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8화
살수들에게 정보는 곧 생명이다.
고급 정보든 하찮은 정보든 살수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었다.
하지만 살문 스스로 정보를 얻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무림 각 문파는 나름대로 정보망을 가지고 있고, 그곳은 뚫고 들어갈 구석이 없었다. 민생 밑바닥은 하오문과 개방이 움켜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곳도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직업별로 상인은 상인들끼리, 약초꾼은 약초꾼끼리 등등… 모두들 결속이 강해서 정보를 얻는다 해도 가공될 소지가 높았다. 그들의 이익과 상반되거나 그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변형될 소지가 다분했다.
결국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정보원을 심어 놓아야 믿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살문의 정보는 모두 외장 식객으로부터 얻어진다.
외형상으로 볼 때 그들은 외장에 기거하고 살문에 구속이나 의무 같은 것이 없어 완전한 식객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실 그들은 살문 문도다.
돈, 원한, 명령… 살문에 들어온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그들은 살문에서 살행을 하지 않는 문도가 분명하다. 그들이 주워 놓는 정보만으로도 어느 무림 문파와 버금가는 정보를 얻어들을 수 있지만 벽리군은 좀 더 많고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었다.
벽리군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농부에게 시선을 돌렸다.
농부들은 평생 집과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논밭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주워듣는 이야기는 저잣거리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만도 못하다.
그런 연유로 정보를 필요로 하는 세력들조차 농부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하나 벽리군은 짧은 시간에 광대한 범위에 걸쳐 농부들을 간자로 심어 놓았다.
올해는 그런대로 농사가 수월하지만 몇 년을 내리 흉년에 시달린 사람들은 은자 한 냥에도 목숨을 걸 정도로 악착같이 정보를 수집해 왔다.
그들이 귀동냥으로 전해 들은 소식들은 살문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은자로 환산되었으니 한마디라도 더 주워듣고자 생업인 농사마저 내팽개칠 정도였다.
정보는 남오와 함께 개봉 망주 천은탁이 보내온 등천조, 진무동이 취합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약삭빠른 자들이라 할 수 있으니 흔적 없이 취합하는 일에 더없이 적합했다.
십사각 각주가 살행을 한다면 음지에서 소리 소문 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외장 식객이다.
이제는 외장도 구색을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살문에 괴객이 찾아왔다.
몸 전체에서 칙칙한 어둠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 나쁜 자였다.
“제가 총관이에요. 무슨 일이시죠?”
벽리군은 한눈에 상대가 무인임을 알아봤다.
상대가 무인이라는 점은 정문에서 괴객을 처음 접했던 남오도 알았다.
괴객은 굳이 무인임을 감추려 들지 않았다.
키가 깡마르고 몸 전체가 검은색 일색…
괴객은 특징이 두드러졌으나 벽리군은 괴객에 대한 정보를 조금도 갖지 못했다.
정보를 분류하는 데만도 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있건만 괴객 같은 무인을 거론한 정보는 단 한 줄도 없었다.
“문주를 뵈어야겠소.”
“문주님은 지금 출타 중이시라…”
“어디요.”
“예?”
“어디로 출타 중이오?”
괴객은 직접 종리추를 찾아갈 심산인 듯했다.
“알아봐야겠는데요. 하도 분주하신 분이라…”
괴객의 입가에 잔미소가 스쳐갔다.
괴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어서 알아보고 오라는 듯.
“살천문 살수군. 데려와.”
종리추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넷? 살천문이라면…”
“살수를 펼칠 것 같으면 공공연히 방문하지도 않아.”
“그래도…”
종리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는 볼일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항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묵상에 잠긴다.
한 시진도 좋고 두 시진도 좋고 말을 건네지 않으면 며칠이라도 묵상에 잠겨 있을 태세다. 말을 걸면 곧 답을 주는 것으로 보아 운공조식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벽리군은 전각에 기별을 넣어 유구, 유회, 역석을 불렀다.
“살천문 살수가 왔어요.”
“뭐, 뭣!”
“흥! 그놈들이 뒈지려고 어딜 찾아왔다고!”
