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6화
적지인살은 기형월도를 차고 있지만 그의 성명절기는 지법이었다. 무림인치고 혈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적지인살은 의원보다 더 자세히 알았다.
인체에 혈이 몇 개나 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어떤 책이든 경혈을 말할 때는 십이정경에 임맥과 독맥을 더해 십사경으로 국한한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분명하지 않아서 수혈이 삼백육십일 개라고 정의한 서적이 있는가 하면 고전 십사경발휘에서는 삼백육십사 개로 구분하고 있다. 십사경발휘에 따르면 십이경맥은 좌우 대칭으로 있기 때문에 모두 육백오십칠 혈이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규 경혈이고 천웅혈, 아시혈과 같이 발병할 때만 반응을 나타내는 경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어떤 서적에서는 본혈이 육백육십여 개, 천응혈 같은 국소 혈이 약 구십여 개가 있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무공에 활용할 수 있는 혈도는 모두 팔백열한 개다.”
적지인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몸이 어디를 찌르든 간에 붉은 손가락 자국을 남긴다. 조금이라도 세게 찌르면 검은 멍 자국이 생기고, 힘이 덜 들어가면 옅은 멍 자국으로 변한다. 더욱 어려운 점은 혈도마다 가격하는 힘이 다르다는 점이다. 사혈은 약간만 힘을 가해도 위험하고, 어떤 혈은 있는 힘껏 타격해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적지인살은 그 모든 혈도에 붉은 손가락 자국을 남길 만큼 힘을 가했다. 그의 별호에 적지인이 들어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생명을 걸고 싸우는 와중에 힘의 배분 역시 신법만큼이나 몸에 녹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중에서 무인들이 중시하는 혈도는 십칠 사혈과 이십일 마혈이다. 이런 혈도는 마혈일지라도 세게 가격하면 생명에 지장을 초래하는 극혈이다.”
종리추는 어린아이가 듣기에는 난해한 말인데도 어렵다는 표정을 짓지 않고 차분히 들었다.
“나는 무인들이 사혈이라 칭한 혈을 모두 배제하고 새로운 사혈을 발견해 냈다. 인체는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아침에는 생기 있고, 밤에는 피로하고. 경혈도 시간에 따라 변했다. 혈의 흐름에 따라 극성을 부리는 혈이 있는가 하면 쇠잔해지는 혈도 있다. 극성으로 치닫는 혈은 타격을 반감시킨다. 사혈일지라도 극성으로 치닫고 있을 때는 힘이 거세져 마혈로 변하고 만다. 반대로 이미 쇠진해 있는 혈도 타격을 반감시킨다. 이미 힘이 다한 혈은 혈도로써의 가치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적지인살은 어린아이에게 평생 익힌 심득을 한순간에 전달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런 경혈론은 권각법을 익혀 무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배워야 하지 않은가.
종리추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적지인살은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모두 이해했단 말이냐?”
“네.”
종리추는 뚜렷하게 대답했다. 적지인살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이야. 문일지십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부족해.’
“극성까지 올라갔다가 쇠잔해질 때, 바로 그 순간을 노려 쇠잔해지는 혈을 타격하면 십 중 십 죽는다. 나는 이걸 절대사혈이라 규정했다. 두부에서 세 군데, 전부에서 여섯 군데, 배부에 두 군데가 있다. 혈은 모두 열한 군데에 지나지 않지만 시간을 정확히 예측해내야 하고 타법이 확실해야 한다. 네가 끼고 있는 수투는 보검도 막을 수 있지만 타격할 때는 망치로 내려치는 힘도 가해준다. 타법만 정확하면 구사일생도 가능할 게다.”
종리추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우선 타법부터 연마하자.”
적지인살은 검지를 앞으로 쭉 내밀었다.
“검지로 내 검지를 찔러라. 정확하게 검지와 검지가 맞닿을 때까지 반복한다.”
종리추는 즉시 일어서서 적지인살의 검지를 노려보았다. 눈앞에 있는 손가락이건만 검지로 검지를 찌르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종리추는 땀을 뻘뻘 흘리며 찔러댔다.
“피곤하면 쉬었다 해도 좋다.”
