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7화
구파일방 장문인들은 지파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금 무림에서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살문을 멸문시키는 것과 절강성에서 살겁을 자행하고 있는 혈영신마의 척살이었다.
구파일방은 혈영신마에게 십방을 내렸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구파일방은 세 번이나 실패한 적이 있다. 십방을 내렸지만 그들은 그물망을 빠져나갔다. 오독마군, 혈암검귀, 살혼부.
장문인들은 허심탄회하게 심정을 토로했고 서로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역별로 구분한 것이 잘못이다. 십방을 내렸으면 구파일방 전부가 하나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 그랬다면 그 누구라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했을 게다.’
장문인들은 오랜 숙의 끝에 십방을 재정비했다. 십방자의 움직임을 쫓기로 했다. 십방자가 개봉에 있으면 개봉에 있는 무인 전부가 하나로 응집한다는 내용이다.
색깔이 다른 무림인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통솔자도 미리 선정해 놓았다. 그들은 각 파의 장로급으로 자기가 맡은 구역에 상주하며 만일을 대비한다. 십방이 선포될 경우 그 지역에 있는 무림인 모두가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 권한을 부여했다.
장문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역시 살혼부 사건이 컸다. 살혼부 사대살수를 단 한 명도 잡지 못한 것은 큰 충격이었다. 오독마군이나 혈암검귀는 무공이 탁월하다지만 살혼부 살수들 정도야 충분히 요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한 명이 아니고 모두 놓치다니…
혈영신마는 재수 없게도 모든 체계가 정비된 다음에 걸려들었다. 전 같으면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어림없다.
“허허! 멋지게 당했어요. 오랜만에 뒤통수를 맞으니 얼얼합니다.”
소림 방장 혜공 선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보통내기들이 아닙니다. 완전히 속았어요. 허! 이제 개방도 천하제일의 정보망이라는 말을 버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개방 방주도 쓰게 웃었다.
‘묵월광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표면으로 부상했다. 그동안 하남 무림에서 있었던 일련의 살행도 그들 소행이 분명했다.
하지만 심증일 뿐 물증이 없다. 그들은 무림의 해악인 살수들을 제거했다.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빤히 보이는 술수이지만 속수무책이다. 스스로 본색을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듣자 하니 묵월광의 소고가 여자라는 말이 들리던데…?”
“맞소이다. 여자.”
“허!”
혜공 선사와 개방 방주의 대화를 들은 장문인들이 혀를 찼다.
“소고를 만나봐야겠소이다.”
혜공 선사의 메마른 눈빛이 빛났다. 혜공 선사는 그 길로 장경각으로 향했다.
타인은 절대 출입할 수 없는 장경각 문을 밀치자 텁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삼층 전각을 메운 고서에서 풍기는 지향.
혜공 선사는 이 냄새가 좋아 장경각에 살다시피 했다. 그것이 그를 무림의 태두가 아니라 불문의 고승으로 기억하게 만들었지만.
방장은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오랜 세월 기름칠을 하고 닦은 탓인지 나무 계단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삼층까지 오르자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는 겨울로 들어선 날씨다. 아침저녁으로는 불을 넣어야 한다. 대낮에도 차가운 기운이 옷 속으로 파고든다.
장경각 삼층에는 다른 사람도 있었다. 훤칠한 키에 체격이 단단하고, 이목구비가 단정했으며, 눈에서는 맑은 정기가 샘솟았다.
“종리추는 어찌 되었는가?”
혜공 선사는 창문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을 온몸으로 받으며 물었다.
“지하통로를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허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내는 혜공 선사가 무척 어려운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묵월광의 소고라고 하던가? 그 여인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아봤는가?”
“제자가 파악하기로는 아무런 관계도 아닌 듯싶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너무 완벽하게 이가 맞지 않는가.”
…
“그렇겠지. 그래, 종리추는 앞으로 어떻게 한다던가? 복수를 생각하던가?”
“거기까지는…”
“아미타불…!”
혜공 선사는 불호를 외웠다.
‘선택이 잘못되었다. 종리추를 건드리지 말든가 죽였어야 한다. 지금은 건드리기는 했으되 죽이지 않았다.’
“백천의.”
“예.”
“앞으로 계속 종리추 곁에 머물 수 있겠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가능하면 옆에 붙어 있어. 만일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면… 아미타불!”
…
“자네에게 못 시킬 일을 시키는구먼.”
