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3화
살문에는 사람이 한 명 두 명 늘기 시작했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놈입니다. 여기 오면 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왔습니다.”
“잘 왔어요. 바라는 거라도 있나요?”
“바라는 거는요 뭘. 그저 먹여주고 재워주시기만 하면….”
“그런 거야 충분히 해드릴 수 있죠.”
벽리군은 역팔자 눈썹을 지녀 순해 보이는 장한을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은 등천조다. 하오문 배수들 중에는 종리추에게 죽은 전대 배문 향주 다음으로 손이 빠르다고 알려진 자다.
망주 천은탁의 배려는 알게 모르게 조용히 진척되었다.
난쟁이가 찾아왔다. 그는 너무 키가 작아 열두어 살짜리 계집아이와 마주 서서 이야기하면 딱 알맞아 보였다.
“몸이 이렇다 보니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놈입니다.”
“아무리 그럴려구요.”
“허드렛일은 할 수 있는데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진무동까지! 너무 이러면 드러나는데…’
진무동은 훔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사내다. 도둑질을 하는 데도 수만 가지의 방법이 있다. 날쌘 몸으로 은밀히 숨어 들어가 신속하게 훔쳐 가지고 나오는 방법,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 한 치 오차 없는 행동으로 도둑질하는 방법. 진무동은 간자를 이용한다. 그는 직접 나서서 도둑질을 하는 법이 없다. 도둑질하고자 하는 물건이 있으면 그 물건과 가장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사람을 포섭하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물건을 훔쳐 오게 한다.
진무동은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치밀하게 연계 계획을 짜고 훔친 사람이 발각되지 않도록 흔적을 지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진무동은 투문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훔쳤다.
‘오늘 찾아온 사람은 열두 명. 진무동까지 세 명을 받아야겠네. 진무동만 받으면…’
벽리군은 종리추가 말한 그림자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살문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신분 내력이 어떻게 되는가 철저히 조사하리라.
“지금은 도와주지만 언젠가는 칼을 들이댈지도 모를 사람이지. 그가 죽이려 한다면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나까지도.”
“도대체 누군데 그래요?”
“호의는 받아들이되 숨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숨겨. 아! 그리고 찾을 생각은 하지 마. 세상에서 가장 찾기 힘든 사람이니까.”
망주는 철저하게 숨은 사람을 보내왔다. 일류에는 두 부류가 있다. 첫째 부류는 솜씨가 너무 좋아서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다 해도 이름은 널리 알려진 자다. 둘째 부류는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으면서 솜씨는 기가 막힌 자다. 전자는 공명을 탐낸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다. 자신이 한 일은 설사 일신상에 화가 닥치더라도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후자는 극단적으로 재물을 탐내는 자다. 도둑의 경우, 취미든 수집벽이 있는 훔친 물건으로 갑부처럼 살든 훔치는 자체로 만족한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다.
등천고, 진무동… 다 후자에 속하는 자들이다. 실제로 벽리군조차 진무동의 얼굴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편히 쉬고 계세요. 곧 할 일이 생기겠죠.”
‘이제 됐어. 청부의 진위 여부는 두더지가 전해주고 청부 대상자는 이 사람들이 파악하면 돼.’
된 것이 아니었다.
“운중삼룡을 죽여주시오.”
얼굴을 드러내기 싫은지 얼굴까지 깊숙이 덮는 방갓을 쓴 자는 다짜고짜 명성이 자자한 무인 세 명을 거론했다.
“운중삼룡이라고 했나요?”
“할 수 있소?”
‘두더지가 듣고 있는데…’
벽리군도 운중삼룡에 대해서는 들은 기억이 있다. 구파일방 출신이 아니면서도 무서운 속도로 두각을 나타내 주목받는 무인들이다. 성격은 광명정대하고 호협하다.
