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23화 : 옥에서의 싸움
옥에서의 싸움
여우는 은동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흥하며 손에 들고 있던쇠고리를 내팽개쳐 버렸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다그쳤다.
“이건 금제를 가하는 고리 아니니? 이걸로 뭘 하려 고 했지? 결국너희 놈들도 마계 놈들과 똑같구나.”
은동은 변명할 말이 당장 생각나지 않아 우물쭈물했 다. 사실 그 쇠고리를 가지고 금제를 가하라 시킨 것은 이판관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태을사자가 호 유화에게 금제를 가하여 복종하게 하려 한 것은분명 한 사실이다. 그리고 자신도 태을사자와 같이 왔으 니 일당이라할 수 있었다.
여우가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으며 은동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바로그때 금옥이 그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너는 또 뭐야?”
“안…… 안 돼요. 은동이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라의 대사가 달린 일입니다.”
그러자 여우는 코웃음을 치며 휙 돌아섰다. 순간 은 동은 아주 스치듯 보았지만 여우의 꼬리가 일곱 개 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구미호의 꼬리가 일곱 개라니? 흠, 어딘가 좀 이상 한 것 같다.’
은동은 미심쩍은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 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의 대사고 뭐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수천 명의 조선군의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어요. 그리고・・・・・・ 그리고…….”
금옥은 숨가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신립이 생 각났는지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흠, 이런 판국에서도 부끄러운 생각이 들다니, 여 자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야.’
은동이 잠시 어이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거렸 다. 여우는 미적미적하는 금옥을 보며 성질이 난다 는 듯 외쳤다.
“그리고 또 뭐가 중요하단 말이냐? 너희는 이미 죽 은 몸인데, 죽고사는 것이 아직도 그리 큰일이냐?” 여우는 벌컥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휙 하니 달려 들어 금옥의 어깨를 나꿔챘다. 금옥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다. 물론 금옥은 죽은 영혼이었으므로 땅에 털썩 엎어진 것은 아니었다. 약간 공중에 뜬 상태였지만 그래도 엎어 진 것이나 다를바가 없었다. 그러자 은동은 금옥에 게 뛰어들면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말아요! 안 돼요!”
“요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감히 깜찍하게 나를 속이려고 해?”
여우는 금옥에게 뛰어들려는 은동을 꼬리로 철썩 소 리가 나게 후려쳤다. 그러자 은동은 눈앞이 캄캄해 질 정도의 고통을 느끼며 아까암류사자와 명옥사자 처럼 데굴데굴 굴러서 땅에 처박혔다. 구르던 은동 을 승아가 멈춰 일으켜 주었다.
그러자 여우는 금옥을 다시 한 번 후려갈겨 쓰러뜨 리고는 노한 듯이 날카롭게 소리를 쳤다.
“이놈들을 모두 한데 묶어서 잡아먹어 버리리라!”
여우는 도무지 화를 이기지 못하겠는지 휙 몸을 날 렸다. 허공에 떠오른 여우의 몸이 번뜩하는 빛과 함 께 세 개로 나뉘어졌다. 그러고는태을사자와 각각의 신장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놀란 것은 신장들과 태사자였다. 싸우는 도중에 느닷없이 세 마리의 흰 여우가 달려들자 싸움은 뒤 죽박죽이 되었고,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알 수 없 는 싸움이 벌어졌다.
유진충이 태을사자를 공격하다가 여우의 꼬리에 얻 어맞기도 했고태을사자가 고영충을 치려다가 여우가 뿜어내는 기운에 스치기도 했다. 한동안 그렇듯 뒤 죽박죽으로 싸우고나자 신장들과 태을사자는 가뜩이 나 지친데다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 었다. 그때태을사자가 소리를 쳤다.
“우리의 잘잘못은 뒤에 가리고 일단 이 요물을 물리 칩시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태을사자는 이판새판으로 소리 를 쳤다. 어차피자신은 사계에서 쫓김을 당하는 판 이었으나 그 시비는 나중에 자연히 가려질 터이고, 일단은 호유화를 잡는 것이 더 문제였다.
지금은 비록 자신과 신장들이 지루한 싸움으로 다소 지쳤다고는하나, 호유화의 법력은 정말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제 금제의 고리마저도 놓쳐 버 린 마당에, 아무리 자신의 법력이 예전보다 불어났 다고는 해도 호유화의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때에 호유화를 잡지 못한다면 호유화를 다시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의 안위보다도 흑풍사자와 윤걸 무사의 법력을 헛되이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신장들에게 일단 힘을 합쳐 호유 화와 싸우자고 제안한 것이다.
신장들은 그 말을 듣고 솔깃하는 눈치였다. 지금 이대로 싸우다가는 태을사자를 잡기는 고사하고여우 에게 모두 죽어 버리게 될 판이 아닌가? 유진충이 화극을 휘둘러여우의 공격을 막으면서 소리를 질렀 다.
“거짓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저승사자는 거짓을 모르오! 나도 염왕께 아뢸 말 이 있으니 우리의시비는 뒤에 가리고 일단 이 미친 요물부터 잡읍시다!”
그러자 여우는 더욱 펄펄 날뛰었다.
“미친 요물? 이것들이 정말!”
여우는 화가 난 듯 세 마리가 동시에 태을사자를 노 리고 달려들었다. 세 마리 모두 꼬리가 솟구쳐 오르 며 흰 바늘 같은 기운을 내뿜었다. 호유화의 미모침(尾毛)이었다!
태을사자는 얼른 묵학선을 휘둘러 한 무더기의 미모 침을 옆으로퉁겨냈지만 미모침은 사방팔방에서 걷잡 을 수 없이 닥쳐 들어왔다.
그때 유진의 화극과 고영창의 장창이 태을사자의 옆을 방어하여 미모침을 도로 퉁겨냈다.
태을사자가 방금 한 약속은 인간 세계에서라면 언제 든지 거짓으로돌아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태을 사자나 신장들은 모두 저승의 존재들이라 그럴 염려 는 없었다. 저승의 존재들은 본디 거짓말을 하지않 기 때문에 그들은 태을사자를 의심하지 않고 힘을 합해 이 위기를뚫고 나가기로 마음을 모았던 것이 다.
“좋소, 대장부의 약속을 믿겠소! 이놈을 먼저 잡고 다시 겨릅시다!”
유진충이 소리치자 태을사자는 크게 기운을 얻어 큰소리로 되받았다.
“좋소이다!”
태을사자는 소리침과 동시에 묵학선을 허공에 뿌렸 다. 묵학선은 이미 네 명의 법력이 뭉쳐 있어 전보 다 훨씬 커다란 검은 학의 모습으로변했다. 학의 날 개가 한 번 휘둘러지자 세 마리 여우들의 몸이 휘청 거렸다. 곧바로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꺼내 양손으로 쥐고 남아 있는 법력을 모두 몰아넣었다.
그러자 윤걸의 법력이 우르르하면서 전해져 오는 것 이 느껴졌다.
검 속에 봉인되어 있는 윤걸도 위기를 깨닫고는 힘 을 보내기 시작한것이다. 그리고 유진충과 고영창, 두 명의 신장은 좌우로 갈라져서 각기 화극과 장창 을 들고 여우의 옆을 노리고 들어갔다. 그러자 세 마리의 여우가 빙그르르 뭉쳐 다시 하나로 변했다.
“이것들이 정말? 봐주면 안 되겠군!”
한 마리로 변한 여우가 크게 노하며 몸에 달려 있는 아름다운 꼬리들을 곤두세웠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고통에 시달리며 막 몸을 일 으키던 은동은여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호유화는 구미호라고 했으니 원래는 꼬리가 아홉 개여야 하는데, 아까 본 바로는 꼬리가 일곱 개였으되 어느 틈엔가 여덟 개로 변해 있었다! ‘어? 저게 어 떻게 된 것이지? 어째서 꼬리가 하나 더 늘었을 까?’
