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69화
이른 새벽, 종리추는 일어나 산길을 걸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옷자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안개에 묻힌 공기 냄새도 기분 좋게 다가와 살갗을 적셨다. 종리추의 회복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빨랐다. 범인 같으면 두어 달은 누워 있어야 하고, 회복이 빠른 무인이라 해도 한 달은 족히 누워 있어야 할 상처인데도 십여 일 만에 툭툭 털고 일어났다.
“쪽! 쪼로록….! 쪽쪽!”
종리추의 입술이 기묘하게 뒤틀어지더니 맑디맑은 산새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째짹! 짹짹….!
산새들이 다가와 어깨에 앉으려다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종리추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음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침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던 병자 생활은 그에게 전혀 색다른 세계에 눈뜨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어려서부터 동물들의 소리에 관심이 많았지만 본격적으로 파고들게 된 기간이라고 할까.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도 듣게 되었다.
인간의 육신도 소리를 낸다. 배가 고플 때 나는 ‘꼬르륵’ 소리나 방귀 소리도 소리겠지만 그보다 각 장기마다 독특한 소리를 낸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이 넘치면 넘친다고, 쉬고 싶으면 쉬고 싶다고. 운기를 하면 그 소리가 한결 명확하게 들린다.
종리추의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것이 뜻밖에도 엄청난 심력을 고갈시켰다.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는 시장에서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소리보다 더 요란했다.
아름다운 음률은 심신을 평안하게 만든다. 활기를 북돋아주고 생명의 즐거움을 맛보도록 이끌어준다. 반면에 귀를 막고 싶은 소리도 있다. 약간만 들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소리가 있다. 몸에서 나는 소리가 바로 그랬다. 귀머거리가 고요한 세상에 살다가 귀가 뜨였을 때처럼 세상이 모두 울부짖는 느낌이 들었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안 들을 수 없다. 일단 귀가 열린 다음인데 어떻게 안 듣겠는가.
종리추는 운기하기가 두려웠다. 운기를 할 적마다 심신을 갉아먹는 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던 소리가 아름다운 음률로 바뀐 것은 무려 십여 일이나 시달리고 난 다음이다.
‘조화야. 조화를 벗어나면 시끄럽고 조화를 따르면 아름다운 거야.’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린 다음부터 세 가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는 몸의 상태다. 몸이 날 듯이 가벼웠다. 상처는 씻은 듯이 나았고 진기는 하나 가득 충만했다.
두 번째는 오신기라 명명한 다섯 진기가 하나가 되어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음이 일면 백회혈과 미간과 코가 동시에 열렸다. 세 군데서 스며 들어온 외기는 다섯 갈래로 갈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전신을 휘돌았다. 다섯 진기를 한꺼번에 돌릴 수 있는데 한 가지 진기만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이런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몸은 하나인데 색깔이 다른 진기가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원래부터 하나였으나 종리추 스스로 다섯 갈래로 나눴을 뿐이다. 아니, 무공이란 틀이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 경험은 전에도 있었다. 모진아는 오독신군의 구연진해를 아홉 가지 각법으로 해석했다. 종리추는 아홉 가지 각법이 하나로 귀일된다고 보았다. 그것과 다름이 없다.
이번에는 모진아가 아니라 종리추 스스로 내공은 분리되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과거 모진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소리의 울림에 따라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세 번째 변화는 소리가 잘 들린다는 것이다. 새들의 소리를 들으면 새가 무엇을 원하는지, 왜 지저귀고 있는지 알게 된다.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왜 우는지,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면 왜 짖는지…… 우연히 생긴 기연은 아니다. 대부분의 무인들처럼 하단전만 단련했다면 소리를 듣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단전은 하단전 대로 단련하고, 변검 양부가 일러준 심법으로 마음의 밭인 중단전을 단련하고, 금종수의 도가 비공으로 상단전을 단련하고… 삼단전을 고루 단련했기에, 몸 자체가 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기연이 찾아왔을 뿐이다.
종리추는 풀잎 소리, 나뭇잎 소리를 들었다. 산천은 봄을 맞아 새 생명들로 가득했다. 산길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울창하던 수림은 온데간데없고 산 아래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탁 트인 곳이 나온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밥 짓는 연기가 솟구친다.
종리추는 그런 풍경이 좋아 앉을 바위 하나 없는 곳에서 한참을 머물곤 했다. 남만의 평화로운 풍경이 재연되는 것 같다. 이 순간만은 피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이 자리에 앉아 있을 때만큼은 살수니 살문이니 묵월광이니 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연의 풍경에 도취되었다.