하나 아무리 광명정대하다 할지라도 무인의 길을 걷는 이상 원한이 없을 수 없다. 무인에게는 싸움이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싸움은 지든 이기든 원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
벽리군은 대답을 못했다. 두더지는 운중삼룡의 청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방갓을 쓴 자는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인 듯 몸을 일으켰다. 깨끗한 성격이다. 어쩌면 살천문이 있기에 이런 행동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장주님에게 여쭤봐야겠군요.”
벽리군은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운중삼룡이 맑은 성품이라고 하나 지금 이 청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림인에 대한 청부는 끊길지도 모른다.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 무작정 받아들일 수도 없다. 처음에 했던 고민, 방갓을 쓴 자가 살문문도인지 아니면 무림인이 파놓은 함정인지 알 수가 없다.
‘문주에게 보고해야 돼.’
벽리군은 즉시 몸을 일으켜 종리추의 거처로 갔다.
종리추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흠!”
벽리군은 기침을 해 주의를 끌었다. 굳이 기침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이지만 묵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방갓을 쓴 자가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무슨 일이야?”
종리추가 눈을 뜨며 물었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 쌍꺼풀이 없으면서도 아름다운 눈이다.
“운중삼룡을 죽여달라는 사람이 있어요.”
“안 돼.”
종리추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는 첫 청부예요.”
“조금 나중에.”
“….?”
“지금은 납작 엎드려야 할 때야. 이름을 얻을 때가 아니라 기반을 다질 때. 무인은 안 돼. 살인 청부도 가급적이면 받지 마.”
“그럼 도대체 뭘…?”
“급하게 먹는 떡이 체하는 법이지.”
“망주께서….”
“쉿! 벌써 잊었나?”
‘그림자!’
“청부는 무인이 아닌 범인들의 사적인 원한에만 국한시켜. 이건 도저히 눈 뜨고 보지 못하겠다 하는 것만.”
“일 년에 한두 건 맡기도 힘들겠군요.”
“청간에 그렇게 적지 않았나? 힘없는 자의 한을 풀어주는 문파가 되겠다고.”
‘도대체 무슨 속셈이에요?’
벽리군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질문을 도로 삼켰다. 종리추는 천화기루에 있을 때보다 더욱 조심하고 있지 않은가. 그림자 때문인가? 그림자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말씀대로 하죠. 이럴 바에는 차라리 표국을 운영하는 편이 나을 걸 그랬어요.”
“참!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표국에서 표사 몇 명이 올 거야. 오거든 일실로 보내.”
‘일실!’
이번에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했다.
일실이라면 유회, 유구, 역석이 머무는 곳이다. 장원 구조로 말한다면 내원이며 전각마다 연못과 수림이 딸린 독립 가옥 형태로 되어 있다. 대우는 최상급이다.
전각 하나에 시녀 다섯 명, 하인 다섯 명이 배정되어 있으며 음식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일류 요리사도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일실에 머무는 사람이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만들자는 의도였다. 남만 세 사내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지만 비어 있는 전각에 드는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되리라.
살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개인만의 공간이었다. 종리추는 일실을 열네 개나 만들었다. 희한한 일은 종리추도 일실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네 개의 가옥 중 열한 개가 비어 있지만 벽리군은 물론이고 자신도 외장에서 기거했다. 표사 몇 명. 그들이 일실의 주인이다.
‘살수야. 일실은 살수들의 거처야. 도대체 언제 어떻게 표사를 끌어 들였을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까지 말하지 않고…’
벽리군은 음식이 걸린 듯 답답하던 체증이 싹 내려갔다. 또 그 자리에 섭섭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럼 말씀대로 운중삼룡의 청부는 거절하겠어요.”
종리추는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종리추가 말한 표사는 하루 이틀 간격을 두고 한 명씩 찾아왔다.
키가 작고 수염이 많으며 체격이 뚱뚱하다는 표현보다는 통통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보통보다 조금 더 살찐 사내가 제일 먼저 찾아왔다.
“열두 냥짜리 일거리를 맡기러 왔소.”
