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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15화


동굴 안에는 한줄기 햇살이 어스레하게 스며들고, 차분하게 내려앉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또다시 혈전 의 기운이 감도는 탄금대 벌과는사뭇 다른 평화이며 고요였다.

“끄으응…….”

흑호는 황소만한 집체를 뒤척이다가 문득 정신이 들 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 들며 경계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고아한 눈빛의 승려, 바로 유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은동의 몸을 가져간 이 승려를 찾으 려고 애를 썼는 터,막상 이렇듯 눈앞에 있는 승려를 보고는 흑호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호랑 이 특유의 포효 소리와 함께 전심법으로 유정에게 흑호의 말이 전달되었다.

“스님, 어쩐 일이시우? 나는…..”

땅에 뭔가를 써가며 진중한 생각에 여념이 없던 유 정이 고개를 돌리면서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시오?”

“스님께서 나를 구해주셨구려. 감사허구 또 감사허 우. 허허…….”

“그나저나 그대 다리에 있던 글자는 무엇이오? 내 해독하기는 했소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하겠 구려.”

그 말에 흑호는 눈을 화등잔만하게 뜨며 깜짝 놀랐 다. 증조부님 호군이 남기신 그 녹도문을 이 승려가 해독했단 말인가?

“그………… 그 글을 해독했수? 정말?”

유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땅바닥을 가리켰다. 흑호는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쓴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흑호 의 다리에 새겨놓은 녹도문 글자와 그것을 해석해 놓은 듯한 한자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정신을 잃고 있는 은동의 몸과 책 한 권이 보였다.

유정이 은동의 몸에서 녹도문해를 찾아내어 글을 해 독한 것이 분명하였다. 흑호는 녹도문은 알지 못했 지만 한문이나 언문은 대강 알아볼 수 있었기에 그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왜란종결자(倭亂終結子)를 찾아 보호하라.’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 같은 뇌옥에 팽팽한 기운이 맞섰다.

태을사자가 긴장하여 승아에게 호통을 치자 그의 몸 에서 도력이솟구쳐 나왔다. 순간 주변을 먹장같이 만들면서 검은 돌개바람 같은것을 일으켰다.

생계에서였다면 눈에 보이는 변모가 일어나지 않았 겠지만 이곳은생계가 아니라 사계였다. 더구나 태을사자는 현재 비록 백아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받 고 있기는 했으나 흑풍사자의 법력을 모두 얻은상태 였다. 윤걸의 법력까지도 그에 더하여 그 위세가 자 못 흉흉했다.

순간 승아라는 계집아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대로 몸이굳어 버린 듯했다. 승아의 눈이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떠지며 갑자기 눈물이 주 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그리… 화를 내시어요……?” 

태을사자는 승아의 모습이 너무도 측은하여 감정이 없는 저승사자였으면 모르겠으되, 이상하게 감정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묵학선을 거두고 다 독거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왜 이렇듯 어린것을의심 할까 하는 생각도 일었으나 애써 긴장을 풀지 않았 다. 다년 동안쌓은 경험에서 얻은 예감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본색을 드러내라!”

“… 본색이라니요…..?”

승아는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태을사자의 뒤에서 은동이 버럭 외쳤다.

“그만하세요!”

태을사자는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은동이 씩씩거리며 태을사자에게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뇌옥의 통로를 지나는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이 든 은동은 태을사자가 어린 여자아이를 매섭게 몰아붙 이는 모습을 보자 아찔했다. 자칫하면 공격할 것 같 아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친 것이다.

은동이 전심법을 배운 바는 없지만 다급하게 소리를 치자 마음속의 울림이 자연스럽게 전심법의 형태로 나타나 말문이 풀어지게 되었다고 할까?

그러나 은동은 그런 것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 다. 태을사자가눈살을 찌푸리며 은동을 바라보는 사 이, 은동은 다람쥐처럼 달려와서승아에게 물었다. 

“괜찮니?”

승아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은동은

태을사자를 보고 말했다.

“사내대장부가 되어, 여자아이를 괴롭히면 안되요!”

