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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19화


“다시 말하여 보아라. 뭣이라구?”

태을사자는 도무지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어서 금 옥에게 다시 한번 다그쳤다. 그러자 금옥은 마치 꿈 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한 목소리로중얼거리듯 말했 다.

“그분을 뵙고 싶었습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직 접 뵙고 제 속좁은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싶었 고……… 다시 한 번 얼굴이라도 뵙고싶었어요.” 

“어허, 알겠느니라. 내 약조하지 않았느냐?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어디로 가서 물을 마시게 될 것이라 했어요. ……그 물을 마시면 전생의 기억 이 모두 없어진다면서요.”

“그래, 그것이 바로 저승의 세심천(洗心川)이다. 그런데 그 물은 심판을 받은 연후에 마시게 될 터인데?”

어느새 태사자는 금옥의 이야기에 온 신경을 집중 하고 있었다.

금옥은 전에 받았던 충격이 지금은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조금씩가시게 되어 이지(智)를 차츰 회복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결코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은동도 놀라 숨을 죽이고 금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는 싫다고….. 싫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구 …………마구 울었어요. 그대로 그분과의 추억을 잊기는 싫었답니다……그래요, 무엇이든 할 테니 제발 그 러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신 장군을 다시 한번 뵙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분이・・・・・・ 그분이……”

“누가 말이냐? 이판관께서?”

“맞습니다.”

“무어라 하셨느냐?”

“정말 그러느냐고……… 정말 무엇이든 하겠느냐고……. 그런데 그말을 하는 그분은 몹시 슬퍼 보였습니다.”

“슬퍼 보였다구?”

“예…….”

태을사자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판관일지라 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윤회의 과 정을 밟도록 되어 있는 영혼을 자의로 빼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슬픈 표정을 짓다니! 태을사자를 비롯한 저승의 존재들은 기뻐 하고 노여워하고 괴로워하는 감정은 느끼지만 슬픔 이라는 감정은 느끼지 않는 법이었다.

그 또한 기이한 일을 겪으면서 이상하게 그런 감정 이 생겨나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판관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있었다니! 도대체 믿 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 다음…… 저는 어디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좁 고・・・・・・ 어두운 곳・・・・・・ 거기서 얼마나 있었는지도 몰라요.”

금옥은 조금씩 떠듬거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해나갈수록 점점 말이 익숙해지는 듯, 소상 하게 설명을 붙여나가고 있었다.

어딘가 좁고 어두운 곳에 갇혀 있던 금옥은 다시 나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추악하고 무서 운 형상의 괴수들이 득시글거려 소름이 오싹 돋았 다.

동물의 형상을 한 것도 많았지만 인간의 형상을 한 것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주 흉측스럽 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중 풍생수라는 괴수가 나타 나서 말을 걸었다. 다른 괴수들 사이에서 불사의괴 수라고 불리워지는 괴수였다. 그 괴수는 금옥에게 신립이 그토록보고 싶다면 신립에게로 들어가서 신 립을 조정하라고 했다. 결국 금옥은 다시 풍생수에 의해 어딘가로 갇혀져서 생계, 즉 인간 세계로 이동 하게 되었다.

“그런데・・・・・・ …… 그 풍생수가 말했습니다……신립에게 들어간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내어줄 수 없다구요. 그래서 약조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는….생각했어요 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요. 꼭둑각시로 만들면 그건 이미 신 장군이라 할 수가 없으니까요. ……풍생수는 저를 몹시 다그쳤습 니다. 그리고 신 장군을해하라고 시켰어요. 신 장군이…………… 신 장군이 돌아가시면 영혼을 거두어 영겁토록 같이 있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는 알았답니다. ……신 장군의 씨가… 자라고 있었어요…….그래서 차마 차마…….”

금옥은 신립의 집에까지 갔으나 그곳에서 신립의 부 인이 잉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러움과 질투 심이 일었지만 신립이 잉태한 자식에게 살가운 정을 느끼는 것 같아, 풍생수의 말대로 차마 신립을 해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풍생수의 말을 어 기고 시일을 미루던 중, 금옥은 누군가의 법력에 의해 어딘가에 가두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권율 대장이었을 것이다. 권 대장이 도력으로 너의 기운을눈치채고 너를 잡아가둔 것일 게야.” 

“그것은…… 그것은 쇤네도 모르겠습니다. …그러 나 그 후에도……… 풍생수는 계속 저를 유혹했습니 다. ………자기 말만 들으면 내보내주겠다고 말입니 다. ……저는 그러나 넘어가지 않았답니다.”

“어째서?”

“저는…………… 비록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신 장군의 주변 에 있었지요…………….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다가…………그러다가…….”

“그러다가?”

결국 풍생수는 화가 치밀었는지 금옥에게 무슨 술법 인가를 가했다.

그래서 금옥은 비록 영혼의 몸이었지만 그 충격을 받고 이지를 거의상실하게 되었다. 때문에 금옥은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기억하지 못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서서히 풍생수에게 세뇌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풍생수는 무슨 술수를 부려서 병을 깨뜨리 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신립에게 무슨 계시 가 내린 것처럼 일을 꾸몄다. 그런 연유로 신립이 진을 칠 위치를 바꾸게 된 것은 태을사자로서도 쉽 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풍생수는 신립을 직접 해하지 않은 것인가? 그놈의도력으로 볼 때 그 정도는 쉬울 것 인데?”

“그런 것은 모르옵니다. 좌우간 쇤네는 죽어 마 땅합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있어 마땅합니다. …………이곳에 당도하면서부터 조금씩 정신이 들어 지 난 일을 제대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 가신 장군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요?”

