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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6화


그러는 동안에도 놀라운 광경에 김여물과 이일을 비 롯한 휘하의장수들은 계속 신립에게 출진을 주장하 였다.

“이것은 하늘이 시기를 알리는 계시이옵니다! 이때 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김여물의 말에 신립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듯한 느낌 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지금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돌격을 다시 감행하면 무리일 것같은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어느 틈엔가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조선군의 사기가 드높아지기 시작했다.

“와, 잘한다, 잘해!”

호랑이를 향해 응원하는 자들까지도 나왔다. 그들은 살벌한 전장에서 싸움을 앞두고 있다는 것도 잊었 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평상시라면 무서워서 벌벌 떠는 호랑이라는 것조차도 잊고 응원을 해댔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던 흑호의 귀에도 그 응원 소리가들려왔다.

‘이런 제기! 난 지금 조선군을 응원하러 나온게 아 니란 말여. 이거잘못하다간 큰일나겠구먼. 조선군이 나 때문에 신이 나서 자기들 힘이 딸리는 것도 잊고 서 왜병에게 쳐들어간다면… 에그그…………… 당장 내가 몸을 숨겨야겠구먼!’

흑호는 요기에 맞을 것을 각오하고 건너편의 왜병 진지로 달려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숲이 아니면 숨을 수가 없었고 힘을 낼수도 없었다. 흑호 는 생계, 특히 자연의 정령이나 마찬가지였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거진 숲은 왜병 진지 너머에 있었다.

숲은 인간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지 몰라도, 그 곳의 각각 나무며 풀뿌리 등의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살려고 애쓰는 생명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마수들이 꺼릴 것 같은(흑호의 짐작일 뿐인지도 몰 랐지만) 생명력이 언제나 가득한 숲이라, 흑호는 어 느 정도 힘을쓰거나 귀신같이 숨어 버릴 자신이 있 었다.

어쩔 수 없이 흑호는 갈지자로 달리는 것을 포기하 고 똑바로 왜병진지로 달려들어갔다. 그때였다. 옆 구리를 한 방의 요기가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빗맞았으니 망정이지, 정통으로 맞았다면 허리가뒤 틀릴 것 같은 충격이었다.

흑호는 고통스러워서 어흥 하며 길게 포효하면서 몸 을 훌쩍 날려왜병의 방패와 목책으로 쳐놓은 진의 일각으로 돌진했다. 상처 입지않은 몸 같았으면 가 볍게 뛰어넘었을 테지만 상상 외로 상처가 걸려와 흑호는 목책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러나 흑호는 예사 짐승이 아니라 팔백 년의 도력 이 있는 짐승이고, 또 원래 기운이 엄청난지라 목책 에 맞고 튕겨나가는 대신 목책을 부수고 왜병 진지 안으로 돌입했다.

“호랑이가 왜병 진지로 뛰어들어갔다!”

“울타리를 부숴 버렸다!”

“지금이 기회다! 금수도 싸우는데 우리는 뭐냐!” 

조선군의 사기가 충만해졌다. 이제는 신립이 영을 내리지 않아도병사들 모두가 왜병 진지로 당장이라 도 뛰어들 것만 같았다.

‘한낱 금수도 조선 땅을 위해 싸우는데 어찌 우리가 군인 된 신분으로 목숨을 아까워하랴. 이미 이길 승 산은 없으니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으리라!’

신립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목소리를 높여 돌격하라 는 준비 명령을 내렸다. 출전을 알리는 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은 기마병들과보병들, 모두가 한 덩 어리가 되어 기다렸다는 듯이 진문 앞에 모여들었고 신립은 이번에도 역시 선두에 섰다.

울달과 불솔보다는 노서기가 먼저 자비전에 당도하 였다. 이판관은태을사자에게 노서기에게도 상황을 자세히 말해주라 일렀다. 태을사자는 간략하게 그간 의 경과를 노서기에게 말하고 그때의 그 마수가바로 풍생수란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이 야기에 노서기의 눈이 커졌다.

“그 마수가 풍생수라고 했소?”

“그렇소이다.”

그러자 노서기는 뭐라  중얼대며 소맷자락 속에서 길다란 두루말이를 꺼냈다. 그러다가 다 시 넣고 하기를 몇 번 하더니 마침내 한 개의 두루 말이를 찾아내었다.

