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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5화


세상에는 백 번을 잘해도 단 한 번만 삐끗하면 평생 쌓은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일이 많다. 청부살수업도 그중에 하나다.

‘왜 받아들였을까? 왜…’

청면살수는 잡초만 무성한 화원을 가로지르면서 희한을 거듭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대형, 구지신검은 대협입니다. 각 파 장문인들과도 교분이 두텁습니다. 청부금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내키지 않습니다.”

“무공은 어떤가?”

“화경에 접어들었습니다. ‘검이란 있어도 없는 것이요, 없어도 있는 것이다. 마음이 검이니 하늘인들 베지 못할까’. 승산 소림 연회에서 읊은 말입니다.”

“누가 자신 있나?”

“혼자면 영. 둘이면 반. 셋이면 팔. 넷이면 십입니다.”

이제 소천나찰의 판단은 정확하다. 소천나찰은 무림인의 무공은 물론 인간관계까지도 소상히 알고 있다. 명호만 읊으면 즉시 한 인물의 신상 내력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무기다.

소천나찰은 구지신검을 죽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 명 이상이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청면살수는 소천나찰의 판단을 무시한 적이 없다.

“모두 같이 가지, 육제만 남고.”

“대형, 방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이번 건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제 방법을 생각해 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대형, 한 번도 물은 적이 없지만 이번만은 물어야겠습니다. 청부금이 도대체 얼마입니까?”

“없다.”

“예?”

“청부금은… 없다.”

“원한이 있으셨습니까?”

“없다.”

“대형, 죄송합니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한… 동참할 수 없습니다.”

“…”

“…”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구지신검을 죽이는 일은 모험이었다. 구지신검의 무공도 무공이려니와 그가 쌓은 인맥은 무공보다 더 큰 위협이었다.

청면살수의 말처럼 귀신같은 솜씨로 흔적 없이 남기지 않는다면 모를까 티끌만한 흔적이라도 남겼다가는 그날로 끝이다. 살혼부는 무림에서 사라진다.

구지신검 같은 고수를 흔적 없이 죽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 차라리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게 쉽지 않겠나.

‘그때 그만뒀어야 했어. 그때…’

청면살수는 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었다. 풀잎이 옷자락에 스쳐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가, 그 느낌이 좋았다. 청면살수는 한 여인을 떠올렸다. 풀잎같이 청조하던 옛날의 모습은 간데없지만 곱게 나이를 먹어 주름살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여인을.

“구지신검을 죽여주세요.”

숨이 턱 막혔다. 구지신검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어왔다. 성품이 광명정대하고 올곧아 평생 흠 하나 없이 살아온 사람이다. 수해가 들면 수재민을 돕기 위해 은자를 아낌없이 풀었고, 흉년이 들면 소작료를 감면해 주는 것은 물론 광이 텅텅 비도록 볏단을 내놓는 인의대협이다.

무공은 어떤가. 구지신검의 애검 화야는 패배를 모르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 숨이 막힐 것까지는 없다. 자신의 서방을 죽여달라는 여인. 그것이 숨을 막히게 한다.

‘구지신검은 안 돼. 대가가 아무리 커도… 거절해야 돼. 이야기를 더 들어볼 필요도 없어.’

“…”

청면살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참! 오라버니는 청부살수였죠. 청부금은 얼마면 되겠어요?”

여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았다. 사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데는 그녀를 따를 여인이 없으리라.

“구지신검 같은 자는 거인이니 청부금도 비싸겠죠? 말씀해 보세요. 얼마면 되겠어요?”

“얼마를 생각하고 있니?”

“어멋! 정말 받을 생각이세요? 하기는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은 바뀌었으니까요. 그래도 실망이네요. 오라버니 사랑만은 변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

“제 몸은 얼마나 가치가 있죠?”

여인은 화사하게 웃었다. 청면살수는 화사함 뒤에 숨어 있는 궁핍함을 보았다.

여인은 돈이 없다. 옛날의 청조함도 잃었다. 밝고 생기 차던 모습도 온데간데없고 잔뜩 구겨진 인생만이 남아 있다.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 뒤에. 방금 전에 한 말도 예전에 그녀라면 꿈도 꾸지 못할 말이었다.

“몸을… 줄 생각이냐?”

“갖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 예전에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다. 전 이 말이 생생해요. 절 살포시 안고 볼을 쓰다듬으며 하신 말씀이죠. 기억나세요?”

여인은 자신만만했다. 사실 그녀의 몸은 나무랄 데가 없다. 사십 중반에 이른 나이건만 젊은 여인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탄력 있고 날씬했다. 만지기만 해도 찰싹 달라붙을 것같이 팽팽한 피부도 지녔다.

