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4화
모두 떠나고 텅 빈 살문은 을씨년스러웠다. 마당은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마당을 쓸어낼 사람도 없고 그럴 정신도 없었다.
정문도 활짝 열려져 있다. 살문 문도 식솔들이 개방 문도를 향해 걸어갈 때 열려진 문은 아직까지 닫히지 않은 것이다.
청부를 하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귀가 있는 사람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죽음 소식에 몸을 사렸다. 살천문과 함께 하남 살수계에 이대 산맥으로 거론되는 살문이 무자비한 살인의 원흉으로 지목되고 있으니 가까이 올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남오는 나가는 사람도,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정문에 의자를 놓고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날씨는 청명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며 빗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은 따뜻했다.
“응? 이건!”
꾸벅꾸벅 졸던 남오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개방 거지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다. 겉옷을 벗어 이를 잡던 자, 거적때기를 뒤집어쓰고 단잠에 빠져있던 자… 한 명, 두 명 몸을 빼고 있다.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래도 하오문에서는 눈치께나 있다고 정평이 난 남오다.
남오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왼손에 밧줄이 잡혔다.
딸랑… 딸랑…!
풍경소리와도 같은 작은 울림이 장원 안으로 들어왔다.
시작이야.
벽리군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제일 먼저 종리추가 준 빨간 보자기를 챙겼다. 그 속에 그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무엇인가가 들려있다.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종리추와의 약속을 믿기에 살기로 작심했다.
검을 집어 허리에 찼다.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검을 차본 적은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도 없다. 검을 차자 무공을 익힌 사람답지 않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는 종리추의 집무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남오는 할 일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누가 공격해 올지 모르지만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을 게다. 치밀하게 계획했을 테고 준비도 완벽할 게다. 살문이 살행을 나가기 전에 그랬듯이 적들도 살문 살수들에 대해서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을 것이다.
‘문주님을 복위시켰으니 내가 할 일은 다한 셈이지.’
그는 복위한 하오문주가 문도들에게 내린 명령을 알고 있다.
“살문과는 어떤 접촉도 하지 마라. 부탁이 있어도 하지 말고, 부탁을 해와도 들어주지 마라. 하오문과 살문 사이에는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고 생각해라.”
개방주 천은탁도 발길을 끊었다.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하오문이 많은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문주를 복위시켜 준 공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남오는 자신의 목숨으로 하오문주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다고 생각했다.
됐어. 이제 은혜는 갚은 거야.
십여 년 전, 문주는 뭇매를 맞아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자신을 구해주었다. 도박판에 늘 있는 것이 사기 행각이고, 걸리지 않으면 많은 돈을 따지만 걸리면 목숨이 위태롭다. 재수가 없었다.
나흘 만에 깨어났고 보름 동안 피똥을 쌌다.
남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치는 남달리 빠르니 오늘 벌어질 일을 예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살문은 피로 물들게 되리라. 마당에 수북이 쌓인 낙엽에도, 아직도 생나무 냄새가 나는 기둥에도.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몸이 오싹해졌다.
해가 석양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질 무렵 남오는 정문을 향해 걸어오는 다섯 장한을 보았다. 그들은 체격이 비슷했다. 키도 비슷했고 입은 옷도 똑같았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똑같아 보였다.
남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낮에 한 것처럼 기지개를 폈다.
딸랑… 딸랑…!
조그만 방울 소리가 전각 안에서 새어 나왔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지만 돌아가시오. 살문은 문 닫았소.
남오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순간,
쉬이익!
눈앞에서 검광이 어른거렸다.
남오는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한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하더니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는 땅바닥으로 쓰러졌고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팔이 잘려나가고, 목이 떨어졌고, 허리도 잘렸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그런 상태인 것을.
다섯 장한 중 한 명이 섬뜩한 음성으로 말했다.
시작해라.
다른 네 명은 미리 약조라도 해놓은 듯 일제히 신형을 날렸다.
