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2화
왠 놈이냐!
소리치지 마. 귀 안 먹었어.
뭣?
물었으니 대답해 주지. 널 죽이러 온 사람.
뭐 네깟 놈이?
호오! 제법이군 네 번째야.
이놈이!
죽이러 왔다는 데도 비웃는 놈이 네 번째로 많았다는 거야. 세 번째로 많았던 놈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놈이었고, 두 번째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놈이었지. 아! 정말 피곤했어.
하하하! 재미있는 놈이군. 살천문에서 온 놈이냐, 아니면 살문에서 온 놈이냐?
그건 다섯 번째야. 많이 듣는 흔한 질문이지. 세상에 사람 죽일 곳이 살천문과 살문밖에 없나? 그런 질문을 하게.
건방진 놈! 실력은 있나?
당해보면 알지. 사실 네놈 정도는 내가 직접 오지 않아도 충분한데 어쩐 일인지 네 목숨만은 꼭 나보고 거두라고 해서 말야.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이제 거둬야겠어. 밤이 길어서 좋은 건 없으니까. 먼 길을 왔더니 술 한잔 들이킨 다음 푹 쉬고 싶거든. 아! 술은 마셨나? 죽음의 공포를 잊는 데는 역시 술이 최고야.
미친놈!
쉬익!
목숨을 가지러 온 자는 양손을 활짝 펼치고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랐다.
이, 이건 용비구천! 운룡대구식!
사내도 크게 놀랐지만 무인답게 대응도 빨랐다. 양손에 창을 움켜쥐고는 허공을 향해 곧장 찔러냈다. 순식간에 열다섯 번을 찔러낸다는 일창십오변이었다.
쉬익! 쉭…!
살수는 허공에서 허리를 틀어 재차 솟구쳤다. 운룡대구식은 허리의 탄력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허공에 뜬 상태로 신형을 네 번 미만 변화시키면 초급이요, 네 번에서 여섯 번 사이로 변화시키면 중급, 일곱 번 이상 변화시키면 상급으로 간주했다.
신법 하나로 무공의 척도를 알 수 있다. 살수는 무려 여덟 번이나 신형을 변화시켰다. 사내의 일창십오변도 변화무쌍하고 빨랐지만 살수를 잡아내기에는 변화가 너무 느린 듯싶다.
하하하…!
살수의 입에서 낭랑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순간 사내는 보았다. 사내의 오른쪽 무릎이 굽혀지면서 빙그르르 신형이 도는 것을. 왼쪽 발이 빙글 도는 신형을 따라 팽이에 칼날을 붙여 놓은 것처럼 휘어져 오는 것을.
회, 회련각! 이자가 누구기에 곤륜 무공을!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회련각은 무서운 속도로 전신을 짓이길 듯 다가왔다.
찻!
사내의 입에서 고함이 터지며 창대가 허공을 갈랐다. 찌르는 수법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후려치는 타법으로 다가오는 속도를 제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빠악!
회련각과 창대가 강렬하게 부딪쳤다. 일반적으로 창대를 후려치면 피하는 것이 상례인데, 살수는 몸뚱이가 바위로 만들기라도 한 듯 거침없이 부딪쳐 왔다.
충격을 받은 사람은 사내다. 창대로 후려치기는 했는데 마치 쇠로 만든 바위를 두들긴 듯하지 않는가. 사내는 손목이 얼얼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충격뿐이면 괜찮을 텐데 손아귀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굳게 잡고 있던 창이 손아귀를 빠져나가 허공을 갈랐다.
헉!
사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회련각은 반탄력과 회전력을 모두 이용하는 각법이다. 발경을 극대화시킨 초식으로 파괴력이 강력하다.
퍼억!
회련각은 여지없이 사내의 얼굴을 짓뭉갰다. 사내의 얼굴 뼈가 안으로 함몰되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자신이 허무하게 쓰러질 줄은 더더욱 몰랐다는 듯 손발에 잔경련만 일으켰다.