외아들로 자란 은동이었다. 홀로 외롭게 자라 동생 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비록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어린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이 많았다. 차라리 자신이 야단을 맞으면맞았 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거 나 꾸지람을받는 것을 그냥 못 보는 성미였다. 하지만 은동이 계속 정신을 차리고 있는 상태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터. 태을사자가 저승사자이며 이 곳은 저승 밑바닥인 뇌옥이라는 것을 생각하여 별 소리 안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신을 잃었다가 막 깨어난 상태라 은동은 아직도 좀 얼떨떨한 상태였다. 그래서 불쑥 평소의 행동이 나오고 만 것이었다.

태을사자는 요 어린것이 감히 자신에게 대들고 나올 줄은 몰랐던지라 기가 막혀 가만 은동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네가 무얼 안다고 끼여드느냐? 저리 비켜라!”

아무 것도 모르는 은동은 승아가 몹시 귀여워 보이는지라 계속 승아를 감싸고 돌았다.

“꾸짖을 일이 있어도 말로 하시면 그만 아닙니까? 손찌검까지 하려들다니요?”

그러자 태을사자는 화가 나서 영력을 담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리 비켜라! 저 요사한 것이 너를 홀렸나보구나! 저 아이가 바로호유화란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은동은 아까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 다. 움찔 놀라며한두 발자국 승아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 보아도 승아는 그냥조그마하고 귀여운 여자아이일 뿐, 괴수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은동은 피식 웃었다.

“요 여자아이가 삼천 살이나 먹은 구미호란 말입니 까? 에이, 그럴리가요?”

그러자 태사자는 발을 굴렀다.

“호유화는 영통한 환수인지라 둔갑에 능하다! 저것 은 필경 호유화의 변신일 것이야. 나를 희롱하였으 니 혼이 나야 마땅하다!”

“이 아이가 사자님을 희롱했습니까?”

“둔갑술로 진짜 정체를 감추었으니 나를 속이고 희 롱한 셈이지!”

“그러면 사자님은 호유화의 진짜 정체를 아십니 까?”

“호유화는 구미호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란 말이 다!”

“그러면 이 아이는 꼬리도 없고 여우 형상도 아닌데 어찌 호유화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이게 진짜 호유 화의 모습이라면 또 어찌하시렵니까?”

그러자 승아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아니에요! 나는 절대 그분이 아니에요!”

“에잇! 누가 너와 말장난을 하자고 했느냐! 썩비 키지 못할까!”

태을사자는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 애당초 환수인 호유화에게 금제를 가하고 본때를 보여주어 말을 듣 게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성계에서도 말 을 듣지 않은 망나니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호유화는 오히려 당돌하게 둔갑하여 자기를 속이려 하지않던가. 하마터면 깜박 속아넘어갈 뻔했 다는 생각에 태을사자는 화가치밀었다. 본래 엄격한 저승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왔으며 웃음이나농지거리 를 하는 등의 감정이 없었고, 또 거짓말로 남을 속 이는 것은큰 죄악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태을사자였 다.

그렇듯 엄격한 태을사자에게 호유화가 죄를 지었으 니 어찌 꾸짖고화를 내지 않겠는가? 그러나 저승사 자의 세계가 어떠한지 이해하지못하는 은동으로서는 태을사자가 공연히 화를 낸다고밖에 생각할 수없었 다.

“쇠・・・・・・ 쇤네는 절대 그분이 아니옵니다. 절대…….”

“네가 아까 웃을 적에 이미 본색이 드러났다! 네가 정말 어린아이라면 어찌 그런 웃음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너는 호유화지?”

태을사자는 다짜고짜로 몰아붙였다.

은동이 비록 야무지게 따지고 있었고 저 요사스러운 것이 변명을하고는 있었지만 태을사자는 나름대로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귀졸의이야기와 이판관의 이 야기로는, 이 뇌옥에는 호유화만이 갇혀 있으며그녀 는 너무도 악명이 높아 수백 년 이래 아무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호유화는 기문둔갑술에 능하고 변신에 능하 여 천상의 신장들조차 희롱하고 유유히 포위망을 벗 어나 달아날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찰나지간이기는 했지만 승아라는 이 계집의 음성에 섞인 그 어조는 꾸민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승아는 계속 울면서 잡아뗐다.