문득문득 삼도산에 남겨두고 온 가족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적지인살, 배금향, 모린아… 모두가 떠올랐다. 특히 어린 아이의 밝게 웃는 모습이 떠오를 때는 못 견디게 그리웠다.
그들과 함께 이 아침을 맞이했으면, 그들과 함께 저 멀리 보이는 마을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구수한 아침으로 하루를 시작했으면.
‘이제 그만 내려가야겠군.’
새벽 안개가 걷힐 무렵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몸이 나은 다음부터 줄곧 이어지는 하루 일과의 첫 걸음이었다.
하남성은 살천문의 영역이다. 살천문주가 종리추를 인정하고 살문 개파를 허용했지만 세를 어느 정도로 굳히느냐는 정해진 것이 없다. 어느 선에서 청부를 맡느냐. 살수로써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 모여 이제 갓 시작한 살문이니 많은 청부를 받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살혼부가 했던 것처럼 고급 청부만 맡을 수도 없다.
무공으로라면 살혼부보다 현재 묵월광에 모인 사람들의 무공이 훨씬 강하다. 하지만 경험이 없다. 살혼부 살수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강한 상대도 죽일 능력이 있지만 묵월광에는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살천문이 어느 정도나 양보해 주느냐 하는 것이다. 큰돈을 쥘 수 있는 청부를 도맡는다면 살천문이 가만있을 리 없다. 먼저 살수들이 들고일어날 테고 살천문주라도 위엄만 내세울 수는 없으리라. 이해 관계가 충돌하는 순간이 살천문과의 암묵적인 평화가 깨지는 순간이다.
“난 사무령이 되고 싶어. 그 꿈 하나로 지옥 같은 곳에서 참고 살았으니까.”
“….”
종리추는 소고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보검을 닦는 일에 몰두했다. 유구가 청부를 해결하면서 여인을 데려올 때 가져온 보검이다. 검의 이름은 적룡검이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검집에 검명이 적혀 있어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만일 검명을 몰랐다면… 그래도 적룡검이라 불렀을 게다. 검수에 조각된 여의주를 문 용의 머리, 검집에 양각된 승천하는 용의 형상. 검을 뽑으면 은은한 자광이 발산한다.
대부분의 검들은 서슬이 시퍼런 청광을 뿜어낸다. 그중에서도 하얀색에 가까운 청광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적룡검은 저녁노을 같은 부드러운 자색이다. 황철로 만든 듯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날카로운 기운도 뿜어내지 않는다. 뭘 벨 수나 있을까 싶을 만큼 날이 무뎌 보인다.
사람을 살상한다기보다는 귀공자들이 패용품으로 차고 다니기 알맞은 검이다.
종리추는 적룡검의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광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볏짚조차 벨 수 없는 검일지라도 기꺼이 패용했으리라.
하나 적룡검은 둔검도 아니다. 오히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이는 예검 중의 예검이다. 날을 갈았으나 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습 또한 마음에 든다.
“솔직히 말하지. 난 널 믿어. 믿고 싶어.”
보검을 다듬던 종리추의 손길이 멈칫해졌다.
“문파를 이끌 능력이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그런가요?”
“그래.”
종리추는 다시 보검으로 눈길을 돌렸다.
“직언 한마디 드려도 되겠습니까?”
“….?”
“적사, 야이간, 백화현녀, 그리고 나. 현재 네 명입니다. 각기 지닌 무공도 있고 살수 문파를 차리기에는 충분한 인원입니다. 하지만 사무령이 되시겠다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그래, 그게 고민이야.”
“그래서 버리기로 하신 겁니까?”
“……!”
소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눈빛은 너무나 찰나간에 스쳐 간 눈빛인지라 자세히 쳐다보기 전에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살수는 죽음을 안고 사는 직업입니다. 마음을 붙잡아둘 곳이 없는 사람들이죠. 무엇으로 붙잡으려 하십니까?”
종리추의 모습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어. 벌써 일대 종주의 모습이야.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나의 가장 큰 적일지도 몰라.’
“야이간의 경우에는 봤겠지만 선대의 인연은 가볍습니다. 그것으로 언제까지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선대의 인연을 토대로 얻으셔야 합니다. 버리면 안 됩니다.”