“마계의 괴수였다니……. 나는 생계의 존재일 것으 로만 생각했었는데 그 놈이 마수였구려. 음… 어 디 보자. 풍생수라…………. 옳지, 여기 있구려.”

풍생수에 대해 기록된 것을 찾아내었다고 하자 태을 사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얼른 물었다.

“기록된 것이 있습니까?”

“보자…… 흐음, 풍생수는 상당한 괴수요. 물론 이 기록도 오래된것이고 들은 바를 적은 것이라 그리 믿을 만한 것은 아니오만. 생계시간으로 지금으로부 터 이천백 년 전에 그와 맞닥뜨렸던 신장의 증언을 통하여 적은 것인데…………….”

“그런 것은 상관없으니 풍생수에 대한 것이나 말해 보오.”

“으음…… 그래. 풍생수는 바람으로 이루어진 괴수 로 오행 중의 목(木)에 해당하며… 음… 보통의 방 법으로는 물리칠 수 없다고 하오.”

“그렇소. 놈과 겨룰 적에 영력으로 몇 번을 베어내 었어도 잘린 부위가 스스로 붙어 버렸소.”

“오행에 따른 상생상극(相生相剋)의 법도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길수 없을 것이라오”

“상생상극의 법이라면?”

“오행의 목은 금(金)을 이길 수 없으며 화(火)에도 약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니, 두 가지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적혀있소. 그뿐이오.”

“두 가지를 함께 한다? 두 가지를 함께라…”

태을사자는 신음하듯 되뇌었으나 그 말이 무슨 뜻인 지 알아낼 수없었다.

그 순간 소맷자락 속에 들어 있던 은동이 오히려 그 말을 단순하게생각해 내었다.

‘나무를 패는 것은 도끼이고 도끼는 쇠로 만든 것이 니, 도끼에 불을붙여서 치면 죽겠네 뭐. 그런데 풍 생수란 건 도대체 또 뭐지? 저승사자에다가 구미호 만으로도 무서워 죽을 지경인데……, 으윽.’ 

마침 울달과 불솔이 들어섰다. 이판관은 잠시 낮은 소리로 울달과불솔에게 뭔가를 이르고는 그 둘을 먼 저 나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때까지도 태을사자가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리고 있자 이판관이 노서기 에게 말했다.

“지금 풍생수의 일보다는 일단 구미호의 일이 급하니 그것부터 아뢰거라.”

“구미호라 하옵시면……?”

“환계의 환수인 구미호 말이다. 그 괴수의 약점이나 성격 같은 것들을 찾아보거라.”

“예, 예.”

노서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른 두루말이를 꺼내려 했다. 그때태을사자가 노서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아까 보았던 두루말이가 마수들에 대한 기록 이 아닙니까?”

“그러하오만….”

“그렇다면 그것을 내게 좀 빌려줄 수 없겠소? 풍생 수말고도 또 어떤 녀석이 나오게 될지 모르는 판이 니.”

“나중에 돌려만 준다면 그러겠소.”

노서기는 의외로 순순히 그 두루말이를 태을사자에 게 건네주고 다시 환수에 대한 두루말이를 찾기 시 작했다. 그런데 그 두루말이는 상당히 커서 휴대하 기가 영 불편했다. 보통의 영체라면 부피의 개념없 이 넣을 수 있었지만 그 두루말이는 마치 백아검처 럼 보통의 법기나사계의 물건과는 어딘가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그러자 동자 한 명이 조그마한 화수대 하나를 태을 사자에게 건네주었다. 화수대는 영적인 물건을 무한 정으로 집어넣을 수 있는 주머니이다. 조그마한 화 수대에 두루말이를 집어넣자 두루말이가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태을사자는 그 화수대를 다시 아무 생 각 없이 소맷자락 속에 넣었다.

소맷자락 속에 있던 은동은 호기심에 그 주머니를 집어들었다. 의외로 그 주머니는 생계에서 물건을 잡는 것처럼 손에 쥐어졌다.


‘어디 한 번 볼까? 재미있겠구나.’

은동은 어린 호기심에, 마수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궁금하여 주머니를 풀고 두루말이를 꺼냈다. 그러나 두루말이가 화수대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크기가 팽 창했다. 순간 태을사자의 소맷자락이 확 부풀어올랐 다.