그러나 태을사자와 신장들은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서 그런 것에는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여우가 세마 리로 나뉘어져 있을 때에는 그 도력도 삼분의 일씩 이라 비교적 상대하기 쉬웠지만, 한 마리로 합쳐지 자 도력이 세 배가 되니 그야말로 힘이 막강했다. 하지만 호유화가 미처 짐작하지 못한 한 가지 사실 이 있었다. 태을사자가 법력이 그다지 높을 것이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태을사자가 흑풍사자와 윤걸의 법력을 지니고 있다 는 것을 호유화가알 턱이 없었다. 그러니 태을사자 가 세더라도 일반 저승사자보다 조금 센 정도라고 여길밖에………….
게다가 저승사자 하나를 상대로 둘이 덤벼도 쉽게 이기지 못하는신장들을 보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그 신장들을 어서 빨리 물리치라고 두명의 저승사자의 법력을 태을사자에게 보태어 주었던 것인데, 막상 부딪치고 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 다.
즉, 한 명의 저승사자의 힘을 하나라 하였을 때 호 유화의 계산으로는 태을사자가 두 명의 저승사자의 힘을 더했으니 셋이고, 나머지 두명의 신장들의 힘 을 합해도 하나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합이 다 섯, 조금 더 잡아도 여섯 정도가 되는 것이라 여겼 다.
실제로는 이제 태을사자의 법력은 백아검 자체의 힘 까지를 합하여여섯이었고, 두 명의 신장들은 호유화 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려 세 배나 강하여 각각이 셋 정도였다. 따라서 도합 열 둘이 되어 호유화의예측 보다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셋이 합세하니 호유화의 도력에 비해 별로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호유화로서도 바짝 긴장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물론 도력이 셋으로 분산되어 있으니 호유화가 아직도 강하기는 했지만 그 셋은 아주싸움 에 능하여 분산공격을 펼치자 호유화에게 그리 밀리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신장과 태을사자가 싸워서 승패가 난 뒤에나머지 놈들을 해치우는 것인데…………… 그리했으면 아주 간단하게 끝낼일인데 괜한 헛고생 이네.’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상태였고, 은동 앞에 서 호기를 부리느라 뛰어들었으니, 이제는 돌이킬 방법도 없었다.
허공에서 일전이 벌어지는 그 와중에 금옥은 비틀거 리면서 일어나땅 위에 둥둥 떠 있는 쇠고리를 집어 들었다. 어쨌거나 지금 조선군을구해낼 수 있는 것 은 태을사자밖에 없었고, 금옥이 믿고 의지할 자도 태을사자뿐이었다. 문득 금옥이 쇠고리를 집어드는 것을 보고 태을사자가 소리를 쳤다.
“그것을 여우에게 던져라! 어서!”
그러나 금옥은 그 쇠고리를 집어들고 망설이고 있었 다. 아까 울달과 불솔이 태을사자에게 금제의 주문 을 말해주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기억이 나지를 않았 다. 그때는 정신이 몽롱한 상태였기 때문에 주문이 무엇인지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그………… 금제 무엇이라고 했는데……. 아휴, 왜 이렇게 기억이 안날까!’
은동은 망설이는 금옥을 보며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 았다. 승아가있었다면 분명히 자신이나 금옥을 방해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신기하게도, 어느 틈 에 없어졌는지 승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은동은 괴이하게 여겼지만 일단은 안심을 했다. 그 주문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금옥에게 소리쳐 주문을 가르쳐주었다.
“복마! 금제복마예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그러나 허공에서 싸우고 있던 여우가 일순간 은동의 소리를 알아차리고 입으로 후욱 입김을 불었다. 바 로 그때 유진충의 화극이 여우의 갈기를 스치고 지 나갔으나, 그 바람은 마치 폭풍우처럼 우르릉거리며 금옥과 은동이 있는 곳을 휩쓸었다.
그 통에 은동의 말은 그 영력이 깃든 바람 소리에 묻혀서 금옥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말만 전달되 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은동과 금옥은 그 영력이 섞인 폭풍에 휘말렸다. 몸이 바닥에 데굴데굴 구르자 극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태을사자는 그것을 보고 더더욱 마음이 급해져서 더 이상 만검법을 쓰지 못했다. 만검법은 마음을 비우 고 차분하게, 그리고 느리게 검을 움직여서 적의 공 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검법이었다. 마음이 조급 해지니 더 이상 만검법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검법이 허물어지자 호유화는 집중적으로 태을사자 를 공격해 들어왔고 태을사자는 다시 호유화의 공격 에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유진충과 고영창은 아까의 일을 잊고 힘을 다해 화극과장창을 휘둘렀으나 호유화는 그 둘 을 되받아쳐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힘으 로 방어만 하면서 모든 공격을 태을사자에게로 집중 시켰다.
태을사자는 묵학선까지 도로 거두어들여 양손에 백 아검과 묵학선을 들고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었으 나 조금씩 밀리는 것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두 신장은 그 모습을 보며 초조해졌다. 태을사자와 이대 일 로 싸웠어도 이기지 못했던 참이라, 태을사자가 만 약 쓰러진다면 자신들도 속절없이 이 요물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유진충은 싸우다가 갑자기 무언가 결심을 한 듯 눈빛을 번쩍이며 태을 사자에게 소리쳤다.
“조심하시오!”
그러고는 별안간 화극을 허공에 던져 버리고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던져진 화극은 흰 안개처럼 변 하여 유진충의 몸에 솨악 스며들었다. 그러자 고영 창은 낯빛이 변하면서 소리쳤다.
“유공! 안 되오!”
순간, 유진충의 몸이 환하게 빛나면서 유진충의 창 에서 벼락 같은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기세 등등하던 호유화마저도 몸을 멈칫하더니 벼락같이 몸을 뒤로 돌렸다.
“아니, 광천멸사(光天滅邪)? 저 녀석이! 삽시간에 호유화의 꼬리들이 부채처럼 퍼져나가면서 호유화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 다음 순간, 유진충의 몸에서 뻗어나간 광채는 마치번갯불처럼 호유화에게로 쏘아져 나갔고, 호유화의 꼬리에 부딪쳐서굉장한 폭발을 일으켰다.
태을사자와 고영충의 몸도 공중에서 서너 장이나 뒤 로 퉁겨져 날았고 땅바닥에 처박혀 있던 금옥과 은 동도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몸이 가벼운 은동이 더 멀리 날아가려는 찰나, 금옥이 손을 잡아주어 저멀 리 날아가려는 것을 간신히 모면했다.
유진충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번개 같은 광휘는 끊이지를 않고호유화의 꼬리막을 지져대고 있었으 며, 무시무시한 불꽃과 폭풍이 꼬리막에서부터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호유화는 조금도 밀리는 기 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유진충이 몸을 비틀거 리기 시작했다.
“유공!”
고영충이 소리를 지르면서 유진충에게로 달려들었 다. 대뜸 법기를허공에 던지더니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영충의 장창도 고영충의 몸으로 스며들었고 그러자 그 번갯불 같은 것이 더욱더 강렬 해졌고 불꽃들과 폭풍도 더욱 강해졌다. 그들이 쓴 술수는 성계의 강력한 술법인 광천멸사 법으로, 자 신의 법기의 힘과 자신의 힘까지를모두 더하여 대단 히 뜨거운 빛을 뿜어 적을 태워버리는 술수였다. 그 러나 법력의 소모가 거의 동귀어진의 술수라고 할수 있었다. 금옥은 은동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으나 폭풍이 더 거세어지자 금옥마저도 은동과 함께 마구 날아가기 시작했다. 태을사자가 가지고왔다가 떨어뜨린 두루 말이도 너풀거리며 날면서 찢어지려 하였다. 오로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울달과 불솔이 변 한 쇠고리뿐이었다.