“나는…”
“말씀하시기 힘드신 것 같은데, 나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죽음을 달고 사는 직업이니 조금 앞당겨 위험스러운 청부를 맡았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이 방법은… 이번 한 번으로 그치십시오.”
“…”
소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일사천리로 일을 풀어 나가던 자신만만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속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새로운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미 무림 동향을 세세하게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 보이는 거야, 앞날이.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어. 짐작하고 있어.’
소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과연 충심을 바치는 것일까? 그가 본인 스스로 말한 대로 가볍기 이를 데 없는 선대의 인연 때문에 사지로 걸어 들어갈 것인가.
“정이란 속에서 우러나야 합니다. 이득을 생각한 순간 정은 사라집니다. 거래만이 남는 거죠. 서글프지 않습니까? 단지 거래를 하기 위해 그 어른들이 십망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준비가 되는 대로 빨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소고는 기가 막혔다.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가. 그녀는 단 한 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사무령이 되기 위해 지옥 같은 곳에서 숨죽이며 살았다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종리추의 입에서 줄줄이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생각과 똑같았다. 그녀는 종리추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적사, 백화현녀, 야이간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죽음이 분명한 길일지언정 그만이 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종리추는 그것마저 하지 마란다. 먼 길을 돌아갈망정 사람을 버리지는 말라고 한다.
‘그럴 수 없어. 난 사무령이 되어야 해. 반드시 세상을 호령하고 말겠어!’
“버렸다고는 생각하지 마.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부탁하는 거야.”
“….”
소고는 일어섰다. 종리추가 그녀의 등 뒤에다 한마디 했다.
“살수의 기본은 단 하나입니다. 나는 철저하게 숨고 적은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는 것. 무엇을 하든 살수가 지켜야 할 철칙입니다. 그것만은 잊지 마십시오.”
‘나를 걱정해 주고 있어. 진심이야.’
소고는 자꾸만 작아지는 자신을 보았다. 사무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종리추라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흥분했어. 이런 생각을 하다니. 세상에서 사무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소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예요?”
벽리군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바로 곁에 있었지만 소고와 종리추가 나눈 이야기를 종잡지 못했다.
“유구, 유회, 역석을 불러줘.”
벽리군은 어깨를 움찍거렸다.
‘준비가 되는 대로 떠난다고 하더니… 정말 떠날 때가 된 모양이네. 그럼 나는… 훗!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당연히 따라가야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 눈에서 뻗어 나오는 무심함. 종리추는 예전의 그로 돌아갔다.
기루에 터를 잡고 앉아 죽일 사람을 노려보던 살문 문주로, 머리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예전의 그로.
“부인은 어떤가?”
“아직은….”
유구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이런 점이 벽리군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위험에서 구해주었다고 데리고 살 생각을 하느냔 말이다. 유구 등은 남만인이니 중원 풍습을 몰라 그런다 쳐도 종리추는 중원인이면서 당연한 듯 받아들이니.
“몸을 열기보다는 마음을 열 생각입니다.”
종리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무리 수하라 해도 유구 등은 마흔에 이르렀고 종리추는 이제 이십 초반의 청년이다. 그런데 유구 등은 마치 조상이라도 모시는 듯 깍듯이 모시고 종리추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태어날 때부터 너는 이 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라는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태어났어도 이럴 수는 없으리라.
“지금부터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유황불 속으로 뛰어든다. 안전을 생각한다면 놓고 가는 게 좋아.”
“아내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습니다.”
이들의 대화가 너무 자연스러워 벽리군은 정말 유구가 그 여인과 부부지연을 맺은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여인은 아직도 마음을 열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고 음식도 옆에서 떠 먹여줘야 간신히 삼키는 정도다. 부부지연을 맺을 시간도 없었고, 여인이 허락을 한 것도 아니다.
이들은 너무 일방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벽리군은 싸움에 진 부락민을 노예로 삼는다거나 마음에 드는 여인을 납치해 데리고 사는 암연족의 풍습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남만이라 해도 부족마다 풍습이 다른 것을.
“상처들은?”
“어떤 놈이라도 붙어볼 만합니다.”
유회가 큰 덩치를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다.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걸 잊지 마라. 앞으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어. 우리는 퇴로가 없는 길을 간다.”
“주공, 이 무슨 섭섭하신 말씀.”
역석이 주먹 관절을 으드득 소리가 나게 꺾으며 말했다. 암연족이나 홍리족이나 주인을 모시게 되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해야 하는 줄 안다.