남은 스물세 명 속에는 유구의 아내가 된 정원지도 포함되었다.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손수 지은 백삼을 꺼내 놓았다.
이걸 입으세요.
이건 왜…?
수의 대신으로 입어요.
수의? 하하하!
유구는 쾌활한 마음으로 백삼을 갈아입었다.
암연족에게 죽음이란 낯선 말이 아니다. 싸우다 죽는 것이야말로 아부타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장소는 다르지만 중원에서 무인들과 싸우다 죽는 것도 전신의 뜻이려니.
정원지 걱정도 하지 않았다. 죽는 자가 무슨 걱정을 한단 말인가. 걱정을 한들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죽는 자는 망각의 늪에 빠진다.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처럼 할 수 있는 일도, 생각할 일도 없다.
남만에서라면 유구가 죽었을 경우 정원지는 유구와 함께 생매장당한다. 중원은 풍습이 다르니 생매장이야 당할까마는 그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으니까. 죽는다면 같이 손잡고 아부타 곁으로 머물면 될 것이고.
솔직히 유구는 죽는다면 같이 죽고 싶었다.
행낭은?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정원지는 행낭을 보여주었다. 행낭 속에 들어 있는 노란 보자기까지 보였다.
이 속에 살 길이 들어있다.
유구는 종리추의 말을 믿었다. 같이 죽기를 원하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다.
가봐.
곧 만나요.
그래.
아부타 곁에서.
유구는 정원지를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입속에 감겨드는 그녀의 혀가 다른 때와 달리 정열적이었다.
이제 그만 가봐.
정원지는 뚫어지게 바라본 후 말했다.
“세상 남자들은 내게 실망만 줬어요. 만약 당신도 실망을 주면 다시는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세상 사내들 모두를.”
정원지를 종리추 집무실로 보낸 후 유구는 방 안 한가운데로 탁자를 옮겼다.
‘어떤 놈들일까?’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살수는 지형을 얻어야 한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지형으로 상대를 끌어들여 싸워야 한다. 낯선 곳이라도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지형으로 탈바꿈시켜 놓아야 한다.
종리추가 말한 지형은 실질적인 지형이 아니다. 실질적인 지형을 얻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좋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마음속의 지형이라도 얻으라는 말이다.
유구가 가장 자신 있는 지형은 남만의 밀림이다. 그중에서도 수환봉 밑에 있는 천폭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디에 풀뿌리가 있고 어디에 번개 맞아 갈라진 나무가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종리추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갈고 다듬은 지형이다.
그곳은 실질적인 지형이다. 유구는 남만의 밀림을, 거세게 쏟아지는 천폭을 살문 제일 전각으로 옮겨올 작정이었다.
우르릉…!
물줄기가 노도처럼 흩어져 내린다. 천폭을 등에 지고 있으면 안심이다. 천폭의 거센 물줄기를 뚫고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일은 종리추라도 감히 시도하지 못한다.
침상이 붙어 있는 벽을 천폭으로 설정했다. 기둥은 아름드리 나무다. 방문은 천폭으로 들어서는 길이며, 창문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난 허공이다. 천장은 하늘이다. 높이를 알 수 없는 키 큰 나무에 오르면 천폭 앞의 작은 공지가 한눈에 들어올 게다. 천장에 기어든 자가 있다면 그렇겠지. 한눈에 방 안 풍경을 세세하게 훑어볼 수 있겠지.
유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매달렸다.
어미 새가 벌레를 잡아 둥지로 돌아오듯 날쌘 인영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천장에 내려앉았다. 그는 내려앉자마자 득달같이 쏘아졌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하늘로 돌아가리라.
유구는 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단지 탁자 밑에 놓인 조그마한 나뭇조각을 발끝으로 톡 건드리기만 했다.
덜컹! 촥, 촤아악…!
변화는 유구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는 의자 바로 뒤, 바닥이 툭 꺼진다 싶더니 손바닥 길이의 화살이 새털처럼 솟아올랐다.
엇! 크윽!