“그놈들이 아니고 그놈이에요. 한 명이거든요.”
“…”
“문주님과 독대를 원하는데, 혹시 불상사가 있을지도 모르니…”
“하하! 총관 말뜻을 알아듣겠소. 괜히 걱정했네.”
유구가 싱겁게 웃었다.
살천문이 급습을 가해온다면 모를까 백주대낮에 공공연히, 그것도 단 한 명이 찾아와서는 종리추를 어쩌지 못한다. 십사전각의 주인들은 종리추를 신처럼 믿었다. 지혜, 무공 모두 다.
“여길 찾아온 놈이라면 범상치 않은 놈이 분명할 거야. 괜히 망신당하지 말고 잘 숨도록 해.”
유구가 당부했다.
괴객은 종리추와 마주 앉은 다음에도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예리하게 살펴보았고 종리추의 면면도 훑어보았다.
“차 드시오.”
종리추가 차를 권했다.
살수는 제 집 안에서도 음식을 함부로 먹지 않는다. 제 손으로 야생동물을 잡아 구워다 먹는다면 모를까, 남이 해준 음식은 만든 사람이 설사 아내라 해도 두 번 세 번 점검한 후에야 먹는다.
한데 괴객은 서슴없이 찻잔을 집어 들고 차를 마셨다. 향을 음미하고 맛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냉수를 들이키듯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찻잔이 단숨에 비워졌다.
종리추는 다기를 들어 또 따라주었다.
이번에도 괴객은 단숨에 들이켰다.
또 따라주고, 단숨에 들이키고… 그렇게 네 번을 반복한 다음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다섯 잔을 마셨군. 오갈미를 먹었다면… 보자…”
종리추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창으로 태양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그대는 유명을 달리하겠군.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전갈을 말하도록.”
종리추는 태연히 찻잔을 입에 댔다.
괴객의 인상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빨리 말하는 게 좋아. 햇볕이 곧 쏟아져 들어올 테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
종리추는 괴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문주께서… 크윽!”
괴객은 말을 잇다 말고 신음을 토해냈다.
오장육부가 타 들어가는 고통… 빨갛게 달군 인두로 복부를 쑤시는 듯한 고통…
괴객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문주께서 살려달라고… 크윽!”
괴객의 코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동자도 발갛게 물들어 혈귀를 보는 듯했다.
“살천문주가 살려달라? 진심인가?”
“야, 약속…”
괴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지만 종리추는 남의 일처럼 태연했다.
“부, 부탁… 제발… 문주님을…”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괴객은 간절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다가 고개를 떨궈 버렸다.
“문주께서 살려달라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괴객은 간절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다가 고개를 떨궈 버렸다.
“저, 정말 오갈미를 풀었어!”
벽리군은 돌연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놀란 사람은 벽리군뿐만이 아니라 유구, 유회, 역석 또한 같았다. 아니 그들의 놀라움은 벽리군보다 컸으면 다 컸지 모자라지는 않았다.
종리추가 왜 독을 풀었단 말인가.
괴객이 독으로 죽일 만큼 강한 자라고는 믿을 수 없다. 실제로 그는 유구, 유회, 역석이 숨어 있는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살수로서의 능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무인으로서는 억지로 일류 고수 소리를 들을 만한 무공밖에 지니지 않았다.
종리추는 말이 없다.
묵묵히 찻잔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맞은편에는 괴객이 피를 흘리며 죽어 있는데.
벽리군은 혹시 혼절한 것이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괴객의 완맥을 움켜잡았다.
맥이 뛰지 않는다. 괴객은 확실히 죽었다.
‘도대체 문주께서 왜 독살을…’
그때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유구, 사냥해.”
살수는 죽이는 것이 능사다.
강한 무공으로 죽이든 잔꾀로 죽이든 목적한 자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자가 강한 살수다.
유구는 미끄러지듯 기어갔다.
괴객을 쫓아 집무실까지 숨어 들어온 이방인은 종리추의 명령을 같이 들었고, 유구의 움직임을 느꼈으리라. 그는 위기를 짐작하고 있을 게다.
