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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77화


벽리군은 한 시진째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운중삼룡 피살.

그녀의 앞에 놓인 서신에는 분명히 그렇게 적혀 있었다.

‘살천문인가? 아냐, 살천문이 운중삼룡을 손댈 리 없어. 자칫하면 십망을 받게 되는데…’

생각을 억지로 살천문 쪽으로 이끌어갔지만 생각은 종리추에게 달려갔다.

무쌍패검을 죽인 자는 쌍구를 사용하는 자임. 미간을 찍은 자국은 쌍구에 의한 상처이며, 반 조각으로 부러진 쌍구도 있었음.

지옥팔도를 죽인 자는 편을 사용함. 현장에서 잘린 편 조각이 두 조각 발견됨.

도룡구검은 소도에 의해 죽었음. 심장을 관통한 다음 폐까지 길게 자른 것으로 보아 심성이 악독한 자임.

사방에 뿌려진 혈흔으로 미루어 상당한 상처를 입고 도주 중인 것으로 판단됨.

망주 천은탁이 위험을 무릅쓰고 보내온 서신이다.

운중삼룡이 한날 감쪽같이 살해당했다.

‘쌍구일살, 혈살편복, 후사도… 그들이야. 도대체 언제 빠져나갔단 말인가.’

벽리군은 한달음에 전각으로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림자가 붙어 다닌다. 그림자는 소식에 정통하니 지금쯤 운중삼룡의 죽음을 알고 있을 게다.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운중삼룡 같은 거목들을 한 번에 찍어 넘길 수 있단 말인가.

벽리군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운중삼룡이 죽었어요.”

“그래?”

“피살당했는데… 우리가 한 일인가요?”

“우리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해?”

종리추는 태연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사군자를 그리는 솜씨는 화경에 접어들어 형식에서 벗어난 그만의 독특한 사군자를 그려냈다.

대나무가 살아 있는 듯 힘차게 뻗어 올랐다.

벽리군의 가슴속에 싸한 아픔이 스쳐 갔다.

분명히 살문에서 저지른 일이다. 방갓을 쓴 사내는 살문을 떠났지만 유구, 유회, 역석 셋 중 한 명이 다시 그와 접촉했다. 운중삼룡의 청부를 받아들이고 깨끗이 해결했다, 벽리군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벽리군에게 아픔을 주었다. 자신마저 속인 종리추가 야속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해 줄 줄 알았는데 끝까지 속이다니. 그때,

‘영? 아! 그림자!’

벽리군의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대나무를 다 친 종리추가 오른쪽 윗부분에 시 한 수를 적어 넣으며 별도로 ‘영’이라는 글자를 썼다.

‘그래, 내게는 그림자가 있어서 숨길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역시 우리 살문이 했어. 운중삼룡을 감쪽같이 죽여 없앨 정도라니. 그보다 상처가 심하다는데 괜찮은지 모르겠네. 도와주러 가야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벽리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벽리군의 생각은 틀렸다. 쌍구일살, 혈살편복, 후사도 그들은 전각에 있었다.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니고 외출했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쌍구일살은 언제나와 같이 멍한 눈으로 창밖을 쳐다보고 있다. 혈살편복은 시녀들과 즐겁게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후사도는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다.

‘이 사람들이 아니었나? 쌍구, 편, 소도… 이들인데.’

혹시나 해서 다른 전각을 둘러보았지만 문밖을 나갔다 온 사람도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분운추월은 벽리군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살문은 조용하다.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기껏해야 자신이 가져다준 정보를 근거로 분운추월이 생각해도 ‘나쁜 놈’이라고 생각되는 자들만 요절내고 있다. 살문은 문파 이름처럼 살인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뒤를 캐주거나 미행을 하는 따위의 조잡한 일로 부산하다.

종리추를 너무 크게 봤다는 후회가 들던 참이었다.

그때 운중삼룡의 살인 사건이 터졌다.