상대는 상당히 놀란 듯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당황했고 쏘아져 오던 기세보다 더욱 빠르게 떨어졌다.
쿵!
건물을 지을 때부터, 바닥을 청석으로 만들어진 때부터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각주들은 좋은 곳에서 푹 쉬도록 온갖 사치를 다한 것이 아니다. 전각은 철옹성 요새다.
제이 공격은 창문을 통해 쏟아졌다.
쾅! 콰앙…!
창문이 거칠게 부서져 나가며 검을 든 인영들이 재빠른 신법으로 쏟아져 들이쳤다.
기이잉! 촥! 촤아악…!
이번에 화살을 날린 곳은 기둥이다. 통나무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기둥 중간 부분에서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침입자는 맥없이 뒹굴었다. 웬만한 무공으로는 막을 수 없는 만큼 화살이 빽빽하게 날아갔으니 최소한의 부상을 입는 것은 당연했다. 무공이 약한 자들은 즉사하는 것이 당연하고.
됐다. 머물 시간이 없어.
유구는 잠시 정적이 흐른 순간을 이용하여 청석 바닥으로 몸을 굴렀다.
턱. 덜컹! 덜컹!
유구의 몸은 침상에 부딪쳤다. 순간 침상 옆면에 구멍이 뻥 뚫리더니 유구의 몸뚱이를 삼켜 버렸다. 침상은 곧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유구의 몸을 삼킬 만한 구멍은 없어 보였다.
벽리군과 정원지는 거의 동시에 지하 통로로 들어섰다. 먼저 벽리군이 빨간 보자기를 열었다. 보자기 속에서는 농가의 아낙이 입는 허름한 옷과 정교하게 다듬어진 인피면구, 그리고 서찰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감격이 확 밀려들었다. 그동안 밤잠을 못 이루고 옷에 흙을 묻히고 다닌 것이 이런 인피면구를 만들기 위해서인가. 그는 적어도 십여 일 동안 자신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쏟았다.
서찰을 펼치자 눈에 익은 글씨가 보였다. 내용은 인피면구를 착용하는 방법이 절반을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미로처럼 얽힌 지하 통로를 빠져나가는 방법이었다.
정원지가 펼친 노란 보자기에서도 같은 내용의 물건이 나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정원지가 입을 옷은 대갓집 부인들이나 입는 금의로 매우 호화스럽다는 것이다.
미로를 빠져나가는 방법도 달랐다. 벽리군은 북쪽을 향해 선이 그어져 있는데, 정원지는 동쪽으로 그려졌다. 서신 제일 뒷부분에는 미로를 빠져나간 후 사용할 이름이며 나이, 고향 등 인적 사항이 상세히 기재되었다. 그리고 화령이라는 이해 못 할 글귀로 마무리했다.
“화령…?”
벽리군은 정원지의 서신을 읽었다. 같은 내용이다.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내용은 같다.
금잔이 뭘 말하는 거죠?
정원지가 물었다. 그녀의 서신은 금잔이란 글귀로 마무리되었다.
몰라요. 이 서신대로만 빠져나가요. 나가는 동안 서신에 적힌 대로 인적 사항은 달달 외우고요. 자, 봐요. 제가 인피면구를 씌워줄게요.
그녀라고 인피면구를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 역시 인피면구라는 것이 있다는 정도만 들었지 실제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혼자 하는 것보다 둘이 서로를 도와주면 한결 완벽해지지 않겠는가.
벽리군과 정원지는 서로를 고쳐주었다.
얼핏 봐서는 모르겠는데? 문주님도 참… 이런 게 있으면 밝은 곳에서 쓰라고 할 것이지.
횃불에 의지하여 인피면구를 쓴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한 곳이라도 잘못되면 당장 발각된다.
