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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21화


하지만 그것이 일인 귀족들이었기에 앉은 자세에서 각자의 방법대로 몸을 풀며 막바지에 이른 회의를 이어갔다.

폐허의 삼분의 일을 뒤지고 다니며, 사람들이나 시체가 있는 곳을 표시해주고, 급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구해 준 이드들은 조금은 피곤하긴 하지만 즐거운 모습으로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각자의 방에서 몸을 씻고 다시 모인 이드와 세레니아들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오늘 있었던 회의의 내용을 크레비츠와 바하잔 등에게서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전해들은 이야기는 메이라가 낮에 이드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같은 것이었다.

기타의 병사들이나 기사들을 제외한, 혼돈의 파편이라는 인물들을 상대 가능한 사람들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먼저 라일론의 크레비츠와 카논의 세 공작 중 카논 밖으로 나와 있는 두 명의 공작인 바하잔 공작과 차레브 공작, 그리고 아나크렌의 황궁으로 딸을 찾아왔다가 딸의 부탁에 못 이겨 참전한 클린튼, 이드와의 계약으로 전투에 참전하는 프로카스, 이미 드래곤이라는 정체가 드러나 중요한 전력인 세레니아와 그녀와 비중이 같은 이드.

이렇게 일곱 명이서만 카논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거기서 좀 더 알아보자면, 양국에서 출발한 일곱 명은 우선 인덕션 텔레포트로 각자 시르카의 한 영지와 수도를 거쳐 카논의 에티앙 영지에서 모이게 된다.

이곳 영지의 주인인 에티앙 후작은 이미 차레브와 바하잔에게서 날아온 편지와 문서를 보고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기에 바하잔 공작이 이드들의 중간 경유지로 사용하겠다는 말에 아무런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아마 지금쯤이면 한참 바쁘게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에티앙에서 이드들은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점검하기 위해 하루를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드들은 마지막 텔레포트 지점으로 정해진 저번 이드와 세레니아, 일리나가 잠시 머물렀던 수도에서 하루 정도 거리에 놓여 있는 숲으로 이동된다.

그곳에서부터 카논까지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말을 타거나 걸어가기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카논 황제 구출작전을 시도해 보고자 해서였다.

이미 카논에 다녀온 이드로부터 수도가 완전히 결계로 막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리고 그 결계를 들키지 않고 뚫고 들어간다는 것 역시 듣긴 했지만 황제라는 인물이 가지는 중요성에 “그래도”라는 심정으로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까운 곳으로 텔레포트하게 되면 혹시라도, 아니 거의 확실하겠지만 혼돈의 파편들이 알아볼 듯해서 수도에서 하루 거리인 이곳 숲을 마지막 텔레포트 지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그 일곱 명이 수도에 도착하게 된 후부터는 모든 행동과 대책은 크레비츠와 바하잔을 중심으로 각자의 재량에 따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실 혼돈의 파편들에 대해 모인 사실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회의에서 그들의 행동을 계산한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 내일 늦어도 모레쯤에는 출발하게 될 것 같네.”

“네…”

바하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에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베후이아 여황이 손에 들었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이드는 잘 마시고 있던 차를 다시 찻잔으로 내뱉을 뻔했지만 내뱉지 않았다.

대신 새알이 들려 거칠게 기침을 해댈 수밖에 없었다.

“호호… 이드군, 오늘 회의를 끝마치면서 아나크렌의 황제께서 이드에게 황제의 여동생인 시르피가 조만간 찾아올 거라고…… 어머, 저런, 농담이었는데 상당히 놀란 모양이네요. 괜찮아요?”

“컥…. 쿨럭콜록….. 험, 험…. 농담… 쿨럭….. 이시라구요?”

“호호호… 미안해요. 사실 크라인 황제가 부탁한 것은 간단한 안부와 이드군이 다시 아나크렌으로 돌아올 때 시피르 공주에게 당할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할아버님께서 옆에 계시다 보니 제가 조금 장난기가 동했나 봐요. 호호호…”

“어이쿠, 여황이라는 녀석이. 체통 없기는… 쯧쯧쯧…”

“하지만 저는 좋은 걸요. 이렇게 할아버님이 옆에 계시니까 편하고 말이에요. 너도 그렇지 않니? 노르위.”

“하하하… 그럼요. 어머님.”

여황의 말에 크레비츠 옆에 앉아 있던 13살의 황태자인 노르위가 크레비츠의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은 제국의 여황과 황태자가 아닌 평범한 한 가정의 모습처럼 보여 주위의 사람들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하… 할아버님, 가셨다가 꼭 돌아오셔야 해요.”

“허허… 녀석 걱정은, 걱정 마라. 내 돌아와서 네 녀석 장가드는 모습까지 볼 테니까.”

슈슛… 츠팟… 츠파팟…

깨끗하고 하얀색의 돌담이 둘러쳐져 있는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

하지만 지금 그 정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초록색이어야 할 잔디를 은빛으로 물들인 거대한 마법진과 그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빛이었다.

그런 정원의 한쪽에서는 몇몇의 남녀들이 눈을 찔러 오는 마법진의 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고 있었다.

한순간 눈을 감고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쏘아오던 빛이 한순간 엄청나게 강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알고 천천히 눈을 뜬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눈을 아리던 빛을 대신해 마법진 위에 서 있는 다섯 개의 사람의 그림자였다.

