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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80화


‘내 실수야.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하는데…’

지혈제를 뿌렸는데도 피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혈맥을 다친 것 같습니다.”

모진아가 구슬땀을 흘리며 다급히 말했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지금은 빨리 의원을 모셔오는 수밖에는..”

“유구! 다녀와! 일각 안에 데려오지 않으면 유회는 죽는다.”

유구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신형을 날렸다.

유회는 거센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상처도 상처지만 몸에 퍼지고 있는 독이 문제였다. 인영들의 몸을 샅샅이 뒤졌어도 해독제는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게다.

‘마을까지 갔다 오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한 시진이 걸린다. 늦어!’

방법이 없었다.

출혈이야 잡을 수 있겠지만 몸에 퍼지는 독은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은가.

“내가 해보지.”

종리추는 모진아를 밀치고 유회 앞에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오신기를 전신에 휘돌려 원활하게 유통시킨 다음 양손에 진기를 주입했다.

모진아는 종리추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그의 눈가에 놀람이 스쳐 갔다. 하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구절편을 뽑아 들었다.

호법이다.

“역석, 호법 서.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게 해서는 안 돼.”

모진아는 종리추에게 방해가 될까 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것은 아직 미완성이다. 소고가 사용하고 분운추월이 사용하지만 종리추는 시도해 본 적이 없다.

기로 기를 치는 이심전심.

분운추월은 강맹한 기로 상대의 기를 짓눌러 버린다. 소고는 음유로운 기로 상대의 기혈 흐름을 끊어버린다.

양손을 유회의 명문혈에 갖다 댔다.

“모진아, 움직이면 안 돼. 혼혈을 짚어.”

호법을 서던 모진아가 다가와 유회의 혼혈을 짚었다. 격한 기침을 터뜨리던 유회가 죽은 시신처럼 축 늘어졌다.

종리추는 잠시 생각했다.

사람은 외기를 받아들여 단전에 밀집시킨다. 독기는 혈맥을 따라 돌며 혈맥을 손상시킨다. 심장에까지 침투한 독기는 심장을 멈추게 하여 기혈이 흐르지 못하게 한다.

‘심장을 가격해야 해. 그리고 독기를 끌어내야 하는데…’

일단 차근차근 처음부터 하기로 했다. 명문혈을 통해 쏟아져 들어간 진기가 유회의 전신을 휘돌아 심장으로 다가갔다.

퍼억!

종리추는 자신의 진기가 심장을 가격하는 소리를 들었다. 움찔 놀라는 심장의 모습도 비쳤다. 여기까지는 도인으로 가능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심장에 머문 독기를 끌어내 밖으로 뽑아내야 한다.

‘족태음비경을 활용하자. 족태음비경은 무지 안쪽에 있는 은백에서 일어나 위로 올라오지. 인영, 인후를 거쳐 혀끝에서 흩어지니…’

심장을 가격한 진기가 재차 휘돌기 시작할 때 족태음비경을 특히 신경 썼다. 진기가 점점 올라와 중극, 관원에서 만날 때부터는 독기를 잡아냈다.

하완, 복애를 거치는 순간부터 힘이 들었다. 진기는 무의식 중에 흘러야 한다. 산들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 한다. 인위적인 힘이 가미되면 기혈이 손상된다. 자칫 중간에서 분산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주화입마에 걸리게 된다. 분산되는 부분에 영구히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입기 때문에.

가해지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처는 커지리라.

종리추는 토해낼 수 있는 진기란 진기는 모두 토해냈다.

유회 입장에서 보면 생명을 맡긴 것이나 진배없다.

족태음비경은 복애에서 심장에서 흘러나온 독기와 만난다. 단중에서 일어나 중완을 거친 기운과 만나 일월로 올라간다.

종리추는 흘러 내려온 진기를 기다릴 수 없다. 직접 단축으로 찾아가 심장에서 독기를 끄집어내야 한다. 여기서부터는 도인으로 할 수 없다.

‘이기타기.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는다.’

종리추는 조심스럽게 상단전의 진기를 풀어냈다.

처음 해보는 방법이다. 오신기란 익히고 있는 다섯 무공이 하나로 귀일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오신기 모두 상단전을 청소하고 중단전을 넓힌 다음 하단전으로 밀집된다.

몸 안에만 있는 진기다. 특정 부위에 운집한 경우는 있지만 밖으로 토해낸 적은 없다.