고영충이 유진충에게 합세하자 공격력은 더 강해졌 지만 그래도 호유화는 끄떡없이 버텨내었다. 태을사 자는 할 수 없이 묵학선과 백아검을 회수하면서 그 안의 법력까지 끌어모아 다시 고영충의 어깨에 손을 짚고 법력을 가했다. 태을사자는 사계의 사자이고, 유진충과 고영충은 신장들이었으니만큼 양쪽의 도력은 다른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 가 아니었다.
일단 세 명의 도력이 합해지자 불꽃은 백열하는 광 채를 내면서 무시무시하게 강해졌다. 그러자 호유화 의 꼬리막이 떨리면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렇지만 호유화는 아직도 버텨내고 있었다.
어느덧 폭풍은 소용돌이로 변하여 회오리처럼 맴돌 더니,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모조리 불꽃에 휩싸이 고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맞잡고 있 던 금옥과 은동의 손이 풀어졌다. 은동은 금옥을 소 리쳐 불렀으나 금옥은 이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승아를 불렀다. 그때 갑 자기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승아는 아까 없어지지 않았던가? 도대체 어떻게……’
소용돌이치는 아수라장 속에서 무엇인가가 은동의 어깨에 덜컥 걸렸다. 굵직한 나뭇가지에 끼인 것이 다. 이곳은 저승의 뇌옥이라, 모든자연의 존재들 또 한 영체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라 그 나뭇가지도 부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중이었다. 쭉 뻗은 나뭇가지가 꿈틀거 리며 안으로 오그라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은동은 그 나뭇가지를 꽉 끌어안고 무시무시한 바람 에 저항하려했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는 은동이 무 거운지 움찔거리며 떨쳐내 버리려고 기를 쓰는 것이 아닌가? 은동은 깜짝 놀라 그만 손을 놓을 뻔했다. 이곳이 저승인 줄은 알았지만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몹시 놀랐다. 비록 아 까 자비전 뜰에서 움직이는나무들과 놀지 않았더라 면 놀라서 손을 그냥 놓쳤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위험한 판이라, 죽을 힘을 다해 나뭇 가지를 잡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느닷없이 무 엇인가가 철썩 하며 은동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 바 람에 은동은 놀라 얼떨결에 나뭇가지를 놓고 얼굴에 붙은 것을 손으로 잡았다.
나뭇가지를 놓친 은동의 몸이 다시 회오리바람 속으 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은동은 빨려 들어가면 서 얼굴에 붙은 것을 잡아떼었는데 그것은 노서기가 태을사자에게 주었던 바로 그 두루말이였다.
‘왜 재수없게 이게 얼굴을 쳐?’
은동은 씨근거리면서 두루말이를 손에 쥐었다. 은동과 금옥이 회오리바람에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 귀를 멍멍하게만드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회오 리바람은 중심부에서부터 터져나가면서 굉장한 힘을 뿜어냈다. 은동은 그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압력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 했다.
한 차례 거센 폭풍과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곧이어 거짓말처럼 말끔히 가셨다. 폭풍이 가신 후 은동은 기운이 없어 몸이 축처졌고 사지가 쑤셔와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드니 저만치에 나뒹굴고 있는 금옥이 보였다. 그녀또한 상당한 타격에 정신을 잃은 것 같 았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니 아까 회오리바람의 중 심부였던 곳에 아직까지도 서 있는 여우가 보였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공중에 떠 있는 태을사자도 있 었다.
여우는 흰털이 마구 그슬리고 털이 뒤엉켜 볼썽 사 나운 꼴이었지만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그리고 태 을사자는 그야말로 금방이라도없어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장포와 갓이 다 찢어져 나가 처 참한 몰골이었고, 몸조차 반쯤 투명해져 있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백아검만은 양손으로 쥐고 있었다. 유진충과 고영충, 두 명의 신장은 정신을 잃고 저만 치에 둥둥 떠 있었다.
은동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여우가 아직도 멀쩡한 것 을 보고 놀라움에 겨운 신음을 토해냈다.
‘아이구, 원 세상에…………. 그렇게 싸우고도 아직도 멀쩡하다니! 저구미호는 정말로 지독하기 이를 데 가 없구나!’
은동이 보기에 태을사자는 아직도 검을 쥐고는 있었 지만 금방이라도 검을 툭 떨어트리고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우는 비록보기 흉한 몰골이 기는 하나, 특별히 다친 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 다.
태을사자는 울분을 참지 못해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진충과 고영충이 썼던 술법은 광계의 주술로서, 자기 몸의 법력을 소진하여 빚으로 공격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대단히 위험한 술법이라목숨을 걸고 사 용해야만 했다.
그렇듯 목숨을 걸고 그 술법을 사용했건만 호유화는 막아내었던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멀쩡했으니, 이제 더 이상 태을사자에게는 승산이 없어 보였다.
‘아니다. 포기해서는 아니 된다.’
태을사자는 다시 흑풍사자와 윤걸을 생각했다. 그들 을 위해서라도여기서 쓰러져 버리면 안 되었다. 그 들의 원수를 갚고 일을 해결하기위해서는, 그리고 지금 자신이 덮어쓴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호유화 를 꼭 굴복시켜야만 했다.
그때 문득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으로 사용할 수있는 방법. 태을사자는 급히 백아검 으로 자신의 남은 법력을 모조리몰아넣었다.
그리고 긴 기합과 함께 백아검을 휘두르며 여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여우는 태을사자나 백아검 모두 법력이 거의 빠져나간 상태인것을 보고 백아검의 날을 가볍게 손 으로 잡았다. 그러고 나서 여우는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내 수천 년 동안 이런 낭패스러운 일은 처음 겪어 보았다. 하지만 이제는 끝이야.”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백아검의 안쪽에서 붉은빛이 확하고 튀어나와 여우를 쳤다. 여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려 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거리가 너무나 가까웠고 손에 잡힌 칼에서 무엇이 튀어나온 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던 터라 그만 어깨를 적중 당하고 말았다.
그 물체는 바로 윤걸의 법기였던 육척홍창이었다. 윤걸은 백아검속에 봉인되어 검과 하나의 몸이 되었지만 아직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윤걸의 법기였던 육척홍창도 백아검 속에 들어 있었던것이 다.
칼날 속에 그보다 더 큰 창이 들어간다는 것은 보통 의 경우에서는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육척홍창은 법기였고 윤걸의 심령에 의한물건이라 그런 공격이 가능했다. 단, 이제 육척홍창은 다시 백아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깨를 맞은 여우는 큰 타격을 입었는지 몸을 뒤로 물러섰다. 그때은동은 여우의 꼬리가 여전히 여덟 개임을 보았다. 그러나 여우는 크게 타격을 입은 것 같았지만 쓰러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노 기서린 목소리로 무섭게 외쳤다.
“이・・・・・・ 이놈! 너를 가만 두지 않겠다!”
소리와 함께 여우는 태을사자에게로 몸을 날려 무시 무시하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태을사자조차 여우의 지독함에 몸이 떨렸다. 도대체 이 놈의 여우는 어떻 게 이토록 끈질긴 것일까?
태을사자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법력이 그다지 필요 로 하지 않는만검법을 써서 여우의 찔러 들어오는 꼬리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었다. 삼합, 사 합…… 여우의 공격은 점점 기세를 더해갔고 태을사자는 그 공격을 막아내느라 급급하였으나 점차 패색이 완연 해졌다. 점점 밀려서 이제는금방이라도 검을 손에서 떨어뜨릴 지경이 되었다.
태을사자의 만검법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적이 공격 하는 진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몹시 지치고 법력이 고갈되어있었던 터라 검이 자꾸 비뚤어져 제대로 진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은동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태을사자가 쓰러지면 만사가 끝장이었다. 은동은 안절부절못하여 울달과 불솔이 변한 쇠고리를 찾았으나쇠고리는 눈에 띄이 지 않았다.
순간 자신이 쥐고 있던 이상한 두루말이에 무엇인가 그려져 있는것을 힐끗 보았다. 아까 회오리바람이 몰아치자 얼굴을 내리쳤던 그두루말이는 노서기가 태을사자에게 준 것이었다. 그 두루말이 속의 그림은 바로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그림이었다.
