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0화
종리추는 일행을 이끌고 등봉에서 백여 리 떨어진 대외산으로 왔다. 숭산 소림사에서 동남으로 백삼십여 리, 공동산 공동파에서는 동북으로 이백삼십여 리 거리다.
“여기가 좋겠군. 음! 좋아, 저 집이 괜찮겠어.”
종리추는 대외산 산자락에 있는 흉가를 가리켰다. 흉가라고는 하지만 간신히 기둥 몇 개만 남아 있는,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빈터였다.
“이 집이 뭐가 괜찮다는 말씀이신지?”
유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집 수리를 해. 어설프게 하지 말고 앞으로 쭉 머물 곳이니까 정성 들여서 새로 짓는다는 생각으로 다듬어. 향주는 생필품 좀 사 오고.”
벽리군뿐만이 아니라 남만 세 사내도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여, 여기서 머문단 말입니까?”
“곧 해가 질 테니 서두르는 게 좋아. 날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밤 공기가 차가워.”
“그러니까 정말 여기서…”
종리추는 더 듣지 않았다. 둘레가 한 아름은 됨 직한 느티나무 아래로 가 보검을 끌어냈다. 그리고 나무 밑동을 찍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검이 도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허! 정말 여기서 머물 생각이신가 보네.”
유회는 종리추의 모습을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지만 반듯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는데 흉가라니…
“향주, 빨리 서둘러 주시오. 자칫하다가는 오늘 저녁도 굶게 생겼소. 이거야 원…!”
역석이 서둘기 시작했다. 결정을 내리면 번복하는 법이 없는 종리추. 그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무를 찍어대기 시작했으니 꼼짝없이 흉가에서 머물러야 할 판국이다.
“아, 알았어요. 원, 뭐부터 사야 할지….”
벽리군도 뜻밖이었다. 하루 종일 걸어온 끝이 대외산 산자락 흉가라니. 벽리군이 당장 필요하다 싶은 먹을 것과 덮고 잘 것을 구해왔을 때는 방 하나 정도의 임시 거처가 완성되어 있었다. 나무와 흙으로 얼기설기 지은 방이다.
“안에다 들여놔 줘요.”
그녀는 당장 필요하다 싶은 것만 사 왔는데도 마차로 한 짐이었다. 남만 세 사내는 쉴 틈도 없이 짐들을 안으로 들여놨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온 거요?”
“오래 머물 거라면서요? 당장 밥 지어 먹을 솥 하며 그릇은 있어야죠. 살림살이 장만하기가 쉬운 줄 알아요?”
벽리군은 여자이면서도 살림을 해본 적이 없다.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여자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일도 그녀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오히려 보통 여자들이 잘할 수 없는 차 달이기라든지, 악기를 다루는 일이라든지, 춤을 추는 일 같은 것이 더 수월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난 후 일행은 방 한가운데로 모여 앉았다. 방이라고는 하지만 들판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흉가를 고쳐 바람이나 막을 생각이었지만 바닥도 썩고 쥐들이 들락거려 아예 완전히 허물어 버리고 다시 짓다 보니 진척이 더뎠다.
“주공, 오늘은 웬만하면 객잔에서…”
“오늘은 두 문파가 개파를 하는 날이야.”
종리추의 말에 역석은 입을 다물었다.
“본 문은 묵월광이라고 한다. 어차피 본 문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해주는 말이야. 하지만 앞으로 묵월광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알고 있는 선에서 그쳐.”
심상치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쳐 갔다. 소고와 종리추가 무언가 일을 시작했다는 강한 예감이.
“여기는 살문 본문이다. 오늘은 우리들끼리 자축하고 정식 개파는 집이 완성된 다음에 하기로 하지. 사 오란 것은?”
벽리군이 생긋 웃으며 술 항아리를 가리켰다.
“누가 저 많은 술을 먹나 했더니 오늘이 살문 개파일이었군요. 미리 말을 해줬다면 안주라도 충실히 준비할 텐데. 저는 두고두고 먹을 줄 알았죠.”
“후후! 닭 한 마리에 술 한잔이면 그만이지.”
유회가 술독을 날라왔다.
“오늘은 거리낌 없는 날이니 실컷 마시고 취하도록 해. 앞으로는 오늘 같은 날이 없을 거야.”