“제자는 오히려 기쁩니다. 제자를 믿고 이렇게 중대한 일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혜공 선사는 불호만 외웠다.
소림이 이랬던 적은 없다.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리고 무슨 일이든 깨끗이 처리했지 미적지근하게 처리하지 않았다.
백천의가 죽일 자라는 말을 한마디만 했어도 종리추는 죽었다. 멸문을 당하기 전에 하인들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죽음을 선물했으리라.
종리추는 모르지만 그가 살게 된 데는 많은 사람이 암중으로 도왔다. 물론 본인 스스로도 살 길을 열었지만. 이래서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던가.
백천의는 오히려 기쁘다고 했지만 오랜 기다림을 견뎌내야 하는 지겨운 일이다. 한 사람 곁에 머문다는 것은 자칫 일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겠는가.
“아미타불! 종리추… 부디 무림에는 들어서지 말게나. 부디…”
혜공 선사는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기만을 바랐다.
소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산문에 들어섰다.
아!
불도에만 정진하는 소림승마저 소고의 매혹적인 자태에는 넋을 잃었다.
“시, 시주, 어떻게 오셨는지…?”
“방장님의 초청을 받았어요.”
소고는 배첩을 내밀었다.
“무, 묵월광! 소고!”
지객승은 무척 당황한 듯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살인 집단의 수뇌가 이 여인이라니…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런 일을 벌였다니…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지객승은 연신 불호를 외웠지만 자꾸 눈길이 돌아갔다.
소고는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방장실로 들어갔다.
“나무아미타불.”
정중히 불문의 예의를 갖췄다.
“말은 많이 들었지. 이리 와 앉으시게.”
혜공 선사는 불문의 고승이 아니라 옆집에 사는 사람처럼 포근했다. 체격이나 인상으로 보면 도저히 포근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고승이었지만 안에서 우러나오는 기품이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소고는 입술이 바짝 타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안으로 오므렸다.
“차 한잔하시겠는가?”
“소림사의 차는 담백하기로 소문났죠. 언젠가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주신다니 감사히 마실게요.”
혜공 선사는 직접 찻물을 올렸다.
차가 끓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이윽고 차가 끓자 찻잔에 정성스럽게 따른 다음 내밀었다.
“소림사의 차라고 다른 게 있을 리 있나.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말들은 많다오.”
소고는 찻잔을 들어 마셨다.
“난 많은 사람을 만났다오. 신흥 문파의 문주들은 모두 한 번씩은 만나봤지.”
…
혜공 선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편하고 좋은 고승이 아니라 감히 범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위압감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소고도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몸에서는 사람을 나른하게 만드는 권태가 새어 나왔다.
“허허! 혈암검귀의 무공은 사장된 줄 알았더니…”
소고는 움찔했다. 누구도 자신의 무공을 알아보지 못했다.
혈암검귀의 무공은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익히면 강하지만 익히는 자가 드물다.
진기를 뿜어내 상대의 정신을 옭아매면 승부는 거의 끝났다고 봐야 한다. 나머지는 불필요한 권각의 놀림이 있을 뿐이다.
혜공 선사는 단번에 무공 내력을 알아냈다. 혈암검귀의 무공과 같이 정신을 제압하는 무공이 흔치 않은 탓인지도 모르지만.
혈암검귀는 십방을 받았다. 그의 무공을 이어받았으니 어떻게 나올 것인가.
“소림사를 방문하는 무림인은 모두 선물을 바리바리 싸오는데, 무슨 선물을 가져왔는가?”
“평화를 가져왔잖아요.”
“평화라… 주시게.”
혜공 선사는 손을 내밀었다.
소고는 손을 내밀어 손에 쥔 것을 건네주는 시늉을 했다.
“내 손은 비었네. 그 평화라는 것, 빨리 주시게.”
혜공 선사는 막무가내였다.
“이런! 벌써 마음속으로 들어간 모양이네요.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찾아보세요.”
소고와 혜공 선사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누구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쇠와 쇠가 마주친 듯 불똥이 튀었다.
“소림사를 방문한 사람 중에 혼자 몸으로 온 사람은 두 명뿐이지.”
“한 명은 저군요.”
혜공 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길은 여전히 소고의 눈에서 떼지 않은 채.
“또 한 명은 살문 문주 종리추고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시주는 차를 마시지 않았지.”
…?
