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8화
백혈마궁, 사.
오월 보름, 수이산 정상에서 전신에 스물두 개의 검상을 입은 채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 부패 정도로 미루어 살해된 지 닷새 정도 경과한 것으로 보임.
단혼검마, 사.
오월 그믐, 기방에서 살해됨.
흉수는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사용했다고 함.
벽리군은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서신에는 무려 십여 명이나 되는 거흉들의 사망 소식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은? 청부가 들어왔었어. 살천문으로 간다고 돌아갔는데… 풋! 역시 문주야.’
살인 청부 접수는 그녀가 모르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녀는 섭섭하지 않았다. 지금도 청부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서신이 탁자에 놓여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림자가 떠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그림자에 대해서는 알아봤나요?”
“알아는 봤지. 하지만 우리 눈엔 잡히지 않아.”
살문이 점점 번성해 가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죽어가는 무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 활기 차게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면 그럴수록 종리추가 약속한 전 하오문주의 복위도 빨리 이루어지리라. 망주 천은탁은 희망에 들떠 있다. 그런 망주 천은탁도 그림자가 이야기를 할 때는 안색이 어두웠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정보를 주고받는 곳은 몇 군데 되지 않아. 여기 개봉성에서는 개방이 아닐까 싶은데.”
“개방이요?”
“추측일 뿐이야.”
“그럴 리는 없어요. 개방이 살수 문파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따로 생각할 곳이 없어서… 참! 무준의 사문은 알아봤나?”
“그냥 웃기만 하던데요?”
“웃기만 해?”
“만나면 알 거래요. 살아 계시다고 하니까, 빨리 뵈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요?”
“그것 참, 문주님은 사제가 없다고 하시던데. 좌우지간 만나보면 알겠지.”
“주의할 만한 것은 없어요?”
“있지. 요즘 살문에 대한 소문이 커지다 보니 살문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그거야 짐작했던 거구요.”
“내 말은 혈주를 마시고 싶어 하는 작자들이 많아진다는 거야.”
“혈주요?”
“살천문을 상대로 혈주를 마시자니 겁나고… 해서 만만해 보이는 살문을 건드리자는 거지.”
“귀찮겠군요.”
“조심해야 될 거야, 살수가 되려는 작자 치고 쉬운 자들이 없으니.”
“알았어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조심해.”
벽리군과 천은탁은 동시에 일어섰다.
벽리군과 천은탁은 벽리군에 대한 추적이 뜸해지고 살천문이 완전히 손을 뗐다고 생각될 즈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정보를 주고받았다. 하오문이 운영하는 문경기루에서.
그 즈음 종리추는 남오에게 살문을 맡겨놓고 유구, 유회, 역석, 그리고 벽녀와 함께 삼도산 자락을 타고 있었다. 삼도산을 떠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십 년도 더 된 듯 발걸음이 빨라졌다.
“에구! 노인네를 만나면 또 술이나 퍼마시자고 할 텐데… 끄응! 주공, 오늘은 마음 놓고 퍼마셔도 되는 겁니까?”
유회가 벌써부터 술 생각이 나는지 배를 슬슬 만지며 물었다.
“차로 대신하지. 앞으로 술은 끊어.”
“술을 끊으라고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꼴은 보기 싫어서 하는 말이야.”
“하하! 감히 어떤 놈이 이 어르신을… 아니지, 주공이라면 할 수 있지. 에구! 아무리 그래도 술을 끊으라니 너무하십니다.”
유구, 유회, 역석도 감회가 새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삼도산의 풀뿌리 하나, 나무 한 그루도 고향에 온 듯 정겨웠다. 그때는 참으로 춥기만 했는데.
그들이 산 중턱쯤 올랐을 때,
“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올라오는 거야!”
갑자기 머리 위에서 앙칼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크!”
유회와 역석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유구는 그 와중에도 벽녀의 허리춤을 움켜잡고 뒤로 일 장이나 물러섰다.
쒜에엑…!
날카로운 기세가 울린다 싶은 순간 종리추 앞에 홍의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그리고,
쫘악!
힘껏 올려친 손바닥이 종리추의 뺨을 후려갈겼다.
“잘 있었어?”
종리추는 뺨을 얻어맞고도 빙긋 웃었다.
“이 새끼… 이 나쁜 자식! 소식도 전하지 않고… 난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는데… 흑!”
홍의소녀는 기세등등하게 나타날 때와는 달리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어댔다.
“어린.”
종리추가 어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놔!”
“정말?”
“미워 죽겠어!”