이봐, 난 상당히 인자한 사람이라고. 사람이란 죽는 순간보다 죽음을 떠올리는 순간이 괴롭지. 난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아. 깨끗이 죽여주지. 넌 첫 번째가 무어냐고 묻지 않더군. 그래 의외로 묻지 않는 사람이 많지. 긴장했기 때문에. 이게 첫 번째야.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것. 하하하!
사내는 경련조차 멈췄다. 그의 육신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안타까운 노릇이군 여인을 죽이기는 싫었는데… 여자면 여자다운 별호를 지녔어야지. 쯧! 탈혼삼도라니. 여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별호야.
왠 놈이냐!
여인의 눈에서 얼음 조각이 쏟아졌다. 여인은 느닷없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보고도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았다.
스르릉…!
보기에도 섬뜩한 대도가 뽑혔다. 중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만월도였다.
몽고 놈이냐?
곧 죽을 계집이 묻는 것도 많군. 그냥 죽어. 퉤! 오늘은 재수에 옴 붙었군. 계집을 죽이라니.
가라랑…!
여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도를 뽑아 들었다. 여인이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한 대도다. 칠척 거한들이 즐겨 사용하는 애병 중 하나로 자유자재로 도결을 뿌려대기 위해서는 타고난 신력이나 정순한 내공이 필요하다.
대체로 대도를 사용하는 자들은 전자가 대부분이다. 내공이 정순한 사람들은 대도를 사용하기보다는 소지하기 간단한 병기를 택하곤 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
대도라…
사내가 중얼거렸다.
대도라면 내가 전문이지. 하지만 난 병기를 바꿨어. 내 무공에는 대도보다는 이 만월도가 훨씬 낫거든.
사내의 말을 듣고 여인은 생각했다.
‘만월도는 공기를 가르는 예기가 보통 날카로운 게 아니지. 속도에 치중하는 도법을 구사했겠군. 전에 대도를 사용했다면 패도를 사용했다는 말인데, 패도에서 쾌도로 전환했다? 완전한 쾌도는 아냐. 적절한 선에서 혼합한 도법이야.’
사내는 많은 단서를 주었다.
물어도 말을 하지 않을 놈 같은데, 죽일 목적이면 빨리 하자. 너 같은 놈하고 오래 있고 싶지 않아.
계집이 입까지 거칠군.
사내는 만월도를 축 늘어뜨리고 일정한 보폭으로 걸어왔다. 그런데 왜일까? 그가 거침없이 성큼성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타앗!
여인은 한달음에 달려 나오며 대도를 휘둘렀다.
휘이잉…!
대도를 흐르는 것이 아니라 굵은 나무 기둥이 공기를 가르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여인의 몸으로 도를 사용하여 탈혼삼도라는 별호를 얻었을 만큼 높은 경지를 이뤘다. 싸움에서 삼초 이상 도법을 시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얻어진 별호다.
휘이잉…!
제일 초는 실날 같은 차이로 어깨 부근을 스쳐 갔다. 사내가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목이 잘렸을 순간이었다. 여인의 도법은 강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고 빠르기도 했다. 무게가 상당한 대도를 휘두르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신력이 있거나 내공이 상당히 높은 여자다.
휘이이잉…!
옆으로 흘러가던 대도가 땅으로 뚝 떨어지더니 밑에서 위로 올려쳐왔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상반신을 노리는 도법으로 전신의 모든 기력이 대도로 몰려 있는 만큼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여인이 피할 틈을 줄지 모르지만.
이런 도법을 대하면 무인들은 뒤로 한 걸음 정도 물러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대도가 위로 흘러간 틈을 타 바싹 다가서게 된다. 여인은 양손으로 대도를 휘두르고 있고 대도가 빗나간다면 왼쪽 반신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사내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여인은 상식과 달랐다. 위로 흘러가던 대도를 멈춰 세우더니 도신을 빙그르르 회전시키면서 곧장 찔러왔다.
사내의 몸도 회전했다. 왼발을 축으로 반 바퀴 정도 빙글 돌았다. 손에 들려 있는 만월도도 신형을 따라 회전했다. 만월도를 휘돌린 것이 아니라 신형이 도니 마지못해 도는 듯 힘이 실려 있지 않은 듯했다.
타앙!