‘구미호! 여기 혹시 무엇이라도 적혀 있지 않을까?’
은동은 구미호의 그림을 보며 혹시라도 도움이 될 내용은 없을까하여 그림을 훑어보았다. 그림 아래로 이상한 글자로 씌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사계 의 글자였다. 다행히 이미 영혼의 상태인 은동은자 연스럽게 그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곳에는 다음 과 같은 말이 씌어 있었다.
– 구미호(九尾狐). 환계(幻界)의 환수(幻獸). 반정 반사(正邪)로 제멋대로의 성격이다. 아홉 개의 꼬리를 이용하여 분신을 할 수 있으며그 각각이 변 해 싸울 수 있다. 둔갑에 매우 능하고 허상을 만들 어 상대를 지치게 하는 술법에 능하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은동은 다른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않았다. 꼬리를 이용하여 분신하고 그 각각이 변해 싸운다는 글자가확대되어 은동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래, 틀림없다! 승아는 호유화의 꼬리분신이었어!’
아까 승아는 태을사자에게 의심을 받자 절대 호유화 가 아니라고맹세를 했었다. 은동도 처음에는 그 말 을 믿었었으나 승아는 저 여우가 본격적으로 싸움을 시작할 적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그때 여우의 꼬리가 일곱 개에서 여덟 개로 늘어났다. 그러한 정황으로 보건대, 승아는 지금 꼬리의 일부 로 여우에게 합쳐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 고 승아의 맹세도 생각났다. 자신은 호유화에게 딸 린 몸이고 호유화를 섬기는 몸, 날 때부터 그리 되 었다고 맹세했었다.
승아의 정체가 호유화의 꼬리라면, 승아가 이야기한 부분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맹세를 어긴 것이 되지 않는 셈이었다.
‘틀림없어! 호유화는 정말 교활하구나! 그런데 호 유화의 나머지 꼬리 하나는 어디로 갔을까?’
은동은 불안해졌다. 저 여우는 내내 꼬리 여덟 개를 달고 태을사자, 신장들과 대적했다. 그러나 아직도 꼬리 하나가 모자란다는 것은 어딘가에 그 분신 하 나가 숨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은동은 불안해져서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나 머지 하나의 분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은동은 다시 쇠고리를 찾았다. 지금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단 한 가지 남은 방법은 쇠고리로 금제를 가하는방 법뿐이었다.
잠시 사방을 주의깊게 둘러보자 저만치에 쇠고리가 떨어져 있는것이 보였다.
은동은 엉금엉금 기고 구르다시피하여 그쪽으로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창 공격과 수비를 거듭하던 여우와 태을사자 역시 은동의 움직임과 쇠고리를 보았다. 여우는 크게 놀 라 몸을 빼려 했으나 태을사자가 정말 죽을 힘을 짜 내어 백아검을 휘둘러댔다.
“으아아!”
태을사자는 울부짖듯 고함을 치며 방어는 할 생각도 않고 숫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러대었다. 법력이 고갈되어 만검법을 제대로 쓸수도 없는 지경이라 닥 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태을사자의 광기서린 공격에 여우는 놀랐는지 간신히 태을사자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 사이 은동은 마침내 쇠고리를간신히 손에 넣었다. 그리고 쇠고리를 공중에 던지면서 큰 소리로 외쳤 다.
“복제금마! 복제금마……………”
두 번 주문을 외치면서 은동은 손가락으로 여우를 가리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어디에서 튀 어나왔는지도 모를 무엇인가가무서운 속도로 은동에 게 덮쳐들었다.
‘아이구! 호유화의 마지막 남은 분신이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은동은 공포에 질려서 마지막 주문을 크게 외웠으나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복제금…… 마!”
이미 주문이 은동의 입을 떠났으나, 여우를 가리키려 했던 손가락이 엉겁결에 덮쳐 들어오는 분신을 가리켰다. 방향이 어긋나 은동은크게 당황했지만 이 미 주문은 입을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그 순간,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놓쳐 막 여우의 꼬리 에 적중당하려던 참이었다.
별안간 쇠고리가 공중에서 크게 팽창하더니 휙 하고 날아가 은동에게 달려 들어오던 물체와 부딪쳤다. 그 뒤를 이어 길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났다.
“아아아아!”
백아검을 놓친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으나 여우의 공격은 없었다. 하늘을 가르는 듯 한 째지는 비명소리에 태을사자는 눈을 떴다. 그러 자기이한 광경이 보였다.
저만치에 금옥과 두 명의 신장, 그리고 두 명의 저 승사자가 혼절한채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은동은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앞에 흰 소복을 입은 웬 여인이 목을 움켜쥐고 몸을 수그리며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그 여인은 고통에 겨운 듯 고개를 숙이고 비명을 지르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몸 전체에서 요염함이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약간은 고풍스러운 흰 옷이 었는데 마치 소복같았다. 흰 옷이 몸에 착 달라붙은 지라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묘한 요염 함이 풍겨나왔다.
그리고 신을 신지 않은 뽀얀 맨발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또한 묘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가장 특이한 부분은 머리카락이었다.
그 여인의 머리카락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R다. 그 백발은 댕기로땋은 것도 아닌데도 아홉 가닥으로 가 지런히 갈라져 길게 늘어져 땅에 끌리고 있었다.
“여우는 어찌되었느냐?”
태을사자는 간신히 입을 열어 은동에게 물었으나 은 동은 넋이 나간 듯 여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은동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 었다. 분명 금제를 여우에게 가하려던 했는데, 자신 에게 덮쳐들던 그림자에게 얼떨결에 가하고 말았다. 그런데 금제를 하고 보니, 여우가 아니라 여자 아닌가?
“내………… 내가 잘못한 것 아닌가요?”
그러자 태을사자도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 다. 은동이 여우에게 금제를 가하지 않은 것만은 분 명했다. 그렇다면 여우는 어디로간 것일까? 바로 그 순간 여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생김새였다. 갸 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눈이 매우 초롱초 롱 빛나는 것이 그야말로 미인형이었다.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매서워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 여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은동에게 외쳤다.
“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은동은 그 여인이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는 느낌이 스쳤다. 자신의실수로 여우를 금제하지 못하고, 엉 뚱하게 낯 모르는 여인을 못살게굴고 있는 것이 아 닐까 싶었다. 은동은 뜨끔한 마음에 놀란 얼굴로 태 을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은동이 들고 있다가 떨어뜨린 노서기의 두루말이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일순 얼굴빛이 환해지면서 은동에게 다가와 은동의
어깨를 철썩 쳤다.
“잘했다, 꼬마야! 정말 잘했어!”
“네? 아…… 나는…… 실…… 실수로…….”
“아니다. 네가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이 여 인이 바로 호유화가 틀림없다!”
“네? 어…… 어떻게………..”
그러자 여인은 슬픈 듯한 얼굴빛을 지우고 표독스럽 게 인상을 쓰면서 소리를 질렀다. 흰 머리카락이 솟 구쳐올라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세심히 살펴보니, 호유화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불에 탄 것처럼 그슬려 있었다. 그 모양새와 노서기의 두루말이를 보고 파악한 것이다.
“이…… 이놈! 당장 이걸 풀지 못하겠니?”
은동은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태을사자가은동의 어깨를 잡았다.
“겁먹지 마라. 그리고 조이라고 해라.”
“조이라고요?”
이상하다는 듯이 은동이 중얼거렸는데 그 다음 순 간, 여인은 다시으아악 하는 소리를 내며 목을 움켜 잡고 신음성을 토해냈다. 솟구쳤던 머리카락도 다시 기운을 잃고 어지럽게 흩어졌고……………..
은동은 또다시 놀라 움찔거리며 멀거니 서 있었다. 태을사자가 대견하다는 듯이 은동에게 물었다.