숨어 들어온 자가 종적이 발각당했을 때는 무조건 도주해야 한다. 잠시라도 미련을 가졌다가는 죽음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도주했다가는 그 역시 죽음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꼴이다. 도주할 때도 숨어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회를 포착하는 치밀함과 도주로를 정확히 파악하는 판단력, 그리고 과감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상대는 이미 도주로를 파악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어떤 공격을 받느냐이다.
우선 명령을 내린 종리추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몇 명이나 숨어 있는지, 어디 숨어 있는지도 파악해 내야 한다.
사사삭…!
유구는 노골적으로 신형을 드러내고 기어갔다.
벽리군 같이 무공이 빈약한 사람에게는 파악되지 않을 은밀한 움직임이지만, 살문 문주의 집무실까지 침입할 정도로 대담한 적이라면 신형이 발각당했다고 봐야 한다.
“잘 가라!”
유구는 품에서 목갑을 꺼내 홱 던졌다.
엎드려 있는 상대가 방어하기 곤란한 옆구리 부근이다.
상대는 돌아눕거나 일어서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병장기로 막아야 한다.
파악…!
상대의 병기는 철수였다.
정교하게 제작된 철수는 손가락 관절 부근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쇠로 만든 수투를 끼고 있는 것과 같다.
철수에 잡힌 목갑이 간단히 부서졌다.
나무 파편이 튀었다.
“헉!”
유구는 짤막한 경악을 들었다.
비록 소리 내어 토해낸 소리는 아니지만 두 눈이 치떠지는 것까지 느낄 수 있었다.
쉬익!
유구의 신형이 번개같이 쏘아졌다.
“큭!”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상대는 눈을 부릅떴다.
그의 옆구리에는 맹독을 가진 흑거미가 달라붙어 그의 육신과 영혼을 갉아 먹는 중이었다.
유구의 마지막 일검이 상대의 목젖을 갈라 버렸다.
살수는 항시 반격을 대비해야 한다. 살수는 무공이 나은지 못한지 가리는 비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빼앗느냐 잃느냐 하는 싸움을 한다. 항시 동귀어진에 대비하라. 검을 찔러 넣는 공격 등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베었으면 즉시 물러서라.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 단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죽어가는 상대가 휘두르는 단 한 번의 움직임에 당하지 마라.
목젖을 가른 유구는 반사적으로 튕겨 나왔다.
종리추가 한마디씩 일러준 말들은 살이 되어 몸에 붙었다.
쒸익!
무지막지해 보이는 철수가 안면을 스쳐갔다.
그것뿐, 상대는 묵직한 몸을 떨궈 지붕에서 떨어져 내렸다.
쿵!
상대가 떨어진 곳은 죽은 괴객의 등 뒤다.
유구는 즉시 신형을 날린 후 절명 상태를 확인했다.
“죽었습니다.”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목갑에 든 흑거미는 남만에서 서식하는 놈으로 물렸다 하면 절명하고 마는 극독을 지녔다.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도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놈이다.
유구는 전리품처럼 철수를 챙겼다.
유구에게는 아주 적절한 병기다. 그렇잖아도 흑거미를 다루기 힘들었는데.
철수를 손에 끼고 흑거미를 잡았다.
아주 편했다. 전처럼 목갑을 꺼내 들고 ‘저놈을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쉬익! 쉬익!
경쾌한 신법으로 역석과 유회가 떨어져 내렸다.
“한 놈은 도주했습니다. 왜 보내셨는지…?”
“두 놈 다 잡으면 소식이 끊기게 된다. 우리 살문이 이자의 청탁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지. 한 놈을 죽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테고.”
“도주한 자는 내 답을 듣지 못했어.”
“아!”
“품속에 서신이 있을 거야.”
벽리군이 괴객의 품을 더듬자 과연 서신이라 생각되는 종이가 만져졌다.
구월 보름. 삼경. 유천. 흑죽림.
서신에 적힌 글자는 의외로 몇 자 되지 않았다. 서신조차도 시간이 없어 급히 휘갈겨 쓴 듯 글씨가 엉망이었다.