“다시 온다고… 그때 와서 마시겠다고.”
“호호! 불귀의 객이 찾아온다니 좀 께름칙하군요.”
‘불문은 영혼이 머무는 곳인데 산 사람이면 어떻고 죽은 사람이면 어떨까.’
탐색이 끝났다.
“시주, 살겁을 중단하시게. 지난 일은 불문에 부치겠네.”
“십방인가요?”
혜공 선사는 눈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거야. 이래서 사무령을 원한 거야. 아무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자유인 사무령…’
소고는 청면살수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살겁을 중단할 수 없어요.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은 너무 피를 그리워해요. 방장님께서 계속 만류하신다면 제 갈 길을 가도록 풀어놓는 수밖에 없어요. 살천문이 차지했던 영역만 차지하겠어요.”
“그것만으로 끝내겠는가?”
혜공 선사는 비로소 눈길을 거뒀다.
“시주는 종리추와는 전혀 반대되는 사람이구먼.”
…?
“종리시주는 날카로우나 정이 숨어있지. 시주는 정이 넘쳐흐르나 마음이 얼어 있고. 종리추는 죽었으나 정이 가는 사람이고 시주는 살았으나 위험한 사람.”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마시고 내려왔다.
목적은 안전하게 이뤘다. 살천문이 차지했던 영역, 하남 무림 살수계를 거머쥐었다. 가장 안전하게.
“종리추는 멸문은 당했지만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지. 시주는 하남 무림에 둥지를 틀었지만 기대하기 힘들 것 같고. 허허! 명심하시게. 구파일방은 허수아비가 아닐세.”
“저도 말을 남겨야겠군요. 다음에 오면 제가 차를 끓여드리죠.”
소고가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시작이야.’
종리추는 지하 통로를 빠져나왔다.
종리추가 나온 곳은 남쪽으로 대외산 산 중턱이었다. 힘들기는 하지만 산이 험하고 가파르며 숲이 울창해서 추적자들을 따돌리기에는 딱 좋은 지형이다.
후사도와 광부를 옆에 끼고 산을 넘었다. 토끼가 꾸물거리는 소리에도 몸을 숨겼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도 숨을 삼켰다.
그 누구와도 부딪쳐서는 안 된다. 밖에 나왔으니 몸 하나 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후사도와 광부는 목숨을 잃게 된다.
대외산을 넘어 허름한 농가로 들어갔다.
“살문이 붕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걱정했습니다. 폭음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어요.”
“이 사람들 치료부터 해야겠어. 빨리 뜨거운 물부터 끓여줘.”
농가에 있는 외장 문도다. 그들은 투항한 후 개방 문도의 눈을 피해 멀리 하남성 밖 호광성 경계까지 나갔다가 돌아왔다.
농가에서 사흘을 요양했다. 개방의 눈을 의식해 대소변까지 늙은 부부에게 신세 지며 방 안에만 틀어박혔다.
나흘째 되던 날, 기다리던 마차가 왔다.
본인이 타려고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 살문 살수들이 도주하지 않고 모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싸울 사람이 필요했고, 가급적이면 그들도 살려보고 싶었다.
단 두 사람만 구했다.
“감시하는 눈들이 많아서…”
“수고했어.”
종리추는 후사도와 광부를 마차에 싣고 늙은 부부에게 은자를 건넸다. 늙은 부부는 사양했다.
“문주님 살문을 나올 때 넉넉하게 받아둔 게 있습죠.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곧 돌아오시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기다리지 마,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편히 다녀오시죠.”
늙은 부부는 끝까지 돌아오리라 믿는 모양이다.
후사도와 광부는 자신들만 산 것이 죄스럽다는 듯 침울했다.
다각…! 다각…!
마차는 천천히 달렸다. 관도에 사람이 있으면 흙먼지가 튀지 않도록 고삐를 잡아당기는 배려도 했다.
“어떤 수법에 당했나?”
종리추는 침울한 분위기를 쇄신시키기 위해 무공 이야기를 꺼냈다.
“그놈들… 꼭 정신이 혼미한 것 같았어요. 눈앞에서 어른어른거리는데 도무지 정확한 신형을 파악해 낼 수가 없었죠. 쌍구광살 형님이 해법을 찾아냈죠. 동귀어진.”
“그렇군.”
살문 살수들의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정통 무가의 제일 정종 무공에는 역시 부족했다.