다행히 종리추가 건네준 인피면구는 딱딱했다. 듣기로는 매미 날개처럼 얇고 부드럽다는데 이건 나무 판자처럼 너무 딱딱했다. 가죽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으면 가면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서신에 적힌 대로 송진을 안쪽에 바르자 야들야들해졌다. 너무 딱딱해서 뒤집어쓸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정확히 일 다경이 지나자 부담 없이 쓸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벽리군과 정원지는 인피를 쓰고 다시 반 각을 기다렸다. 서신에는 인피가 얼굴에 달라붙는 데는 반각이 걸린다고 했으며, 그동안은 얼굴을 심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적혀있었다. 될 수 있으면 말도 하지 말고 웃는 것처럼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정원지와 벽리군은 어둠을 쳐다보며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겼다. 한 여인은 종리추를, 한 여인은 유구를 생각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공통적인 생각도 했다.
반 각이 지나자 벽리군은 인피를 만져 보았다. 억지로 뜯어내도 벗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달라붙었다. 이러다가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들었다.
이제 가요. 행운을 빌어요.
예. 저도 행운을 빌어드릴게요.
정원지는 무림과는 인연이 없던 여자였다. 무림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 무림인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던 여인이 무공은 모르지만 사고는 무림인을 닮았다.
두 여인은 각기 북과 동으로 갔다. 지하 통로는 길고 깊었다. 갈래길이 나올 때마다 서신에 적힌 대로 걸었지만 문득문득 지하 통로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치밀었다. 어떻게 이런 공사를 했을까 싶었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시원한 공기가 섞여서 맡아졌다. 횃불에 비친 출구는 장작 더미로 막혀있었다.
벽리군은 우뚝 멈춰 섰다. 장작 더미만 밀쳐내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자부터 죽여야 할 것이다.
사내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가 일어서자 암굴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시죠.
종리추는 치밀했다. 그런 점이 느껴질 때마다 벽리군의 가슴은 아렸다.
사내는 장작을 밀쳐 내고 동굴을 나서자마자 장작 더미를 다시 쌓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곳이 아니라 수레에. 동굴 밖에는 소 한 마리와 농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수레가 대기해 있었다.
여기서 얼마나 기다리셨나요?
열흘쯤 됩니다.
열흘요?
네.
열흘이라면 종리추의 안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다. 십사각 각주와 자신을 불러놓고 하인과 시녀를 모두 내보내라고 명령했을 때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나요?
장에요.
장요?
장에 가야 장작을 팔죠. 부지런히 서두르면 나무 시장에 늦지 않을 겁니다.
종리추는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다. 그가 준비를 시작했을 때 도주를 생각했다면 누구도 쉽게 잡지 못했을 게다.
‘몸에 흙을 묻히지 말고 도주할 길을 찾았다면…’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모두 그 여자 때문이야. 소고. 소고가 저지른 일로 덤터기를 쓰고, 그 여자 때문에 도망을 가지 않은 거야.”
종리추가 도주하면 무림인은 쫓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우연찮게 소고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다. 종리추는 거기까지 계산했다.
‘그럼 결국 앉은 자리에서 맞서 싸우겠다는 건데… 그럼 죽을 때까지? 아냐. 산다고 했어. 산다고…’
소고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자신이 질투를 느낄 만큼 빼어난 미인이다. 종리추는 젊은 사내다. 혈기를 주체하지 못할 만큼 치솟는 건장한 젊음이 있다.
종리추가 소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때문일까? 벽리군은 깊은 사정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종리추가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깊고도 넓다. 그의 마음속을 뚫고 들어갈 여지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도 젊은 사내이지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감정은 없으리라.
정원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종리추가 펼쳐 놓은 안배이니 무사히 빠져나왔을 게다.
사내는 수레를 몰았다. 거지 두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못 보던 얼굴인데… 뉘시오?
빌어먹을 거지놈들! 썩 꺼지지 못해!
사내는 우람한 목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허! 이 작자…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을 깰 위인일세.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리기 전에 썩 꺼져! 사지육신 멀쩡한 놈들이 비럭질은…
아, 누가 거지가 되고 싶어서 거지가 됐나? 산에서 내려왔소?
