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6화
비영파파의 내력은 무척 높았다. 오로지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면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본보기라도 보여주려는 듯 진기가 끊이지 않았다.
‘당황하고 있어.’
종리추의 상단전이 활짝 열렸다. 그는 비영파파의 눈 속에서 당황하는 기색을 읽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 당황이다. 아마도 일개 살수 문파 살수가 이토록 오래 견디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기회는 단 한 번!’
쉬익! 쉬이익…!
월영반이 날아왔다. 종리추는 월영반의 형태를 보지 않았다. 소리로 월영반의 형태며 날아오는 기세를 알아냈다.
차앗!
종리추가 양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십비십향이 아니라 하오문주가 선보였던 십비십향이다.
양손이 허공을 휘저어 천수여래의 형상이 생길 때,
타앙! 탕! 탕탕!
비수는 정확히 가운데를 때렸다. 월영반은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기세를 잃고 비틀거리더니 뚝 떨어져 내렸다.
“십비십향!”
비영파파는 하오문주의 십비십향을 아는 듯 경악에 차 나지막한 음성을 흘려냈다.
차앗!
종리추의 전신이 비늘로 덮었다. 그리고 몸에 돋은 비늘이 사방으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컥!
크윽!
구경만 하던 살천문 살수들이 푹푹 고꾸라졌다. 사방으로 날아간 백 개의 비수는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한꺼번에 거둘 수 있는 악마의 혼령이었다.
스으윽…!
비영파파는 당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덮쳐간 비수이건만 비영파파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월영반을 사용하는 관계로 병기의 빠른 움직임에 눈과 몸이 익숙해진 탓일까.
환상처럼 뒤로 물러서는 신법에 비영파파를 향해 날아간 비수 스무 자루는 꽂힐 곳을 잃고 사라졌다.
쉬이익…!
종리추의 신형이 비수의 뒤를 쫓았다.
“음…! 구연진해!”
비영파파는 구연진해까지 알아봤다.
허공에 떠 내지른 다섯 번의 발차기는 구연진해 중 흑살각이다. 땅에 떨어지면서 몸을 빙글 돌려 내지른 각법은 천둔각이다. 몸을 일으키며 올려 찬 각법은 원음각의 변형이다.
종리추는 자신이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려는 듯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비영파파는 견디지 못하고 주춤 물러섰다. 한번 물러서기는 어렵다. 두 번 물러서기는 쉽다.
비영파파는 연신 물러났다. 능공십팔응을 펼쳐 신형을 흐리고 있지만 소리로 발자국 소리를 감지해 내는 종리추의 귀만은 속이지 못했다.
“음…!”
비영파파가 곤혹스러운 신음을 토해냈다. 그때,
쉬익! 쉬이익! 쉬익!
종리추는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인영을 보았다. 한 명은 생면부지였고, 또 한 소녀도 낯설었다. 가장 멀리서 신형을 날렸으나 가장 빨리 다가오는 분운추월은 알아봤다.
“파파! 다음에 보지.”
종리추는 연속적으로 단철각, 환영각, 자오각을 펼쳐낸 후 집무실로 뛰쳐들어갔다.
집무실은 시체로 가득했다. 혈살오괴, 살문 사살, 살천문 살수들… 새로 추가된 시신도 있다. 머리가 으깨진 역석, 가슴에 단봉을 박은 쌍구광살, 진무동도 죽었고, 산화단창, 천왕검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두 죽은 줄 알았다.’
육천군 중 두 명이 혈인이 나올 때부터 살문 살수들은 모두 죽었으리라 짐작했다.
일수비백비로 살천문 살수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었지만 죽이고 싶었다. 처음으로 마음속으로부터 치미는 살심을 느꼈다.
‘공동이 끼어들다니…’
비영파파의 등장은 종리추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으리라.
“아직 살아 있어!”
후사도는 쌍구광살처럼 심장에 꽂고 있지만 비켜 맞았다.
‘천우신조야.’
종리추는 부지런히 죽은 자들을 뒤척였다.
으… 음!