처음으로 만월도와 대도가 부딪쳤다. 만월도는 나비처럼 너울거렸고 대도는 장사가 나무를 뽑아 휘두르는 것처럼 무지막지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외였다.
힘이 없어 보이는, 도병을 손끝으로 살짝 잡은 듯 금방이라도 놓쳐 버릴 것 같던 만월도가 대도의 도신을 밀어 올렸다. 그 순간 만월도는 또 한 번의 변화를 보였다.
싸아악…!
여인의 눈을 부릅떴다. 대도가 위로 치켜진다 싶은 순간 손아귀에 더욱 강한 진기를 밀어 넣었건만… 사내는 찍어 내리는 대도를 무시하고 가슴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대도가 반으로 쪼개기 전에 옆으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무섭도록 빠른 신법이다.
‘패도가 아니었어. 쾌도였어. 이 자는 처음부터 쾌도였다. 도를 사용하되 힘이 아닌 속도를 중시하는…’
쩍 갈라진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여인은 대도가 무거운 듯 툭 떨구며 사내를 쳐다봤다. 그는 승부가 끝났다는 듯 만월도를 집어넣었다. 뒤로 돌아봤다. 볼 것도 없다는 듯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서운 자…
여인은 마지막 진기를 두 다리로 밀어 넣었다. 죽더라도 땅에 쓰러져 죽기는 싫었다. 두 다리로 대지를 굳게 밟고 선 채 당당하게 죽고 싶었다. 사내들에게 뒤지지 않고 당당히 살아왔듯이.
사박! 사박…!
야심한 밤에 낙엽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팔극쾌검 마종구는 모닥불 앞에 앉아 어둠 저편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종구의 눈가에 이채가 스쳐 갔다.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닌 것은 알았지만 여인이라니.
그것도…
폐월수화, 침어낙안, 미목수려, 일고경성… 온갖 미사여구는 들어봤지만 이 여자에게 어울릴 만한 말은 찾아볼 수 없군. 요물이야.
여인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눈길 한 번에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아 성을 기울인다는 일고경성의 미인도 여인에게는 부족할 듯싶었다.
마종구는 마음이 진탕 되었다.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직감했으면서도 좀처럼 여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여인이 사뿐히 다가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산속에 비파를 뜯고 시나 읊을 여인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언가 심상치 않다.
‘선자불래요 내자불선이라.’
좋은 목적으로 찾아온 여인은 아니다. 길을 잃어 불빛을 찾아온 여인도 아니다. 누구냐는 물음을 던져야 옳다. 하지만 던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말을 했다.
아름답군.
여인이 싱긋 웃었다. 명모호치. 시원한 눈매에 새하얀 이빨, 붉은 입술, 어린아이 살결처럼 보드라운 살결…
꿩을 구워놨는데 좀 들겠소?
고마워요. 그렇잖아도 구수한 냄새에 시장기를 느끼던 참이에요.
마종구는 살점이 많은 다리 부분을 찢어 건네주었다. 모닥불빛에 길고 가느다란 여인의 섬섬옥수가 밝게 빛났다.
좋은 분 같군요.
드시오.
마종구는 여인의 입술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살점을 살짝 베어 물고 작게 오물거리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술은 없나요?
독한 화주뿐이오.
이 고기에는 화주도 어울릴 것 같군요.
드시오.
여인은 독한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기에 여인의 볼이 발갛게 물드는 듯했다. 모닥불에 반사된 얼굴색이라 그렇겠지만 너무 보기 좋았다.
여인은 꿩고기를 안주삼아 독한 화주 한 독을 모두 비웠다. 술을 잘 하는 여인이 분명하다. 술을 잘 알고 있는 여인이다. 하지만 마종구는 과음을 하면 안 되는데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여인은 잠시 불기를 쬐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그래요. 오늘 만남은 이뤄지지 못할 거예요.
짐작했다.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알지 못할 불안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전 당신을 죽이러 왔어요.
마종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역시 짐작했던 일이다.
우리 사형제에게 원한이 있소?
아뇨.
그럼 왜…?
누가 죽여달라고 부탁했나 봐요.
음…! 소저는… 살수요?
그런 것 같아요.