‘하오문과 연이 닿고 있는 것은 맞는데… 하오문에서는 어떤 정보도 캐내지 못해. 지금 연이 닿고 있는 것은 벽리군이 향주로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모르면 죽이지도 못한다. 설사 죽인다 해도 감쪽같이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

운중삼룡은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무림에 이름이 난 만큼 문전을 들락거리는 사람도 많아서 객방에는 항상 무림인 서너 명이 하룻밤 신세를 진다.

살문은 정보에 관한 한 갓난아기와 같다.

전각에 살수들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그 점은 분운추월도 모른다. 살문을 개파할 때부터 있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후사도나 광부 같은 자들은 안면이 있지만 살수가 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점은 없다.

살수? 움직이지 않고 전각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도 살수라고 할 수 있나?

‘허점이 있어. 이건 분명 저 약은 놈의 짓이야. 내가 알지 못한 게 있어.’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분운추월은 즉시 서신을 썼다. 이제는 더 망설일 수 없다. 살문이 분운추월을 죽였다면 무림 어느 누구라도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놈들로…’

분운추월은 전서구를 날리기 전에 다시 한 번 전각을 쳐다봤다. 날카롭고, 사납고, 인상적인 자들이기는 하지만 운중삼룡 같은 거목을 쓰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인데.

전서구를 날렸다.

장문인은 지켜만 볼 것이다. 아직 살문은 피라미에 불과하다. 개방 장문인 같은 사람이 끼어들기에는 너무 미약한 존재다. 분운추월은 그렇게 보지 않았지만 장문인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리라.

‘장문인이 움직이는 것은 살천문과 싸우고 난 다음이 될 거야. 살문과 살천문은 부딪칠 수밖에 없어.. 누가 이기든 이번 기회에 살수 집단을 쓸어버릴 계획을 세우실 거야.’

분운추월처럼 장문인을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개방 장문인은 선이 굵으며 결단이 빠르다. 자잘한 일에는 신경을 안 쓰지만 손을 댔다 하면 확실히 뿌리 뽑는다. 십여 년 전 살혼부를 지워 버리듯이. 어쩌면 분운추월이 살문에 집착하는 것도 그때 일 때문인지도 모른다.

흑봉광괴에 이어 그마저도 적지인살을 잡지 못했다. 다른 문파도 마찬가지여서 살혼부 사대살수는 감쪽같이 십망을 벗어났다. 흑봉광괴도 그렇겠지만 분운추월도 생애 최대의 실패였다. 그래서 살문에 이렇게 매달리는지도…

“쯧! 어지간히도 심하게 다쳤네.”

용금화가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쌍구일살, 혈살편복, 후사도는 한결같이 심한 중상을 입었다. 그들은 살해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살문까지 달려오기에는 힘이 부쳤다. 종리추는 그들 뒤에 음양철극, 천왕검제, 좌리살검을 받쳤다.

“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다. 흔적을 남기면 버린다고도 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너무 비정하지 않은가. 상대가 안 될 사람에게 보내면서, 당할 것을 빤히 보고도 버린다면 너무 몰인정하다. 가서 데려와라.”

“그럼 왜 보냈습니까? 상대가 되지 않을 줄 알면서.”

“자신들의 실력을 냉정히 점검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는 넘어가도 다음에는 죽을 테니까.”

종리추는 쌍구일살, 혈살편복, 후사도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말은 전각에 있는 살수 모두에게 들으라는 소리였다. 과연 세 명은 크게 다쳤다.

“상처가 완전히 나을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라. 시간이 나거나 무료하다 싶으면 싸움 장면을 되새겨 봐. 어디서 어떤 살수를 했는지.”

“쌍구를 놓고 왔습니다. 흔적이…”

“다음에나 실수하지 마.”

종리추는 싸늘하게 대했지만 속정은 세 사내의 마음속 깊이 박혀들었다.

“반갑다, 살아 돌아와서.”

그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살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문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살수가 되었으니.”

쌍구일살이 새삼스럽게 말했다. 그는 이제야 진정으로 살수가 된 것이다. 혈살편복, 후사도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종리추는 유구의 전각을 찾아갔다.

“밀림에는 천폭이 있는데 굉장히 커. 아무리 찌는 듯이 더워도 천폭을 보며 앉아 있으면 더위가 싹 가셔. 고기를 구워 먹어도 좋고.”