미간에서 빠져나온 진기가 유회의 전신을 휘감았다. 단지 상상에 불과하지만 종리추는 자신의 진기가 휘감아드는 모습을 확실히 느꼈다.

‘단중으로…’

진기가 살 속을 파고들어 단중으로 밀려갔다.

종리추도 깜짝 놀랄 만큼 순식간이었다.

모든 게 의식이다. 몸속에 흐르는 진기를 느끼는 것도 의식이고, 자신의 진기가 타인의 몸속에 흘러드는 것을 감지하는 것도 의식이고, 미간에서 빠져나간다고 느낀 것도 의식이다.

퍼억! 퍽퍽퍽…!

진기는 단중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주심중을 타고 내려와…’

진기가 주심중으로 밀려오더니 중완까지 다가왔다.

‘마지막… 복애까지.’

명문혈을 통해 투입된 진기가 미간에서 빠져나온 진기가 복애에서 합쳐졌다.

족태음비경의 행로를 따라 천천히 밀어냈다.

‘휴우!’

종리추는 자신의 진기가 유회의 혀끝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유회의 몸속에 들어 있던 독기도 진기와 함께 부서져 나갔다.

종리추는 손을 뗐다.

의원이 왔을 때 유회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기타기는 이심타심이나 마찬가지야. 이게 소고, 분운추월의 비밀이었군.’

종리추는 홀로 묵상에 잠겨 깨어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너무 진중해 감히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종리추는 무학의 새로운 경지를 만들고 있었다.

성공만 하면 그토록 고민했던, 진기는 원래대로 순환시키되 일정한 혈도에서 순간적으로 폭발시킨다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의 효과는 지대하다.

용천혈에서 폭발시키면 비호무영보보다 두 배는 빠른 신법을 얻을 수 있다. 타격을 받을 때 받는 부위에 폭발이 일면 가격하는 상대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절정에 이르러 폭발이 자유롭게 되면 철신갑을 수련한 효과도 얻는다. 폭발을 일으킨 진기는 다시 안정되어 원래의 경맥을 따라 흐르니 몸에 무리가 없다.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무공이 현실로 다가왔다.

‘잡아주면 돼. 진기가 휘돌 때 상단전과 중단전을 공고하게 잡아주는 거야. 흔들리지 않도록. 상단전은 의식을 관장하고 중단전은 마음의 밭이니 폭발을 일으킨 진기는 마음을 따라 이어지는 거야.’

종리추는 가상의 무리를 만들었다. 옳고 그르고는 직접 몸으로 시연해 봐야 안다.

‘분운추월과 소고는 하단전만 수련해. 나는 상단전을 이용했는데… 그럴 수도 있겠군. 어쩌면 내가 나은지도 모르지. 이기타기… 아!’

종리추는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소고가 이기타기를 시전할 때 종리추 자신은 저항했다. 한순간이라도 의식을 놓치면 요요로운 기운에 말려들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 자체가 말려든 것이다.

외기격인, 격공격인.

무형의 힘으로 쳐오니 무형의 힘으로 맞선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분운추월과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를 끌어들여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비무만 하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

분운추월이 뿜어내는 진기는 몸으로 받아들였다.

모두 생각이다. 맞받을 때는 상대가 생겼기에 힘을 쓸 수 있지만 맞받지 않을 때는 머물 공간이 없으니 스쳐 지나간다.

소고나 분운추월이나 모두 진정한 외기격인은 아니다. 고도의 집중력이 그들을 크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그들의 기도는 말을 걸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분운추월을 있는 그대로, 소고를 있는 그대로 보면 아무 기도도 일어나지 않는다.

종리추는 진정한 의미의 외기격인에 대한 무리는 세우지 못했다.

육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진기만으로 상대를 살상시키는 방법은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소고와 분운추월이 어떻게 진기를 뿜어냈는지 알았다는 것만도 큰 수확이다.

‘세워놓은 무리부터 시전해 봐야겠군, 어떻게 되는지.’

종리추는 자신이 바람같이 표호하다고 생각했다.

비호무영보를 펼칠 때는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심신이 평안하고 고요했다. 지나가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유회를 혼내주려고 했는데 상을 줘야 하나?’

유회의 방심, 혈주의 대상으로 살문을 지목한 자들이 종리추에게 기연을 안겨주었다.

비호무영보는 끊임없이 진기를 일으켜 용천혈에 집중시켜야 한다. 한데 새로운 신법은 용천혈을 돌아온 진기가 하단전에 쌓이고 자연히 일어나 다시 들어가니 진기 소모가 거의 없었다.