마종구는 침묵했다. 여인은 살수라는 걸 알았으면서도 여인이 측은했다. 어떻게든 살수 소굴에서 빼내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런 것 같다’고 말할 때 여인은 괴로운 듯했다. 본의 아니게 살수 집단에 몸을 의탁하지나 않았을까?
살천문이오, 살문이오?
휴우! 아실 필요 없어요.
여인은 한숨 쉬며 말했다. 서시봉심이라는 말이 있다. 서시는 일대의 미인이지만 가슴에 통증이 있어 늘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 마을 처녀들이 이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면 서시처럼 아름답게 보일까 싶어서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는…
사람들이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의 한숨 쉬는 모습을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한숨을 쉬기 시작할 게다.
소저, 어느 문파인지 말해 주시면 미력하지만…
아뇨.
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나예요. 가장 빨리, 가장 고통스럽지 않게 죽일 수 있게 되기를… 제가 그럴 수 있을까요?
그제야 마종구는 깨달았다. 여인은 살수다. 무슨 말에도 변하지 않을 살수다. 그녀를 회유하여 밝은 세상으로 끌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살수로 살 것이고, 살수들의 운명이 그렇듯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마종구는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내 손으로 깨끗하게… 휴우! 그래, 그게 여인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온정이겠지.
스르릉…!
마종구는 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날이 불빛에 반사되어 요요롭게 빛났다.
소저, 무정한 손속을 원망 마시오.
그래요.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종구는 진기를 끌어올렸다.
여인은 살수다. 목숨을 체념한 듯하지만 자신 없으면 오지도 않았으리라. 긴장해야 한다.
‘필살 비기가 숨겨져 있을 거야.’
그는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발끝을 움직여 조금씩 다가섰다. 그가 일족즉검의 거리에 들어서 막 검공을 전개하려는 순간,
제가 죽으면 묻어주실 건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진기가 흐트러졌다.
물론 … 컥!
대답하는 게 아니었다. 일족즉검에 들어선 후에는 항상 진기를 모으고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말을 하더라도 즉시 검을 칠 수 있도록 대비를 했어야 했다.
마종구는 심장에 바싹 붙어 있는 섬섬옥수를 보았다.
당신은… 고수였군.
그런가 봐요.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나눴어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는걸요.
하기는… 방심은 죽을 죄지.
그래요.
마종구는 전신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는 심장에서 멀어지는 여인의 손을 보았다. 너무 작아 여인의 노리개나 장신구로 쓰일 작은 소도가 보였다. 녹색으로 물든 칼날이 섬뜩한 귀기를 뿜어냈다.
‘독이군. 독이 묻어있어.’
그는 사제, 사매 역시 벌써 당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자신이 살수 문파의 표적이 되다니… 도대체 누가 살인 청부를 했단 말인가. 아무리 적이 없을 수 없는 무림이라지만…
쿵!
마종구는 평생 절치부심하며 수련했던 무공을 단 한 초식도 펼쳐 보지 못했다. 목숨을 잃는 순간에는.
하남 무림의 인의대협으로 삼정을 뽑는다. 삼정 중 한 명인 구지신검은 죽은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를 죽인 살혼부는 멸문했지만 구지신검의 가문 또한 몰락하고 말았다.
구지신검에게는 애석하게도 그의 무공을 이어줄 기재가 없었다. 자식들도 있고 제자로 거둔 젊은이도 있지만 그 누구도 구지신검처럼 협명을 드날리지는 못했다.
둘째는 적수공권으로 삼정 중 하나가 된 철권 구양춘이다. 철권 구양춘의 무공은 권법이다. 그의 권법은 단 일격에 사람을 이 장이나 날릴 만큼 위력이 크다.
셋째는 검, 도, 창에 능통하여 삼절기인으로 불리는 정운후. 그를 알아보기는 쉽다. 오른 쪽 허리에는 검을, 왼 쪽 허리에는 도를, 등 뒤에는 창을 매고 있는 사람은 드넓다는 무림에서도 삼절기인밖에 없다.
삼절기인, 그가 분노했다.
어떤 수법에 당한 것 같으냐!