“총관, 지금 당장 살천문에 대해서 샅샅이 조사해. 움직임 하나까지 철저하게. 이번 일은 모습이 드러나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단단히 주의시키고. 정보를 얻지 못하더라도 모습이 드러나는 일은 피하도록 주의해.”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벽리군이 의아해 물었다.
종리추의 말투로 미루어보면 사단이 생겨도 단단히 생긴 듯한데.
“살천문주가 쫓겨났다는군.”
“예?”
“전에 살천문주를 방문했을 때 약속을 했지. 목숨을 살려주기로.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살천문주는 그때부터 반란 징조를 읽었던 거야. 살천문주조차 대처할 수 없을 만큼의 징조를.”
“세상에, 그런 일이!”
벽리군은 믿을 수 없었다.
반란이란 모를 경우에나 당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몇 달 전부터 알았는데 당하는 경우는 없다.
하오문주도 같은 일을 당했지만 만약 하루 전이라도 낌새를 눈치챘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게다.
하늘도 속이고 땅도 속이지 않는 반란은 성공하기 어렵다.
“후후, 세상일이란 이해 못하는 일이 많지. 유구, 십사전각 각주들을 모두 준비시켜. 살문의 사활을 건다.”
“주공!”
유구가 놀라서 소리쳤다.
종리추가 이토록 강경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종리추는 언제나 백 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비성유검의 청부를 받을 적에도 눈썹 한 올 까딱이지 않았다.
지금은 서두르고 있다.
강하지만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패기마저 엿보인다.
“총관, 외장 문도를 모두 풀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각별히 조심하라고 해. 살문 문도인 것이 드러나면 여지없이 목숨을 잃을 거야. 그 누구라도, 설사 나라도 죽을 거야. 열 번 백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한 다음에 움직이라고 해.”
“살천문주를 구하려고 해. 자칫 살천문과 전면전을 벌일 수도 있겠군.”
“살천문과…”
벽리군은 바짝 긴장했다.
“이 자… 주공께서 독살한 것이 아니군요. 찻잔을 마시면서 스스로 오갈미를 복용했어요.”
괴객의 시신을 치우려던 역석이 괴객의 손가락을 유심히 살펴보며 말했다.
괴객의 손톱은 마치 물감이라도 칠해놓은 듯 오색으로 물들어 있다.
괴객은 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종리추에게 옛 약속을 일깨워 주는 것으로 제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한 듯싶다. 어쩌면 목숨을 바칠 테니 문주의 목숨을 꼭 구해달라는 당부일지도 모르고.
오갈미는 흑점사, 선홍사, 미각사, 의염사, 소화사라는 다섯 종류의 뱀에서 추출한 독이다.
물리면 타는 듯한 갈증이 치미는 공통점이 있다 하여 오갈미라 불리며 독성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다. 하지만 다섯 종류의 독을 음용하였을 경우에는 어느 맹독사 못지않은 독성을 발휘한다.
차에 타서 마시면 타는 듯한 갈증이 치밀어 계속 찻잔을 비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섯 잔을 연거푸 마시고 나면 이번에는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어진다.
첫 잔을 마시기만 하면 죽음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지는 독이다.
살수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 자진용으로 많이들 사용하곤 한다.
종리추는 괴객이 첫 잔을 들이켰을 때 오갈미를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계속 찻잔을 따라 준 것이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없애 주려고.
“이 자는 미련하게도 우리가 그림자를 파악하지 못할 줄 알았던 모양이야. 우릴 가볍게 본 거지. 판단 착오. 잘 봐둬라. 한 번의 판단 착오는 목숨을 앗아가는 거야. 이 자는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됐어.”
“그랬군. 어쩐지 독을 쓸 때가 아닌데 독을 사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벽리군은 옛날의 종리추를 보는 듯했다.
천화기루에 있을 적에 종리추는 무심하면서도 냉철했다. 인간의 감정 대신 차디찬 이지로 뭉쳐진 듯했다.
