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26화 : 이판관의 정체
이판관의 정체
한편, 한동안 일행을 이끌고 이동하던 호유화는 널 찍한 바위 비슷한 것이 놓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 바위 밑에 무슨 통로가 있나 하고태을사자는 생각했 으나 호유화는 그 바위 위에 냉큼 올라갔다. 태을사자는 그 모양새를 보며 호유화가 엄청난 주문 을 외우려고하나 보다 생각했지만, 호유화는 그곳에 앉지 않고 휙 드러누웠다.
태을사자는 누워서 외우는 주문도 있나 하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금옥은 아무리 호유화가 여우라지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무 데서나 드러눕는 것이 남사스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대뜸 호유화는 머리카락을 모아 베개처럼 둥글게 말더니 기지개를쫙 펴는 것이 아닌가?
“너희들도 좀 쉬어둬. 난 지쳐서 한숨 잘련다.”
태을사자는 호유화가 안하무인이고 버르장머리가 없 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이런 태도에는 몹시 화가 났다.
“아니, 지금 무엇 하는 것이냐? 시간이 급하다는데여기서 잠을 잔다구?”
“내가 자겠다는데 왜 성질을 내? 네가 자장가라도 불러줄 거냐?”
“뭐 ・・・……뭐라구?”
“나가려면 여기서 일단 기다려야 된단 말야. 못 알아듣겠어?”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으면 저절로 나가게 된단 말 이냐? 그런 허황된 소리, 썩 그만두지 못할까?”
그러자 호유화도 성질이 나는 듯 몸을 벌떡 일으키 더니 날카롭게외쳤다.
“도대체 날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조금 있어야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된단 말야!”
“나갈 수 있는 시간?”
호유화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저승사자 양반, 너 여기가 어딘지 알지?”
“여기가 뇌옥이지, 어디겠느냐?”
“그러면 뇌옥이 어떤 곳인지도 알겠지?”
“흠…… 뇌옥은 죄인들을 가두어두는 곳으로・・・・・・ 귀 졸의 말을 들으니 무슨 동물의 몸 속에 있는 세계라 고 들었다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그러자 호유화는 다시 한 번 훙 하고 코웃음을 치더 니 태을사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맞아. 그런데 동물은 어디에 살지?”
“생계에 있겠지. 그런데… 아…… 그러면…..”
“그래. 아마 그 귀졸 녀석은 뇌옥을 이루고 있는 동 물이 죽을 때에는 천지가 무너지는 소동이 있다고 네게 말했겠지? 우주가 망하는 아수라장이 된다고 말야. 그때가 바로 기회야.”
호유화는 태을사자에게 장황한 수다를 섞어서 말했 다. 뇌옥은 생계에 살고 있는 동물의 몸 속이며 영 혼들은 그 안에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축소되 어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들어간다기보다는 그 동물의 기억이나 의식 에 의해 보여지고, 마음속에 각인된 세계 속에 존재 하게 된다고 할까? 그러나 그 동물이 죽으면 그것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망하게 되는 순간 이 된다. 그 때문에 사악한 자일수록 보다 생명이 짧게 끝나는 동물의몸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거기까지 듣고서야 태을사자는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너는 그 짐승이 죽어서 대혼란이 일어나 는 시각, 그러니까 우리들이 다른 동물의 몸 속으로 옮겨지는 시각을 노리고 있는 것이란 말이냐?”
“바로 맞추었어. 똑똑하신 사자님이시군.”
“그것이 가능하냐? 그리고 너는 어찌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여기서나가지 않았느냐?”
“내가 말하지 않았어? 나는 여기 갇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 네가 그렇게 주장하는 천기를 지키기 위해서 이 속에서 기다리기로 한 거야! 제발 좀 날 힘없이 갇힌 죄인 취급을 하지 말아주었으면 고맙겠어!”
“허어………… 알았으니 그만두어라. 그런데 어떤 방법 으로 나가는 것이냐?”
“사실 나도 정확한지 아닌지는 장담 못해. 그러나 십중팔구는 될거야.”
호유화는 다시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역시 미래의 말투라고하는, 태을사자가 알아듣기에는 쉽지 않은 이상한 말투로・・・・・・・
그리고 호유화의 말에는 여자들 특유의 장황하고 수 다스러운 묘사가 많아서 태을사자는 답답했지만 그 래도 꾹 참고 호유화의 설명을들었다.
