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1화
“서화 임영을 죽여주세요.”
개파 후 첫 청부였다.
“지금 죽여달라고 하셨나요?”
벽리군은 조심스러웠다. 무림인이 던져 놓은 올가미일 수도 있고 살천문의 징계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네, 방법은 상관하지 않아요. 무조건 죽여주기만 하면 돼요.”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죽이는 일이라면 제가 결정할 수 없군요.”
벽리군은 왠지 께름칙한 느낌이 들었다. 여인은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무림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여인처럼 보인다. 서화의 임영을 죽여달라고 말할 때는 눈에서 새파란 독기도 흘러나왔다. 원한이 얽혀 있는 살인 청부다.
그녀가 내민 돈도 녹록지 않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천은 백 냥은 족히 되어 보인다. 그런데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인에게서는 알지 못할 어두운 그림자가 엿보인다. 마치 함정을 파놓고 유혹하는 사람처럼. 이런 느낌은 무엇 때문에 드는 것일까. 무림과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여인인데.
종리추는 청부 접수에 관한 일체의 권한을 벽리군에게 떠맡겼다.
“사람 보는 눈이라면 향주를 따라갈 사람이 없겠지. 접수는 향주가 맡아. 욕심 부릴 필요는 없겠지. 장원을 유지할 정도면 될 거야.”
“하오문에서 내쫓긴 몸이니 살문 식구로 받아줄 수 없나요? 향주라는 말 말고 다른 소리를 듣고 싶어요.”
“말해 봐. 어떤 소리를 듣고 싶나?”
종리추는 정말 그날 이후 누님이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는 냉담하고 차분한 예전의 종리추로 돌아갔다. 천화기루에 있을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간간이 웃음을 흘린다는 것 정도다.
벽리군은 입술을 잘끈 깨문 다음 욕심껏 말했다.
“안살림을 도맡고 있으니 부인이란 칭호를 주세요.”
“….”
“….”
조용한 침묵 속에는 결단이 숨어 있다. 바람이 숨어 있다.
“총관으로 하지.”
종리추는 거절했다.
“좋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벽리군도 더 이상 종리추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처음부터 욕심을 버렸던 것을. 한데 왜 틈만 나면 욕심이 고개를 쳐드는지. 그에게 어린이라는 아내가 있다는 것도 역석에게 들어 알고 있건만, 아니, 아내가 없어도 그렇지. 창기 주제에 감히 누굴 넘보겠다고.
‘그래, 그냥 이대로 곁에만 있어도 좋아.’
벽리군은 총관 직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첫 청부자를 만났는데…
‘거절해야겠어. 느낌이 안 좋아.’
벽리군은 거절하기로 작정했다.
“살인은 살문주께서 직접 관장하시나 보죠?”
“서화 임영을 왜 죽이려는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나요?”
“아뇨, 말해 줄 수 없어요. 청부하는 데 그런 것까지 말해 줄 필요는 없겠죠? 전 돈을 주고 부탁하고 그쪽에서는 죽여주기만 하면 돼요. 되는지 안 되는지 확실히 말해 주세요. 총관께서 결정할 수 없다면 장주님에게 여쭤보시던가. 청부할 곳은 이곳 말고도 많아요.”
여인은 살천문을 말하고 있다.
“죄송해요. 장주님도 살인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이라… 다른 곳에 부탁하는 게 좋겠군요.”
여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갔다.
벽리군은 곧바로 역석을 불렀다.
“저 여자 뒤 좀 밟아줘요. 살천문으로 갈 것 같은데 살천문으로 들어가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뒤를 밟아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서화의 임영이 누군지도 알아보세요.”
역석에게 일을 부탁하면서도 벽리군은 답답했다.
‘이게 살수 문파라니… 사람이 너무 없어. 역석 같은 살수가 뒤를 밟는 일이나 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리추의 태도다. 시녀나 시종, 하인들은 얼마를 받아들이든 상관하지 않으면서 살수는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모르지 않을 텐데.
역석은 팔 일 만에 돌아왔다.
“총관 말씀대로입니다. 살천문에 들렀다가 서화로 돌아가더군요. 임영이란 어린아이는 진가 장원의 소장주입니다.”
“방금 어린아이라고 했나요?”
“네,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어린아이예요.”
“소장주라고 했는데, 장주가 그렇게 젊던가요?”
벽리군은 여인을 생각했다. 여인은 주름이 거의 없는 얼굴이지만 풍기는 자태로 보아 쉰에 가까웠다. 그럼 장주가 첩을 들인 것인가?
“하하! 그것도 알아봤죠. 진가 장원 대부인은 아이가 없었어요. 그래서 첩을 몇 명 들였는데 대부인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이를 가진 겁니다. 그게 임영이에요.”