“대단하구나. 어떻게 호유화의 진신(眞身)을 알아보 았지?”
“이상해요. 나는 호유화의 분신에게 금제구를 씌우 려고 했어요. 꼬리가 여덟 개여서………….”
그러자 호유화가 고통과 울분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면서 악을 썼다.
“하늘의 뜻이구나! 하늘의 뜻! 저 꼬마가 내 본색 을 알았을 리가 없어! 아………….. 내가… 내가 잡히 다니!”
은동은 여우의 꼬리가 여덟 개인 것을 보고 분신 하 나가 숨겨져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 판 단한 것이었다.
그 여우 자체도 호유화의 꼬리가 변한 분신이었으 며, 그 때문에 꼬리가 하나 부족했던 것이다. 그때 문에 여우는 은동이 호유화냐고 물었을 때도 다소 애매하게 대답을 했었다.
호유화는 처음에 태을사자와 신장들을 우습게 보았 지만, 태을사자와 신장들의 목숨을 건 공격을 받자 전력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진짜 모습을 드러내었다가는 혹여 금제 구에 걸릴지도모른다고 신중을 기했다. 그 금제구가 해결되기까지는 진짜 모습을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신장들과 태을사자의 전력을 다한 광천사 의 공격에 크게혼쭐이 나 희뜩했다. 그러다가 태을 사자가 내지른 육척홍창에 상처를입고는 마음이 다 급해지고 성질이 뻗쳐올랐다.
때마침 은동이 금제구를 던지는 것을 보고서 이제야 되었구나 싶어 몸을 드러내었는데…………. 비록 꼬리가 둔갑한 여우가 금제를 당할지라도 진짜 호유화의 몸 이 금제를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꼬리만 묶이 는 것이니 진짜 몸으로 다시 태을사자 일행을 해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은동을 덮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은동은 어린아이라 겁이 많았다. 겁에 질린 은동은 얼결에 자신에게 덮쳐드는 물체를 가리키게 되어 그 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좌우간 결과적으로, 태을사자 혼자 힘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적인 호유화의 진신을 잡은 셈이었다. 그야말로 은동은 크나큰 공을 세운 것이 나 다름없었다.
“아무튼 잘되었다. 호유화를 잡았으니, 어서 그녀를 심문하여 시투력주를 토해내도록 다그쳐라.”
그러나 은동은 고통받는 호유화의 모습을 숨죽여 보 고 있다가 말했다.
“풀어.”
그러자 호유화의 고통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목에 걸린 금제구가주문을 외운 은동의 말을 듣다니!고 통이 없어지자 호유화는 이때다 싶어 순식간에 몸을 솟구치며재주를 넘더니 사라지고 말았다.
은동은 크게 놀라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구! 도망을…………? 조여! 조여! 조여!”
그러자 갑자기 허공에서 으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뭔가 털썩 떨어져내렸다. 바로 호유화였다.
은동이 다급한 끝에 여러 번 조이라는 말을 한 탓에 호유화의 고통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했 다. 고통받는 호유화를 보며 은동은 또다시 놀랍기 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말했다.
“풀어.”
그러나 호유화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두 번・・・・・・ 두 번 더 외쳐! 아이구!”
그러자 은동이 다시 말했다.
“풀어, 풀어.”
그러자 호유화는 후우 한숨을 내쉬면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당장은 고통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이 작은 꼬마녀석이 자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고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러나 은동은 그런 기색도 모르고 천진하게 물었다.
“많이 아프세요?”
“이놈! 확 죽여…….”
그러자 은동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조……”
그러자 호유화는 단번에 인상을 바꾸어 태평한 표정 으로 은동에게살살거렸다.
“아냐 아냐. 내가 장난친 거야. 내가 너를 왜 죽이 겠니? 그런데 은동이 너 참 귀엽구나.”
호유화는 생글생글 웃으며 은동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은동은호유화의 속셈을 모를 정도로 멍청한 아이가 아니었다. 은동은 대뜸뒤로 물러서며 말했 다.
“미안해요.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어요.”
“그러면 어서 이걸 풀어줘.”
“난 풀 줄 몰라요. 나중에 저승의 이판관을 만나게 되면 혹시 풀 수있을지 몰라도…….”
은동은 말끝을 흐리다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까 신장들과 저승사자들이 태을사자가 이판관을 살해했다고 하면서자신들을 잡으러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판관은 이미 소멸되어 없어진 셈인데,
그렇다면 누가호유화의 금제를 벗겨줄 수 있을 것인 가? 호유화도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갑자기 안색 이 변했다.
“야! 너…………..! 너…………..!”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해 호유화가 손톱을 바짝 세 우며 은동에?
달려들려고 했다.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지만 손 톱을 뻗치자 마치고양이가 발톱을 펴는 것처럼 다섯 치는 됨직한 날카로운 손톱이 쭉쭉 뻗어나왔다. 은 동은 등골이 오싹하여 몸서리를 치면서 외쳤다.
“조여조여조여조여…………….”
순간 호유화는 숨이 끊어질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더 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 고 기절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숨은 쉬 게 해주었으나 완전히 풀어주지는 않았다.
“이… 이 녀석………… 아이구. 여자를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야? 아이구구…… 나 죽네…….”
그러자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태을사자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여자도 여자 나름이지. 너처럼 무서운 여자를 어찌 다루겠느냐?
그런데 네 말투는 좀 이상하구나. 어찌 그런 말을 쓰는가?”
그러나 호유화는 태을사자를 매서운 눈매로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은동은 그런 호유화가 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호유화에게 말했다.
“왜 그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호유화님. 죽을 죄를 지었답니다.”
“왜 절을 하는 거니?”
“당신은 나를 아까 저승사자들에게서 구해주었으니 내 은인이라할 수 있지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금제하여 고통을 주고 협박했어요.
이 모두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만 반드시 부탁할 것 이 있어서 할 수없이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은동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었다. 그 말을듣자 호유화는 크게 감탄했다. 은동은 비록 어리기는 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넓고 솔직한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수천 년 동안 방종하게 살아온 호유화였지만 이제껏 자신을 이렇듯 생각해주는 자를 알지 못했다. 과거 자신이 도를 닦는 것을 도와주었던 그 사람은…………. 갑자기 과거의 생각이 떠오르자 호유화는 고개를 저 어 상념을 떨쳐 버렸다.
은동이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도 맹세합니다. 제가 사리사욕을 위해서 당신에 게 무리한 일을시키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거예 요. 세 가지 일만 들어주신다면 자유롭게 해드리겠 습니다.”
호유화는 그 말에도 감명을 받았다. 호유화의 재주 정도라면 어떤일이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사실 좀 전에 몸이 풀려나자마자 은동을살살 꼬여 아무 소원이나 빌게 만들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은동이 이렇듯 솔직한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자기 자신이부끄러워졌다.
은동이 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까 승아에게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같이 놀아주겠다고맹세했는데 그것도 지키겠습니다. 승아 는 당신의 분신이니 당신과 같이 있으면 되겠지 요?”
어린 은동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호유화는 감동에 겨 워 몸둘 바를몰랐다. 천성적으로 속임수에 능하고 간교한 면이 있는 호유화였다.
만약 태을사자가 맹세를 시켰더라면 어떻게든 술수 를 써서 빠져나갈것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호유화도 순수하게 자신의 맹 세를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물론 워낙이 까다 롭고 변덕이 심한 성격이라 언제 또 변할지는 스스 로도 알 수 없었지만………….
“염려 말고 일어나라. 다 운수소관이지 뭐.”
호유화는 웃으면서 은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은동에게 살짝 한쪽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말했다.
“만약 네가 이렇게 진심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다면 나는 기회를 봐서 널 없애 버리고 말았을 거야. 그 러나 네가 진심으로 대했으니 나도진심으로 내 맹세 를 지킬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태을사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로환동(反老還童 : 노인이 다시 아이가 된다는 뜻)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 여우는 수천 년을 살면 서 다시 어린애가 된 것일까? 하는 행동거지가 은 동이와 죽이 착착 맞는 것이 완전히 어린 계집아이 같구나.’