호유화의 설명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뇌옥이 다른 동물의 몸으로옮겨지게 되면 그때는 뇌옥이 일종의 차원공간(空間, 물론 이것도 미래의 말이라 태 을사자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을 통과하게된다. 그 차원공간 통로는 생계의 동물에서 생계의 동물 사이를 잇는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분명 생계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이 뇌옥을 이루는 동물의 의식 이 극도로 혼란되고 어지러워져 있어서 이 세계가 부서져 나간다. 그 때문에 이 세계를 이루는 장벽도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사백 년 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지금 이 뇌옥을 이루는동물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를 기해 차원이동(次元移動, 이역시 태을사자는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대략 번뇌연 같은 통로 로 해석했다)이 되는 도중에 법력을 한데 모아 차원 의 벽을 뚫고 나오면 틀림없이 생계로 나가게 될 것 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은동이 끼여들었다.
“그런데 저승사자들과 신장들은 어떻게 되죠? 그들 은 마냥 정신을 잃고 있으니 그대로 두었다가는 봉변 을 당할 것인데요.”
“뭐 혼 좀 나면 어때. 어차피 너하고 태을사자를 뒤 쫓는 자들이니이 김에 혼 좀 나라지 뭐. 죽지는 않 을 테니까 염려 마.”
“그래도…………….”
그러나 호유화는 은동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태을사 자를 쏘아보면서 성질을 부렸다. 얼굴 표정이 금세 온화해졌다가 날카로와졌다 하는 것이 은동에게는 신기해 보일 정도로 빨랐다.
“그러니까 지금 지친 상태로는 나가기 어렵단 말야. 그러니 좀 쉬자는 건데 꼭 그렇게 신경질을 부려야겠어? 엉?”
“사정이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하였으면 될 것 아닌가? 밑도 끝도 없이 잠을 자려 하니, 그런 말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태을사자와 호유화는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옆에 서 은동이 조용히 지켜보니 둘 다 화가 많이 나서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휴, 아무래도 저 둘은 성격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것 같아.’
은동은 속으로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나이가 삼천 살이 넘은 환수와 사계의 지긋한 저승 사자가 시정잡배처럼 말다툼을 하는 것이 조금 이상 하기도 했고 안쓰럽기도 했다.
은동은 좌우간 태을사자와 호유화가 벌이는 말다툼 을 듣고 있기도뭣했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던 금 옥에게 지난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 다.
금옥은 정신을 차리게 된 지금, 신립의 안위를 몹시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신립에게 누를 끼친 죄를 속죄하겠다고몇 번이나 다짐하였다.
은동은 그것은 금옥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마수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말했으 나, 금옥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여리여리하고 소심해 보였으나 금옥의 이야기대로스 스로 자기 집에 불을 지르고 타죽을 수도 있을 만큼 마음이 모진면도 있는 듯싶었다.
그럭저럭 약간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땅이 조금 흔 들리는 것 같은느낌이 은동에게 전해져 왔다. 은동 은 처음에는 그저 지나쳐 버렸으나 잠시 후 다시 우 르릉 하는 울림이 조금 더 강하게 전해져 왔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입씨름을 하고 있던 호유화가 별 안간 하던 말을 중단하더니 주위를 번뜩이는 눈초리 로 살펴보았다.
태을사자도 느낌이 이상했던 터라 입씨름을 벌이던 것을 중단했다.
잠시 지나자 주변의 사물들이 갑자기 춤을 추는 듯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보다 더 강해지면서 주변이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호유화가 바위를 툭 치면서 말했다.
“시작된다. 자, 어서 이 바위를 치우자구.”
먼저 호유화가 나서서 바위를 밀었다. 그러나 그 바 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유화가 당황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태을사자도 붙어서 그 바위를 치우려 했다. 그래도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태을사자가 묻자 호유화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갑자 기 꼬리를 솟구쳐 태을사자를 때리려 했다. 태을사 자는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피하며 노기 띤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에그, 그러니 법력을 회복해야 한댔잖아! 이 바위 는 비록 영체이지만 상당한 힘으로 밀어야 열린다 구! 둘 다 법력이 쥐뿔만큼도 안남았으니 원・・・ ……. 법력이 없으면 결계도 치지 못하니 뇌옥의 전이과정 에 무진장 고생할 텐데………….”
그 말에 태을사자가 놀랐는지 눈을 번쩍 떴다.