신음이 새어 나왔다. 광부였다. 그는 한쪽 팔이 잘렸고 단봉이 등까지 삐죽 튀어나왔지만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한쪽 손으로는 후사도를, 다른 쪽으로는 광부를 껴안고 문밖을 쳐다보았다. 살천문 살수들을 비롯하여 육천군 중 살아남은 두 명, 많은 사람이 있지만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다. 서두르지 않는 게다. 예로부터 고양이도 쥐를 쫓을 때는 도망갈 길을 열어주고 쫓는다 했으니.
‘분운추월은 알고 있는데, 왜? 그렇군. 분운추월은 살아남기를 바라는 거야.’
“고맙소. 분운추월. 철천지원한이 있어도 개방을 도와주겠소. 단 한 번, 목숨값으로.”
종리추는 서가를 밀었다. 어두운 암동이 시커먼 입을 드러냈다.
피해!
물러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한번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가 타 들어가는 냄새만 맡고도 뒤로 물러섰다.
포위를 풀지 않았다. 살문 문주의 집무실을 멀리서 빙 둘러쌌다.
쾅! 콰쾅! 콰콰쾅…!
거대한 폭음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던 먼지가 다시 솟구쳤다. 폭풍에 휘말린 돌가루가, 전각 파편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지독한 놈!”
백수검은 자신도 모르게 치를 떨었다.
“대단한 자였어.”
비영파파는 혼쭐이 났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크크크! 할망구, 할망구는 그래도 다행이야, 나에 비하면.”
“영감탱이가 누구보고 할망구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 싸우지도 않았잖아?”
싸웠지.
언제?
“한 일 년 됐나? 일 년이 못 된 것 같기도 하고… 살문이 개파할 때였으니까… 그래. 아직 일 년은 못 됐어.”
비영파파가 궁금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내가 졌어.”
…?
“신법으로 시합을 했는데 지고 말았어. 크큭!”
“저, 정말이야?”
“쉿!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할망구. 소문 내면 우린 원수지간이 되는 거야. 알았지? 끌끌! 무공은 뛰어난 놈이었는데, 길을 잘못 들었지. 죽일 놈… 뒤질 바에는 왜 날 이겨. 그냥 져주면 어때서.”
분운추월은 거짓말까지 해가며 격상시킨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공동파의 체면을 위해서다. 공동파 장문인이 자랑스럽게 내놓은 육천군 중 네 명이 죽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능공십팔응도 깨졌다. 그것만은 분운추월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지만 종리추란 놈은 분명히 능공십팔응을 깼다. 비영파파도 어지럽게 쏟아지는 발길질을 피하지 못해 쩔쩔맸으니까.
당금 무림에서 신법에 관한 따를 자가 없다는 분운추월마저 종리추에게 진 전력이 있다면 공동파의 체면은 단번에 살아난다.
육천군은 종리추에게 죽은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죽음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워낙 강한 놈이니.
살천문이 멸문하다시피 당한 것도 공동파의 체면을 세워준다.
살문은 멸문했다. 그까짓 명예에 흠집이 생기면 어떠랴. 모두 끝났으면 그만이지.
두 번째는 종리추를 위해서다. 그는 종리추가 탈출한 것을 안다. 살문을 멸문시켰어도 종리추가 살아있다면 불안하다. 그런데도 탈출하는 것을 묵인했다.
‘어디 깊은 곳에서 한세상 잘 살아라, 이놈아.’
종리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살수이기는 하지만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 사람을 죽인 것 자체가 죄라면 죄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무림인치고 죄짓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종리추가 어떤 사람을 죽였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다시 무림에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나온다면 무림은 혈풍이 몰아친다.
구파일방은 십만살인자를 선포할지도 모른다. 공동파는 앞장을 서서 복수의 칼을 들 게다.
그럴 바에는 처음부터 무림공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종리추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무공이 얼마나 높은지 과장해서라도 무림연합을 확실히 해놓아야 한다.
종리추는 고민하게 된다. 무림에 나서려면 무림 전체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
전체를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에서 상대해야 한다로 바꿔놓는 것이다.
클클클…!
분운추월의 웃음소리가 폐허 속으로 파고들었다.
“대단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살천문을 멸문 직전까지 몰아넣고 비영파파, 육천군…”
소고는 묵월광이 싸웠어도 이보다 더 잘 싸우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각을 폭파시키는 시기도 적절했다. 살천문은 절반이나 되는 일급 살수를 허무하게 내놓았다.
동녘이 밝아오고 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싸움은 긴 밤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야 끝났다. 결과는 예측한 대로 살문의 몰살이다.