적지인살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적지인살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에서 수련을 지도하고 있을 의형들도 기대하는 마음이 적었다. 어차피 구파일방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중원을 빠져나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지 않은가. 어른도 아니고 살도 여물지 않은 어린아이들을 겨우 하루 가르쳐 무얼 어쩌겠는가. 기병의 활용법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하루 이틀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두들 요행을 바라고 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이미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천문이 무서워 어른을 쫓아왔어요. 그런데 살천문조차 하루아침에 멸문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상상이 안 돼요. 이렇게 해야 살 수 있다면 계속할래요.”
어린아이의 대답치고는 당찼다.
‘이 아이… 내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보통 아이가 아냐. 혹시 무인의 피를 이어받은… 아냐. 무인 중에 종이씨는 없어. 종리… 종리… 없어.’
적지인살이 생각을 하는 동안 종리추는 정확히 검지를 찔러오기 시작했다. 요령을 습득했다. 처음부터 힘을 주어 가격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맞대는 정도로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점점 빨라졌다. 맞댄다는 심정으로 손을 뻗어오다가 검지와 검지가 부딪치려는 순간 힘을 주어 폭발적으로 쳐왔다.
‘타, 타법을 익히고 있어!’
경악이 도를 더해갔다. 여기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수투의 효용을 빌어 지법이 아닌 권법으로 때리는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그런 면에서 종리추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선택받았다. 야이간은 쇠구슬을 날리는 혹독한 수련을 받고 있을 게다. 적사가 수련하는 권추에 숨겨진 비밀, 권추 끝에 매달린 바늘을 정확히 쏘아내는 수련도 혹독하기는 매한가지다. 적각녀는 조금 수월하다. 손가락만한 은장도로 순식간에 찔러야 한다는 것이 어렵지만, 은장도에 극독이 묻어 있어 살갗만 스쳐도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종리추는 가장 편하다. 특별히 수련할 것이 없다. 수투 자체가 쇠몽둥이와 같은 타격을 뿜어내기 때문에 팔이든 다리든 후려갈기는 대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적지인살이 지법을 가르친 것은 좀 더 욕심을 부렸기 때문이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이다. 그런데 종리추는 타법을 익히고 있다.
적지인살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였다. 종리추가 살며시 다가오다가 힘을 가하는 순간,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빗나갔다. 당연하다. 지법으로 움직이는 물체를 가격하기 위해서는 밤에도 사물을 뚜렷이 볼 수 있는 안법이 필요하다. 움직이는 물체를 끝까지 쫓을 수 있는 연법이.
‘아직은 무리였어.’
적지인살은 곧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약은 것인가,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인가. 종리추의 검지는 영활한 뱀처럼 움직이는 손가락을 쫓아왔다. 적지인살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간 종리추는 힘을 풀고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재차 힘을 가했다.
‘이타까지!’
적지인살은 혼란스러웠다. 이제 갓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이지 않은가. 지법을 가르친 것은 두 시간밖에 되지 않았고. 그런데 어떻게 힘의 배분은 물론 이타까지 깨우칠 수 있단 말인가. 설명도 해주지 않았는데… 그저 손가락을 내밀고 있었을 뿐인데.
적지인살은 좀 더 변화를 주었다. 이번에는 검지로 지면을 가리켰다. 종리추가 검지를 타격하기 위해서는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타법을 구사해야 한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곧바로 찌르는 것과 밑에서 위로 올려치는 것은 힘의 배분이 달라진다. 직선으로 찌르는 것은 힘의 강약을 비교적 쉽게 조절할 수 있지만, 위로 올려치는 것은 강약을 조절하기 힘들다. 검지에 힘을 가하는 순간 방향이 틀어지기 일쑤다.
‘할 수 있을 거야. 해. 해봐. 포기하지 말고!’