“아니, 이 바위가 그토록 무겁단 말이냐?”
“내 법력이 반, 아니 반의 반만 회복되었어도 그냥여는 건데……….”
네 놈이 말씨름을 걸어오니 못 들게 됐잖아! 어떻 게 해! 책임지라구!”
“이거야 원… 그러면 진작 이야기를 했으면 될 것 아닌가! 어째서 내게만 책임을 돌리는 거냐! 그 리고 또 뭐, 네 놈???”
태을사자가 다시 화를 내자 할 수 없이 은동이 말렸 다.
“그만들 두세요, 제발. 어서 이걸 치우기나 해봐요!”
그 말에 태을사자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고 바위를 밀기 시작했다. 호유화와 태을사자말고도 은동과 금옥까
지같이 합세하여 바위를 밀어냈다. 그러나 호유화는 그 와중에도 떠들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까 싸울 때는 힘만 좋더니만…………. 아니 고명하신 저승사자가 이것 하나 못 밀고 뭐해! 아까 내가 저승사자 두 명분의 영력까지 줬는데 전부 날 공격하 는데 써 버리고 말야! 좌우간…….”
태을사자는 이제 지긋지긋해졌다. 도대체 무슨 놈의 환수가 삼천년이나 도를 닦았다면서 이렇듯 말이 많 단 말인가? 조용하고 냉정한 성품의 태을사자는 호 유화의 잔소리 때문에 다혈질이고 거친 성품으로바 뀌어 버린 것 같아 보였다. 조금만 더 하면 손찌검 을 할 기세였다.
“제발 그 입 좀 못 닥치겠느냐!”
그러자 은동이 울상을 지었다.
“아이고, 제발 이것 좀 밀어요!”
은동의 소리를 듣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태을사자는 바위를밀던 것을 멈추고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소매 속에서 백아검을 꺼냈다.
“전부 물러서라.”
태을사자의 말에 은동과 금옥은 바위에서 조금 물러섰고 호유화도물러서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바위를 부숴 버리면 치울 수 있겠지. 어서 치라구.”
그 와중에서도 우르릉거리는 소리는 더욱더 심해졌고, 땅은 마치지진이 난 것처럼 파도를 치는 듯이 흔들렸다.
은동과 금옥은 지금 영혼인 몸이라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있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땅바닥을 데 굴데굴 굴러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진뿐만 아니라 허공도 요동을 치면 서 여기저기작은 영력의 회오리바람(이곳은 비록 공 기는 없지만 영력의 줄기들이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데, 은동이 느끼기에는 바람과 감촉이 거의 같았다) 이 날아다녔고,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바뀌었다. 그 하늘에서 형형색색의 번갯불이 무섭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백아검을 휘둘러 바위를 반으로 쪼갰다. 호유화는 그틈을 타 반쪽 중의 하나를 아홉 개의 꼬 리로 두들겨서 다시 박살내었다.
태을사자와 호유화는 둘 다 보기 드물게 법력이 강한 자들이었지만 워낙 법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바위 하나 부수는 것도힘들어 했다.
다시 태을사자가 검을 내리쳐서 바위의 반 조각을 여러 조각으로부수자 모두들 달려들어서 바위덩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이미 사방은 캄캄해졌고 회오리바람이 미친 듯 심해져서 은동은 바위를 치우기는커녕 바위 에 매달리는 꼴이 되었다.
회오리바람도 영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이제는 전심 법에 의한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주변의 모 든 것들이 부서지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산이 무너지고 나무들이 찢겨져 사라지고…………….
그러나 그때 그 순간 검은색 하늘이 무너져서 쏟아 져 내리기 시작하여 은동은 혼절하리만치 기겁을 했 다.
호유화가 날카롭게 큰 소리를 쳤는데도 은동의 귀에 는 몇 마디만들렸다.
“뇌옥이 무너진다. 기억이 깨진다!”
어떤 동물인지는 모르지만 뇌옥을 이루고 있던 동물이 지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 동물이 지니고 있던 의식의 세계도 무너져가는 순간이었다.