지금 종리추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정다감함은 사라지고 명령과 움직임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이런 점에 마음을 빼앗겼지만…
역석이 괴객의 시신을 들고 나갔다. 유구와 유회는 십사전각 각주를 일깨우러 갔고, 아직도 죽음의 기운이 남아있는 집무실에는 종리추와 벽리군만이 남았다.
“총관도 어서..”
“그전에… 부모님과 어… 소저는 어떻게…?”
“음…!”
“제 생각에는 살문의 사활이 걸린 싸움이라면 일단 다른 곳으로 피신하셨다가…”
“아니.”
종리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 스스로 말했어. 사람을 죽이는 살수는 이급 살수,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살수는 일급 살수. 내 스스로 이급 살수로 전락할 수는 없어.”
“그럼 저는요, 저는 누가 보호해 주죠?”
벽리군은 문득 야속한 생각이 치밀었다.
어린이 살문에 들어온 다음부터 알지 못할 담벼락이 종리추와의 사이를 가로막은 느낌이었다.
어린이 오지 않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을지 모른다. 평생 뒷바라지를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말을 꺼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마저 이해한다. 평생 꺼내지 않아도 좋다. 그냥 옆에서 묵묵히 수발을 들어주는 것으로 행복하다. 그런데 아니다. 어린이가 있으나 없으나 마음이 똑같아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다.
마치 남이 되어버린 것 같다.
“총관, 언젠가는 누님 소리를 하게 될 날이 있겠지. 어쩌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못 할지도 모르고. 지금은 감정을 숙이고 머리를 열어.”
알고 있었다. 잊지 않고 있었다. 종리추는…
“풋! 누가 뭐래요? 외장을 즉시 움직이죠.”
그동안 체한 듯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일시에 가시는 듯했다.
벽리군은 밝게 웃었다.
살문은 많은 움직임이 있었던 것에 비해 너무 조용했다.
이제는 거의 백여 명에 육박하던 외장 문도가 일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라 더욱 조용하게만 느껴졌다. 활짝 열려진 정문으로 들여다본 살문은 오가는 사람 한 명 없어 쓸쓸하게까지 보였다.
외장 문도는 각기 열 명의 하수를 두고 있다. 그 열 명의 하수는 또 열 명의 농군을 관리한다.
외장 문도 백여 명이 일시에 풀려나갔다는 것은 무려 만 명이 넘는 막대한 눈과 귀가 움직인다는 말이 된다.
농군 만여 명도 혼자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자신이 정보를 얻는 데 필요한 사람들을 규합해 놓거나 선이 닿아있고, 그런 점까지 계산한다면 십만 명은 넘어설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단일 문파로는 막대한 정보력이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이 자신들이 얻어 들인 정보가 살문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연락 방법도 은밀해서 상수가 연락을 취하지 않는 한 하수는 상수에게 연락할 방도가 없다.
정보를 얻는 일이니 항시 꼬리가 밟힐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하수를 둘 적에도 아는 사람은 일절 배제했다. 그런 점 때문에 정보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진땀께나 흘렸지만, 모든 게 원활해진 지금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다.
“살천문이 어떻게 움직이든 모두 걸려들게 되어있어.”
벽리군은 정보의 중심을 유천 흑죽림에 두었다.
흑죽림을 중심으로 점점 넓게 퍼져나가면서 무림의 동태뿐 아니라 의문의 죽음, 낯선 자의 등장 등 다른 점이 있으면 무조건 보고하게 했다.
살천문의 총단은 극비인지라 파악할 수 없다.
중원에 살문처럼 당당하게 개문한 살수 문파는 단 한 군데도 없다. 특히 살천문처럼 일세의 패주쯤 되면 총단을 알아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벽리군이 취한 방식은 마구잡이로 긁어모으는 식이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에는 그 방법 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실제로 살천문주는 열 군데에서 스무 군데에 이르는 은신처를 두고 수시로 옮겨 다닌다고 한다. 그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살천문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을 꼽을 만큼 극비 사항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에도 반란을 주도한 자는 심복 중의 심복임이 틀림없을 것 같다.