“그럼 여기 왔던 여자는?”
“첩이더군요. 사내아이만 넷을 낳았는데 임영 때문에 장원을 물려받지 못할 위기죠.”
진짜 청부였다. 찜찜한 구석은 임영이라는 아이에게 있었다. 그를 알지 못했으니 진짜 청부인지 가짜 청부인지 파악할 도리가 없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진짜 청부라도 여섯 살 난 어린아이를 죽이는 짓을 어찌하겠는가. 종리추도 그런 청부는 탐탁지 않게 여기리라.
하지만 이런 간단한 문제 하나 정리하는 데 장장 팔 일이나 걸렸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책을 세워야 해. 이래서는 아무 청부도 받을 수 없어. 최소한 어디서 정보를 얻을 곳은 있어야지. 이렇게 눈뜬장님이 되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벽리군은 그 길로 망주 천은탁을 찾아갔다.
“하오문의 힘이 필요해요.”
“…”
“종리추는 문주님과 같은 사문이에요. 문주님을 복위시켜 드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구요. 도와주세요.”
“여기는 들르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살수 문파가 개파했다고 버젓이 청간을 돌리는 짓은 보지 못했어.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아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그랬어?”
“저도 모르겠어요. 그분이 하시는 일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요.”
‘그분? 벽 향주… 끝내 수렁에 빠지고 말았군. 벽 향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되거나 가장 비참하게 죽는 여자가 될 거야. 어쩌자고 그렇게 무모한 사랑을….’
“지금 장님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분도 그렇고 수하라는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이나 죽일 줄 알지 정보에는 까막눈이에요. 도와주세요.”
“내 생각은 달라.”
“…?”
“종리추 그 사람, 절대 미련한 사람이 아냐. 대놓고 개파 선언을 한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지만 무엇인가 생각이 있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처음 살수 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벌써 한 번 경험이 있어. 그런 사람이 정보의 중요성을 모를까? 벽 향주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급한 상황은 아닐 거야. 돌아가서 몸이나 잘 보존해. 벽 향주는 하오문이나 개방, 살천문 모든 사람들에게 표적이야. 나도…. 도울 수 없어.”
“알아요.”
벽리군은 힘없이 대답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다. 망주 천은탁 역시 운신이 곤란한 입장이다. 하오문에서 청부 살인과 연관을 맺으면 문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렇지 않아도 직업이 떳떳치 못한 사람들인데 그런 연유로 하오문에서는 청부 살인만큼은 엄금하고 있다.
망주는 의심을 받고 있다. 종리추가 저지른 살인과 무슨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주나 벽리군을 포함한 다섯 향주, 청부를 접수하려고 동분서주했던 하오문도, 아니면 종리추 일행 그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꼬투리가 잡히면 일망타진된다. 노출된 사람들은 무림 공분을 사서 죽을 것이고, 전 문주 역시 하오문주로 복위하는 일은 요원해진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어. 한 번만 깊게 생각해 봤어도 여기까지 오지 않는 건데…. 하지만 이제 어쩌나, 도움을 청할 곳이 없으니.’
“만약 아주 급한 위험이 감지되면 그때는 연통해 주겠네.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까지는 발걸음을 끊어야 해. 사람도… 애써서 칠보사를 구해줬더니 손가락 하나 집어넣기가 그렇게도 힘들던가?”
“훗! 칠보사가 굶어 죽었더군요.”
“그래? 나쁜 놈들, 감히 망주를 속이다니.”
“돌아갈게요.”
“다음에 만나면 우리 술이나 같이 한잔하세. 향주가 따라주는 술을 받아본 지도 오래됐군.”
“그래요.”
돌아서는 벽리군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종리추가 걱정되었다. 정보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곳마저 이런 지경이니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벽리군이 하오문에서 나오고 있는 시각, 종리추는 여주부 서평을 향해 걷고 있었다. 관도는 구불거렸지만 잘 손질되어 있어 마차를 타고 가도 덜컹거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고 가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졌다. 관도에서 보이는 곳에 자리한 집들도 걸음을 더할수록 가구 수가 많아지고 반듯했다.
노정표를 보지 않더라도 서평에 거의 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리추는 세상을 접하는 것이 즐거웠다. 삼도산을 떠나 소고를 만나기 위해 삼이산으로 가던 도중 사람들의 훈기를 접했던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물결 지어 찾아들었다.
당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망조차도 없다. 하늘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풀잎에서 풍기는 냄새가 풋풋하면 상쾌하고, 먼지에 뒤덮여 축 늘어져 보이면 오후의 편안한 한때가 생각나고.
자연은 있는 그대로 종리추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굽이를 돌자 멀리 큰 도읍이 보였다. 수천 가구는 밀집된 듯 산도, 강도, 나무도 보이지 않고 온통 집들투성이었다.