‘종리추, 너무 잘해줬어. 너무…’
소고는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종리추가 세상을 등졌다는 생각을 하자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전했다.
“잘못한 것 같아요. 그를 죽여서는 안 되는데…”
소여은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잘못했지. 하지만 누가 이 일을 대신할 수 있겠어. 아무도 대신하지 못해. 죽음이 확실한 길인데 어떻게 일을 할 수가 있겠어.”
“어쩌면 우린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을지도 몰라요.”
“그래. 큰 사람을 잃었어. 하지만 이런 수순을 밟지 않으면… 봤잖아. 살문이 커진다 싶으니 단번에 쳐버리는 것. 무림은 살문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고 하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묵월광이 무너졌을지도 몰라.”
소고는 정신을 수습했다. 아직도 산 아래 살문에서는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대외산 산정까지 뒤흔들 폭음이었으니 바닥 전체를 화약으로 뒤덮어놨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령주!”
“넷!”
“시작해!”
파풍의를 두른 적사가 살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고, 종리추와 나. 서로 싸웠다면 누가 이겼을 것 같습니까?”
“종리추.”
소고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살수로서 싸운다면?”
“종리추. 불만이야?”
“우리 사령은 많은 자를 죽였습니다. 무공이 강하다고 정평 난 자가 아니면 건들지 않았죠. 종리추는…”
“죽이지 않았어. 그것뿐이야. 죽이지 않은 것. 못 죽인 게 아니고 안 죽인 것.”
“후후후! 소고, 내 생각에는 이번 일은 크게 실수한 것 같습니다. 종리추를 죽여서는 안 되는데. 죽이려면 야이간, 저놈이나 죽일 것이지. 쯧! 하긴 저놈은 그만한 값어치도 못하지.”
“아! 말이 너무 심한데. 적사,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시작하라는 명을 받은 것 같은데?”
야이간은 모욕을 받고도 흥분하지 않았다. 적사는 야이간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무리에게 갔다.
적사처럼 검은 파풍의를 두른 사람이었다. 눈에는 인광과도 같은 귀기를 풍겨냈다.
십칠사령.
적사가 몽고에서 데려온 자들 중 최종까지 살아남은 도귀들이다. 절반은 죽고 절반밖에 살아남지 못했지만 그들이야말로 도에 관한 귀신이 됐다.
축혼팔도는 이 세상에 열일곱 명의 귀신을 내려 보냈다.
적사는 이들과 분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십팔도객이야. 한 사람의 은원은 우리 십팔도객 전체의 은원이야.”
그들은 십팔도객이 되었다.
가자!
십팔사령은 소리 없이 뒤를 쫓았다.
“조 령주, 시작해.”
“하하! 오늘 정말 사람 많이 죽는 날이네.”
야이간은 실소를 흘리며 여기저기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사내들에게 갔다.
가자.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일어섰다.
십팔도객이 살기를 뚝뚝 흘리는 데 비해 이들은 타락한 세상에서만 살아온 듯 음울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청살괴 살수 서른 명.
야이간은 청살괴에 약속한 이천 냥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 돈을 살수들에게 주었다. 한 사람당 예순 냥이 훨씬 넘는 큰돈이다.
“내가 고용하지. 몇 명을 죽이든 상관없이 해마다 예순 냥을 주겠어. 어때?”
청살괴는 복수하려고 할 테지만 그까짓 신경도 안 쓴다. 청살괴 살수 서른 명만 장악한다면 실제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청살괴 살수들은 실제로 청살괴를 배신했다.
“퉤! 살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니 기운이 쭉 빠지네.”
“그러게 말야. 오늘은 일하고 싶지 않은데.”
청살괴 살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야이간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없었다. 명령을 어긴 자는 잔인한 시체가 된다. 야이간이야말로 무서운 살수다.
“저도 가볼게요.”
소고는 끄덕였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일이 앞당겨졌지만 준비는 충분하다.
‘머리 속으로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았다. 혹시 허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다. 허점은 없다. 계획은 완벽하다. 지금까지는…’
소고는 소여은이 서른일곱 명의 화령들과 함께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일살!”
“넷!”
산속 깊숙한 곳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십팔숙은?”
“준비 끝났습니다.”
“가자!”