은동은 혼비백산하여 화수대를 자기도 모르게 움켜 쥐고 두루말이를 다시 넣으려 했으나 두루말이는 이 미 엄청난 크기로 변해 있었다.

조그맣게 변해 있는 은동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크 기였다. 은동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나 상황 은 바깥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맷자락이 부푸는 통 에 태을사자가 잠시 당황했으며 노서기나 이판관도 약간 놀라는 눈치였다.

“자네 소맷자락에 무엇이 있는가?”

이판관이 묻자 그제서야 태을사자는 영혼들과 은동 의 일이 새삼떠올랐다.

“아, 예. 풍생수와 겨루다가 풍생수가 흘린 몇몇의 영혼들을 소맷자락 속에 거두어두고 있었습니다. 그 리고 한 아이의 영도…………. 아마 그들이 방금 넣은 화수대를 열어본 듯하옵니다.”

태을사자는 원래 거짓말을 못하였다.그러니 말을 하지않고 말꼬리를 흐 리는 것을 두고 거짓말을 한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 다. 멀쩡한 아이의 영혼을 꺼내어 가지고 있다고 아 뢰면 문제가 될까봐 일부러 말을 얼버무렸다. 헌데 이판관은 의외의 말을 했다.

“가만. 내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군. 뇌옥으로 갈 때 에는 영혼을 지니고 갈 수 없네. 물론 자네를 못 믿 어서가 아니라 뇌옥은 경계가 엄중한 곳이라 몸 속 에 영혼을 거둔 채 가서는 아니 되게 되어 있어. 그 러니 지금 동자를 시켜 영혼들은 제 갈 곳으로 돌려 보내야 하겠네. 영혼들을 모두 꺼내게.”

“예……? 아, 예.”

태을사자는 내심 당황했다. 지금 영혼들을 동자들에 게 맡긴다면 필경 영혼들을 심판 받는 곳으로 데리 고 갈 것이다. 다른 영혼들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은동은 죽지 않은 몸이니 심판 받는 곳으로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판관이 보는 앞이라 태을사자는 하는 수 없이 은동을 비롯한 죽은 자들의 영혼을 꺼냈다. 은 동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하여 화수대를 꽉 움켜쥐고 소맷자락에서 나왔다. 그런데 아무도 은동이 화수대 를 쥐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두루말이를 그냥 손에 쥐고서 은동에게 얼른 눈짓을해 보였다.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으라 는 신호였으나, 은동은 그런 신호를 받지 않아도 이 미 기가 질려서 말을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동자가 무슨 깃발 같은 것을 하나 꺼내들고 깃발에 달린 방울을 딸랑거리며 앞을 인도했다. 영혼들이 동자를 따라 줄을 지어 서자 은동도 얼떨떨한 김에 그냥 그 뒤를 따라 맨 끝에 섰다.

보아하니 죽은 자들의 영혼은 그 깃발과 거기에 달 린 방울 소리앞에서 아무 저항도 없이 줄을 서게 되 어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은동은 진짜로 죽은 몸이 아니었으므로 깃발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이판관 과 태을사자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이라, 대강 눈치 를 보아 그 뒤에 선 것이다.

그런 은동의 속을 모르는 태을사자는 마음이 조마조 마했다. 이판관은 그런 것도 모르고 이번에는 묵학 선 속의 여인의 영마저도 꺼내놓으라고 하였다. 

“내 자네에게 맡겨 조치하라고 이르고 싶지만 뇌옥 에 갈 때에는 영과 동행할 수 없는 법이니, 그 영도 일단 동자의 뒤를 따라가도록 하게.”

태을사자는 무심결에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이러다가 흑호와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사소한 일로 이판관을 번거롭게 할 때 가 아니었다. 여인의 영은 처음 나왔을 때 조금 주 변을 보고 무엇엔가 놀란 듯 하다가이내 안색이 흐 려지며 구슬프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판관은 다소 귀찮았는지, 아니면 그 여인이 조선군을 망하게 만 든 범인이라 그런것인지 냉랭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 렸다.

“모두 데리고 나가거라.”