‘거의 다 왔는데….’
종리추는 서평으로 향하는 관도에서 벗어나 논둑에 주저앉았다. 논들은 기나긴 겨울의 때를 벗어던지고 검붉은 속 알맹이를 드러냈다. 아직도 겉옷을 벗어 던지지 못한 황소가 느린 걸음으로 쟁기를 끄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논둑길을 걸어 농부에게 다가갔다.
“말 좀 여쭙겠습니다.”
“이럇! 이럇!”
농부는 연신 황소를 재촉하며 고개만 돌렸다.
“이 근처에 견도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쯤입니까?”
노인은 손을 들어 야트막한 산언덕을 가리켰다.
“저 뒤로 돌아가면 보일 게요. 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없을 텐데? 잡아먹을 개가 있어야 잡아먹지. 쯧!”
농부는 비쩍 마른 손으로 힘겹게 쟁기를 끌었다.
견도장은 노인의 말처럼 황량했다. 말이 견도장이지 개를 잡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텅 빈 개집들, 개의 피로 짐작되는 검붉은 흔적들만이 견도장임을 알려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잘못 짚었나? 틀림없이 여길 텐데….’
종리추는 천천히 견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견도장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된 듯한데 아직도 누릿한 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각종 오물들이 썩어 들어가는 냄새는 머리까지 욱신거리게 만들었다.
‘이상하다. 틀림없이 이곳일 텐….. 찾았어!’
종리추는 전신을 이완시켰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난 다음부터 긴장은 아무 데도 쓸데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바위를 쪼개 보이고 흉포한 검풍을 선보여 봤자 아무 쓸모 없다. 은근슬쩍 다가가 칼로 쓰윽 찌르는 것만 못하다.
물론 긴장은 필요하다. 인간의 육체는 적당한 긴장을 요구한다. 싸울 때도 긴장은 필요하다. 바짝 긴장할수록 집중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긴장할 때와 이완할 때를 구분하게 된다.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무조건 긴장하는 것은 심력의 낭비다.
그는 나무 막대에 거적 몇 장 올려놓은 것 같은 움막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보폭은 자로 잰 듯 일정했다. 발에 실리는 힘도 균등했다. 딛는 발과 떼어놓는 발에 똑같은 힘이 실렸다.
움막은 지저분하고 초라하다. 하나 알지 못할 미증유의 힘이 뻗어 나온다. 종리추는 적지 않은 고수들을 만났다. 적지인살은 고수라기보다는 뛰어난 살수였고 모진아는 고수였다.
유구, 유회, 역석도 처음 만났을 때는 상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강해 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정말 강해 보인다. 아니다. 진짜 강한 고수다. 중원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다. 허명뿐인 고수가 아니라 진신 무공을 지닌 절대 강자다.
“누구냐!”
움막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살문주.”
“….”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종리추는 움막에서 십여 보 떨어진 곳에 이르자 걸음을 멈췄다.
‘움직일 수 없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었다. 세상이 온통 단단한 철벽으로 둘러싸인 듯한 느낌. 움직이고 싶으나 움직일 곳이 없는 곳으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오랏줄에 전신이 결박되어도 이보다는 자유로울 것 같았다.
‘마음마저 답답해지고 있어. 이 상태에서 검을 쳐온다면 죽는다. 상대할 수 없는 고수야.’
종리추는 곧 진기를 휘돌렸다. 소리를 들었다. 몸에서 일어나는 소리, 중단전에서 울리는 평온한 대해의 소리. 이미 일체가 되어버린 오신기가 전신을 휘돌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금성철벽에 둘러싸인 것 같던 느낌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살며시 빠져나갔다.
‘소고보다 더하다. 소고는 부드러워 기운이 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데 이건 너무 강해 처음부터 옭아매어 온다. 소고가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식이라면 이건 피할 수 없는 소나기다.’
소고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무형기였다. 무형기는 말 그대로 무형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또한 볼 수도 없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 무형기를 지니고 있다.
뱀을 만난 개구리가 오금을 펴지 못하는 것도 천적이 지닌 무형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글만 읽던 서생이 산적을 만나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것도 무형기에서 공포를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로 흉악한 산적이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는 서생에게 쩔쩔매는 것도 힘이 아닌 다른 것, 학식이나 덕과 같은 것들이 무형기로 발전해 표출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은 모두 무형기를 갈고닦는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먹은 음식, 자라는 환경에 순응하고 몸속에 간직된 무형기를 일정하게 성숙시킨다.
하지만 소고나 움막에 있는 자처럼 사람의 행동까지 결박시킬 정도로 강한 무형기를 지니려면 유생이 평생 책을 읽는 정도의 고된 수련이 필요하다. 소고나 움막에 있는 자는 밥 먹는 것보다 무공 수련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다.