“하하! 주공께서는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려면 술 한잔 마실 기회가 없겠습니까?”
유회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는 술을 먹지 말란 이야기야. 술을 먹을 기회가 있어도 절대 마시지 마, 절대.”
종리추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왁자지껄하게 시작된 술자리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없어지고 조용해졌다.
벽리군이 금을 타기 시작했다.
딩딩! 디디딩…!
아름다운 선율이 적막한 밤 공기를 뒤흔들었다.
유희가 벽리군의 탄금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겠다는 듯 술독을 집어 들고 꿀꺽꿀꺽 마셔댔다. 다른 사내들도 취기가 오를 만큼 마셨다. 유구가 데려온 아낙은 장난 삼아 건네준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더니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지금쯤 들판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겠지?”
역석이 생각난 듯 불쑥 말했다.
남만의 삼월은 일 년 중 가뭄이 가장 극심하다. 상식적으로는 우기가 시작되기 전인 오월이 가장 더울 것 같은데, 삼월이 가장 덥고 견디기 힘들다.
“빌어먹을! 왜 그 이야기는 꺼내고 그래! 하기사 저렇게 맥이 빠져 있으니 한 계집을 놓고 여러 사내가 기웃거리지.”
“그 말 취소하는 게 좋을걸.”
“취소하지 않는다면?”
“잠깐 밤바람 좀 쐬러 나갈까?”
“미친놈, 술 처먹다 말고 바람은 무슨 바람. 술이나 처먹어.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말고. 아까 이야기는 취소하지. 잘못했다. 됐냐?”
“….”
역석은 유회가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을 건드렸지만 취소 한마디에 무심히 넘어갔다. 유회도 핀잔을 주고 싶어서 준 것은 아니다. 모두들 남만의 푸른 들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환봉, 천폭… 태양열에 살이 이글이글 타는 곳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이었다. 유회도 역석의 마음을 알고 역석도 유회의 마음을 안다.
“에구! 술기운이 도네. 그만 잠이나 잡시다.”
유회가 먼저 술독을 놓고 벌렁 드러누웠다. 그리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술자리는 흐지부지 끝났다. 통쾌하게 마음껏 마시고 싶었지만 고향과는 너무 다른 환경을 간신히 버텨온 사람들에게 술은 독약이었다.
“누님.”
벽리군은 느닷없는 호칭에 봉목을 부릅떴다.
‘누…님? 나보고 누님이라고 불렀어. 누님이라고…’
“오늘이 마지막일 겁니다, 누님이라고 부르는 건.”
“….”
벽리군은 금줄을 만지작거리며 뒷말을 기다렸다.
“이제 시간도 어느 정도 지났고 다시 하오문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
“피 냄새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벽리군이 고개를 쳐들었다.
“누님이라고 불렀으니… 오늘은 나도 말을 놓을게. 그게 무슨 뜻이야? 피 냄새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니? 나도 무인이야. 동생처럼 높은 무공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싸울 줄은 알아.”
“…”
“그런 말은 하지 마. 내가 좋아서 있는 거니까.”
“하오문주 때문입니까?”
‘야속한 사내… 아무리 목석 같은 사내라도 이렇게 마음을 몰라주다니…’
“아니군요. 혹시 이 우제 때문입니까?”
‘아, 알고 있었어, 내 마음을…’
벽리군의 볼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숱한 사내를 겪어본 몸이지만 직접 면전에서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사내와 살을 섞는 것보다 더욱 힘들었다.
“그래서 피 냄새를 맡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만약 검을 들 때가 되면 누님은 제 실력도 발휘해 보지 못하고 죽습니다. 가슴속에 정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요.”
“동생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동생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살았어. 나도 알 건 다 알아. 그리고 또, 설혹 그런 일이 있으면 어때? 난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 그냥 이렇게 동생 수발을 들어주는 게.”
‘짐이 또 생겼구나.’
종리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종리추의 지난 십 년 세월은 다른 사람의 평생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파란만장했다. 열 살에 살인을 하고, 열세 살에 암연족 전사들을 무수히 죽이고… 그러면서 싸울 때는 조금의 인정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이래서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떼어놓고 왔건만 또 정이 생기고 말았다.
“세상에는 참 바보가 많은가 봅니다.”