여인이 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자 태을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 신립의 패 전을 책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진정한 흉수는 풍생수와 마계의 존재들이라 해야 옳을 것이었다. 태을사자는 다시 이판관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너를 풍생수에게 넘긴 것이 이판관이 확실하냐?”

“틀림없사옵니다. 쇤네가 무엇 때문에 거짓을 아뢰오리까.”

“너는 아까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어찌 이판관을 알 아보았지?”

“사실 그 호랑이의 꼬리에 들었을 때부터 조금씩 정 신이 돌아오는것 같았사옵니다. 그런데 저승으로 와 서 이판관을 보게 되어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요. 그 런데 그러자마자 다시 정신이 몽롱해져서 예전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로 도착하고서야 다시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구요…….”

그러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승아가 끼여들었다.

“그건 백망섭혼술(百忘魂術)이라는 술법이라서 그 래요.”

“백망섭혼술?”

은동이 희한하여 되묻자 승아는 은동에게 눈을 껌벅 해 보이더니물이 쏟아지듯 줄줄이 유창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상대방의 심지에 충격을 주어서 아무 것도 생각 못 하고 바보같이만드는 술법이죠. 워낙 악독한 것이라 마계에서나 사용하는 방법인데사계의 판관이 그런 수법을 쓴다니 묘하군요.”

태을사자는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 다.

‘그렇다면 이판관이 마계의 존재와 소통하고 있었다 는 뜻인가? 은동과 금옥이 보았다는 것, 즉 노서기 를 소멸시키고 손바닥으로 흡수시켜 버렸다는 이야 기도 사실이란 말인가?’

태을사자는 머리가 혼란스러워 고개를 설레설레 저 었다.

‘아니, 더 나아가 나를 이리로 보낸 것도 무엇인가 계략이 있어서였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무슨 계략을 꾸민 것인가? 지금 여기서시간을 소비한 것 도 어쩌면 이판관의 술수에 놀아나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꼴은 아닐까?’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여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예삿일이 아니다. 어서 돌아가야겠다.”

“호유화는 만나지 않고요?”

“이판관님이 만약 뭔가를 꾸며서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라면그대로 따를 수 없다. 일단 전후사정 을 알아본 후에 다시 오더라도 와야 하느니.”

그러자 은동 역시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어 렴풋이 깨달은듯이 별안간 소리쳤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요? 지는요? 조선군은요!”

“가만 있거라.”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전부 속임수였으면 어떻게 해요! 호유화를 불러 도 움을 청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면서요!”

“하지만 너와 금옥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행할 수는 없는 법.”

“아이구, 안 돼요! 안 돼!”

은동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실상 엄청난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태을사자 쪽이었다. 태을사자는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역시 결정은 내리기가 힘이 들었다.

‘만일 금옥과 은동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이판관 은 무엇인가를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 리보낸 것도 목적이 있어서 그리하였을 것이야.’ 

애당초 태을사자는 환수를 불러 그 도움을 청한다는 발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판관이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여기까지 오게 된것이다. 그렇다면 이판관 은 마계와 결탁하여 뭔가 좋지 않은 음모로자신을 보낸 것임이 틀림없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그 술수에 놀아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금옥과 은동의 말이 사실이 아니거나, 이들 이 뭔가를 오해하고 있다면 지금 여기까지 와놓고 되돌아가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게다가 신 립은 십중팔구 패할 것이고 탄금대에 진쳤던 수많은 영혼들은 또다시 마수들에게 잡혀갈 것이 분명하였 다.

결국 둘 중의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판관이 설마그럴 리가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금옥과 은동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는 생 각되지 않았다.

아무튼 만의 하나라도 일이 잘못 틀어지면 생계가 문제가 아니라사계도 큰일이 나는 판이었다. 태을사 자는 다시 돌아가서 사정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 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승아 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위험해요!”

승아는 몸을 던져 은동을 밀어내고 금옥의 옷자락을 잡고 땅바닥을 굴렀다. 태을사자도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피하였는데 그들이 몸을 피하자마자 날카로운 여러 줄기의 영력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공격을 한 것인데, 요기가 느껴지지 않는 영력으로 보아마수의 공격은 아니었다. 태을사자가 놀라 영력이 날아온 쪽을 돌아다보았다.

두 명의 저승사자와 두 명의 신장이 살기등등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의 저승사자 둘은 태 을사자가 아는 자들이었다.

“아니, 암류(流)사자! 명옥(冥沃) 사자! 이게 무슨 짓이오? 그리고여기는 어찌하여 온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법기를 들어 공격할 채비를갖추었다. 그 모양새를 보고 태을사자 는 놀라서 다시 소리쳤다.

“무슨 짓이오? 어째서 나를 공격하려는 것이오?” 

그러자 암류라고 불리운 저승사자가 크게 소리를 쳤 다.

“죄인 태을! 어떻게 감히 상관인 이판관을 살해하 고 신물을 훔쳐일을 꾸미느냐? 우리는 죄인인 너를 처단하러 왔다. 당장 법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태을사자는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머리끝에서 발끝까 지 찌르르 하고 전기가 도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온몸에서 힘이 주욱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도대체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 내가 처해 있는 문제만도 머리가 터져나갈 지 경인데 이판관이 소멸되었다고? 게다가 내가 죄인 으로 몰려 추격을 받다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태을사자는 자칫하면 놀라서 혼절할 지경이었지만 간신히 정신을수습하였다. 핼쓱하게 질린 얼굴을 서 서히 돌려 네 명의 살기등등한사자와 신장들에게 무 슨 말이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장들과 저승사자 들은 태을사자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 대로 짓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은동은 신장과 다른 저승사자들의 무지막지한 공격 에 질려 도망치고 싶었으나, 마치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굳어 버린 듯 몸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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