울던 아이도 이름만 들으면 울음을 끄친다는 청면살수이지만 그녀에게는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정인에 불과했다.

“우 대인 첩으로 들어가 사내아이를 낳고, 장사꾼 만탁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 청루에서 창기 생활도 했고… 구지신검 눈에 띄어 첩 생활도 편안히 지내는가 싶었는데, 서방을 죽여 달라? 그런 여자의 몸뚱이는 몇 푼이나 될까? 그런 여인을 아직도 안고 싶을 것 같은가? 네 몸뚱이는 닷 푼도 아까울 만큼 닳고 닳았어. 살수를 청부하고 싶으면 돈을 가져와.”

여인의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뭐 하러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다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난 닳고 닳은 계집이다! 야, 이 새끼야! 누군 밑을 내주고 싶어서 내준 줄 알아! 나도 서방 잘 만나 알콩달콩 살고 싶었단 말야, 새끼야!”

돌아서는 청면살수의 등 뒤에서 여인의 패악 소리가 들렸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어. 좋게 타일러 보냈어도 됐는데…’

후회가 막급했다. 청면살수는 여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여인이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는 마음이 쓰리면서도 제 일처럼 기뻐했다. 만탁이 여인을 유혹해 내고 버렸을 때, 만탁을 죽인 사람도 청면살수였다. 그녀가 청루에 몸을 의탁했을 때는 청면살수 역시 술독에 파묻혀 살았다.

구지신검. 청면살수처럼 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게다. 소천나찰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여인의 새 서방이 누구인지 본인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여인이 왜 구지신검을 죽이려는 지도 안다.

여인은 구지신검의 첩으로 들어가, 구지신검의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 천하디천한 미약을 사용해서. 구지신검의 아들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진했고, 여인은 구지신검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저 영감이 간통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는 것 같은데… 아냐, 모를 거야. 알 수가 없어. 얼마나 주의했는데.’

여인은 도주하고 싶지만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남아 있자니 마음이 한시도 편하지 못했다.

청면살수는 도주를 권유하기 위해 우연을 가장해 만났다. 구지신검이라면 알고도 남는다고. 그는 지금 여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라고.

도주하라고, 도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가능하면 돌아가지 말고 이 길로 도주하라고. 필요한 은자는 보태주겠다고.

그런데 청부를 듣고 말았다. 청부를… 기어이…

“흔적이 드러나면 우리 살혼부는 끝장이야. 하지만 난 하고 싶네. 이유는 묻지 말고… 부탁하네.”

“휴우!”

“십망.”

“뭐, 뭐요!”

“대형! 그렇게까지!”

“그건 안 됩니다. 차라리 목숨을 걸고…”

“그만!”

청면살수는 의제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결정된 일. 십망을 택해도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하하! 육제… 남으라는 이유를 알겠지? 그동안 봐왔던 아이들을 빨리 데려오게.”

“대, 대형!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열흘. 열흘은 시간이 있네. 그동안 데려오게. 봐둔 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가?”

“세 명입니다.”

“충분하군. 명심하게. 열흘이 지나면 안 돼.”

청면살수는 잡초가 우거진 화원을 가로질러 썩어 들어가는 대청에 발을 들여놓았다. 폐허뿐인 장원, 이곳이 청부살수로 악명 높은 살호부의 거점이었다. 널브러진 기와장, 곧 허물어질 것 같은 아름드리 기둥, 한쪽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진 현판… 거미줄로 가득한 대청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먼지가 푸석하니 피어 올랐다.

“개방 남양 분타주 천애유룡입니다.”

얌전히 뒤를 따라오던 공지장이 대청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제 서른을 갓 넘었을 것 같은 젊은 거지를 소개했다.

“고명은 많이 들었습니다. 청면살수입니다.”

청면살수는 나이가 한참 어린 젊은이에게 먼저 깊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거지가 눈을 번쩍 떴다. 두 눈에서는 분노의 화염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

청면살수는 담담히 눈길을 받았다.

“감히 구지신검을 암살하다니!”

노기가 쩔쩔 끓어 나왔다.

“십망을 택하고 전갈을 보냈습니다.”

청면살수는 공손했다.

“흥! 그런다고 살아날 것 같은가!”

“명문정파가 내건 약조. 이행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너희 같은 버러지들인 줄 아는가! 흥! 약조? 약조를 지키면 살아날 자신이 있나 본데. 어디 두고 보지. 소천나찰, 비원살수, 미안공자, 적지인살. 그놈들 지금 어디 있어!”