이 동물은 필경 생계의 경치 좋은 곳에서 살던 동물 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뇌옥의 내부도 경치 좋은 풍광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동물의 기억은 동물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며,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기억 은 형체가 없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혼들의 의 식속에서는 실제의 사물들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하늘이 박살이 나서 무너지는 광경도 연출될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 조각들은어마어마한 크기 로 쏟아져 일행을 납작하게 깔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마지막 바위덩이가 치워졌다. 마침내 구멍이 치워지자 그 밑에는 아무 색깔도 없 는, 그렇다고 어두운 것도 아니고 밝은 것도 아닌 공간이 펼쳐졌다. 글자 그대로 무(無)의 공간이었 다.
호유화가 제일 먼저 그 구멍으로 뛰어들었고, 그러 자 태을사자가금옥을 구멍에 넣어주고 거의 바람에 날아가려는 은동을 들어 넣어주었다.
은동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 다. 구멍 너머로무너지는 거대한 하늘과 산들, 그리 고 지각과 그밖의 모든 것들이 박살이 나며 회오리 쳐서 알 수 없는 무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모습 …….
그 무시무시하고 장대한 모습에 은동은 기가 질려, 자신 또한 무의공간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인 식하지 못했다. 호유화는 공간속을 떨어져 내리면서 금옥과 은동을 양손에 각각 잡았다.
마지막으로 태사자가 구멍으로 뛰어들면서 호유화 의 머리칼 한가닥을 잡았다. 호유화는 잠시 눈을 감 고 의식을 집중하여 무의 공간속을 비행하기 시작했 다.
그러면서 호유화는 태을사자가 매달려 있는 머리카 락(꼬리)를 움직여 태을사자를 앞장세웠다.
“의식을 집중하고 잡생각을 하면안 돼! 빨리! 휩쓸리기 전에!” 태을사자는 흑호를 생각하며 의식을 집중했다. 태을 사자는 냉정하고 정신력이 강하여서 여럿을 인도하 게 되자 당장에 무서운 속도가났다. 까마득한 속도 로 구멍에서 멀어져가는 동안, 은동은 거의 넋을잃 은 채 무너져가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빠져나온 구멍도 잠시 후 무너지기 시작했 다. 곧이어 무화(無化)되어 있는 구멍 부근 전체가 소용돌이치며 무너져 점점 사라져갔다. 태을사자는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으나 그들 뒤를 쫓아맹 렬한 속도로 무화의 소용돌이가 퍼져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채만하게… 그러다가 산만하게……………….
결국에는 까마득하고 크기를 알 수 없을 만큼, 거의 우주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의식의 세계는 무화되어 녹아 없어져 가고 있었다.
‘하나의 동물에 불과한 것의 의식세계가 이토록 넓 다니……. 그러면 내 속에도 이만한 세계가 있을까? 아니,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이런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인가?’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린 은동은 앞으로는 미물이라도 함부로해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생명은 정말 작으면서도 큰 것이구나.’
어느 순간 뒤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무화되어 사라지 고, 갑자기 다른것들이 보였다. 마치 어지러운 꿈 속과 같은, 오만가지 사물들의 형체와 빛과 그림자 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얽혀 흘러가 고있는 그 어떤 속이었다.
은동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의 형상이 얽혀 있었 으며, 알 수 없는 형상이 그보다도 훨씬 많이 얽혀 있었다.
호유화가 태을사자에게 큰 소리를 쳤다.
“차원공간이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의 영상을 놓치 지마!”
태을사자는 눈을 감고 있다가 호유화의 말에 다시 눈을 떴다. 은동이나 금옥은 어지러운 주변의 형상 에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호유화나 태을사자는 도력이 깊은 그 기본이 있는지라, 주변의 어지러운 정황 속에서도 주의를 잃지 않고 도착점을 찾아 신경을 곤두세웠다.
은동으로서는 충격적인 여행이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물들이 얽혀있는 허상과 같은 세계 속을 지나가면 서 거의 정신을 잃고 까무라칠지경이다. 금옥도 그 와 마찬가지로 거의 정신이 없었다. 영의 몸인데도 멀미가 났다.
그 순간 태을사자는 저만치서 나타나 무섭게 확대되 며 다가오는한 형체를 발견하고 정신을 모았다. 그 것은 비록 다른 것들과 마구 얽히고 일그러져 있기 는 했지만 분명 흑호의 영상이었다.
“저 영상이 있는 곳을 뚫고 나가면 돼! 놓치면 안 돼!”