새하얗게 질린 안색에 비하면 지극히 차가운 음성이었다. 분노를 안으로 삭여 응어리로 만드는 현상이지 않은가.
십여 명에 이르는 제자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말문을 열지 않았다.
팔극쾌검은 날 죽여줍쇼 하고 허점을 드러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죽을 리 없어. 잘 봐라!
삼절기인은 팔극쾌검의 웃옷을 벗겨냈다.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깨끗이 닦여 있었다. 팔극쾌검의 심장에 새겨진 가는 자상이 시커멓게 변색된 채 드러났다. 마치 장난을 하다가 상처를 입은 듯 아주 작은 상처였다.
“아주 작은 소도로 정확히 심장을 찔렀다. 아주 정확히. 너희 대사형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보느냐!”
…
제자는 석상처럼 굳어져 분루를 삼켰다.
“암살이다. 정정당당히 싸웠다면 이렇게 죽을 리 없지. 흥! 그래도 검은 뽑긴 뽑았으니 가르친 보람은 있군.”
삼절기인은 비꼬듯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서는 진한 정이 아픔으로 변해 우러나왔다.
삼절기인은 두 번째 시신으로 다가섰다.
탈혼삼도는 깨끗이 당했다. 다만 적이 너무 강했으니… 애석한 죽음은 아니다. 무슨 수법으로 보이느냐!
수법은 모르겠지만 병기는 만월도입니다. 들어가는 깊이와 중간 깊이, 나오는 깊이가 일정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 한 명이 대답했다.
“잘 봤다. 가늘게 들어가서 깊이 패고 다시 가늘게 나왔다. 만월도야.”
삼절기인은 마지막 시신 앞에 섰다. 마지막 시신은 보기에도 처참했다. 얼굴 뼈는 모조리 함몰되어 형체를 분간할 수 없었고, 당연히 청수하던 이목구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군다나 그의 얼굴은 살이 저미고 안으로 살펴보았는지 옆면을 따라 긴 자상이 있었다.
이전 무슨 수법이냐!
…
이번에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상처를 보아서는 철추에 당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살갗이 너무 온전했다. 곤에 당했다고 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넓고, 각법을 생각하기에는 위력이 너무 강하다. 철추만 한 두께의 곤에 닿았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건 각법에 당한 것이다.”
…?
“무림에 이만한 위력을 지닌 각법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이 소림사의 항마연환신퇴, 곤륜파의 회련각이지. 무당파의 삼양장이나 아미파의 복호금강권도 이만한 위력을 지니나 수공을 제외한 것은 각법만의 특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삼절기인의 음성은 점점 낮아졌다. 이를 악물고 혀만 살짝 굴려 말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발뒤꿈치는 동그랗지. 동그란 것에 가격당하고 넓은 것에 이차 가격을 당했어. 이마 뼈가 산산조각 났지만 자세히 보면 부서진 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이 간 상태에서 부서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 각법 특유의 흔적이지.”
…
“더군다나 너희 삼 사형은 …”
삼절기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를 삭였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가 다시 말했다.
“너희 삼 사형은 이상한 각법에 당했다. 부서진 얼굴 뼈가 한쪽으로 몰렸어. 회련각!”
제자 중 한 명이 부지불식간 소리쳤다. 삼절기인이 그를 노려보았다.
“넌 지금 당장 곤륜으로 떠나라. 회련각을 익혔고 중원에 나온 자가 누군지 알아와.”
알겠습니다.
제자는 깊이 읍을 취해 보인 후 바로 신형을 날렸다. 말할 수도 없을 만큼 먼 거리이지만 준비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들끓었다.
삼절기인은 깊이 침묵하고 있는 늙은 거지를 돌아봤다.
복수는 내가 하겠소. 말은 들어 알고 있을 테니 살수 중에 만월도를 쓰는 자, 회련각을 쓰는 자, 그리고 은장도를 병기로 사용하는 자가 누군지 알아봐 주시겠소?
어떤 놈인지 꼭 알아봐 드리리다.
늙은 거지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그는 삼절기인과는 막역한 사이로 무림에서는 흑봉광괴라고 불렸다.