흘러간 과거는 잊어야 한다. 종리추도, 살문도 모두 잊어야 한다. 앞으로 헤쳐 나갈 일은 그보다 훨씬 위험하고 급박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지. 종리추, 고마워.’
그녀마저 떠난 자리는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비운적검은 아침부터 술을 들이켰다. 특급 살수 백여 명을 데리고 와서 이제 겨우 십여 명만 살아 돌아간다. 심정이 참담했다.
‘명맥도 이을 수도 없어. 지부에 남은 자들이 전부야. 그것도 이급 살수. 이제는 청부도 마음대로 받을 수 없어.’
일이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을까.
심정이 답답하기는 살천오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제는 살천삼살이 되었다. 아무리 문주라고는 하지만 이제 갓 약관을 넘었음 직한 풋내기에게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살겁을 저지른 자들은 따로 있어. 살문이 아냐. 제길! 엉뚱한 자들을 치느라고 집안 기둥이 뽑혀 나갔군.’
살천삼살은 역시 문주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임 문주 같았으면 구파일방이 핍박을 가해와도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갔을 게다. 어쩔 수 없이 휘말려들었어도 지금처럼 참담한 심정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그들은 자신들의 패배가 모두 문주 탓만 같았다.
“술 더 가져와!”
“문주라는 자가 이게 무슨 꼴… 살수가 옆에 다가와도 모를 판이잖아.”
하나를 밉게 보면 열이 미워진다. 살아남은 살수들은 비운적검에 대한 신망을 거뒀다.
“에이! 술이나 퍼먹자.”
살천문 살수들은 총단에 돌아가지도 않고 주루에 눌러앉아 술을 들이켰다.
“아예 고주망태가 따로 없군. 이건 신경 쓸 것도 없겠어.”
비운적검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소여은이었다.
“응? 뭐야? 어! 이게 어디서 내려온 선녀이신가?”
비운적검은 문주로서의 품위조차 지킬 줄 몰랐다. 실력이 없는 자가 야망을 가지면 추해진다.
비운적검이 딱 그 모양이었다. 그는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도 소여은의 미모를 알아봤다. 사내란 술에 취하면 여자 생각을 떠올리는 법, 그에게 소여은이 어떤 여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무섭게 치솟는 욕정을 풀어줄 상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소여은이 여염집 아낙이었어도 추잡한 행동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소여은은 비운적검이 이끄는 대로 손목을 내주었고 허리를 부여잡는 손도 뿌리치지 않았다.
“흐흐흐! 어디 기녀냐? 대단한 미모인데? 너 내 첩 해라.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지. 이년아, 내가 살천문주야, 살천문주. 알지? 들어봤지? 너 맘에 안 드는 새끼 있어? 내 당장 숨통을 막아줄게.”
“호호호! 농담도 잘하셔.”
“이년아, 농담이라니! 흐흐흐! 좋아, 좋아. 오늘 우리 하늘나라 구경 좀 해보자. 햐! 거 살결 한번 뽀얗다.”
소여은은 지겨웠다. 이런 작자에게 희롱당하는 것은 역겹기까지 했다.
그녀는 삼십칠 화령이 자리를 잡았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손을 둘러 살천문주의 목을 휘감았다.
“오냐, 오냐 오… 컥!”
살천문주는 자신의 목이 뒤로 꺾이는 느낌을 받았다. 느낌은 현실로 이어졌고 무서운 충격과 함께 경추가 부러졌다.
백수도를 비롯한 살천삼살도 횡액을 면치 못했다. 살천문 최고의 살수들이라는 그들이지만 기습에는 병기조차 뽑지 못했다.
여인들이 우르르 나타났을 때 경각심을 가져야 옳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조그만 변화에도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던 사람들이다.
가자.
소여은은 태연히 일어서서 주루를 벗어났다.
“사, 살인이야! 살인이야!”
뒤늦게 주루 주인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살문의 몰락은 혈풍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단 칠 주야 만에 하남 무림 살수계를 장악하고 있던 살천문이 뿌리째 뽑혀나갔다.
살천문 총단이 무너지고 각 지방에 산재되어 있던 지부가 불탔다.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살인자들은 닭이나 개 같은 미물마저도 살려두지 않았다.
철저한 멸종이다.
그러는 가운데 신흥 세력이 부상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묵월광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