호유화는 다급하게 외치고는 온몸의 법력을 한데 모 으는 듯 날카로운 일갈성을 질렀다. 호유화의 아홉 가닥의 머리칼 중 태을사자를붙잡고 있는 것을 제외 한 여덟 개의 머리칼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태을사자도 그나마 조금 휴식을 하면서 남았던 법력 을 있는 대로끌어모아 백아검과 묵학선에 모았다. 일순간, 일그러진 영상이 번개같이 확대되어 다가왔다.
“지금!”
커다랗게 외치면서 호유화는 여덟 개의 머리카락을 번개같이 곤두세웠다. 그 여덟 개의 머리카락이 서 로 댕기처럼 꼬고 나무를 다듬는연장인 끌처럼 영상 을 파고들어갔다.
그러자 영상의 공간에 파문 같은 것이 크게 울렁하 며 번져갔다. 차원의 벽에 호유화가 머리카락을 박 은 것이다. 그 틈에 호유화의 머리칼이 당겨지자 무 서운 속도로 멀어져가던 일행의 몸이 덜컹하고 정지 했다.
그때 호유화가 큭 하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호유 화는 양손으로각각 금옥과 은동을 잡고 있었고, 머 리칼 한쪽으로 태을사자를 잡고있어 모든 충격을 혼 자 받은 셈이었다. 그 통에 고통이 극심한 것 같았 다.
이에 태을사자는 다시 기합을 넣으면서 백아검을 휘 둘러서 영상의공간을 쳤다. 순간 공간이 휘청하면서 굽어지면서 백아검이 조금 그안으로 파고 들어가기는 했지만 깨어지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법력을 밀어넣었으면 되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태을사자나 호유화는 둘 다 법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호유화가 다시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꽉 깨물면서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호유화의 머리카락들은 마치 요즈음의 드릴처럼 회전하여 꼬이면서 공간 속 으로 파고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공간의 탄력이엄청 난 듯, 움푹하게 들어가면서 뚫어지거나 찢어지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을사자도 모든 법력을 일으켜 두어 번 더 백아검 으로 공간을 후려쳤다. 백아검은 공간의 허공에 퍽 퍽 박혔지만 공간을 깨뜨리지는못했다. 백아검으로 그어진 공간은 다시 살아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아물 어드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태사자는 호유화의 머리칼 한 가닥이 자 신을 잡고 있는 것을 생각해내고는 비장한 각오를 했다.
“나를 놓아라! 그래서 전력을 다해라!”
그러자 호유화가 되받아 소리를 쳤다.
“여기서 잘못 빨려들어가 떨어져! 영원히 미아가 되려구?”
“그렇게는 안 된다!”
태을사자는 기합을 지르면서 오른손으로 백아검을 들었다. 그리고왼손을 공간에 댄 뒤 이야앗 하는 소 리와 함께 백아검으로 왼손을 꿰뚫으며 공간에 박아 넣었다.
호유화는 깜짝 놀랐으나 태을사자는 고통스러운 비 명을 지르면서도 오른손으로 은동과 금옥을 함께 잡았다.
“꽉 매달려라!”
은동과 금옥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면서 태을사자 의 팔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자 호유화도 다 시 한 번 기를 고르고는 아홉 개의 머리칼을 한데 합쳐서 무섭게 공간을 몰아쳤다.
그 동안 은동과 금옥은 거센 폭풍 같은 기류에 밀려 점차 태을사자의 팔에서 미끄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태을사자는 안간힘을 다해 은동의 옷자락을 잡고 발 로 은동의 몸을 한 번 걷어차 받쳐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금옥의 손이 점점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호유화는 캬아아 하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면서 갑자기 눈동자가 불길처럼 시뻘겋게 변 하여 흉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호유화의 머리는 꼬인 것을 풀고 뾰족한 끌 처럼 뭉쳐서 공간의 벽을 후려쳤다. 두 번… 세 번……..
금옥의 손이 미끄러져 막 떨어지려 할 찰나, 공간의 벽이 퍽 소리와함께 꿰뚫렸다. 그 순간 금옥의 손이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호유화의머리칼 한 가닥이 재 빨리 날아와 금옥의 손목을 감았다.
공간의 벽은 깨어지기는 했지만, 금방 다시 아물려 는 듯 뚫린 구멍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호유화는 다 시 여섯 가닥의 머리칼을 둥글게사방으로 뻗어서 공 간의 벽이 오므라드는 것을 버텨내기 시작했다.
“어서!”