“그 비영파파라는 노파도 능공십팔응을 전개한 것 같던데 문주님을 어떻게 파훼하셨습니까? 아주 몰아붙이더군요.”
광부는 그 와중에도 종리추에게 눈길을 던졌나 보다.
“소리.”
“예?”
“발자국 소리로 파악했지.”
…?
후사도와 광부는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됐군.’
“형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병기를 쳐낼 수 있소?”
“그게 가능하다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발자국 소리를 들을 짬이 어딨나?”
종리추는 후사도와 광부가 말문이 트인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째짹! 째째짹…!
새들이 지저귄다. 새들의 음성을 날아오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이 없으면 세상은 침묵에 싸이고 말리라.
‘이제 무림을 떠나는 거야. 빚은 갚았으니…’
지난 세월 소고라는 여인의 영상을 천 근 무게처럼 얹고 살았다. 이제는 홀가분하게 떨쳐버려도 된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살문 살수들은 모두 죽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상처만 나으면 이놈들을 그냥…”
“아서. 그러다 죽을라. 우선 무공부터 다듬어야겠어.”
종리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들, 살아남은 살수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이들은 싸움이 좋아 무림을 떠도는 사람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무공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돌아가는 대로 정리해야겠군.’
마차를 천천히 몬 탓인지 십이월 중순 무렵에야 섬서성 백수에 도착했다. 안전지대였다.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신흥 문파 묵월광의 이야기로 분분했다. 살문은 이미 잊혀진 문파가 되었다.
종리추 일행을 눈여겨보는 사람도 없었다. 간혹 개방 문도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무심히 지나갈 뿐 말 한마디 건네오지 않았다.
백수에서 배를 탔다. 백수 한가운데는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어떤 섬은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바위섬이고 어떤 섬에는 염소가 서식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섬의 군락을 일컬어 천부라고 한다. 하늘의 집처럼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부에서 사공이 된 하오문 외장 문도는 천부 지리에 환했다.
“전 여기서 나고 자랐죠. 그때는 정말 지겨웠는데 다시 보니 정겹기만 하군요.”
종리추에게 천부 이야기를 꺼낸 사람도 이 사람이다. 천전흥. 외장문도로 등천조 휘하에 있던 백 명 중 한 명이다.
과연 천부는 천전흥이 장담한 대로 어디 한 군데 놓칠 곳이 없었다.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저깁니다. 저기가 천부에서도 상궁이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천부에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열댓 곳 되는데 저 상궁이 경치가 가장 좋아요. 전에는 노파 한 명이 살았는데 제가 이곳을 떠날 무렵에 죽었죠. 그때부터 빈 섬이에요.”
천전흥은 신바람이 나서 떠들었다.
배가 상궁이라 불리는 곳에 도착하자 반가운 얼굴들이 마중 나왔다.
아버지, 어머니, 어린… 유구, 유회, 혈살판복, 음양철극… 벽리군… 모두들 무사히 도착했다.
후사도와 광부는 그때까지도 낫지 않아 부축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상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살문에서 일어났던 싸움 이야기를 꺼내면 죽은 사람의 이야기도 꺼내야 할 것 같아 애써 참았다.
섬에 마련된 거처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무와 풀로 얼기설기 다듬어 간신히 비바람이나 피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살 만한 집은 아니었다.
“미안해요, 자재를 들여오면 소문이 날 것 같아서.”
“잘했어.”
벽리군과의 정리도 어떤 식으로든 끝내야 한다. 종리추는 갑자기 정리할 것이 많아졌다. 그런데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이 사람들을.
집으로 들어서던 종리추는 한구석을 쏘아봤다.
“인사해라. 이분은…”
“그만!”
종리추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버지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이내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녕 보기 싫은 사람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다.
종리추는 바위에 앉아 하루 종일 파도 소리만 들었다.
“저러다 굶어 죽겠어요.”
어린이 울먹거렸다.
“휴우! 놔둬라.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
적지인살은 일절 종리추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했다.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한 달이 지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답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정말 종리추는 바위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섬서성의 겨울은 매섭기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겨울에는 사람 구경을 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밤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쳤지만 종리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머리는 헝클어지고 의복은 더러워졌다. 얼굴에는 때가 끼기 시작했다.
“휴우!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요?”
배금향은 마음이 아팠다.
“놔둬요.”
적지인살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번 일만은 자식의 의사에 맡기고 싶었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아.’