적지인살은 기본공도 익히지 않은 아이에게 지법의 활용부터 가르치고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위로 올려치는 것이 어느 정도 숙달되자, 적지인살은 손가락을 하늘로 곧추세웠다.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아래로 내려쳐야 한다. 이것은 더욱 힘들다. 손이란 지면을 향해 있을 때 경계심을 풀어준다. 반대로 일단 손이 위로 올라가면 누구나 경계심을 갖는다. 종리추가 손을 위로 쳐드는 순간 상대는 이미 반격 준비를 끝냈다고 봐도 좋다. 적지인살은 종리추가 검지를 치기 위해 손을 올리는 순간 검지를 내려 버렸다. 종리추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그렇게 느려서는 굼벵이도 잡지 못한다. 다시!”
종리추는 잔뜩 긴장했다. 지금까지는 단지 맞추는 것만 원했는데, 이제는 속도까지 요구하고 있다.
“얏!”
종리추는 고함까지 지르며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적지인살의 검지는 이미 밑으로 내려간 후였다.
‘아무래도 무리야.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는 속도를 잡지 못해.’
더 이상은 무리였다. 지금까지만 해도 잘 따라와 주었다. 정말 기대 이상이었다. 무림기재란 말을 듣는 후기지수가 많지만 종리추야말로 그 소리를 들어야 할 기재였다. 수투의 위력에 지법의 운용까지 더한다면 삼류 고수 정도는 능히 잡을 수 있는 실력이었다. 방심까지 노린다면 이류 고수까지도 가능하겠지만.
적지인살은 손을 거뒀다.
“앉자.”
“괜찮아요. 더 해도…”
“먼 길을 가야 한다. 충분히 쉬어야 돼. 앞으로는 편히 쉴 날이 없을 게다.”
그제야 종리추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어린아기가 숨이 턱에까지 차오르는 것을 내색조차 하지 않고 참았다니. 놀랄 일은 그것뿐이 아니다. 무공을 수련한 시간이 벌써 여섯 시간을 넘어서고 있다. 하루 중 꼬박 반나절을 먹지도 쉬지도 않고 지법 수련에 몰두한 것이다.
종리추가 앉아 숨을 헐떡이자 명문혈을 살살 어루만져 주었다. 숨이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 적지인살은 내친김에 골격을 구석구석 만져보았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비는 듯한 실망감이 찾아왔다. 종리추는 뼈가 가는 작골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뼈가 가늘고 살이 별로 붙지 않아 마른 체형이 되기 쉬웠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사라졌다. 적지인살이 골격을 만져 본 것은 혹시 무가의 자손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갓난아기 적에 어떤 명약을 복용한 것은 아닌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간단한 운기토납법을 수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종리추의 수련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여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종리추는 보약을 복용한 흔적도 없고, 운기토납을 수련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평범한 아이들처럼 그저 그런 혈행에 응축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종리추는 처음 무공이라는 것을 접했고, 순전히 자신의 이지와 의지로 지법의 운용을 터득해 냈다. 한 마디로 평범한 천재였다.
‘살아남는 데는 도움이 안 되지만 살아남으면 대형을 능가하는 살수가 될 것…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실망스럽다고 해야 하나. 좋게 생각하자. 잘된 일이라고.’
적지인살은 종리추의 목뒤 천주혈을 살살 어루만졌다.
“지금 내가 만지는 곳을 잘 기억해라.”
“…”
“기억했느냐?”
“예.”
“이곳을 천주혈이라고 한다. 방광경의 요혈이다. 마혈이 몇 군데 있다고 했지?”
“스물한 군데요.”
“그래. 스물한 군데. 이곳이 그 중의 한 군데다. 이곳을 세게 잡히면 거한이라도 정신을 잃게 된다. 분명히 마혈이야.”
“…”
“절대사혈이 몇 군데 있다고 했지?”
“열한 군데요.”
종리추는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두부에는 몇 군데?”
“세 곳이요.”
“그래, 잘 기억했다. 이곳이 바로 그 세 곳 중 하나다. 평시에는 마혈이지만… 인시(3시~5시)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각(30분)이 더 흘렀을 때부터 묘시(5시~7시)가 시작되고 이각이 더 지날 때까지 한 시진 동안 이곳은 절대사혈이 된다.”
“…”
“이곳 위치를 기억하겠느냐?”
“예.”
“뒷골 밑 움푹 들어간 곳에서 좌우로 손톱만큼 벌리면 바로 이곳이다. 머리털의 경계이니 잘 기억해라. 언제 절대사혈이 된다고?”