태을사자도 마지막 기력을 모아 우선 은동을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백아검을 뽑은 뒤 호유화의 머리칼 틈바구니로 가까스로 몸을 날렸다. 호유화는 용을 쓰면서 금 옥을 구멍 저편으로 던져넣었다. 금옥을 집어넣고 난 후에는 기운이 다하는 것 같았다.
강철같이 뻗어 있던 호유화의 머리카락들에서 스르 르 기운이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공간의 벽이 다시 급속하게 아물어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태을사자는 황급히 호유화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힘을다해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토록 힘을 썼으나 태을사자는 호유화를 허리춤 정 도까지밖에 끌어내지 못했다. 공간의 벽은 버티고 있던 저항력이 사라지자 마치 괴수의 입처럼 다물려 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대로 두면 호유화를 허리 부터 두 동강낼 것 같았다.
이번에는 은동과 금옥이 재빨리 호유화의 양팔을 잡 고 힘껏 안으로 끌어당겼다. 바로 직후에 벌어졌던 공간의 벽이 별안간 투퉁 하는금속성의 굉음을 내며 닫히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태을사자는 법력이 완전히 고갈된 것을 느끼며 힘을 잃고 쓰러졌다. 쓰러진 태을사자는 마치 줄에서 풀 린 빨래처럼 공중에 반쯤 떠서허공을 부유하기 시작 했다.
은동과 금옥도 영(靈)의 상태였으므로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호유화는 구멍에서 나오자 휴우 하고 한 숨을 쉬면서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호유화의 몸은 정말 기이하게 되어 있어서 생계로 돌아오자마자영의 상태에서 벗어나 곧바로 실체화 (實體化)가 된 것이다. 은동은 둥둥 떠도는 태을사 자를 얼른 붙잡아 끌어당기고는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틀림없이 저승이 아닌 생계, 즉 인간 세상임 이 분명했다.
비록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낯익은 소나무 며 떡갈나무 같은 것이 보였다. 우거진 숲하며, 졸 졸거리며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도들려왔다.
은동이 영혼의 몸이어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끼 지 못하였으나호유화의 백발이 바람에 어지러이 나부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호유화의 앉은 자세가 그 당시의 관점에서는 조금 단정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 으며 은빛 백발을 나부끼는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 이었다. 또한 지친 듯 눈을 감고 있는 자태가 요염 하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었다.
은동은 어린 나이라 음심이 동하는 것은 아니었지 만, 어린 은동의눈에도 뭔가 오싹한 느낌마저 들 정 도의 아찔한 모습이었다. 은동은금옥이 말을 걸어오 자 움찔하면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났다.
“우리가 제대로 온 것일까?”
그러자 호유화가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냄새가 나.”
은동은 호유화의 말을 듣고 코를 쭝긋거려 보았으나 아무런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은동은 영이 었으므로 직접적으로 냄새를맡을 수도 없었고, 냄새 에 해당하는 기운을 느끼기에는 아직 법력이너무 부 족했다.
“무슨……?”
그러자 호유화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호랑이 냄새. 오긴 제대로 온 것 같군 그래.”
호랑이라는 말을 듣자 은동은 흑호를 떠올렸다. 아 직까지도 흑호의모습은 무섭게만 느껴지는 큰 호랑 이로서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래도흑호가 부근에 있 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흑호가 내 몸을 도로 찾았으면 좋겠는데……. 그리 고 유정 큰스님도 혹여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은동의 생각과는 달리 호유화가 한 말은 뜻 밖이었다.
“그 호랑이… 거의 죽어가고 있군 그래.”
“네?”
은동은 깜짝 놀랐다. 놀란 낯빛으로 태을사자를 얼 른 흔들어 보았으나 이제 완전히 법력이 고갈된 태 을사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법력으로 움직이는 저승사자에게 법력이 고갈된 것은 사람이 식물인간 상태나 혼수상태에 빠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은동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호유화는 은동이 말을 걸지 못하도록 시 한동안 눈을감고 주의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호랑이가 하나. 그리고 사람 피냄새…………. 두 사람 이 죽어가고 있어. 피냄새가 물씬 나. 가만가만 …………. 사람 중 하나는 너와 느낌이 비슷해. 그 호랑 이가 네 몸을 지키고 있니?”
은동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호가 분 명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호랑이가 죽어가고 있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어서 그리로 가요!”
놀랍게도 호유화는 조금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또 뭔가가 있어…………. 상당히 강한데 ・・・・・・.”