“…”
종리추도 벽리군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종리추는 천화기루에서 살인 청부로 벌어들인 은자를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인근에 있는 목수란 목수는 모조리 동원되었다. 값비싼 대리석도 사들이고 조경에 사용될 나무와 바위도 사들였다.
한 달이란 기간이 지났을 때, 대외산 산자락에는 대도읍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대저택이 지어졌다.
“이렇게 큰 집이 필요합니까?”
유구가 입을 쩍 벌렸다. 장원을 처음 본 것이다.
종리추는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향수병을 고치는 데는 몸을 바쁘게 놀리는 것보다 좋은 게 없다. 잠을 쪼개도 몸이 부족하다 여길 만큼 바쁘다 보면 고향을 떠올릴 틈이 없어진다. 종리추는 마음이 죽어버린 자들을 원했지만 이들은 마음이 살아 있는 자들이었다. 유구, 유회, 역석. 그들은 종리추가 장원을 짓는 동안 하남성 곳곳을 돌아다니다 지금에야 돌아왔다. 한 달 동안 무려 이백여 곳에 달하는 문파를 빠짐없이 돌았으니 다리가 서너 개라도 모자랐으리라.
“서신은?”
“전부 전했습니다.”
“반응은?”
“코웃음만 치던데요?”
“됐어.”
종리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먼 길을 다녀왔으니 목욕이나 하고 푹 쉬도록 해. 사월 초하루에는 많은 음식을 먹어야 될 거야.”
남만 세 사내는 종리추가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월 초파일이면 몰라도 초하루에 많은 음식을 먹어야 되다니.
장원 곳곳은 사람들의 훈기로 가득했다. 마당은 먼지 한 올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기둥은 파리도 앉지 못할 만큼 반질거렸고 새로 입혀놓은 기와에서는 풋풋한 냄새가 풍겨났다.
종리추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시녀, 시종, 하인. 단 여섯 명만 거주하면 되는 공간이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처럼 북적거렸다.
그들은 대형 솥에 밥을 안치고, 삼, 사백 명이 먹어도 충분할 양의 채소를 다듬고, 생선을 다듬었다.
종리추는 자단목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텅 빈 대청에 눈길을 주었다. 대청은 족히 백여 명이 자리해도 남을 만큼 넓었다. 종리추가 앉은 자리에서 폭이 낮은 계단 네 개를 내려가면 서른 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만한 길쭉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대청 가장자리는 가볍게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고, 병장기를 진열해 놓은 병가도 있다. 벽에는 아름다운 화조도가 걸려 있고 화병에는 싱싱한 꽃망울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크고 화려한 대청이다. 그곳에 달랑 네 사람만 앉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음식 준비는?”
“다 됐어요. 삼백 명 정도는 먹을 수 있어요.”
벽리군이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종리추는 그녀에게 떠나라 했고 그녀는 종리추의 시중을 들겠다고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벽리군은 남았지만 종리추의 시중을 들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장원의 주인이랄 수 있는 여섯 명 중 시녀나 하인을 거느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벽리군뿐이었다. 하인을 받아들이고 시녀를 고르고… 장원의 안살림은 모두 그녀의 몫으로 돌아왔다.
“손님은?”
“…”
대답이 없었다.
하남성에는 구파일방 중 세 방파가 있다. 소림사, 공동파, 개방. 하남성 경계를 약간만 벗어나면 무당파와 화산파도 있다. 대방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신경을 써야 하는 문파들도 많다. 하오문이 그렇고, 종리추의 경우에는 살천문도 무시하지 못한다. 상악에서 강맹한 창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철가도 주의해야 한다. 강맹하고 파괴적인 철가 창법은 빠르고 현란한 양가 창법과 더불어 중원 이대창법으로 불리어진다.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청간을 넣었건만 단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코웃음만 치더라는 유구의 말이 옳았다. 거지들은 잔치라면 지옥불 속이라도 뛰어든다. 환갑이나 혼인 같은 경사는 물론이고 장례 같은 애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들이 거지들이다.
대외산 거대한 장원이 들어선다는 것은 일찌감치 소문이 날 대로 났다. 목수들이 집을 지을 때도 거지들이 어슬렁거리곤 했다.
한데 그들도 오지 않았다. 음식 만드는 냄새는 담 너머 멀리 퍼져 나갔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후후! 골칫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겠지.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지켜보는 눈들은 있을 거야.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지켜보겠지.’