시끄러! 저리 꺼져!
사내가 무지막지하게 몰아치는 바람에 거지들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벽리군은 똑똑히 보았다. 그들 허리에 일결 매듭이 묶여 있는 것을.
세상에 개방을 모르는 사람은 그야말로 순진하게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 없고 목구멍에 거미줄 칠까 봐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거지들이 물러나자 사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요.
저 사람들, 그냥 가지 않을 거예요. 이 근처 산이란 산은 모두 뒤질 거예요.
하하! 뒤지라고 하죠 뭐. 저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우슬산 화전민 중에 전 씨 부부가 살고 있다는 것뿐인걸요.
전 씨 부부?
몰랐어요? 총관께서 쓰고 계신 인피가 전 씨 아낙 것인데.
아! 종리추는 살인을 했다. 완벽한 탈출을 위해 애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그것은 종리추의 성격에 맞지 않은 행동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람이 아닌데.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전 씨 부부는 겉으로는 장작을 팔아 멀쩡히 길 가다 횡액을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누구세요?
예?
문주님을 잘 아시는 듯한데…
흐흐! 몰라보실 줄 알았습니다요. 제가 덕삼입니다요.
더, 덕삼?
벽리군은 사내의 얼굴을 다시 뜯어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제칠각에서 음양철극의 수발을 들던 하인 덕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인피면구를 쓰고 있군 그래. 우슬산 전 씨가 이 얼굴일 거야. 풋! 정말 주도면밀한 사람이네. 하인들을 모두 풀어준 게 아냐. 그중 일부를 회유해 놨어.’
벽리군은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약속한 대로 살 게다. 그렇다,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쾅 꽈르르릉…! 우르릉…!
거대한 굉음에 지축이 흔들렸다. 천년고목이 부르르 떨리고 만년거암이 뒤흔들렸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방이 온통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짙은 먼지에 휘감겼다.
살문 내원 십사 전각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돌 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모습도 진풍경이었다.
하나 살문 주위에 있는 무인들에게는 결코 멋있는 광경이 될 수 없었다.
저, 저런!
분운추월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낮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기운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언제 술을 마셨나 싶게 멀쩡했다.
저, 저것… 누,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했어?
입에서 터져 나온 노성은 광야를 질타하고도 남았지만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묻혀 바로 곁에 있는 구곡신개만이 들을 수 있었다.
그, 글쎄…
구곡신개도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 못했다. 한 가지, 살문을 폭파시키려는 계획 같은 게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알아보겠습니다.
구곡신개는 살문에서 일 리 안으로 들어서지 말라는 방주의 명령도 망각한 채 문도를 몰아쳤다.
빨리 가서 알아보고 와!
비운적검은 분운추월보다 훨씬 놀랐다. 그가 놀란 정도는 경악을 넘어 몸이 떨릴 정도라고 표현해야 옳았다.
며, 몇 명이나 들어간 거야!
배, 백 명이 훨씬 넘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살문은 눈엣가시였다. 그동안은 살천문주라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고심하느라 등한시했지만 턱밑을 바짝 치고 올라오는 살문이 껄끄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지금이 살문을 초토화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누, 누가 들어갔지?
그의 물음은 이미 물음이 아니었다. 절규였다.
초특급 살수님… 일급 살수님…
모두 죽지는 않았겠지?
…
비운적검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살문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살수라고 해봐야 겨우 열댓 명에 불과한데 신경 쓸 것이 무엇이랴.
초특급 살수 열 명만 보내면 그 정도는 간단히 무너뜨릴 수 있다.
비운적검은 한 발 더 멀리 내다봤다.
‘이 기회에 살천문의 위엄을 보여야 해.’
그는 가장 빠른 시간에 너무 잔인해서 고개를 돌릴 정도로 처참히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그동안 살문을 기웃거렸던 사람들에게 살천문이 건재하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참이었다.
제삼의 마두가 탄생했거나 거대한 사파가 등장했다. 원흉이 누구든 비운적검은 그들에게도 살천문의 위용을 보일 생각이었다. 단단히.