긴 침묵은 움막이 걷히는 소리로 깨어졌다.
움막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노인이었다. 이마에 큼지막한 혹이 달린 노인, 장원에서 남만 세 사내에게 죽일 방도를 강구해 보라고 말했던 개방 이장로 분운추월이다.
분운추월의 눈에서는 몸을 태워 버릴 것 같은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몸을 친친 옭아매던 무형기도 다시 폭출되었다.
종리추는 태연했다. 긴장을 하지도 않았고 진기를 끌어올리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분운추월의 무형기를 소리 없이 소멸시켰다.
‘이건! 이건 마치 바다 속에 조약돌을 던지는 것 같다. 저자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분운추월은 내심 크게 놀랐다. 경공으로 이름이 높다 보니 간혹 경공을 겨루자고 찾아오는 무인들이 있다. 그러나 무형기를 쏘아내면 우물쭈물하다가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분운추월은 그런 상대의 감정 변화를 즐겼다.
살문주라고 신분을 밝힌 젊은이는 이제 약관을 갓 지났을까 말까 한데 득도한 고승처럼 태연히 무형기를 받아들인다. 감정의 변화를 읽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래서는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도 없다. 직접 손속을 부딪치기 전에는.
‘고수였군. 살문…. 문도들이 꼬리를 밟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어. 웃어넘길 게 아니라 어쩌면 개방 전력을 다해 주의해야 할 자인지도 모르겠군.’
분운추월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심리전에서 지고 들어간 것이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살문주라…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고?”
“개뼈다귀에게 죽어보겠소?”
“크크크! 본색을 드러내는군. 오래가지 못할 줄 알았지. 어떤 놈이 내 목에 황금이라도 걸었더냐?”
“거지 목에 황금을 거는 사람도 있소?”
“어린놈이 안하무인이군.”
“죽이러 온 사람인데 예의를 갖출 건 뭐 있소.”
종리추는 뒷짐을 진 채 태연히 말을 받았다. 무림 원로라는 배분도, 대방파 개방의 장로라는 신분도, 무형기를 뿜어낼 수 있는 고수라는 점도 그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는 듯했다.
‘오래 살긴 그른 놈이군.’
“죽이러 왔다면 죽여봐.”
“편히 죽일 생각은 없소. 경공으로 명성을 날린 분이니 뛰다가 죽게 할 참이오. 어떻소?”
“….?”
“여기서 상채까지는 백여 리 길이오. 달려보겠소?”
“지금… 경공 비무를 제안하는 게냐?”
분운추월은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흥미도 치밀었다. 경공 비무를 하자는 사람은 많았지만 실제로 비무를 해본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달마의 일위도강을 재현했다는 소림 고승 혜미 선사와 중원에 산재한 수많은 신법 중 가장 빠르다는 점창파 유운신법의 대가인 추풍섬전 대협이다. 두 사람 모두 분운추월과 동등한 연배다. 무공에 눈이 트일 만큼 수련도 깊다. 그들 외에는 감히 경공으로 비무를 하자고 덤벼든 사람이 없었다.
“경공으로는 분운추월을 당할 수 없겠지. 해서 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오. 말을 타든, 마차를 타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든. 어쨌든 상채 온수산 정상에서 기다리겠소.”
“흐흐흐! 키키키키!”
분운추월은 상당히 재미있어했다. 살문주는 분명히 경계해야 할 자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감히 기다리겠다? 키키키! 오래 살다 보니 별 미친놈 다 보겠군.”
“하겠소?”
“그냥 하면 재미없고… 뭘 걸겠나?”
“하하하! 역시 노인이라 기억력이 없군.”
“…?”
“방금 말했을 텐데? 죽이러 왔다고.”
“…….”
분운추월은 종리추를 쏘아보았다.
“좋아. 그럼 나도 네 목을 접수하지. 네가 죽일 놈이든 살릴 놈이든 상관없어. 지는 놈이 목을 내놓는 거야.”
“좋소.”
종리추는 자신만만했다.
“노인이니 반 걸음 양보하겠소. 먼저 가시오.”
그는 여유까지 부렸다.
“어디, 네놈이 얼마나 빠른지 보지.”
분운추월은 서슴없이 신형을 날렸다.
개방에는 두 가지 신법이 있다. 취리건곤보와 대팔건곤보. 취리건곤보는 접전 시에 주로 사용하고 대팔건곤보는 장거리를 이동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경신술이다.
분운추월은 대팔건곤보를 시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허공을 부유하는 귀신처럼 발이 땅에 닿는 모습을 볼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도박은 시작됐어.’
종리추도 신형을 날려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