호유화는 이제 자신이 은동에게 매인 몸이라는 생각 에서 벗어나자기분이 홀가분해졌다. 빙긋 웃으면서 은동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것을 보고 있는 금옥이나 태을사자, 그리고 은동 본인마저도 호유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금옥은 호유화가 얼굴에 다정한 빛을 띠우자 왠지 기분이 상하는것 같았다. 무심결에 호유화가 벗어던 진 쇠고리를 집어들어 태을사자에게 건네주었다. 그 러자 호유화는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이제 부수는 게 어떻겠어?”
그러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고리는 나의 동료이기도 한 울달과 불솔이 변하여 된 것이다. 내 절대 너를 다시 금제하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여라.”
그리고 태을사자는 쇠고리를 소맷자락 속에 넣었다. 호유화는 여전히 그 쇠고리가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저승사자는 거짓을 하지 않기에 일단 빼려고 말하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그 다음에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모으려 했으나 지금법력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어 섭물공조 차 쓸 수 없었다.
곁에 금옥이 태을사자를 도와 두루말이 두 개를 집어주었고 은동에게는 화수대를 건네주었다. 태을사 자가 금옥을 쳐다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고맙네.”
“별 말씀을……. 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네요.”
그때까지도 두 명의 저승사자와 두 명의 신장은 깨 어나지 못하고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암류사자와 명옥사자는 법기마저도 태을사자에게 흡 수당하고 호유화에게 강하게 맞은 터라 완전히 법력 이 빠져나가 버렸다. 유진충과 고영충 역시 광천멸 사의 수법으로 모든 법력을 소진해 버린 뒤라혼절해 있었는데, 조만간 깨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 다.
주변이 대강 정리되자 호유화가 은동에게 말했다.
“자, 그러면 네 부탁을 들어줘 볼까? 네 부탁이 뭐 지?”
은동은 태을사자에게 원하는 바를 대신 말하도록 부 탁했다. 도무지이 복잡하고도 얽힌 일을 정연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자신이 어째서 이 일에 말려들게 되었으며 마수들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 것이 조선의 국운과도 연관이있다는 것, 그리고 이 판관까지도 묘하게 그 일에 얽혔다는 것 등등을설명 해주었다.
전심법을 써서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긴 이야기였지 만 별로 시간이걸리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듣고나자 호유화가 말했다.
“그러면 내가 뭘 해주어야 하지?”
“너는 생계의 양광 속에서라도 나다닐 수 있겠지?
그리고 법력도그대로 사용할 수 있고?”
“물론. 그러나 법력은 반 밖에 못 써. 아무래도 나 도 어둠 쪽에 속한존재니까………..”
태을사자는 호유화의 말투가 괴이했고 너무 짧아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사실 거의가 전심법으로 하는 대화라 뜻만 간결하게전달되어서 그나마 의사 소통이 되는 것이었지, 어미나 말투가 너무도달랐 다.
호유화가 하는 말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하는 말투와 거의 비슷했으니, 사백년 전인 조선 시대의 말투와는 많은 부분이 다를 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는 왜 그리 말을 하는 것이냐?”
“호호, 시투력주를 삼켰더니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고 이상한건 아냐. 사백 년 후에는 모두 이렇게 말할 테니까.”
“사백 년 후?”
“내가 삼킨 것은 그 당시 천팔백 년 후의 천기를 담 은 시투력주였어. 내가 여기서 지낸 지 천사백 년이 지났으니 지금으로 치면 사백년 후가 되겠지. 여기 서 혼자 있다 보니 나도 점점 미래의 영향을 받았다 고나 할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그래, 저승사자님. 내가 왜 여기 갇혔는지도 잘 모 르겠지? 나는 장난을 좋아하긴 하지만 살생을 하거 나 중죄를 짓지는 않았어. 바깥에서 떠도는 소문들 은 모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덩이처럼 부풀려진헛 소문이야.”
그 점은 이제 태을사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태을사자는 원래 호유화가 무서운 괴물로,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판관의 이야기를 듣고부터는 그것이 시투력주 때문 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 각되어 태을사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호유화가 수다스럽게 계속 자신의 과거를 이 야기했다.
“실상 난 보통 당신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아니야. 성계(聖界)의 일월력실(日月曆室)을 엿본 것이 실제 의 죄였지. 일월력실은 천기를 조절하여 미래의 일 을 예정짓는 방이야. 장난삼아 그곳에 갔다가 예쁜 구슬 하나가 있기에 그걸 훔쳐 나왔는데, 그것이 앞 날을 내다보는 시투력주(時透力珠)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신장들이 그걸 되빼앗으려 나를 마구 쫓 기에 겁결에 빼앗기기 싫어서 그것을삼켜 몸과 일체 화시켜 버렸는데……. 그 때문에 나는 미래의 천기 를알 수 있거든. 그래서 여기에 갇힌 거라구.”
“네가 천기를 알고 있다는 것은 내 이미 들은 바가 있다. 그런데 미래의 천기를 알다니?”
“시투력주는 미래의 천기가 기록되어 있는 구슬들이 걸랑. 나는 그중의 하나를 훔쳐 몸에 넣었으니 미래 의 천기를 짚을 수 있게 되었어. 천기란 것은 밖으로 새면 안 되는 것이거든. 결국 나는 저승에서도 가장 깊은 곳인 이 뇌옥에 들어가 게 된 거지 뭐. 그래야 아무도 나와 만나거나 접촉 하여 천기누설이 되지 않을 것 아니겠어? 그래서 나는 스스로 여기 들어온 거라구. 그리고 이 뇌옥은 계속 무너지며 경천동지를 반복하고 있지만 나는 하 나도 고통을 받지 않아. 그건 다른 자들이나를 건드 리지 못하게 나에게는 고통을 주지 않겠노라고 성 계와 약속했기 때문에….”
불현듯 태을사자는 다급해졌다. 너무 오랜 시간 동 안을 지체한 것같아서였다.
“좌우간 너는 미래의 천기를 안다는 뜻이렷다? 그 러면 대답을 해다오. 지금 조선에서 왜란이 일어났는데, 조선군의 신립이 왜군을 맞아싸우다가 죽을 운명이냐? 아니냐?”
그러자 호유화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더니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는 미래의 천기를 읽을 수 있다면서?”
그러자 호유화는 팩 성질을 부렸다.
“내가 아는 일은 지금부터 사백 년 후의 천기일 뿐 이야! 고작해야팔 년이나 십년 정도의 일밖에는 모른다구! 조선군 신 뭐라는 자가싸우다가 죽는지 어쩌는지 모르지만, 그건 당장의 일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팔 년이나 십 년?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시투력주는 수천 개가 넘어. 나는 그 중 하나만을 집은 거구. 그구슬은 사백 년 후의 천기만을 알 수 있는 거야. 음… 그러니까 대략 사백 년 후부터 사백십 년 정도까지 말이야. 그러니 나는 그것밖에 는 몰라. 이백 년 후도 모르고 삼백 년 후도 모르고 천년 후도 몰라. 내가 아는 건 다만 사백 년 후 뿐이라구! 알았어?”
그러자 태을사자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호유화가 지닌 시투력주의 능력이란 것은 전혀 쓸모가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면 네 능력은 무엇에 쓴다는 것이냐?”
“나도 몰라. 다만 천기가 새어나가면 안 되니 여기 들어와 있었던것뿐이었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 어, 응?”
그 이야기를 듣고 태을사자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호유화가 시투력주를 삼켰으니 호유화는 사 백년 후의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천사백 년 이란 세월을 뇌옥에서만 지냈으니 그간의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을 터였다.
게다가 자신은 사백 년 전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알 고 있는 처지도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사 실이 떠올랐다.
‘지금도 조선의 대궐에서는 임금의 행적을 기록한 실록을 만들고있으며, 사초(史草)를 매일매일 기록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전의 내용을 알 수 있을지 도 모른다.’