빠르기도 배는 빨라졌다. 비호무영보가 억지로 진기를 일으킨다면 새로운 신법은 자연과 닮아 일어나고 지는 것을 순리에 맡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가진 것만큼 살 수 있다. 천 냥을 가졌으면 천 냥만큼 누릴 수 있고 만 냥을 가졌으면 만 냥만큼 누린다. 천 냥을 가졌는데 만 냥을 가진 것처럼 살면 반드시 사단이 난다.

만 냥을 가진 사람들은 천 냥을 가진 사람처럼 살 수 있다. 그렇게 사는 사람도 많다. 재물이라면 그렇게 살아서 모은 돈을 물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공은 다르다. 있는 만큼 써야 하지만 있는 만큼도 쓰지 못한다면 무능력한 것이다.

종리추는 무능력했다. 그리고 지금에야 올바른 길을 찾았다.

벽리군은 심정이 착잡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어린이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여자인 줄은 몰랐다. 배금향을 대하기도 서먹서먹했다.

같은 기문 향주다. 비록 먼 옛날이야기지만 하오문주가 한 여인을 사모한 적도 있다. 바로 이 여인,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사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 여인을 사모했다.

“말은 많이 들었어요. 뛰어난 분이라고 하더군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 왔을 뿐이니까.”

배금향이 활짝 웃으며 반가워했다.

벽리군도 웃었다.

“저도… 말씀 많이 들었어요.”

“그래요?”

“네.”

“우리 좋은 자매가 될 것 같지 않아요?”

‘자매….’

벽리군은 그 말이 싫었다.

“아뇨.”

“….?”

“문주님께서 늘 그러시더군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정을 쌓고 싶지 않아요.”

“아! 네…”

‘전… 문주님께 누님 소리를 들었는걸요. 그 소리가 훨씬 좋아요. 나이로 보면 언니로 모셔야겠지만… 용서하세요.’

벽리군은 마음속에 있는 말을 쏟아내지 못했다.

그 순간 배금향의 눈빛이 기이하게 흔들렸다.

벽리군의 얼굴 표정이며, 말투며, 생각하는 것이며. 배금향은 전에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하오문주가 자신을 대할 때의 모습이 바로 이랬다.

‘설마! 아닐 거야. 내가 노망이 들었나? 풋!’

배금향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시간, 종리추는 상처를 입은 유회를 제외한 전각 살수 모두를 지하 집무실로 불렀다.

살수들은 일을 나갈 때면 항상 하듯이 자신과 똑같은 체격에 자신이 봐도 놀랄 만큼 정교한 인피를 쓴 자들과 교체하여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그들은 지하 통로를 걸으며 다른 살수를 만났다.

‘표적이 두 명인가?’

조금 지나자 다른 살수를 또 만났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또… 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종리추가 전각 살수 모두를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열세 전각의 주인들, 인원으로는 열여섯 명.

종리추는 그들 얼굴에 일일이 초점을 맞춘 후 입을 열었다.

“인노가 당한 사실은 모두 들어서 알고 있을 게다.”

차디찬 음성이었다.

인노는 유회의 별호였다. 유구, 유회, 역석은 노예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려는 듯 별호도 천노, 지노, 인노로 지었다. 다른 것으로 바꾸라는 명령에도 별호만은 고집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인노가 표적이 되었을 뿐, 너희가 밖에 나갔다면 표적은 너희가 되었을 게다.”

“….”

“너희 모두를 부른 것은 살문을 혈주 제물로 바치려는 자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가르쳐 주기 위해서다.”

“…..”

“낙양 청림방으로 가라! 무공을 익힌 자는 모두 죽여라. 너희들이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수법으로 죽여라. 손속에 사정을 두지 마라. 살천문은 건드릴지언정 살문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느끼게 만들어라.”

종리추가 이렇게 말한 적은 없었다.

청부가 들어오면 지도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지도에는 참고 사항이 적혀 있었지만 그대로 따르고 안 따르고는 살수 자신들에게 맡겼다. 죽이는 시간, 방법, 모든 것을.

“유구!”

“넷!”

“네가 책임지고 이끌어라.”

“넷!”

유구의 눈빛이 벌써부터 살기로 이글거렸다.

“일이 끝나면 청림방 정문에 이것을 붙여놓고 돌아와라.”

종리추는 곱게 접은 서신을 건네주었다.

상당히 두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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