할 수 없이 은동은 죽은 자들 및 여인의 영과 함께 동자의 뒤를 따라 자비전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은동은 조금은 멍한 상태였지만일단 자비전 밖으로 나서자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동자의 뒤를 따라가면 염라대왕을 만나게 될테고 정말로죽은 목숨이 되는 셈이 아닌가?

‘우우우,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죽기 싫어.’

은동은 애가 탔다. 그러다가 자비전 밖에 이르는 순간, 비록 저승이었지만 평소 숨바꼭질을 자주하던 몸놀림을 발휘하여 날렵하게 집 뒤로 숨었다.

동자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대여섯 명의 정말로 죽은 영들만 인솔하여 저만치로 가고 있었다. 앞에 선 것이 어른들의 영이라 뒤에 선은동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동이 대오를 벗어나서 집 뒤로 돌 때에 자신의 뒤에 섰던 그 여인의 영이 아무 생각 없이은동의 뒤를 따라왔다.

은동은 동자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가 동자가 죽은 영들을 인솔하고 저만치로 가자 안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 뒤에 머리를 풀어헤친 모양의 여인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흠칫 놀란 은동은 곧 진정하고 여인에게 조용히 하 라고 손가락을입에 대보였다. 얼굴빛이 파리한 그 여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양묵묵히 슬픈 얼굴로 소리없이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은동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그 울림 이 일종의 전심법처럼 사방에 울렸는지, 저만치 가 던 동자가 우뚝 그 자리에 멈추어서는 것이 보였다.

은동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별로 내키지는 않 았지만 재빨리여인의 영을 잡아끌고 근처의 수풀 속 으로 몸을 숨겼다. 그런데 그 수풀이란 것이 또 괴 이하여 은동이 숨으려 하자 저절로 가지를 비키며은 동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수풀들도 저승에서는 모두 영이라 나름대로 행동을 한다는것을 모르는 은동은 다시 한 번 혼비 백산하여 집의 반대편으로 여인의 영을 끌고 허겁지 겁 걸음을 옮겼다.

동자는 두 영이 없어진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자비전 주위를 맴돌며 은동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자가 움직일 때마다 깃발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며 울렸기 때문에 은동은 자비전을 가운데 두고 동자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옮겨 다녔다. 결국 동자는 자비전 근처에서 은동을 찾는 것을 포 기하는 눈치였다. 당황한 기색으로 동자는 다시 어 디론가 영들을 끌고 운동을 찾아나섰다. 은동은 안 도의 한숨을 내쉬며 혼자 중얼거렸다.

‘비록 저승이지만 난 해냈단  말씀이야, 하하. 저 동 귀신을 속인 셈이 되는구나.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 군.’

은동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몹시 무서웠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나이라는 것이 오히려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했다. 이제는 신기한 저승세계에 호기심을 가지 게 되자 어느덧 무서움이 많이 사라졌다.

은동은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는 계속 자비전 주위 를 얼씬거리며태을사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 나 자칫하면 아까 그 판관의 눈에 띄일까 봐 자비전 의 뒤켠에 숨어서 저절로 움직이는 신기한 덤불들과 장난을 치면서 무료함을 달래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잡아간 저승사자라 무서워하는 마 음이 컸지만, 지금은 이 넓은 저승에서 아는 사람 (?)이라고는 태을사자뿐이라 어서태을사자가 나오기 만을 학수고대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은동이 몸을 숨긴 것을 알지 못한 태을사자는 몹시 마음이급해졌다. 노서기가 구미호에 대해 이것저것을 일러주었으나 태을사자의 귀에는 한 마 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태을사자는 다급한 마음에 노서기에게 그냥 그 두루 말이도 빌려달라고 하여 두 개의 두루말이, 즉 마수 에 대한 두루말이와 환수에 대한두루말이를 손에 쥐 었다. 그러고는 자리를 떠나려 했으나 이판관이 태을 사자를 불러 세우더니 방울 하나를 내주었다.


“이것은 내 법기이자 신물인 묘진령(妙辰)이야. 이것을 지니고 뇌옥 입구에 가면 귀졸이 길을 인도 할 걸세. 그리고 울달과 불솔에게는내 나름대로 일 러준 것이 있으니 이후의 일은 그 둘과 상의하도록 하게나. 그 둘은 아마도 준비를 좀 갖추고 뇌옥으로 가는 입구인 무겁연에서 기다릴 것이네.”