종리추는 수북이 쌓인 서신을 꼼꼼히 점검했다. 살천문주를 구하고 하오문주를 복위시키고… 모두가 구파일방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벽리군은 십사전각 각주들이 모두 돌아온 후에도 외장문도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불철주야 눈과 귀를 열어놓고 무림 동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둬들인 정보는 하나도 거르지 않고 모두 보고되었다.
아직은 무사해. 심증은 잡은 듯한데 꼬투리를 잡으려는 움직임은 없어.
벽리군은 다행이다 싶었다. 구파일방 장문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움직이고도 무사한 문파는 없었다. 꼭 짚어서 어느 문파라고 할 수 없지만 이유 없이 봉문하거나 멸문한 문파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 문파에서 공통점을 찾으라면 어렵지 않다. 구파일방이 행했을 것 같은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
종리추는 침묵을 지켰다.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종리추인데 오늘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다.
무슨 일이…?
벽리군은 접수된 보고를 처음부터 다시 되새겨 보았다. 없었다. 종리추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냐. 큰일이 벌어지고 있어. 문주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는… 천화기루에서 혈주를 들 때도, 살천문주를 구하러 갈 때도 긴장은 했지만 이런 표정은 아니었어.
이제는 표정을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지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고갯짓 한 번에도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한다. 날마다 문주의 생각을 하지 않는 날이 없기에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사소한 변화까지도 알아낸다.
탁자에 수북이 쌓인 보고 중에 문주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 있다. 유구, 역석, 유회도 표정을 굳혔다. 그들 역시 종리추와 살아온 나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에 종리추의 인상을 찡그리게 만든 것이 얼마나 중대차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어려운 청부 같은 종류는 아닐 게다. 종리추는 아무리 어려운 청부가 들어와도 해결책을 찾을 사람이지 인상을 찡그릴 사람이 아니다.
종리추는 등을 의자 깊숙이 묻었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아버렸다.
벽리군은 눈짓을 유구 등에게 던졌다.
나가요, 문주님을 조용히 생각하게.
유구 등은 벽리군의 눈짓을 알아듣고 마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벽 총관, 구파일방이 움직이기라도 한 거요?
유회는 종리추의 집무실을 벗어나자마자 궁금증을 캐물었다.
아뇨, 없어요. 평범한 것들뿐이었어요.
정말 구파일방이 움직이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소?
예, 없었어요.
이것 참… 도깨비한테 홀린 것도 아니고. 문주님 표정을 보면 큰일도 아주 큰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동감이에요.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미안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씀드릴 만한 게 없네요.
기다려 봅시다. 말씀하실 때가 되면 말씀하시겠지.
유구는 돌아가지도 않고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역석과 유회도 따라서 앉았다. 벽리군도 따라 앉았다. 집무실이 바로 코앞이지만 돌아가서 기다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종리추가 벽리군을 찾은 것은 밤이 늦어 별이 밝게 빛날 때였다. 그때까지 종리추는 깊은 생각에 몰두했고, 유구 등은 몇 번이고 살며시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벽리군을 앉혀 놓고도 종리추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답답한 침묵이 거의 반 각 정도 이어진 후 종리추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 보고 중에 삼절기인의 세 제자가 죽었다는 내용이 있어.
아! 있어요.
무심히 지나친 보고다. 눈과 귀를 막으면 일 년 내내 평화롭게만 보이는 곳이 무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루에도 최소한 서너 명씩은 죽어가는 곳이 무림이다. 삼절기인의 세 제자들 역시 일상화된 죽음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종리추가 말했다.
앞으로는 모든 살행을 중지해.
네?
정보를 꾸준히 받아들이되 활동은 중지해. 청부도 받지 말고.
청부를 받지 않으면 정보도 받지 못해요. 외장 문도들이 사용하는 돈은 하루에 천 냥은…
됐어.
…
“옛날, 천화기루에 수전노 천 노인이 온 적이 있었어.”
알고 있어요.
“천 노인이 구만 냥을 준다고 했지. 그 돈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받아와. 그것으로 버티면 돼.”
알겠어요. 그런데 뭣 때문에 그런지나 알면 안 돼요?