“인시 초부터 묘시 초까지요.”
“틀렸다.”
“인시가 시작되면서 이각이 더 지난 다음부터 묘시가 시작된 후 이각까지요.”
“그래. 그 시간 동안은 절대사혈이 되지.”
“…”
“‘살 맞았다.’는 말을 들어보았니?”
“예.”
“어떤 때 쓰는 말이냐?”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툭 건드렸는데 죽어버리는 거요. 살 맞았다고도 하고, 귀신 쓰였다고도 하고.”
“살 맞은 것도 귀신 쓰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런 곳,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반적인 경혈이 절대사혈이 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지인살은 뒤에서 껴안 듯이 손을 앞으로 돌려 양쪽 젖꼭지를 만졌다.
“이곳은 어떨 것 같으냐. 혈도일 것 같으냐?”
“어, 어르신, 간지러워요.”
“그래?”
순간,
“악!”
종리추는 펄쩍 뛰며 고통스러워했다. 적지인살이 젖꼭지 바로 밑을 살짝 두들겼을 뿐인데.
“몸으로 겪어봤으니 잊어버리지 않겠지. 이곳이 바로 절대사혈 중 두 군데다. 양쪽 젖꼭지 바로 밑.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됐을 것 같으냐?”
“모, 모르겠어요.”
종리추는 아직도 고통스러워했다. 고통을 호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보통 아이는 분명 아닌데… 이제는 쫓기는 신세가 됐으니 내력을 알아볼 수도 없고…”
“배고프지 않니?”
“모르겠어요.”
“조반을 들 시간이다. 아침이 됐어. 그럼 몇 시쯤일까?”
“진시(7~9시)요.”
“그래, 아까처럼 말해 봐라.”
“진시가 시작된 후 이각이 지났을 무렵부터 사시(9~11시)가 시작된 후 이각이 더 지난 시간까지요.”
“그렇다. 그 시간 동안은 천추혈이 아니라 이곳이 절대사혈이야.”
적지인살은 한 군데씩 짚어 나갔다.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게 반복과 확인을 거듭하면서. 종리추는 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반나절이 넘도록 곡기를 입에 대지 않았는데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눈을 좀 붙여라. 피곤하면 먼 길을 못 간다.”
“어르신, 시간이 얼마나 있어요?”
“앞으로는 사부님이라고 불러라. 내가 네 사부야.”
“사, 사… 잘 안 나와요.”
“천천히 불러도 좋아. 그런데 시간은 왜 묻지?”
“수련할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알고 싶어서요.”
“노옴! 자 두라고 했는데…”
“걸어서 갈 건 아니잖아요. 저희 같은 꼬마들과 발을 맞추려면 무척 답답하실 거예요. 그래서 생각한 건데, 분명 뭔가를 타고 갈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잠은 그때 자고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적지인살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종리추의 말이 맞기는 맞다. 꼬마들을 걷게 하여 도주한다면 십 리도 못 가서 잡히고 말 것이다. 설혹 잡히지 않더라도 꼬마들의 어수선한 발자국은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리라. 탈 것을 준비해 놨다. 언제까지 버젓이 타고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남성을 벗어날 때까지만 탈 수만 있다면 다행이다 하는 심정에서.
‘안 돼. 타고 가면 안 돼. 꼬마가 생각하는 것이라면 구파일방에서도 생각한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힘들더라도 걸어서 간다.’
상황이 바뀌자 적지인살은 마음이 급했다. 적지인살은 종리추의 등 뒤 옆구리 살이 있는 부분을 꼬집듯이 짚었다. 종리추가 맥없이 풀썩 무너졌다.
‘혼혈을 짚었으니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게다. 그것이 편하겠지.’
소천나찰은 적지인살의 말을 듣자 머리를 쳤다.
“으음…! 그 말이 맞군. 우린 삼 일 간의 여유 중에서 하루를 소비했어. 남은 시간은 이틀 반. 새를 타고 도망가도 중원을 벗어나지 못해. 구파일방은 모레 신시(15시~17시)가 되자마자 공격을 시작할 거야.”