종리추가 몰라서 한 말은 아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도 험난해서 기회를 준 것뿐이다.
“돌아가서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고 했다.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떠난 것 같습니다.”
소고는 보고를 받지 않아도 그들이 떠난 줄 짐작했다. 천의원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텅 빈 듯 허전했다. 그런 느낌은 대청에만 앉아 있어도 전달되어 왔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첫 임무는 제게 주실 줄 알았는데, 역시 종리추였군요.”
적사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너는 할 수 없는 일이야.’
소고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떤 청부인데 그가 직접 나갔죠? 모두 다 데리고 나간 걸 보면 상당히 어려운 일인 모양이죠?”
소여은도 섭섭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동생은 더욱 못하는 일이지. 사실… 난 아직 동생을 어디다 쓸지 생각해 내지 못했어. 동생은 너무 예뻐, 검을 들고 피를 쫓기에는.’
“후후! 삼급살수도 괜찮을 때가 있네요. 어려운 일이야 윗분들이 해주시니 이놈은 잔챙이나 청소하면 되겠군요.”
야이간은 부쩍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를 지켜보는 눈들조차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분명히 변신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자! 이제 잡담들 그만하고.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알아?”
소고는 허전한 마음을 떨쳐 버리려는 듯 애써 밝게 말했다.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오늘이 묵월광 개파일이야.”
“언니!”
“예엣?”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똑똑히 들어둬. 묵월광에는 그대들만 있는 게 아냐. 일급 살수가 적어도 서른 명은 있어.”
“….!”
소고의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들이 만 냥을 허튼 데 쓰는 동안 나는 일급 살수 서른 명을 규합했어. 자신하는데… 묵월광에서 못 죽일 사람은 거의 없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적사, 소여은, 야이간. 그들은 한결같이 소외감을 느꼈다.
“동생, 내가 마지막으로 뭐라고 말했지?”
“못 죽일 사람은… 거의 없다고.”
“그래, 거의야. 그래서는 안 돼. ‘거의’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하나씩 풀어가지. 우리가 당면한 적은 살천문이야. 모든 신경을 살천문에 집중해. 가져와!”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묵직한 보따리 세 개를 가져와 세 사람 앞에 놓았다.
“만 냥이야.”
“….!”
“그것으로 사람을 구해. 말 한마디면 불 속이라도 뛰어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을. 너희들은 지금부터 영주야. 혼을 움켜쥐고 있다는 뜻이지. 적사는 사령주, 소여은은 화령주, 야이간은 조령주.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호칭이야 얼마든지 바꿔줄 수 있으니까.”
“….”
세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느끼고 있었다.
‘혼을 움켜쥐고 있다’는 말. 그 말은 자신들의 혼은 소고가 움켜쥐고 있다는 뜻이지 않은가. 혼을 움켜쥐고 있으니 거두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거둘 수 있으리라.
소고는 무섭고 치밀한 여자였다.
‘호칭이야 얼마든지 바꿔줄 수 있다고? 문파를 개파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하긴 호칭이야 무엇으로 불리든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오래전부터 계획되었던 일이란 거지. 날림인 것 같지만 착착 진행되고 있잖아.’
야이간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자칫 한순간 방심하다가는 정말 족쇄에 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돈으로 영을 만들어. 못 죽일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면 돼. 어떻게 만드느냐는 묻지 않겠어. 무조건 만들면 돼.”
소고는 자신이 만든 것과 비슷한 정도를 원하고 있다. 그것도 단시일 내에. 아니나 다를까.
“기간은 석 달이야. 칠월 초하루까지. 살수의 기본은 단 하나야. 나는 철저하게 숨고 적은 밝은 곳으로 이끌어내는 것. 살수가 지켜야 할 철칙이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진행해.”
소고는 자신도 모르게 종리추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괜찮아. 이렇게 만들어가는 거야. 종리추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나는 살천문을 단숨에 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드는 거야. 종리추,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면…’
살아 있다면 무엇을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싶었지만 그 ‘무엇’ 이 생각나지 않았다. 종리추에게는 어떤 명예나 지위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소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묵월광에게 해가 된다고 생각되면 숙부님들의 안면은 생각하지 않겠어. 이 말은 믿어도 좋아.”
믿어도 좋다. 그녀가 살수들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검을 뽑아도 상대할 수 없다. 요사한 무공의 파훼법이 떠오르지 않는 한.
“가.”
소고는 텅 빈 대청에 혼자 있고 싶었다. 정말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