“너는 사백 년 후의 일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지?”
“그래.”
“그러면 사백 년 후의 책도 읽을 수 있느냐?”
그러자 호유화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웃었다.
“호호…… 천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지, 내가 그 시대로 간 것은아니라구. 착각하지 마.”
“그러면 천기를 읽어서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이 냐?”
“음…… 그러니까…… 말해줘도 이해할지 모르겠지 만, 지금부터사백육 년 후에는 조선의 지도자가 바 뀌어.”
“왕이 바뀐다는 것이냐?”
“왕이 아냐. 그러니까 그 시대에서는 음………… 대통령 이라고 해. 백성들이 무슨 종이를 가지고 모아 뽑는 거야.”
“뭐? 왕을 백성들이 뽑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 냐?”
태을사자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나라의 왕이라 함은지고무상의 권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 던가?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왕의 명에 따라 생사가 달린 존재들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무슨 종이를 가지고 왕을 뽑는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소리란 말인가?
“에이, 그러니 이해 못할 거라고 했잖아? 그리 고…… 보자… 그시대에는 백성들이 상당히 고통 을 당하겠군.”
“무엇 때문에? 전쟁이나 흉년이 드는가?”
“아니야, 경제적인 고통이라는데………….”
이상한 글자 를 써서 뭐라 하는데, 뭔지는 나도 읽을 수 없어. 으음, 외국 글자 같은데 처음 보는거야. 외환이 부 족하다는 것 같은데….”
“외환이라니? 그것이 무엇이냐?”
“외국의 돈일 거야. 좀 천천히 물어봐!”
“아니, 외국의 돈은 외국에서만 통용이 되는 것인 데, 어찌 그것이 모자라 고통을 받지? 그것도 무역상 인이 고통을 받는다면 모를까 왜백성들이 고통을 받 는다는 말인가?”
태을사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실제 로 명나라의 영락전 같은 것은 조선에서도 굴러다닌 다. 하지만 그것이 없어서 일반백성이 고통받는 일 은 거의 없다.
시장에서 거래를 해도, 쌀이나 베로 바꾸는 거래를 하는 조선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엽전이 그 리 필요하지 않았다. 그나마 견문이 넓은 태을사자 가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은동이나 금옥이 이해할 리가 만무했다.
둘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유화의 가느다랗고 고운 입술을홀린 듯이 바라보며, 호유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이구, 너희는 이해 못해. 천사백 년을 갇혀서 생 각해 왔지만 나도 모르겠는걸. 음….. 사백 년 후에 는 말도 타지 않고 걸어다니지도않아. 쇠로 만든 수 레 같은 것을 타고 다니는데 굉장히 빨라. 말이 끌 지도 않는데 말야. 한양에서 부산포까지 한나절밖에 안 걸려.”
“어허… 전부가 축지법을 쓴다는 것인가?”
태을사자는 놀랐다. 생계의 존재들, 조선의 백성이 걸어서 한양에서 천리길인 부산포로 가려면 보통 보 름이 걸린다. 말을 타고 죽기로다하여 힘을 써서 달 리면 하루 만에 갈 수도 있지만, 그것도 말을 여러 마리 바꾸어 타야만 하며 새벽 일찍에 떠나야 간신 히 자정 무렵에도달한다. 축지법에 아주 능한 술법 사가 달린다면 그보다도 조금 빨리 갈 수는 있지만 한나절 만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수레에 축 지법을 걸어 수레를 타고 달린다는 것은 들어본 적 도 없는 일이었다.
“것 봐. 태을사자 당신도 이해가 되지 않지? 미래 는 무척 빨리 바뀌어. 기술이 너무 발달하여 사람들 도 그것이 어떤 원리로 되는 것인지알지 못해. 그때 사람들은 바빠. 아주 바쁘게 산다구. 그리고 너무너 무 많은 것들이 있어. 상상조차도 하지 못할 거야. 천리만리가 떨어져 있어도 누구든지 무슨 조그마한 장치만 쓰면 즉각 대화할 수 있고 멀리 떨어진 것들도 볼 수가 있어.”
“그런 것들은 천리안(千里眼), 순풍이(順風耳)의 술 법이 아닌가?”
“술법이 아니라 기술이래두 그러네. 어휴, 답답하 군. 그런 판인데내가 그때로부터 사백 년 전의 일을 어떻게 판단한단 말야.”
“사서를 읽으면 되지 않는가?”
“어이구. 사백 년 후에 책이 몇 종류나 나오는 줄 알아?”
태을사자는 규장각이라는, 조선에서 책이 가장 많은 서고(書庫)를떠올렸다. 그리고 사백 년 후라면 지금 보다도 훨씬 많은 책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대답 했다.
“한 십만 권 정도 있지 않을까? 너무 많이 잡았 나?”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비슷한 시기에 서양최고의 도 서관이었다는대영제국의 한 도서관에는 2만5천권의 서적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은출판이 발달한 나라여 서 그보다 조금 많은 책이 규장각 서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니 십만 권이라도 태을사자에게는 엄청 많은 수라고 생각되었다.
“수천만 권이 훨씬 넘어. 어느 한 곳에만 일억 권도 넘게 있는 것을느꼈어. 아마 하루에 나오는 책만 몇 천 종류는 될 거야. 그것을 어떻게 일일이 판단한단 말야?”
그 말을 듣고 태을사자는 놀라서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못했다. 그리고 호유화는 다시 쐐기 를 박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보는 데에도 한나절 이상 집중하 고 시간을 소비하여야 해. 내가 아까 이야기했지? 나는 천기만 읽을 수 있다고. 무엇이 어떻게 된다,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다…. 라는 흐름만 읽을 수 있을 뿐이야. 책 내용 같은 것을 일일이 알아내려면 그런 흐름을 얼마나 읽고 머리를 써야 하는지 알 아? 하물며 책이 몇수천만 종류가 있는데 말이야.” 태을사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 야 할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일단 미래를 알 려던 내용이 벽에 부딪히자 더이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좌우간 일단 이곳에서 나가서 호유화의 협조를 받아 싸우기로 마음 먹고 호유화에게말했다.
“좋다. 그러면 우선 첫 번째 부탁을 하마. 일단 나와 함께 생계로가자.”
“그래서?”
“마수들과 맞서 싸우는 거다.”
그러자 호유화는 피식 웃었다.
“마수라니? 마계 전체를 상대로 나보고 싸우라는 거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어?”
“좋다. 우선은 천기를 어그러뜨리고 조선군을 해치 는 마수들과 싸우는 거다.”
그러나 여전히 호유화는 고개를 저었다.
“마계 전체 놈들이 다 나오면 어떻게 하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죽을 때까지 끝이 안 날 거야. 좀더 구체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일러달래두.”
“좋다. 그러면 일단 우리와 함께 가서 조선군을 위 기에서 구해내자. 마수들이 인간들의 영혼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너는 마수들을 대적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자 호유화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버들가지 같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더니 은동에게 물었다.
“은동아, 이 녀석 말을 들어야 하니?”
“들어주세요.”
“좋아, 은동이가 들어달라고 하니 들어주지. 정 그 렇다면 너는 별볼일 없지만 강력한 내가 널 도와 싸움에 나설께. 됐어?”
호유화는 태을사자를 무시한다는 듯 말했다. 이제는 같은 편이 되기로 했다 해도 아까 목숨을 걸고 싸웠 던 일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던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호유화는 역시 여자야.’
곁에서 지켜보던 금옥은 생각했다.
태을사자는 호유화가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했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워낙 사고방식이 공적이고 칼로 잰 듯하여, 그런 일을 따져 본댔자 시간 낭비일 뿐 이라 생각하고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호유화는 태을사자에게 할말을 다했 다는 듯이 그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것을 보고 태을사자가 다그쳤다.
“시간이 없다. 어서 가자.”
그러자 호유화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 지금 가자구?”