‘문주로 따지자면 일각주 유구나 이각주 역석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데… 그럴 수 있나?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하는 반란이라… 도대체 뭐가 있기에…’
벽리군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도 있다.
살천문주가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의 반란이라면 살문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살천문주를 구하면 살천문과 앙숙이 되는 거야. 무서울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살천문과 부딪쳐서는 곤란해. 아직은 그럴 때가 아냐.”
종리추보다 무림 경륜이 높은 벽리군이 생각하기에는 살문은 이제 병아리 신세를 갓 벗어났고, 살천문은 숱한 싸움판에서 승승장구한 투계 중의 투계였다.
무림인의 약속은 중요하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도 있다.
하나 살수 세계에서 약속이란 서로 이용 가치가 있을 때나 지켜지는 보잘것없는 것이다.
현재와 같이 문주에서 쫓겨나는 처지라면 세상천지 어디에 손을 내밀어도 마주 잡아줄 사람이 없다.
한데 종리추는 마주 잡아주고 있다. 약속이라는 보잘것없는 것 때문에.
‘정말 살문의 존폐가 걸렸어.’
벽리군은 만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준비를 한다면 지금이 기회였다. 조금만 더 늦장을 부린다면 준비할 기회조차도 없어지리라.
“살천문주를 구하겠다고… 했단 말이오?”
적지인살은 벽리군의 말을 듣고 난 다음 인상을 찡그렸다.
평생 살업에 몸담아 온 적지인살조차도 종리추의 행동은 겁 모르는 젊은이의 치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쯧! 하긴, 추아는 그럴 만하지. 원래 살수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거리가 멀었어. 살수와는 어울리지 않았어.”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서 준비를 하자는 거예요.”
종리추는 살수보다 정통 무인에 가깝다. 살검을 버리고 활검을 잡는다면 명예, 부귀 모든 걸 더 빠른 시간 안에 얻을 가능성이 높다.
“동생, 준비를 한다고 되겠어?”
배금향이 미운 소리를 했다.
‘동생’이란 말은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서 듣더라도 듣기 싫은 미운 소리였다.
종리추에 대한 애모를 떨쳐 버려야 한다고 작심했으면서도 배금향에게 동생이란 소리만은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휴우!
벽리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눈빛이 총명하고 티 없이 밝은 어린을 볼 낯이 없었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살천문주를 구한다면 살천문과 검을 섞는 것은 불가피해요. 지금은 약속 같은 걸로 연연해 할 때가 아닌데… 살천문주를 몰아내는 자는 아주 무서운 자예요. 살천문주가 몇 달 전부터 알았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한 반란을 주도했으니까요.”
“몇 달 전부터…”
적지인살이 신음하듯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난 그냥 남만으로 갔으면 좋겠어.”
어린이 철없는 소리를 했다.
천방지축…
벽리군은 입가에 미소를 매달았다.
종리추의 여인이라서일까? 어린이가 사랑스러웠다. 같은 사내를 같이 사모하는 연적이라지만 질투보다 아끼고 싶은 마음이 소록소록 새어 나왔다.
아마도 어린이의 거침없는 언행이 적의를 없앴는지도 모른다.
구맥이 눈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계속 투덜거렸을 게다.
“지금 어떤 방도를 구사하지 않으면…”
벽리군의 말문은 적지인살의 도리질에 뚝 막혔다.
“현 살천문주는 나도 잘 알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피 냄새를 맡으며 자랐어. 머리가 아주 뛰어나서 천재라는 소리도 들었고. 열두 살에 살천문에 입문해서 적수공권으로 살천문주에 오른 인물이야. 뛰어난 사람이지.”
“…”
벽리군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살수 문파를 이끌고 나가는 것은 무림 문파를 이끄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살수 문파는 언제 어느 때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 누군가가 심심해서 공격했다 하더라도 지탄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무림 영웅이 된다.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멸살의 대상이 되는 살수 문파.
살천문주는 그런 살수 문파를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이끌어 왔다.