“알아도 상관없지. 그들은 그냥 죽은 게 아냐. 내 짐작이 맞다면 살수들에게 죽은 거야.”
넷? 누가 그들을…
“옛날에 살혼부는 구지신검을 죽인 대가로 십망을 받았어. 삼절기인의 영향력 역시 구지신검 못지않아. 삼절기인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할 것이고, 구파일방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무림의 촉각이 최고조로 곤두섰다고 봐야 해.”
그렇군요.
벽리군은 이해되지 않았다. 살수 문파를 창건하면서 개파까지 했던 종리추다. 십사각 각주들은 아무리 촉각을 곤두세워도 감쪽같이 살행을 할 사람이다. 청부를 조심스럽게 받으면 될 것 같은데…
“옆집이 불났을 때는 미리 가재도구를 빼놓는 것이 좋지. 언제 불똥이 날아들지 모르니. 그래, 천 노인이 구만 냥을 건네준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어주는 대가로 소용되는 금액은 막대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모아도 못 모을 돈이 하루에 소용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청부액이 고액이기는 하지만 살문과 같은 체계로는 결코 고액이 아니다.
이문을 남기고 황제 부럽지 않게 살려면 옛날 살혼부나 현재 살천문처럼 청부 대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하오문이나 개방은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수집하지만 문파라는 이름으로 결속되어 있다. 그들은 귀중한 정보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지만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 반면에 살문은 목숨까지 걸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은자를 지불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나쁜 체계다. 하지만 어떻게 하랴. 이것이 살문이 살아가는 최선인데.
벽리군은 오랜만에 양성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날, 죽음 직전까지 들어선 날 이후로 꿈에서도 들여놓기 싫었던 양성 땅이다.
아는 사람도 많다. 양성 사람들 중에는 그녀와 긴긴밤 만리장성을 쌓았던 사내만도 백여 명이 넘는다. 관계를 맺지 않은 사내는 더 많이 안다. 기문 향주로 있으면서 많은 사내를 술과 향락으로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밤이 될 때까지 양성에 들어서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들어가기 싫으면 내가 들어가죠.
호법 겸 따라나온 역석이 말했다. 벽리군도 무공을 지녔지만 살수들의 표적이 된 적이 있기 때문에 혼자 몸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은 살천문과의 사이도 불편한 터인데.
아뇨. 제가 이따 밤에 들어가면 돼요.
벽리군은 “그래 줄래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안으로 삼켜버렸다.
역석은 말주변이 없는 사내다. 아무리 천 노인이 구만 냥을 내주겠다고 했지만 사람 마음이란 조석지변에 바뀔 수 있는 것. 못 주겠다고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럴 때를 대비하여 직접 들어가야 한다.
벽리군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천 노인은 두말 않고 어음을 내주었다. 천 노인 명의로 된 천 냥짜리 어음 아흔 장이다.
“한 번에 돌리면 곤란하네. 그 속에는 전답이 있고 임야도 있어 처분할 기간이 필요해. 만 냥 단위로 한 달 간격은 줘야 하네.”
알았어요. 고마워요.
고마워할 것도 없네. 오히려 내가 고맙지.
…?
“난 평생 돈만 모으며 살아왔어. 왜냐?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 살수 중에 완전한 자유인이 존재할 수 있는지. 아니 무림인 중에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보고 싶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다. 불로장생을 꿈꿨던 천하제일의 패자 진시황조차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 노인이 말하는 죽음이란 그런 죽음이 아니다. 천명은 피할 수 없다 해도 검을 든 자가 검에 죽지 않는 죽음을 말한다.
천 노인의 바람은 단순한 요망일 뿐이다. 상대를 비교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정파 무림인도 하루살이 인생에 불과하다. 삼절기인의 세 제자처럼 명성을 드높이다가도 어느 날 시신이 되어 뒹군다.
하물며 살수야 말해서 무엇하랴. 살수는 천하인이 적이다. 병기를 든 사람은 모두 적이다.