그런 생각이 살천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줄이야. 살문에 들어간 자들 중 절반이 죽었어도 굉장한 타격이다. 살문 정도는 한두 명 정도의 희생으로 끝나야 하거늘, 많게 봐줘서 십여 명 선에서 끝나야 하거늘…
가.
…
가서 알아봐!
또 한 사람, 비영파파도 벌떡 일어서 먼지로 자욱한 살문을 노려보았다.
지, 지독한 놈들!
비영파파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살문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맑은 개울까지 흘러들었다. 자욱한 흙먼지에 숨쉬기가 답답했다.
유, 육천군이!
비영파파에게 차를 끓여주던 소녀가 놀라서 소리쳤다. 고목 아래 앉아 대외산 맑은 개울물로 차를 끓여 마시는 풍류. 비영파파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동파 장문인의 사매로 무림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고수다.
어, 어떻게 해요. 사형들이 모두 저기 있어요!
소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계집아!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저, 저도…
시끄럽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비영파파는 진기를 최대한 끌어내어 신형을 날렸다.
쉬이익…!
그녀의 신형은 물 찬 제비처럼 우아하게, 그러면서도 번개처럼 빠르게 나아갔다.
안 돼! 사형들은 모두 저기 있어. 나쁜 놈들!
소녀는 꼼짝 말고 있으라는 말이 귀에 쟁쟁했지만 가만히 앉아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가봐야 해!’
소녀는 진기를 한껏 끌어올려 신형에 실었다.
우두머리 된 자가 가장 괴로울 때는 수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일 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같이 떠들며 같은 음식을 먹었던 수하들을 죽음이 빤히 보이는 곳에 밀어 넣는 일만큼 괴로운 일은 없을 게다.
열아홉 명. 종리추는 이들 중 절반은 죽여야 한다.
주공!
유구가 다그쳤다.
시간이 없다. 십사 전각은 무너졌고, 악에 받힌 무리들은 살문 전각 중 유일하게 멀쩡한 문주의 집무실로 몰려들고 있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
유구, 역석, 유회는 남만에서부터 진심으로 충성을 바쳐온 심복이다. 쌍구광살은 처와 자식들이 있다. 종리추만 아는 비밀이다. 그는 자식이 무려 아홉 명이나 된다. 혈사편복은 동생이 있다. 배냇병신으로 혈사편복이 아니면 돌봐줄 사람이 없다. 그것 또한 종리추만이 아는 비밀이다.
모든 사람에게 죽어서는 안 될 사연이 있다. 무인이 무슨 사연이냐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데까지는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유구, 역석, 유회.
넷!
준비해.
넷!
쌍구광살, 후사도, 음양철극, 좌리살검, 준비해. 외장에서는 진무동이 남고.
넷!
거명한 사람들이 몸을 날리려 했다. 그때,
안 됩니다!
종리추의 명령에 제동을 건 사람은 쌍구광살이었다.
대사형, 이사형, 삼사형은 문주님의 피붙이 같은 사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수를 해도 됩니다.
유구 형님 대신 제가 하겠습니다.
쌍구광살의 의견에 동조한 사람은 광부였다.
흐흐흐! 역석 형님은 가시오. 내가 남죠.
혼세천왕이다. 이들은 모두 죽음이 뻔한 길을 자청하고 있다.
명령을 내렸다. 거명되지 않은 사람은 빨리 피하도록.
안 된다고 했습니다.
쌍구광살은 여간해서 물러서지 않았다. 문주의 명령에 이토록 정면으로 반박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하더라도 빨리 결정지어야 한다. 갑론을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산화단창이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음수는 피하고 양수는 남기로.
…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양수 중에는 종리추가 거명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천왕검제, 산화단창, 광부, 살문 사살.
산화단창과 광부는 본인 스스로 남겠다고 했으니 불만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은 불만이 있을 수 있다. 누가 죽기를 바라겠는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들 피해!