청면살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신시정(16~17시)에 십망을 당했다. 그래 봤자 한 시진을 더 벌어주는 것에 불과하지만.
“이틀 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해. 수련은 어떤가?”
“저는 만족합니다.”
비원살수의 음성은 의형제간에 대화를 나눌 때도 변함없었다. 살기가 잔뜩 묻어나는 음성.
“계집이 여간 영특한 게 아녜요. 만족합니다.”
미안공자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다른 곳, 다른 상황이었다면 환한 웃음을 흘렸겠지만 대형 청면살수가 십망을 받았을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소제도 만족합니다.”
적지인살도 간단히 말했다.
“마차를 준비했던 게 오히려 우리에게는 득이 됐어. 개방이라면 그만한 정보는 이미 캐냈겠지. 그럼 지금 당장 흩어지기로 하세.”
소천나찰이 세운 계획도 완벽하다 싶었다. 이틀 동안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알맹이를 바꿔친다는 계획이었다. 바꿔치기를 할 장소도 물색해 놓았고, 자신들과 아이들을 대신할 사람도 구해놨다. 적지인살이 급하게 생각한 점이 그것이었다. 종리추가 생각한 것을 구파일방의 너구리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인가. 중간에 알맹이를 바꿔치기는 계획은 물론 기타 다른 변수도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계획대로 밀고 나서는 승산이 없었다.
“부디… 다시 만나세.”
“저 역시…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시기를.”
네 사람은 서로의 진로를 마저 묻지 않았다. 잡혀서 고문을 당할 경우까지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뇌옥같이 생긴 암동은 살혼부의 마지막 비처였다. 청부살수업을 하는 만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공적으로 몰려 무림인의 집중 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 마지막까지 항전할 곳으로 물색해 놓은 곳이다. 암동에는 일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벽곡단이 준비되었고,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기관도 설치되어 있다. 통로 또한 아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들어올 수 없을 만큼 미로가 얼키설키 얽혀 있다. 인공 요새 중에도 이만한 요새는 드물 것이다.
“여기서라면 닷새를 버틸 수 있습니다.”
소천나찰이 냉철히 판단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닷새… 천연의 요새도 구파일방의 거력 앞에는 닷새밖에 견디지 못한다는 결론이 내려진 다음,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 암동은 폐기되다시피 버려져 왔다. 그것이 이제야 진가를 드러냈다.
살혼부 네 사내는 동혈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 챙겼다. 동혈에는 많은 것이 먼지에 뒤덮인 채 쌓여 있었다. 제일 먼저 소천나찰이 혼절한 야이간을 걸머지고 암동에 뚫린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소천나찰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암동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무려 스무 군데나 이른다. 소천나찰이 빠져나간 통로는 갈림길이 세 군데나 있고, 갈림길은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소천나찰이 어디로 발걸음을 옮겼느냐에 따라 스무 군데 중 한 군데로 빠져나갈 것이다.
“대형의 원한을 잊지 마라. 중도에서 죽게 된다면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라. 그냥 맥없이 죽는 놈은 내 동생도 아니다. 시체라도 파내서 추궁할 테니 그리 알아라.”
비원살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냉혹한 빛을 놓지 않았다. 미안공자와 적지인살은 비원살수의 냉혹 속에 흐르는 정을 느꼈다. 서로 교감이 통하지 않는다면 절대 느낄 수 없을 정을.
“삼형, 형님께 부탁하겠소. 쓸데없이 죽을 생각 말고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할 생각을 하시오.”
“배알도 없는 놈.”
비원살수가 한마디 툭 내뱉고 비밀 통로로 스며들었다.
“나도 가야겠네.”
미안공자가 적각녀를 들쳐 멨다.
“형님이 하신 말, 고스란히 형님께 드리겠습니다. 목숨만은 보존하시기를.”
“하하! 그러지. 또 보세.”
미안공자는 마치 옆집이라도 놀러 가는 사람처럼 가벼운 인사를 던지고 사라졌다.
적지인살도 종리추를 들쳐 멨다.
“우리도 가자.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잠시 후 암동 안은 찬바람만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