초막에는 괴물이 누워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데다가 눈까지 파인 장님… 그가 누군지는 한눈에 알 수 있다.
살혼부 부주였던 청면살수.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무엇을! 무엇을 더 달라고!
청면살수는 종리추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그를 회유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그 누구도 종리추를 얽맬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가 살았다는 소식은 아마도 아버지가 말했을 게다. 그런 분이다. 자신이 대형으로 모셨던 분, 지금도 대형으로 모시며 존경하는 분에게 거짓을 말할 분이 못 된다.
청면살수 옆에 있던 사람은 아버지의 유일한 의제인 공지장이 틀림없다.
‘사무령…’
사무령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토록 집착한단 말인가.
쏴아아…! 철썩!
파도가 거칠게 밀려와 바위를 때렸다. 그 모습이 세상 풍파가 달려와 자신을 두들기는 것처럼 여겨졌다.
종리추는 일어섰다.
“무엇을 원하나?”
공지장의 눈에 분노가 스몄다. 적지인살도 배금향도 당황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공지장이 분노를 억누르고 물 적신 붓으로 청면살수의 배에 글씨를 써 나갔다.
“하하하!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 유감이군. 아주 똘망똘망했다던데, 지금쯤 장성한 청년이 됐겠군.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니 이해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던데… 거래를 하고 싶네.”
“거래?”
공지장이 다시 글씨를 썼다. 종리추가 말한 것은 한마디였으나 공지장은 여러 글씨를 썼다.
청면살수가 입을 열었다.
“혈암검귀의 무공비급은 얼마만한 가치가 있나?”
종리추가 즉시 대답했다.
“똥 닦개.”
공지장은 폭발 직전에 이른 듯 눈을 부라렸다. 적지인살은 난감한 듯 초막을 나가 버렸다.
“써.”
종리추는 공지장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아버지의 의형, 의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럼 내 목숨은?”
퉤!
종리추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좋아. 그럼 소고는 봤을 테니… 소고를 준다면 어떤가? 적각녀도 뛰어난 미인이라지? 적각녀도 갖고 싶다면 가지게.”
종리추는 귀를 파냈다. 옷자락을 북 찢어 귓속을 깨끗이 파냈다.
“한.”
…
“한은 값어치가 얼마나 되겠나?”
…
청면살수가 불쌍했다. 청면살수는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소고에게 주었다. 그는 빈손이다. 애당초 거래라는 말은 성립될 수도 없었다.
그는 종리추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다. 그가 이 정도로 말할 정도면 아마도 소고에게는 비밀로 하고 왔을 게다. 자신이 여기 온 사실도, 종리추가 살아있다는 사실도. 사실대로 말해도 더 이상 소고가 어떻게 해볼 것은 없지만.
“사무령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소고를 도와주든 독자적으로 사무령이 되든, 아님 서로 힘을 합치든. 살수의 위치에서 사무령이 되어주면 아무런 원한이 없지.”
청면살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살문이 몰살한 것, 수하들이 죽어간 것… 모두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네. 나도 일문을 이끌던 부주였는데 자네 심정을 모른다면 말이 안 되지. 알지, 알아.”
“필요 없는 죽음이었어!”
“무림을 떠나더라도 이것만은 알아두게.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은 사무령이 탄생하는 순간 빛을 보게 되는 걸세. 그렇지 않으면 헛된 죽음일 뿐이지.”
“궤변!”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어서 왔네. 헛된 죽음을 만들든 그렇지 않든 자네에게 달렸다는 걸. 자네는 적어도 자네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네. 내가 이런 몰골이 되고도 나를 믿고 따르던 의제들에게 책임을 다하고 있듯이.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생각해보게. 의제들의 인생은 뭐가 되겠나. 그런 걸세, 문주라는 것은.”
종리추는 말을 잊었다.
아버지의 일생… 남만까지 쫓겨가 비참하게 살다가 다시 중원으로 건너와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무림을 바라보는 심정. 소천나찰, 미안공자, 비원살수… 그들의 인생.
남만에서 따라와 중원에서 생을 마감한 역석, 쌍구광살은 말했지.
“비겁한 놈들이 꼭꼭 숨어서 나올 생각을 안 해.”
“싸우기 싫어도 싸우게 해주지. 그래, 그렇게 말했어.”
“목숨을 걸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
그 말은 산화단창이 했고… 종리추는 다시 안으로 깊이깊이 침잠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