태을사자는 한시바삐 여인의 영과 은동의 영을 되찾 아야 하기에얼른 묘진령을 받아들고 넙죽 그 자리에 엎드리며 말했다.

“알겠사옵니다. 한시가 바쁘오니, 소인 이만 출발하겠사옵니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밖으로 물러났다. 태을사자는 은 동의 뒤를 따를양으로 마음이 바빠졌다. 동자가 간 곳은 당연히 영혼을 접수시키는심판소 쪽이었을 것 이므로 별 다른 생각 없이 서둘러 신형을 이동시켰 다.

저승사자의 움직임은 산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 므로 당연히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 나 은동은 태을사자가 이미 자신을 찾아 밖으로 나 간 것도 모르고 덤불과 새롱거리며 태사자를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태을사자가 나가고 나서 장서각의 노서기도 그 뒤를 따라나갈 차비를 했다. 그러나 이판관이 자 꾸 별것도 아닌 것을 물어보며 집요하게 붙들고 늘 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태을사자가 충분히 멀 리 갔을 것으로 여겨질 즈음이었다.

이판관은 은밀한 표정으로 노서기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가까이 오라.”

자비전 밖에 태을사자를 기다리고 있던 은동이 지루 함을 견디다못하여 용기를 내어 자비전 안을 한 번 엿볼 생각으로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순간, 은동 의 마음속에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퍼 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그리 크지는 않은 소리가 분 명 자비전 안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은동은 놀라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그러나눈에 보이는 광경에 너무도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자비전 안에서 이판관이 노서기의 얼굴을 손바닥으 로 누르고 있는것이 아닌가! 노서기는 온몸이 구겨 지면서 이판관의 손바닥 안으로 이미 반쯤 빨려 들어 가며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은동은 생전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참한 광경에 몸서리를 치면서 무서움에 다시 얼른 몸을 숨겼다. 은동은 이판관이 왜 저러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노서기는 이판관의 부하 같았는데 어째서 이판관이 노서기를 죽이는 것일까?’

잠시 후 희미한 비명 소리마저 사라졌다. 노서기는 분명 이판관의손바닥으로 빨려들어가 죽어 버린 것 같았다. 그야말로 형체도 남기지 않고 죽은 것이라 은동은 몸서리를 쳤으나, 실은 노서기는 이판관에게 흡수되어 버린 것이었다.

은동은 부르르 떨면서 멍하니 서 있는 여인의 영을 잡아끌고 문 뒤쪽에 몸을 바싹 붙였다.

이판관이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였으면 움직이는 은동의 기척쯤은 알아챌 수 있었을 터. 그러나 이판 관은 심각한 생각을 하면서 한존재를 소멸시키는 중 이라 자비전 밖의 동정에 관심을 기울일 수가없었 다.

또한 은동이 워낙 어린아이라 영기가 약했으며 게다 가 진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강제로 혼이 뽑혀진 상 태였다. 그런 연유로 은동의 몸에서 나오는 영기는 너무 약하여 자비전 부근에 있는 나무나 돌들이일종 의 영체들이라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영기와 크게 구 별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은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동안 안절부 절못했다. 다시한참이 지난 뒤,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조심스레 자비전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자 비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내가 헛것을 보았나?’

은동은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으나 괴이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판관은 어디로 간 것일까? 태을사자가 나가는 것 을 보지 못했으니 이판관이 나가는 것 역시 보지 못 했을 수도…’

하지만 아까와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아까는 자신 이 동자의 시선을 피해 집 뒤로 돌아가는 사이에 태 을사자가 나간 것이겠지만, 지금은 내내 문 부근에 있었다. 이판관이 나가는 것을 보지 못할 이유가없 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귀신처럼 꺼져 버린 걸 까? 하긴 이판관도 귀신이지. 아냐아냐. 여긴 저승이고 귀신들만 있는 곳이니 그렇게꺼질 리는 없는데……. 그렇다면 이곳에 왜 문이 있겠어? 좌우간 무섭다, 무서워…………….’

좀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잦아들지 않았다. 금 세라도 이판관이 나타나서 아까 노서기처럼 자신 을 쭈글쭈글 구겨서 손바닥에 흡수해 버릴 것 같은 느낌에 오금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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