“시간이 없다. 가자.”
호유화는 어이 없다는 듯 태을사자를 째려보았다.
“원 참. 지금 죽기로 싸워 법력이 하나도 없는 판인 데 어딜 가냐?
지금 나가면 귀졸 따위도 상대하기 어렵다구.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시간이 없단 말이다. 이곳의 시간은 생계와 비교하여 어떻게 흐르는지 아는가?”
“음, 거의 같아.”
“그러면 생계 시간으로는 이미 날이 저물었을 것이 다. 어서 가서은동이를 다시 원래 몸에 넣어주어야 한다. 게다가 신립도 구해야 하니 여기서 지체할 틈 이 없다. 자, 오서 가자.”
태을사자가 재촉하자 호유화는 마지못해 스윽 몸을 일으켰다. 바로그 순간 은동이 물었다.
“그런데 호유화님. 호유화님의 꼬리는 어디로 갔나요?”
그러자 호유화는 생글 웃었다.
“달려 있잖아?”
“안 보이는데요?”
“이 녀석아. 내가 누구라고 꽁무니에 거추장스럽게 주렁주렁 꼬리를 달고 다니겠니? 내 머리카락이 바 로 꼬리가 변한 거란다.”
“아!”
그제서야 은동은 은유화의 은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순간 호유화의 머 리카락 한 무더기가 마치 손처럼 뭉쳐지더니 은동의 머리를 툭 하고 쳐서 알밤을 먹였다.
은동은 아이쿠 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지만 몹 시 신기하여 아픈 것도 몰랐다.
“우와, 정말 신기하네요. 이 머리카락이… 꼬리로 둔갑도 하고 변신도 하나요?”
“그래. 이 꼬리들은 모두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 단다. 그런데…..”
호유화는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다가 잠시 말을 끊고, 잠깐 동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이 꼬리들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들이기도 하 지. 각자 개성도있고 모습도 있단다.”
태을사자가 듣기에, 제아무리 구미호라고 해도 꼬리 들이 따로 살아저마다의 개성을 갖는다는 이야기는 좀 황당한 소리 같았다. 그러나은동은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그래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래. 이 안에는 승아도 있단다. 제일 막내지.”
“그럼 꼬리에 전부 이름이 있나요?”
“응. 맏이가 매랑(梅娘), 둘째가 난향(香), 셋째가 국미(菊美), 넷째가 죽희(竹嬉), 다섯째가 춘영(春 英), 여섯째가 하기(夏己), 일곱째가 추풍秋風), 여 덟째가 동주(冬珠), 그리고 막내가 바로 승아란다.” 은동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면서 듣고 있었지만, 금 옥은 그 이름들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매난국죽(梅蘭菊竹),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이름이네요?”
금옥이 끼여들자 호유화가 성질을 부렸다.
“내가 내 꼬리에 이름을 붙이는데 뭐가 어때서 그 래? 너는 끼여들지 마.”
태을사자가 가만히 들어 보니 그 이름들은 분명 즉 석에서 지어서 아무렇게나 갖다붙인 이름 같았다. 사 실 까놓고보면, 호유화는 수천년간을 너무도 무료하 게 보낸 끝에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 은동을 만나 놀 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면 도 로 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호유화의 나이는 사 람으로 치면 수십 번 늙어 죽었을만한 나이였고 혼 자 워낙 오랜 세월을 있다보니 괴팍해지고 다소경망 스러워져서 거의 어린아이 같이 되었다. 그래서 아 까 꼬리 하나를 승아로 변신시켜서 은동에게 같이 놀아달라는 맹세를 시켰던 것인데 지금 이렇게 큰 어른의 모습으로 어린 은동과 논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거북할 듯 싶었다. 그래서 호유화는 어린 승아의 모습으로 은동과 놀 생각이었고, 그러려면 승아라는 분신이 호유화와 같은 존재가아니라고 은동에게 생 각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 호유화는 역 시 다소 간사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라 그렇게 은동 과 친해져야지금 호유화를 얽매이고 있는 남은 두 가지 약속 – 호유화는 마수 따위는 벌레 정도로밖 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을 조금 수월하게 치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있었다. 아무튼 호유화 가 신이 나서 은동과 수다를 떠는 것을 보자 머리가 다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태을사자는 본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격이어 서 수다 떠는것을 한동안 듣고 있자 지겨워졌던 것 이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다시한 번 모두에게 재촉 했다.
“그만, 그만. 어찌되었든 간에 여기서 나가자. 이러 다가 신립 군대가 전멸하면 어찌하겠느냐?”
그러자 은동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 생 각이 주마등처럼스치고 지나갔다. 신립 군대가 참패 한다면 아버지도 위험해진다는 생각에 태을사자보다 더 서둘러서 호유화와 금옥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요, 어서.”
떠나기 직전 태을사자는 은동을 가까이 오라 일렀다. 그리고 은동의 손에 아까 백아검에서 빠져나왔 던 윤걸의 법기인 육척홍창을 집어주었다.
“이걸 왜……?”
“이 창은 윤걸 공의 것으로 윤 공과 함께 백아검에 봉인되어 있었는데, 이렇게 밖으로 나오게 되니 다 시 들어갈 수가 없구나. 그러니네가 지니고 있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사용해라. 윤걸 공은 비록 검에 봉인되어 있으나 소멸된 것은 아니니 홍창은 계속 창으로서의 기능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원주인이 소멸되면 법기도 사라지나요?”
“그렇단다..”
태을사자는 동료였던 흑풍사자를 새삼 떠올리며 감회에 잠겼다. 불행하게도 자신은 슬픔이 무엇인지 몰랐다. 슬픔이………….
“하지만 나는 도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맨손보다는 나을 것 아니냐? 내가 일러주는 대로해보아라.”
태을사자는 약간의 도력을 홍창에 불어 넣었다. 그러자 홍창은 변하여 은동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들어가 순식 간에 사라져버렸다.
지금 극도로 도력이 고갈되어 있는 상태인 태을사자 는 그런 간단한 법술을 쓰는 데에도 정신이 아득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것도 모르고 은동은 마냥 놀랍기도 하 고 재미 있게 여길 뿐이었다.
“어, 이러면 이제 나도 법기가 생긴 것인가요?”
“법기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쓸만은 할 것이다. 네가 나오라고 하면 나와서 손에 쥐어질 것이고, 들어가라고 하면 도로들어갈 것이다. 한 서 너 번 정도는 그렇게 사용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내 가 다시 도력을 넣어주거나 네 스스로 힘을 쌓도록 하라.”
그러자 은동은 신기하여 한번 홍창을 뽑아서 손에 쥐었다가 다시손바닥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주 재미있고 신기했지만 태을사자가서너 번밖에 쓰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그 이상은 시험해 보지 않기로 했다.
태을사자는 은동이 홍창을 가지고 노느라 정신이 없 자 곁에 있던금옥에게 슬쩍 눈짓을 하여 가까이 오 게 한 후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아직 저 요물을 완전히 믿을 수 없구나. 네가 이것을 감추어두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다시 한 번 금제를 가해라.”
그러면서 금옥에게 울달과 불솔이 변한 쇠고리를 호 유화는 물론,은동조차 보지 못하게 슬쩍 건네주었 다. 태을사자는 원래가 세심하여모든 것에 만전을 기했다.
비록 호유화가 지금은 순순히 따라오고 있지만, 또 언제 변덕을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은 동에게도 법기를 하나 주어 대비하게 한 것이고 금 옥에게 쇠고리를 준 것이다.
아까 호유화는 쇠고리를 태을사자가 가지고 있는 것 으로 알 터였고 그러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을 주목할 뿐, 금옥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태을사자는 그런 연유로 금옥에게 최후의 수단인 쇠 고리를 맡긴것이었다. 은동은 비록 성격이 시원시원 하고 영악하지만 어린 만큼너무 순진하였다. 이 은 밀한 일을 알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은동에게도 그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