그러다가 호유화는 용기를 낸 듯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좋다, 좌우간 어서 가자. 시간이 없을 것 같아.”
호유화는 머리카락 세 가닥을 풀어 은동과 금옥, 그 리고 태을사자를 잡고 나는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호유화는 몸이 실체화된 뒤여서인지 저승에서처럼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날렵하게 달렸 다. 나뭇가지를 거침없이 옮겨 뛰고 재주를 넘으며 아찔할 정도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호유화의 머리카락에 감긴 셋 중 태을사자는 의식을 잃었으므로알지 못했지만 은동이나 금옥은 나무에 몇 번이나 부딪쳤다. 그러나신기하게도 나무에 직접 부딪혔으나 타격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몸 은 나무를 뚫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둘 다 생계에서의 기억 때문에 부딪히려 할 때마다 놀라고가슴이 섬뜩섬뜩했다. 금옥이 어지럼 증을 느끼는 듯 소리를 쳤다.
“꼭 이렇게 가야 하나요?”
그러자 호유화는 다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환수이기 때문에 있는 곳에 맞추어 몸이 저절로 변해. 여기는 생계니까 육신이 생길 수밖에. 그 러니 이 수밖에 없어!”
조금을 더 달려간 끝에 그들은 어느 산등성이의 조 그마한 동굴 앞에 도달했다. 동굴은 잘 보이지 않는 우묵배미에 있었으나 그 옆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굴러다니고 있어서 눈에 쉽게 띄었다.
은동은 그 동굴에 다가갈수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동굴 안에 누군가가, 그것도 자신에게 친 숙한 누군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호유화는 마지막으로 몸을 날려 공중에서 세번공 중제비를 넘은다음 사뿐 땅에 내려섰는데, 나뭇가지 밟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세 명을 내려놓았는데 호유화의 얼굴은 몹 시 긴장한 것 같았다.
호유화는 조용히 은동과 금옥에게 물러서 있으라는 듯이 손짓을했다.
은동은 당장이라도 뛰어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호유화의 얼굴이 심각해 보이자 태을사자의 몸을 끌 고 금옥과 함께 조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뒤에 호유화는 조용히 동굴 안을 향하여말했 다.
“자, 모습을 드러내시지.”
그러자 안에서 무엇인가 커다란 형체가 휙하고 튀 어나왔다. 은동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동굴 안에서 튀어나온 것이 쿵 소리를내며 땅에 떨어지더 니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것은 온통 만신창이가 되어 정신을 잃은 커다란 호랑이였다. 완전한 호랑이도 아니고 반인반수의 모 습을 지닌 호랑이! 바로 흑호였다. 그것을 보고 은 동은 깜짝 놀라 앞으로 뛰어나가려 했으나 금옥이떨 리는 손으로 은동의 손목을 잡았다. 은동은 섬칫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 자리에 멈칫하고 섰다. 그 다음 순간, 누군가가 서서히 동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자는 인간의 모습이었지만, 몸이 조금 허공에 떠 있는 것이 인간은 아닌 것 같았다. 그 자가 나타나자 은동의 손목을 잡고 있던 금옥의 손이 갑자기 파르르 떨렸다.
은동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을사자가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아마 가장 놀랐으리라.
“이판관!”
은동은 경악하여 소리쳤다.
태을사자의 상관으로 태을사자에게 살해의 누명을 씌웠던 이판관.
노서기를 죽인 이판관. 태을사자를 꼬드겨 호유화를 뇌옥에서 빼내게했던 이판관이 생계에 와 있었단 말 인가?
그러나 호유화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타는 듯한 눈길로 이판관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판관은 미소를 지으며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유유 히 은동과 금옥, 태을사자와 호유화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그러다가 이판관의 눈길은 호유화의 앞에서 멎었다. 이판관은 호유화의 목을 살피는 것 같았는 데 호유화의 목에 금제구가 없는 것을 보자 조금 놀 라는 것 같았다.
“허허……… 용케도 데리고 왔군 그래. 그런데 금제구 를 하지 않았군? 그건 조금 뜻밖인걸……?”
호유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고 이판 관을 쏘아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이었으나 이판관은 호유화의 눈길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연했다.
“지금 몹시 기운이 빠져 있군. 나에게는 몹시 다행인데 그래? 성계,사계, 생계, 환계……… 네 개의 우주를 주름잡던 호유화님도 지금 내상대는 되지 못할 것 같군.