“저도 가보고 싶어요.”

“….”

방 안에서 주고받은 소리는 거기서 그쳤다. 여자는 천폭을 보고 싶다고 했지만 유구는 대답하지 못했다.

“흠!”

종리추는 큰 기침을 한 다음 방문을 열었다. 유구와 벽녀는 탁자에 마주 앉아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셨습니까? 부르시지 않고…”

유구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는 늘 종리추의 외장에 거주하는데 자신이 내원에 있는 것을 불편해했다.

“오랫만에 담소나 나누고자 왔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을 보니 다행입니다.”

벽녀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벽녀는 가벼운 목례로 대신했다. 그녀는 유구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유구와만 말을 주고받았다. 화제가 그녀의 과거로 돌아갈 때는 어김없이 입을 다물었지만.

종리추는 대연신공을 얼마나 수련했는지, 하루에 몇 시진이나 수련을 하는지 등등 그야말로 잡담에 지나지 않는 말을 주고받은 후 물러나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인가? 살문이 연관되지 않았나?’

분운추월은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희에게도 들르고 역석도 만났다. 그들도 유구처럼 전각에 눌러앉아 시녀들의 시중을 받는 게 불편한 듯했다. 세상에는 편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수족을 움직이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한 사람도 있다. 이 세 사내가 후자였다.

역석의 전각을 나온 종리추는 쌍구일살의 전각을 찾았다. 쌍구일살은 여느 때처럼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싸움이 하고 싶은가?”

쌍구일살의 대답이 의외였다.

“편히 있는 것도 괜찮군요.”

‘쌍구일살의 음성이야. 어딘가 뚫렸는데… 여우 같은 놈. 이 사건을 네놈이 일으켰다면 정말 네놈은 말릴 수 없는 종자야. 하지만 이놈아, 살천문주는 만만한 자가 아냐. 조심해야 할 게다, 여우 같은 놈아.’

분운추월은 감시는 감시대로 하면서도 종리추에게 정이 깊어졌다. 언젠가는 검을 맞댈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재미있었다. 종리추와 머리 싸움을 하는 게.

분운추월이 증거를 잡아내지 못하고 운중삼룡의 살인 사건 역시 미궁에 빠졌지만 소문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살문이 운중삼룡을 죽였대.”

“나도 그 말은 들었는데 모른다던데 뭘. 아직 누가 죽였는지 모른대. 흉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더군.”

“살문이야. 살문에는 쟁쟁한 고수들이 모여 있대. 누군지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고수들이라던데?”

“그런 사람들이 미쳤다고 살수 짓을 해?”

“또 아나? 돈 앞에는 어미도 팔아먹는다는데.”

“…”

“정말 살문이 운중삼룡을 죽였을까?”

“조만간 밝혀지겠지 뭐. 운중삼룡 제자들이 가만있겠어?”

사람들이 떠도는 소문처럼 운중삼룡의 제자들은 한데 모여 숙의를 거듭했다. 그들이 초점을 맞춘 곳은 살천문이었다. 그들도 살문이 개파를 한다는 정확한 정보는 본 적이 있지만 재미있는 놈들이라는 생각만 했지 운중삼룡을 죽일 만큼 강대한 문파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살천문.

역시 살천문이다. 살천문만이 운중삼룡을 죽일 수 있다.

복수는 만만치 않다. 살수들의 특성상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고, 숨어 있는 곳을 안다 해도 한두 명 죽이는 선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그 다음은 필연적인 결과이겠지만 불의의 습격을 받게 될 테고.

살천문이라면 무림 대문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자들이 소림사로 달려가 방장을 만났을 때 방장 혜공 선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미타불! 살천문은 아니오.”

“틀림없습니다. 살천문이 아니면….”

“나무관세음보살! 운중삼룡이 제자를 잘못 두었구려.”

“…?”

“무림정세를 읽지 못하면 큰 나무가 될 수 없다오. 살천문은 움직일 수 없는 처지라오.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보이는 것을. 아미타불!”

운중삼룡의 제자들은 무안만 당한 채 물러섰다.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살천문이 아니라면 소문처럼 정말 살문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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