천 노인이 바라는 것을 보려면 무림인 중에서 골랐어야 가능성이 높다. 소림사 장문인 정도로 선택했다면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에 비하면 살수는 가장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가야 한다. 천하인을 상대로 살검을 휘두르며 최고봉에 올라가야 한다. 거센 풍랑을 막아주는 바람막이도 없고 물러설 곳도 없다.
최악의 선택이다. 사무령… 그래서 사무령은 전설에 불과하다.
“난 믿네. 소고와 종리추. 둘 중에 한 명은 꼭 사무령이 될 거야. 둘 다 무공과 지혜를 겸비했어. 사무령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지. 내가 두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침착함과 결단력, 그리고 행동력이야. 두 사람은 정확한 결단을 빨리 내릴 수 있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행동력이 있어. 이 모든 것을 구비한 사람은… 사람이 모래알처럼 많지만 찾기 힘들지.”
그래요. 잘 보셨네요.
벽리군은 자신이 칭찬받은 것처럼 기뻤다. 종리추를 높게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가.
그녀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런! 세상이 이렇게 흉흉해서 어떻게 살아?
자네가 무인인가? 무인도 아니면서 왜 그래?
아, 꼭 무인만 죽나? 재수 없으면 자다가도 홍두깨를 맞는 거지.
하기는… 꼭 무인만 죽으라는 법은 없지.
사람이 둘만 모였다 하면 죽음 이야기였다.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뒤집히는 정도가 너무 심해 무림인이 아닌 사람까지도 죽음의 공포를 맛봤다.
낭인이나 강호 초출의 풋내기가 죽는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시신이 되어 나뒹구는 사람은 그래도 명성깨나 얻었다는 무인들이었다. 개중에는 구파일방의 무인들도 포함되기 시작했다.
개방 분타주가 죽었고 소림승이 피살당했다.
대살성이 등장한 거야. 엄청난 마두야. 소림사에서는 왜 가만히 있지?
아직 누군지 알아내지 못한 거지 뭐.
개방이 있는데 설마 알아내지 못했을라고.
그랬을 수도 있지 뭐. 개방이라고 자네 마누라 속곳 색깔까지 알아내지는 못하잖아?
이 사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는 거야?
사태가 이쯤 되면 벽리군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이 커지고 있어. 문주의 생각이 옳았어.
벽리군은 양성에서 천 노인으로부터 돈을 받아 들고 오기까지는 십여 일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그동안 무림은 엄청나게 변했다.
우리 문파도 요주의 대상인 모양인데…
역석이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살문 주위에 거지들이 진을 치고 앉아 있다. 알지 못하도록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이건 좋지 않아. 지하 통로가 있기는 하지만 언제 들킬지 몰라. 분운추월도 아는 눈치고. 이러면 정보가 차단돼. 눈과 귀가 막힌 채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꼴이 되는 거야.
종리추는 천 노인으로부터 받아온 구만 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총관이 알아서 써.
그 말이 고작이었다. 중원에서도 알아주는 갑부가 될 수 있는 돈을 일개 여인에게 맡긴 것이다.
눈과 귀가 막혔다는 소리에도,
잘됐군. 당분간 외장문도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해. 우리 손과 발을 묶어놨으니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면 고민깨나 해야 될 거야.
하며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럴 수도 있네. 무림에서 벌어지는 살인이 우리 짓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런데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벽리군은 도무지 어둠의 암살자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벽리군은 또 다른 사건을 발견했다. 적지인살, 배금향, 어린… 외장내원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종리추가 어디로 보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잘됐어. 어차피 부담스러웠는데.
그런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마음 한편으로는 잘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또 하나의 사건… 지하 밀실에서 지도 작업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십사각 각주에게 큰 도움을 준 지도마저 사라졌다. 지도를 올려놓던 서가도 사라졌고, 처음부터 지도 제작 같은 것은 없었던 듯 말끔히 치워졌다.
이건…!
종리추가 정리를 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위험을 느끼고 어디로인가 빼돌렸다.
그만한 위험은 아닌데…
하지만 종리추가 내린 결정이지 않은가. 그가 언제 허튼 명령을 내린 적이 있던가. 알지 못할 위험이 닥치고 있어. 무언지 모르겠지만…
벽리군은 마음이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