은유화는 조용히 이판관을 쏘아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군…. 전에 마계의 존재들과 함께 나를 찾아왔던 것이 바로 당신이었군.”
그러자 이판관은 다시 껄껄 웃으며 말했다.
“호유화, 너는 정말 대단하구나. 시투력주도 시투력주이지만 네 법력이나 재주, 인물 모두가 정말 빼어 나구나. 정말로 없애 버리기가 아까운걸……?”
은동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악당! 나쁜 놈!”
그러나 이판관은 은동의 존재 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했다. 오히려호유화가 잠시 뒤를 돌아보며 은동에 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염려 마라. 아무리 법력이 빠졌어도 저 따위 놈에 게 이 누님은 절대 지지 않는단다.”
“그럴까? 그러면 이것은 어떠한가? 내게도 친구가 와 있거든.”
이판관이 능글능글하게 말하자마자 그와 동시에 갑 자기 땅이 우르릉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 들이 흔들리고 잔돌이며 바위들이땅바닥에 마구 굴 렀다.
호유화는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었으나 은동과 금옥은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리 고 잠시 후 땅이 좌악 갈라지더니시커멓고 거대한 형체가 땅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길이가 다섯길(십 미터 정도)은 넘는 것 같았으며, 몸에 수많은 마디 가 있었고 마디마다에는 갈고리처럼 날카로운 발톱 을 지닌 다리가 한 쌍씩 달려 있었다.
그리고 대가리에는 타는 듯한 붉은 구슬 같은 눈이 네 개나 박혀있었다. 그 눈에서 기분 나쁜 붉은 광 채가 솟구치고 있어서 대가리 전체가 붉은 것 같았 다. 그것은 바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지네였다. 태을사자가 전에 흑풍사자와 이야기했던, 한때 조선 북부 일대를공포에 빠뜨렸던 괴수…………….
“홍두오공(紅頭蜈蚣)!”
호유화는 몸을 움츠리며 바싹 긴장하는 듯했다. 은 동과 금옥은 너무나도 무서워서 공포감에 거의 넋을 잃어 버렸다.
이판관이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그러고는 한 번 소매를 스윽 휘두르자 동굴 속에서 두 명의 사람이 허공에 뜬 채 끌려나왔다. 두 명의 사람을 섭물공을 응용하여 소맷자락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끌어낼 정도이니, 이판관의 법력은 실로 대단하였다. 호유화는 자신도 모르게 땀이 한 방울 흐르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몸이 밖으로 끌려나와 허공에 둥 둥 떠 있었다. 은동이 그 얼굴들을알아보는 순간 별 안간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아버님!”
호유화 역시 은동만큼이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두 사람 중하나는 장년의 남자였는데 몹시 중상 을 입은 듯, 아직도 상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조그마한 몸집의 아이였는데, 바로 은동의몸이었다. 그런데 저 중년의 남자가 은 동의 아버지란 말인가?
은동은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용을 썼으나 금옥이 필 사적으로 은동을 붙잡아 뛰쳐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이판관의 주위로 거대한 홍두오공이 기분 나 쁘게 스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똬리를 틀자 이판관 이 다시 껄껄 웃었다.
“자, 어찌할 테냐? 항복하고 시투력주를 내놓지 않 으면 너는 물론, 이 둘의 육신도 바스러뜨려 버릴 테 다. 그리고 네 뒤에 있는 세 놈을이 홍두오공에게 먹이로 주는 것도 괜찮겠지. 어떠하냐?”
“…… …….”
항상 자신만만했던 호유화마저도 이제는 조금씩 몸을 떨고 있었다.
이판관의 법력은 전에 한 번 겨루어 보았지만 상당 한 경지에 있었다.
호유화가 비록 법력이 충만해 있는 상태라 해도 금 세 이긴다고는 보장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다 가 지금 법력이 온통 고갈되어 있으니………….
더군다나 홍두오공이라는 무서운 마계의 괴수가 옆 에 있었고, 협조자인 태을사자나 흑호는 모두 의식 을 잃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은동의 아버지와 은 동의 몸까지도 인질로 잡혀 있었으니, 가히 절대절 명의 위기의 사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유화에게 미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이판관은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 러자 홍두오공이 지각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호유 화와 태을사자, 금옥과 은동을 향하여 덮쳐들어왔 다.
<2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