창문 밖으로 비치는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장구름이 가득 끼어 우중충했다.
‘됐어. 할 도리는 다 했으니까.’
종리추는 ‘살문’의 개파를 하남 무림에 알렸다. 정통 무림 문파가 개파를 하듯이 올바른 수순을 밟았다.
문제는 청간에 적힌 내용이다. 문파명이 정식 문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살문’ 이다. ‘개파의 의미’에 적힌 ‘원한 없는 세상’이라는 노골적인 글귀도 그렇거니와 ‘공적’에 개봉부 살천문 개봉지부 지부장을 살해한 사실까지 버젓이 적어놓았으니….
형식만 정식 문파이지 어둠 속에 숨어 있어야 할 살수 집단이 양지로 나오겠다는 의미이지 않은가.
살수집단은 개파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존재는 한 사람, 두 사람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 살혼부도 그랬고 현재 하남성의 어둠을 휘어잡고 있는 살천문도 그랬다. ‘혈주’ 의식도 그렇다.
살수들은 혈주 의식을 통해 새로이 등장한 살수와 구 살수들 간에 영역 정리를 한다. 합의가 이루어지면 일정한 영역을 물려받는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면전이다.
혈주 의식은 살수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는 관습이지 이렇게 청간에 버젓이 적어 무림인들에게 알릴 사안이 아니다.
종리추는 무림의 규칙을 깼다. 살수들의 규칙도 깼다. 사면초가를 스스로 자처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식 문파의 형식을 취했으나 내용은 살수 집단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으니 무림인들이 참석할 리 없다. 살천문에서도 심기가 불편하리라. 아무리 살천문주와 협의가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내놓고 말한다면 살천문의 위신이 급전직하한다.
징계는 곧바로 이어질 것이다. 하남 무인들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다가 살문에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하면 곧바로 쳐올 것이다. 살천문과의 협의도 깨졌다고 봐야 한다. 살문에서 살천문의 영역을 침범할 경우 전면적으로 치달을 위험도 크다.
“나가자. 이미 예정되었던 일. 약속 시간까지 기다렸으니 할 도리는 다 했다.”
종리추가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사두마차가 나란히 지날 수 있을 만큼 넓은 정문이다.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종리추가 나타나자 손님을 영접하기 위해 아침부터 정문에 서 있던 집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하오문 개봉 방주 천은탁이 특별히 보낸 자다. 행동이 민첩하고 약삭빨라서 많은 보탬이 될 자라 하면서.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뎁쇼.”
그는 민망한지 슬쩍 방명록을 덮었다.
“됐어. 현판은?”
“여기 있습니다.”
유구가 직접 현판을 들고 왔다. 헝겊을 걷어내자 획이 곧바른 글씨로 ‘살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리추가 글씨를 쓰고 하남 제일의 목공이 조각을 한 현판이다.
“걸어.”
유구와 역석이 현판을 향해 삼배를 올린 다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현판을 걸었다. 상판식이다. 드디어 정식으로 개파를 한 것이다.
‘소고는 사월 초파일 이전에 살인 청부를 받으라고 했지. 늦어도 초파일까지는 살천문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후후! 살인 청부는 진작 받았고, 이만하면 살천문의 이목도 집중시켰고… 계획에 차질이 있겠군. 예정보다 반년 이상 앞섰으니까. 하지만 소고라면 잘 해낼 거야. 풋! 남 걱정할 때가 아닌데… 내 코가 석자인 걸.’
친분이 두텁고 서로 공생 관계에 있는 하오문 천은탁 방주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 역시 무림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까닭이다.
“방명록은 치우고 사람들을 맞이해. 요즘 같은 흉년에 음식을 남기면 죄받아. 남는 음식은 아낌없이 싸 주도록 해.”
“헤헤! 남을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같이 피죽도 구하기 힘든 판에. 음식 걱정일랑 딱 붙들어 매두십시오.”
집사 남오는 밝게 웃으며 묵직한 기운을 떨쳐 냈다.
정오가 되기 전부터 인근 마을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그렇게 넓던 장원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요즘같이 먹고 살기 힘든 판에 공짜 음식을 주는 곳이 나타났으니 아니 그런가.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걸어서, 걸을 수 없는 사람은 등에 업혀서 잔칫상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살문이라고 쓰인 현판 앞으로 무심히 지나쳤다. 이윽고 글을 아는 사람이 나타났고 현판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살…문? 살문!”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물었다.