“저는 절대 그분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천 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너처럼 천지를 우습게 보는 요물이 천지신명께 맹 세한다고 내가믿을 줄 아느냐?”

“저는 아닙니다. 제가 그분이라면 저는 영영 뇌옥에 서 나가지 못할것이고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썩어서 죽어 버릴 것입니다!”

승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태을사자는 조금 긴장을 늦 췄다. 원래 태을사자는 거짓말을 할 줄 몰랐으니 그 정도 맹세를 한다면 정말 이아이가 호유화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승에서의 맹세는 생계에서의 맹세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저승의 존재들은 거짓말을 모르 는 법이라 맹세를 한다는 것은 항상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법이기 때문이다.

“정말 너는 구미호 호유화가 아니냐?”

“맹세코 아닙니다.”

“흠…….”

그러자 은동은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그것 보세요. 아니라고 하잖습니까?”

태을사자는 힐끗 은동과 승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승아가 비록얼굴은 울고 있었지만 은은한 미소를 머 금고 은동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 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태을사자는 다시부쩍 의심이 들었다.

“네가 여우는 아니라 할지라도 요사스럽기 짝이 없구나! 좋다. 그러면 어서 대라. 여기는 분명 뇌옥이고 뇌옥에는 호유화만이 갇혀 있다는데 네가 그 여우가 아니라면 너는 어데서 온 것이냐?”

“제가 어디서 오다니요?”

“여기는 지옥 십팔층 중에서도 가장 깊은 뇌옥이 다! 그런데 너 같은 어린 계집아이가 무슨 죄를 어 떻게 지어서 이리로 들어오게 되었느냔 말이다!” 

태을사자는 저승사자였으니만큼 저승의 법도에 대해 어지간히 알고 있었다. 저승의 법도에도 체계가 있 었으니 생계에서 제아무리 대죄를 지었다고 해도 한 낱 어린아이의 몸으로 뇌옥으로 들어오기란 매우 힘 든 일이었다.

그러나 승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줄줄이 말을 쏟아냈다.

“저는 호유화님에게 딸린 몸으로 호유화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그리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어 찌하여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오나 좌우간 지금 말씀 드리는 것에 추호도 거짓은 없습니다.”

“정말이냐?”

그러자 은동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이분은 좋은 분이야. 거짓말하면 안 돼. 거짓말 아니지?”

그러자 승아는 눈에 눈물을 매달린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절대로 아냐. 맹세할게.”

그러나 태을사자는 아직까지도 의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네가 호유화를 모시고 있는 몸이라면, 지금 호유화가 어디 있는지 알렸다?”

“예……? 아, 예……………”

“그러면 어서 우리를 그리로 안내하여라. 지체할 여 유가 없다.”

“안내하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어떤 연유로 호유 화님을 찾으시는 것인지요? 잘못하면 쇤네가 크게 꾸중을 듣습니다.”

그러나 승아를 의심하고 있는 태을사자는 신중을 기 하느라 승아에게 자신의 목적을 말하지 않았다.

“가서 내 직접 말할 것이니라. 나는 너를 아직 믿지 못하겠으니 일단 호유화를 만나게 해주면 그때 말할 것이다.”

그러자 승아는 뭔가 잠시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그 러면서 은동과태을사자, 그리고 뒤의 여인의 영까지 한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여인은 그제서야 정 신을 차린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구슬프게 흐느꼈다. 우는 것밖에는 모르는 영인 것 같아서 태 을사자는약간 짜증이 났다.

“저 아가씨는 누구십니까? 그분도 볼일이 있습니 까?”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고 없다면 없다고도 할 수 있느니! 자, 어서 앞장 서라!”

그러자 승아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서서히 앞장 서 서 일행에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때 때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태을사자에겐 눈길을 주지 않고 은동과 여인만을 흘금거리며 볼 뿐이었 다. 여인은 길을 가는 동안에도 계속 구슬프게 울어 댔다.

은동은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대강 들어 알고 있는 터라 그 여인이 측은했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자꾸만 흘금거리는 승아가 마음 에 들지 않는다는 듯, 대뜸 호통을 쳤다.

“만약 꾸물거리거나 내뺄 생각을 한다면 용서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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