남양 분타주는 분기를 지우지 않았다. 천애유룡은 삼결 제자다. 개방주가 구결이니 그리 높은 지위는 아니다. 무공만 논해도 천애유룡은 분명히 청면살수의 하수다. 하지만 그는 십망 집행자다. 청면살수는 목숨을 초월한 듯 담담했다.

“그 자식들은 어제저녁 오채산으로 기어 들어가 아직까지 조용합니다.”

일결제자 중 한 명이 분타주의 물음에 대답했다.

“흥!”

천애유룡은 청면살수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코웃음 쳤다.

‘천하제일의 정보망을 지닌 개방.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청면살수나 공지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십망을 자청했다? 뼈다귀가 억센가 본데… 얼마나 억센지 보지. 흐흐! 야! 저 자식 뼈다귀 좀 추려봐!”

천애유룡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결제자 두 명이 청면살수 양옆으로 달려와 섰다. 청면살수는 그들이 집행하기 좋게 무릎을 꿇었다.

“일망! 소림사는 명한다. 인명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하늘이 준 목숨은 하늘밖에 거둘 수 없는 것. 어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을 죽이는가.”

천애유룡은 이제 갓 서른이 넘어 보이니 십망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십망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자체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가 십망 집행자가 된 것은 단순히 살혼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는 이유뿐이다. 구파일방은 관습대로 살혼부에서 가장 가까운 남양 분타에 십망을 일임했고, 아마도 남양 분타에는 총타에서 파견된 칠결 이상의 장로나 호법이 와 있을 게다. 천애유룡은 밤새도록 십망을 외웠겠지. 청면살수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자신이 의제와 술을 마시고 있는 시각에 십망을 줄줄 외우고 있었을 천애유룡을 떠올리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일망을 경전 외듯이 읊어 나가던 천애유룡의 얼굴이 벌게졌다.

‘네놈의 웃음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

“이런 연유로 소림은 세상을 올바로 보지 못한 눈 중 한쪽을 제거하고자 한다. 악업에 대한 죗값이니 부디 원망 말라. 아미타불. 제거하라!”

천애유룡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결제자 중 한 명이 손에 들고 있던 소도로 청면살수의 오른쪽 눈을 파냈다. 청면살수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그뿐, 청면살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소도가 살점을 파고들고, 신경을 끊어내고, 멀쩡한 눈을 도려내는 아픔이 하늘을 닿을 텐데도. 눈알을 뽑아낸 눈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흥! 독한 놈이군. 그러니까 살수 짓도 했겠지. 이망, 무당파는 명한다. 그대의 마음은 악으로 가득 찼구나. 그대의 아홉 궁전은 악귀로 가득하구나. 태일신을 불러 악귀를 쫓아내리니 경건히 기도하라. 강궁-심장-에 있는 아기신이여! 집-머리-에 있는 아홉 신선이여! 신의 명령이라면 그를 들어오게 하소서! 그러나 상서롭지 못한 것이라면 영원히 판결하소서! 태일의 흐르는 불로 모든 악을 멸하소서! 그대의 죄업을 생각하면 목숨을 끊어 마땅하되 한쪽 눈으로 모든 악업을 대신할지니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무량수불. 제거하라!”

왼쪽에 있는 이결제자가 소도를 들이밀었다.

십망! 참으로 처절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소림사는 오른쪽 눈을, 무당파는 왼쪽 눈을 도려낸다. 아미파와 화산파는 양쪽 고막을 하나씩 터뜨리고, 청성파와 종남파는 양팔을 하나씩 잘라낸다. 공동파와 점창파는 양 발까지 절단해 버린다. 이로써 사람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팔다리가 전혀 없는 산송장이 되어버린다. 거기에 해남파의 몫으로 기해혈이 파괴되고, 개방 몫으로 중완혈이 망가진다. 산송장은 진기조차 끌어올릴 수 없는 못이 되어버린다.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다.