어린은 매서운 눈길을 던지고는 산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휴우!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뺨 한 대로 끝나냐? 나 같으면 개 패듯이…”
역석의 입이 뚝 닫혔다.
“더 말해 봐.”
“왜, 왜 저한테 화풀이하시려고 그럽니까? 뺨을 때린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옛말이 있어.”
“…?”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저는 시누이가 아니라 역석인데요?”
“지금부터는 시누이야.”
퍼억!
주먹이 명치에 틀어박혔다.
아버지, 어머니는 건강해 보였다. 모진아는 노예답게 땅에 엎드려 절부터 했고 구맥은 흐뭇한 미소로 반가움을 대신했다. 어린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쟤가 웬일일까? 찾으러 가자고 울고불고 떼를 쓰던 애가?”
배금향이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종리추는 얼굴을 붉혔다. 마치 떠나기 전에 어린과 있었던 일을 아는 듯해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호호호! 얘 얼굴 빨개지는 거 봐? 살문 문주 맞니?”
“어머니는 점점 짓궂어지시는군요.”
“살수 문파를 세운 문주의 어미인데 이 정도는 약과지. 안 그래요?”
“그렇지. 아냐, 아직은 약한 것 같아. 좀 더 하지 그래? 예를 들면 손자는 언제 안겨줄 거냐는 둥 이런 소리 말야.”
“그럴까요?”
“정말 오랜만에 만나니 많이 변하셨군요. 어머니, 제 동생은 언제 볼 수 있어요?”
“동생?”
“아니! 그럼 아직도 안 만드셨어요? 지금 제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예요.”
“응? 호호호! 얘야, 이제는 그 정도로 안 돼. 염려하지 마라. 곧 보게 해줄게. 호호호!”
종리추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한시라도 죽음, 죽임, 피… 이런 말을 잊어버리고 사는 게.
“언제 갈 거야?”
방에 들어서자마자 어린이가 다그쳤다. 그녀는 얼마나 울었던지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올랐다.
“예쁜 얼굴을 기대했는데, 이건 영 보기 싫잖아.”
“정말? 그렇게 보기 싫어?”
“아냐.”
“금방 갈 거지?”
종리추는 마음이 흔들렸다.
살문에 있으면서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살수들의 세계이니, 비록 오늘은 편하다 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떼어놓고 갔는데… 가족들의 안위가 늘 염려스럽고 걱정되었다.
이번에는 살문으로 데려가고자 왔다. 아버지, 어머니, 장모, 어린, 모진아 모두 다 함께 가자고.
하지만 어린의 모습을 보니 너무 여리지 않은가. 이래서야 만약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일이 일어날 경우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아직은 아냐. 너무 빨랐어.’
그때 어린이가 말했다.
“모진아와 상의했어. 우리도 살수 문파를 세우자고.”
“뭣!”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단 말야!”
“바보야, 나 혼자 간 것은…”
“알아. 걱정스러워서 혼자 갔다는 것.”
“알면서 왜…?”
“내가 맞춰볼까? 가장 염려스러워하는 게 뭔지?”
“맞춰봐.”
“죽는 것.”
“맞아.”
“내가 아니고 상공이 죽는 것.”
“…”
“이렇게 생각할 거야.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지켜줄 수 있다. 하지만 죽으면 지켜줄 수 없다. 가장 큰 고민은 정작 죽었을 때 받을 심리적인 타격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겨낼 수 없을 것 같다. 어때?”
“잘 아는구나.”
어린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종리추는 어린의 가녀린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버님, 어머님은 무림인이야. 한 번쯤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나도 걱정하지 마. 난 족장의 딸이야. 내 피는 강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피가 어떤 피인지 알아?”
“….”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피야. 우리 홍리족은 암연족보다 강해. 암연족은 싸움이 좋아서 싸우지만 우리는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해. 그래서 오빠, 동생,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 모두 우리가 선택해야 돼. 누구를 죽음터로 보낼 것인지. 그렇게 선택하면 거의 대부분 죽어서 돌아와.”
종리추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남만에서 살며 암연족과 홍리족을 알 만큼 알았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내면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상공, 걱정하지 마. 죽을 때는 편히 죽으면 돼.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왜 걱정해? 걱정이나 하게 될 것 같아? 나머지는 모두 산 사람 몫이야. 여기 있다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나 옆에 있다가 죽는 것을 보는 것이나 똑같아.”
‘그렇군. 어린은 나보다 더 큰 어른이었어.’
종리추는 어린을 힘껏 껴안았다.
어린이 가쁜 신음을 토하며 붉은 입술을 부딪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