유구가 소리쳤지만 그의 명령 또한 허공을 치는 데 불과했다.
천왕검제와 산화단창이 신형을 날려 맡은 자리로 갔다.
흐흐흐! 문주님께 불만이 많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맨 마지막 자리에 놓을 수 있어. 안 그래?
흐흐! 그렇죠. 사실 우리야말로 죽음의 사신들인데.
보여주자고.
문주님, 잘 봐야 합니다. 만약 살아남으면 유구 형님 대신 일각주 자리를 줘야 해요.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유구 형님의 자리를 뺏냐?
그럼 누구 자리를 뺏어?
자리야 많… 끄응!
산적… 그들은 그물을 메고 맡은 자리로 갔다. 종리추가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결정되었다.
산화단창이 음수를 피하라고 한 것은 음수 중에는 유구와 유회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종리추를 주공이라 부를 만큼 충성심이 강한 사람들이고, 그들에게도 대형이 되니 꼭 살게 해주고 싶었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역석까지 피하게 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의견이 너무 분분해진다. 또 그런 식으로는 피하라고 해서 피할 사람들이 아니고.
유구. 빨리 데리고 가라.
걱정 마라. 살아남을 테니.
떠날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서가를 밀쳤다. 전각이 무너지며 지하 통로까지 무너졌는지 매캐한 연기가 숨 막히게 다가왔다.
살천오살. 그들은 살천문의 모든 것이다. 살천문에서 가장 뛰어난 다섯 살수를 꼽으라면 당연히 그들이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다섯 명은 키가 비슷했다. 체격도 비슷했고 사용하는 병기도 모두 검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검도 특별히 주문하여 같은 모양으로 다섯 자루를 만들었다. 검집도, 자루도, 검날도 똑같은 검이다.
살천문 사람들은 그들을 살천오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살천오살의 의복은 먼지로 뒤덮여 회색빛이었다. 검은 머리도 더러운 회색이다.
살천오살은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살천문 살수들에게는 수하가 없다. 필요에 따라 우두머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일이 끝나면 별개의 각각으로 돌아간다.
이번 살문 멸살에는 살천오살이 살천문 살수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 지명되었다.
처참한 패배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들이 죽는 것하고 자신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실력이 없는 자, 운이 다한 자는 죽는 게 당연하지.
자신만 죽지 않으면 그만이다.
살천오살은 남은 자를 추렸다. 채 이십 명도 되지 않는다. 전각에 설치된 기관에 서른 명 가까이 죽었고, 전각이 폭파되는 바람에 쉰 명 가까이 죽었다. 종리추가 노린 살천오살과 십여 명은 털끝하나 다친 곳이 없지만.
살천오살 중에서도 이번 일의 총책임자로 지명된 백수검이 말했다.
혈살오괴, 들어가.
흐흐흐! 애송이 놈이 혓바닥이 반 토막이군. 살천오살, 살문을 정리한 다음에 보자고.
소림 십팔나한진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오방협객술의 주인공은 살천오살을 노려보았다.
‘사천 같았으면 한 줌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그러나 살천오살은 현재 몸을 의탁하고 있는 살천문에서 제일 뛰어났다고 소문난 자들이다. 결코 만만히 볼 자는 아니다.
그런 말은 살아난 다음에나 해.
백수검은 끝까지 혈살오괴의 비위를 건드렸다.
쉬익… 쉭! 착!
혈살오괴는 암기가 날아올 때를 대비하여 은폐물을 설정한 다음에야 신형을 날렸다.
살문 문주의 집무실은 독아를 드러낸 뱀처럼 침묵만 지키고 있다. 일 장만 더 가면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혈살오괴는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다.
좋아.
혈살오괴 중 꼽추 노인이 신형을 제일 먼저 날렸다. 남은 자들도 거의 동시에 바깥을 경계하는 포진이었다.
꼽추 노인이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남은 네 명도 원이 부서지지 않게 재빨리 뒤따랐다.