정도문파를 표방하는 십대문파, 더군다나 속인으로 구성된 문파는 그렇다 해도 불교를 숭상하는 소림사나 아미파, 화산파, 도교를 숭상하는 무당파, 청성파, 공동파마저 이런 비인간적인 형벌에 관여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십망은 일벌백계의 의미가 강했다. 한 사람을 죽여 만인을 구한다는 의미도 깃들었다. 무엇보다 마도나 사도를 추종하는 무리는 더 이상 중원에서는 설 땅이 없음을 알린다는 의미가 가장 컸다. 십망이 선포된 후, 도살로까지 표현되던 일방적인 학살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으니 효과는 제대로 본 셈이다. 살천문이나 살혼부와 같은 살수 집단도 공공연히 활동하지 못했다. 증거가 남을 만한 청부는 처음부터 거절했고, 청부를 받아 살업을 자행하더라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구지신검의 사례처럼 증거가 드러나면 남은 것은 멸문밖에 없다. 중원 전역에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구파일방은 손에 손을 맞잡고,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추살에 전력한다. 증거가 드러난 일파에서 무공을 익힌 자라면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기회도 주었다. 십망이다. 장문인 혹은 방주나 문주가 스스로 죄를 참회하고 십망이라는 형벌을 자청한다면, 일족이 탈출할 기회를 준다. 어디로 어떻게 도주하든 삼 일 간은 공격하지 않는다. 십망을 받는 순간부터 삼 일 간. 절망을 느낀 사람은 자식이라도 살리고 싶어 할 테고, 살 가망이 극히 적지만 그래도 일방적인 추격을 받다가 죽는 것보다는 삼 일 간이라도 말미를 얻는 쪽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될 터였다. 구파일방 쪽에서 생각하면 더 간단했다. 살겁을 저지른 문파의 장문인쯤 되는 자를 죽이기 위해서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이쪽에서 아무리 강한 자를 보내도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자를 잡기는 쉽지 않다. 그런 자가 선선히 십망을 받는다면 희생 없이 일을 척결할 수 있다. 가시적인 효과는 더욱 크다. 누가 십망을 당했다는 소문만 퍼져도 일 년 동안은 칼 뽑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남은 자들도 도주할 수 없다. 삼 일 간의 여유를 주었지만 도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위치가 변방 쪽이라면 도주하기 용이하겠지만, 그런 곳에 위치한 악인은 십망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설혹 도주하여 복수의 일념으로 무공을 익혔다 해도 구파일방을 상대로 검을 뽑을 수는 없다. 어떻게 중원무림 전체에게 검을 겨눌 수 있단 말인가. 구파일방이 연대하여 십망을 선포한 것은 어느 한 문파가 집중적인 공격을 받지 않게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중원 전부를 상대로 도주극을 펼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희생해 십망을 받고 운이 따라주기를 바랄 것인가는 오직 문주의 선택에 달렸다. 이번에는 재수 없게도 살혼부가 걸려들었다. 구지신검을 살해했지만 시신을 처리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시신을 불태우기만 했어도 살공의 흔적을 지울 수 있었는데. 청면살수의 양쪽 고막이 터지고 양쪽 팔이 잘려 나갔다.

‘내가 줄 것은 모두 줬다. 영영… 이제는 제발 편히 살기를…’

그는 안다. 영영이 편히 살지 못할 것을. 영영의 심성이라면 구지신검의 정부인을 살해하여 막대한 재산을 독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정부인까지 죽여주려고 했건만…

“칠망! 공동파는 명한다…”

청면살수는 천애유룡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들을 수 있는 귀도 없거니와 너무도 극심한 고통에 혼절하려는 정신을 붙잡기도 벅찼다. 의제를 만나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혼절하려는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기억이라면 모두 떠올렸다.

‘동생들… 미안하이. 내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건 알지만… 용서해주게..’

불덩이보다 뜨거운 쇠꼬챙이가 기해혈을 후벼 팔 때, 청면살수는 의식을 놓치고 말았다. 공지장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구파일방은 십망을 자청할 경우, 혈족이 아닌 경우에 한해서 단 한 사람의 생명을 부지시켜 주었다. 청면살수는 공지장을 선택했고, 구파일방은 승낙했다.

“십망! 개방은 명한다….”

천애유룡은 마지막 십망을 읊어댔다. 마지막으로 중완혈이 관통당하면 청면살수의 살덩이뿐인 육신은 공지장이에게 돌아온다. 공지장은 청면살수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다.

“구지신검의 정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영영을 죽여주게.”

“영영이라면…?”

“구지신검의 소실일세.”

“대형과는…?”

“죽여주게. 그럴 수 있나?”

“알겠습니다.”

공지장은 당장이라도 쫓아가 영영을 죽이고 싶었다.

‘대형은 정말 못난 사람이오. 영영이라는 여자를 살펴보겠소. 대형이 이런 참변을 겪어도 될 만한 여자인지. 우리 형제가 이토록 처참한 고통에 시달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대형!’

통곡하고 싶지만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살혼부의 기백을 보여줘야 해. 절대 흔들리지 말게. 꼿꼿이 서 있게. 마지막 순간까지.”

마침내 혈육덩어리로 변한 청면살수가 무너졌다. 천애유룡과 개방 이결제자들은 혹독한 처형을 받으면서도 신음 한 마디 내뱉지 않는 청면살수에게 질려 버렸다. 낯빛이 하얗게 탈색되어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걸개도 있었다. 공지장은 지혈부터 시작했다. 성품이 여린 공지장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냉철하여 보는 개방문도를 또 한번 질리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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