“이봐, 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저, 저 글씨…!”
“글씨가 왜?”
“사, 살문! 살문이래!”
“그게 뭐 어때서?”
무심코 중얼거리던 그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살문? 사람을 죽인다는 그 살문?!”
“누, 누구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는 살문이야. 그 살문!”
종리추가 천화기루에서 청부받아 해결한 건은 모두 열네 건. 하루에 서너 건씩 밀려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소문이 번질 청부만 받아들였다.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천화기루에서 몸을 숨긴 지 거의 두 달이 지나가고 있건만 사람들은 살문을 잊지 않았다. 아니, 날개를 달고 더욱 멀리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아직은 개봉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만간 살을 보태어 하남성 전체에 퍼질 소문이었다.
“이, 이거 그냥 가야 되는 것 아냐? 으, 음식이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그래도….”
그들의 눈길은 피골이 상접한 가족들에게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굶는 것이다. 가족들은 살문이라는 소리를 들었어도 시큰둥했다. 그들의 눈길은 오로지 대문 안에 펼쳐진 음식으로 향했다.
“헤헤! 왜 그러시는가? 아, 왔으면 빨리 들어가 음식을 먹어야지, 여기서 뭘 해? 사람들이 예상 밖으로 많이 몰려들어서 곧 동이 날 거야. 들어가려면 빨리 들어가게.”
적시에 나타난 한마디 한 남오의 말은 효력이 컸다. 그들은 살문에 대한 우려를 떨쳐 버리고 우르르 안으로 들어가 음식 상 앞에 앉았다.
또 다른 부류도 있다. 그들은 장원에 들어온 다음에도 음식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척하지만 그들의 곁눈질은 연신 장원 구석구석을 살폈다.
개파를 하는 날은 장원 곳곳이 공개된다. 그들에게는 장원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측간을 가던 자가 길을 잃은 척하고 내원으로 들어섰다. 빈 접시를 들고 주방으로 달려가던 자가 곳간을 살폈다. 조금 더 대담한 자는 종리추의 집무실까지 엿보았다.
그들의 행동은 은밀하기 이를 데 없어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범인들과 분간해 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살문에는 눈빛을 빛내고 있는 자조차 없었다.
종리추가 말했다.
“저기 저 사람, 이마에 혹이 난 노인, 저 노인을 보고 느낀 게 없느냐?”
“궁색한 듯한데 여유 있어 보입니다.”
유구가 대답했다.
“보통 노인은 아닙니다.”
유회가 대답했다.
“무림인 같습니다.”
역석이 대답했다.
“향주는?”
“저 같으면 상종하지 않겠어요. 무서운 사람일 것 같아요.”
벽리군이 대답했다.
“향주는 목숨을 건졌어. 너희 셋은 죽었다. 오늘 장원에 온 사람들 중 저 노인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다. 저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죽일 수 있겠느냐?”
“…”
대답이 없었다.
원래 이런 것이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대단해 보이지 않는 노인이다. 노인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종리추는 노인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한 수는 있음 직한데… 노인을 알지 못하니 방법이 나올 수가 없다.
“과거에 여양에서 감수까지 하루 만에 달린 사람이 있었다. 삼백여 리가 넘는 거리지.”
“그럴 수가!”
탄성은 역석이 터뜨렸지만 한결같이 놀란 표정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무림 문파를 찾아 하남성 곳곳을 돌아다녔으니 여양에서부터 감수까지가 얼마나 먼 거리인지는 잘 안다. 그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렸다니… 인간인가, 날개 달린 새인가.
“개방 분운추월!”
벽리군의 탄성은 다른 각도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와 있어. 그들 중에서도 무공이나 배분이 가장 높은 고수지. 어때? 이제 신분을 알았으니 죽일 자신이 생겼나?”
“…”
“이틀 기한을 준다. 죽일 방도를 강구해서 보고해 봐.”
종리추는 재미있다는 듯 싱긋 웃었다. 해맑은 표정이었다. 몇 달 동안 곁에 있었지만 벽리군이 한 번도 보지 못한 맑은 웃음이었다.
‘너무 아름다워.’
벽리군은 사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장원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사층 망루 제일 꼭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