종리추의 집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듯 싸늘한 냉기가 자욱이 흘렀다.
숨어 있어! 그물에 걸려든 거야!
혈살오괴는 고요함 속에 숨어 있는 살기를 읽었다.
입이 삐뚤어진 언청이 노인이 품에서 검은 전낭을 꺼내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옆의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시선을 자신이 맡은 방위에서 떼지 않았다.
원의 형태는 여러 가지 진 중에서 가장 완벽한 진이다. 방어를 하기에는.
이윽고 검은 전낭은 한 바퀴를 돌았다. 다섯 번째 노인은 안에 든 것을 모두 꺼낸 후 전낭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종리추는 기다렸다. 살수의 자질 중에 가장 많이 요구되는 것이 인내심이라면 종리추는 적격이다.
숨도 쉬지 않았다. 진기를 끌어올리기도 했지만 전신 모공을 막는 데 사용했다. 숨소리는 당연하고 온기도 흘려내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저벅… 저벅…!
혈살오괴는 매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사방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기둥 뒤, 집기들, 천장… 매처럼 날카로운 그들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조금만 더…
종리추는 더 기다렸다. 염려되는 것은 숨어 있는 자들이 발각되지 않는 것이다.
척! 처적…!
혈살오괴는 바로 밑에까지 다가왔다. 꼽추 노인이 반 걸음을 내딛고 있고 다른 자들이 막 발을 내딛고 있다.
기회다!
사아악…!
종리추의 신형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은신해 있던 곳은 천장이었다.
놈이다!
언청이 노인이 제일 먼저 종리추를 발견했다. 반응은 무척 빨랐다.
슉! 슈우욱…!
언청이 노인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은 환단을 허공에 뿌렸다.
이건!
기억난다. 십 년도 훨씬 더 된 어렸을 적… 적지인살에게 캄캄한 암동에 있을 때, 살혼부 살수들이 모여들었고 하나씩 고르라고 건네주었던… 야이간이 지녔던 구슬이다. 쇠구슬. 이름이 투골환이라고 했던가?
암기야!
투골환은 맞받으면 안 된다. 맞받는 순간 투골환은 백여 개의 비침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한다.
사사삭…!
혈살오괴는 부산히 움직였다. 그들의 육신 또한 피와 살로 이뤄진 것이기에 투골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언청이 노인이 투골환을 던져냈긴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촤르륵…!
연녹색 뱀의 껍질로 만든 채찍이 풀려나갔다. 채찍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십여 개에 이르는 투골환을 밀어냈다.
촤악! 촤아악…!
혈살오괴 중 지팡이를 허리에 꽂고 있던 노인이 비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틀거렸다. 비침에는 치명적인 독이 발라져 있다. 아무리 작은 비침이라지만 맞으면 단지 따끔거리기만 하지만 즉시 사지가 마비되고 피의 흐름이 중단된다.
투골환에 당하고도 반각을 살아있으면 내력이 정말 강한 사람이라는 게 무림인의 정설이다.
종리추는 허공에서 몸을 틀어 옆으로 굴러떨어지며 계속 채찍을 갈겨댔다. 너무 가까이 날아와 채찍으로 걷어내지 못한 것은 손으로 움켜쥐었다. 비산하더라도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도록 투골환을 꼭 움켜잡았다.
퍼억!
손아귀 안에서 무엇인가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투골환의 비침은 수투를 뚫지 못했다. 주먹을 펴자 쇠털 비침이 우수수 떨어졌다.
천하의 종리추가 기습에 실패했다. 가장 완벽한 거리를 잡았고,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렸지만 공격을 하기는커녕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혈살오괴는 바닥에 쓰러져 꿈틀대는 노인을 발길로 걷어냈다. 그는 방해만 될 뿐이다. 협객술을 펼치는데 장애물이 있으면 그만큼 위력이 감소한다. 그때,
쏴아악…!
혈살오괴의 뒤쪽에서 기괴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종리추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막 퉁겨 일어서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