집사 남오는 긴장했다. 사전에 벽리군에게 무슨 말을 듣지 않았다면 ‘별 미친놈 다 보겠다’며 내쳤을 위인이다.
“열두 냥짜리 일거리라고 했소?”
“….”
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여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사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살문 요기조기를 살펴보았다.
‘가만! 이자는 황가표국의 광부 같은데… 아닌가? 맞나?’
체격이나 인상으로 보아서는 황가표국의 광부가 틀림없어 보인다. 평소에는 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싸움을 시작하면 미친놈처럼 날뛴다고 해서 광부라는 별호를 얻었다. 손도끼 두 자루를 들고 날뛰는 모습이 양 떼 무리 속에 뛰어든 호랑이와 같다고 해서 양중호라고도 불린다.
‘면접할 필요도 없이 바로 안내하라고 했지? 은밀하게.’
“따라오슈.”
남오는 사내를 객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밤이 될 때까지 여기서 나올 생각일랑 마슈. 그럼 이따 밤늦게 오겠수.”
자정이 넘어 모두 깊은 잠에 빠진 시각 남오는 사내를 찾아갔다.
“조용히 따라오슈. 가는 동안 말은 단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되우. 알았수?”
사내는 짐작하고 있다는 듯 군소리 한마디 없었다. 남오는 사내를 내원 십삼 전각으로 안내했다.
십삼 전각 역시 살문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불이 꺼져 있었다.
“자 여기서 푹 주무슈. 시킬 일이 있으면 이 줄을 당기면 되고.”
남오는 침상 옆에 길게 늘어진 홍색 줄을 가리켰다.
“오면서 보니까 다른 전각에 불이 켜져 있던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나?”
사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있나? 이 자식이 어디서 반말지거리야! 휴우! 어른이 참아야지. 앞으로 눈꼴실 일 많겠네.’
“아니우. 빈 전각이오. 여기는 비어 있어도 사람이 있는 것과 똑같이 불을 켜고 시녀들도 바쁘고 그런다우.”
사내는 무슨 영문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오의 할 일이 끝났다.
“여섯 냥짜리 일거리를 맡기러 왔소.”
짙은 눈썹과 두터운 입술이 인상적인 사내다. 다른 부분은 특이할 곳이 없다. 무리 속에 섞여 있으면 특별히 눈길을 잡아끌지는 못하리라.
남오는 사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눈에 쓸어봤다. 아무리 봐도 특이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의혹이 생겨 다시 물어 보았다.
“방금 여섯 냥짜리 일거리라고 했소?”
사내는 먼저 사내와 마찬가지로 건방진 태도를 취했다. 남오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살문을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작자들!’
“따라오슈.”
남오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먼저 사내처럼 객방으로 밀어 넣은 뒤 같은 당부를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그는 사내의 등을 보았다. 정확히는 뒷요대에 찔려 있는 소도 한 자루. 도집도 없이 찔려 있는 작은 도에서는 시퍼런 예광이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등 뒤에 도? 후사도! 그럼 이자가 진성표국에서 가장 날래다는 후사도? 어째 심상치 않네. 각 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이 슬슬 모여들고 있으니. 하기는 여긴 살문이지. 이상할 게 없어. 흠! 나도 배에 힘을 주고.’
“이따 자정 넘어서 거처하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리다. 오늘 저녁은 비단금침을 덮고 주무실 수 있을 게요. 히히!”
남오는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괜히 기분이 우쭐했다.
아홉 냥짜리 일거리를 가져온 사내는 한눈에 알아봤다.
오른팔이 없는 외팔이에 검을 등에 비껴 메고 다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 검이 칠흑같이 시꺼먼 묵검이라면 오직 한 명만 꼽을 수 있다.
‘오량표국 좌리살검! 아홉 냥짜리라….. 흠! 좋지. 좌리살검이라면 충분히 전각에 머물 자격이 있지.’
남오는 자신이 살문주라도 된 듯 찾아오는 사내들의 기량을 평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