그가 살천문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는 불문에 부치더라도 쥐 죽은 듯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무림에 붙어 있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능력이다.
그렇게 많은 살행을 하고도.
그런 사람이 쫓겨나는 마당인데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도주로는 준비해 둬야 하는데..”
“문주님을 만나보세요. 제일 좋은 선택은 살천문주를 구하지 않는 거예요. 그게 안 된다면 두 번째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이고요.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문주님만이라도 건사할 수 있는 비책을 세워 놓아야 해요.”
이번에도 적지인살은 도리질을 했다.
“총관은 추아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소.”
“…”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문이 막히는지… 벽리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총관,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의 거취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소? 추아에게.”
“여쭤봤어요.”
“뭐라고 합디까?”
“…”
“허허! 총관의 심정으로 보면 우리라도 피신시켜야 한다고 말했을 테고 추아는 거절했을 텐데… 아니오?”
“그…래요.”
“추아에게 위기가 닥치겠지만 이번은 아닌 듯싶소. 추아를 믿어봅시다.”
“그래도 이건…”
“살천문주가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물러서는 일은 있을 수 없소. 그것도 몇 달 전부터 반란 음모를 알았다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하! 무림 문파라면 그럴 수 없지. 하오문에서도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소. 하지만 살수 문파라면 가능하오.”
“옛?”
벽리군은 놀랐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니.
무림에 대해서는 벽리군만큼이나 잘 알고 있는 배금향도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 무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진아도 놀라는 듯했다.
‘알고 있으면서 당하는 일이 가능하다니.’
“어느 문파나 구파일방에게 자유로울 수는 없소. 구파일방… 영원히 넘을 수 없는 커다란 산이지. 구파일방이 개입됐다면 문주 정도는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어. 살문도 마찬가지야. 구파일방에서 추아에게 물러가라고 총관에게 문주직을 맡으라고 하면 그렇게 되는 거야. 몰살당하지 않으려면 말을 들어야지. 쯧! 그토록 영악한 사람이 무슨 꼬투리를 잡혀가지고는…”
벽리군은 기가 막혔다.
구파일방이 살수 문파까지 조종하고 있단 말인가.
하기는… 그들이 묵인하고 있기에 살수 문파들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이지 칼을 뽑아 든다면 무사할 살수가 없으리라.
“구파일방은 건드리면 안 돼. 청부가 들어와도 절대!”
과거 살혼부는 구지신검을 죽인 것으로 십망을 받았다.
구지신검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십망을 결정하는 과정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벽리군은 적이 안심했지만 심란하기도 했다.
살천문주는 누구를 죽였기에 문주에서 쫓겨나는 것일까. 그래도 십망을 받지 않고 쫓겨나기만 하는 것이 어디인가.
“청부를 받을 때는 조심해야 돼. 특히 무림이라면.”
외장 문도가 살천문 동향에 초점을 맞추고 살문을 나선 지 반나절이 지나면서부터 속속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파일방은 조용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움직임이 포착되어도 어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사일 뿐,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일어날 만한 징조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자는 특히 유의해라. 평생 땅밖에 모르는 농부일지라도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자는 살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촉각을 곤두세워라.”
주의를 단단히 주었지만 살천문에 대한 동향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하다못해 낯선 자라도 모습을 보여야 하건만 들어오는 보고는 거의 근거 있는 것들이었다.
‘진작 살천문 살수들을 파악해 왔어야 하는데… 하오문이나 개방이라면 파악해 놨을 거야. 하오문은 연락할 형편이 못 되고… 연락해도 망주만 괴롭힐 뿐이지. 개방 분운추월이라면…’
벽리군은 고개를 내저었다.
분운추월이 살문에 정보를 제공한 적은 있지만 살문을 관찰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살문이 살수 문파임을 안 이상 도와줄 리가 없다.
‘그래도 문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의지할 곳은 개방밖에 없고 개방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분운추월이 유일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휴우! 힘드네. 할 수 없지, 약속 장소가 흑죽림이니 흑죽림 주변 단속을 하는 수밖에.”
벽리군은 흑죽림에 대한 정보만 따로 추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