이드는 감고 있던 자신의 눈썹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는 빛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을 알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이드의 눈에 제일 처음 들어온 것은 잘 정돈되고 아름답게 조형된 정원의 모습이었고, 그 뒤를 이어 낮으막하지만 있으나 마나 한 담장을 넘어 보이는 넓은 영지와 평야의 모습이었다.

이드는 그 탁 트인 시야에 기분이 좋아 싱긋이 웃고는 시선을 돌려 자신을 제외한 네 명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시야가 자신의 바로 옆에 붙어서 있는 한 명의 엘프에게 닿았을 때, 그 엘프 역시 이드를 바라보며 예쁘게 미소 짓는 것이었다.

이드는 그런 일리나의 모습에 조금 어색한 미소와 함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오늘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드들의 일정에 일리나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베후이아 여황으로부터 모든 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느새 준비했는지 간단한 가방을 들고 같이 가겠다는 뜻을 비치는 일리나의 모습에 이드와 크레비츠 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만, 세레니아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충고하듯이 말을 건네었다.

“포기하세요. 저번처럼 절대 떨어뜨리고 가지 못할 테니까요. 괜히 떨어뜨릴 생각하지 말고 빨리 가죠.”

“….. 이번에도 그 확정되지 않은 일 때문이에요?”

이드의 말에 일리나를 힐끗 바라본 세레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이 이드를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그 문제. 그런데 정말 모르세요? 그래이드론님의 모든 것을 이으셨다면, 아실 수도 있을 텐데요. 분명히 그래이드론님도 엘프의 생활형태와 전통을 알고 계셨을 테니까요. 자, 그만 출발하죠.”

세레니아의 말에 대체 자신에게 확인할 게 뭔지 물으려던 이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옆에 일리나를 세운 채 세레니아의 뒤를 따라 저번 이드가 텔레포트했었던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드는 그냥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래이드론이라는 이름의 도서관에서 엘프에 관련된 것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일리나의 항상 차분하던 눈이 잔잔한 흥분으로 물들고 있었다.

지금 이드의 모습과 세레니아의 말에서 얼마 후 이드가 자신의 행동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리나를 바라보며 한 시간 전쯤의 일을 생각하던 이드는 앞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일리나를 바라보던 고개를 들어 앞에서 다가오는 일곱 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선두에는 중년을 지나 노년에 접어드는 듯한 50대 정도로 인후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고, 그런 그의 오른쪽으로는 그 남자의 아들로 보이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와 안경을 끼고 상당히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왼쪽에는 온 얼굴로 짜증 난다는 듯한 표정을 표출하고 있는 17세 정도의 적발의 화사한 머리를 가진 아가씨가 걷고 있었다.

그런 네 명의 뒤로 조금 떨어진 채 제멋대로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

이드는 개중에 두 개의 아는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바하잔도 그들의 모습을 보았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하, 하…. 상당히 마이 페이스의 사람들을 끌어 모아 놓아서 그런가요? 전혀 일행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어쩔 수 없잖은가. 저들을 대신할 사람도 없는데. 오늘부터 발라파루에 도착하기 전까지라도 어떻게 해봐야지. 그보다, 저 사람이 이 영지의 주인인 에티앙 후작인 것 같은데…”

“예, 겉으로 봐서는 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제 후배 녀석이지요.”

크레비츠의 말에 그렇게 대답한 바하잔은 앞으로 나서며 에티앙 후작에게 인사말을 건네었다.

“거의 삼 년이 다 되어 가는가? 오랜만이구만. 에티앙.”

“아닙니다. 작년 무투회에 우연히 뵈었으니 1년 반 만이지요. 바하잔님.”

“하하하… 그런가. 이거, 이거 나도 나이 탓인가? 그런 걸 깜빡하는 걸 보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곳에서는 별일이 없었던가?”

“예, 다행이도. 저희 영지에서 두도까지의 거리가 먼데다가 두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것도 아니라서 별 탈 없이 넘길 수 있었습니다. 사실, 차레브 공작 각하의 편지와 서신이 오기 전에는 일이 그렇게 될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자네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했던 일이니까. 그런데 자네 뒤에 있는 아이들은, 자네 자제들인가? 보아하니 한 명은 눈에 익은 듯한데 말이야.”

바하잔의 말에 에티앙 후작이 손짓으로 뒤에 있는 아이들을 자신의 옆으로 서게 했다.

“예, 아마 첫째는 제가 바하잔님께 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녀석 둘째는 거의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항상 성에서 책만 읽어 대니 저도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지요. 그리고 이 퉁퉁 부어 있는 아가씨는 제가 늦게 얻은 막내 녀석인데, 제가 막내라고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운 덕분에 버릇이 없습니다. 혹시나 이 녀석이 실수를 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에티앙 후작의 말이 끝나자 후작이 소개한 순서대로 한 명씩 바하잔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이트 하우거 에티앙, 바하잔 공작 각하를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하잔 공작 각하. 하이너 에티앙이라고 합니다. 평생 책을 읽는 게 제 꿈이지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르보네 에티앙입니다.”

바하잔을 향해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세르보네의 태도에 에티앙 후작이 질책하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괜찮다는 듯이 미소를 지은 바하잔이 에티앙 후작을 말렸다.

“괜찮네. 그 아이가 기분이 과히 좋지 않은 모양이지. 그것보다 인사드리게. 현 라일론의 황제이신 베후이아 여황 폐하의 할아버님 되시는 분일세.”

바하잔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이드들은 에티앙 후작 가족들의 치아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정신을 수습한 듯한 에티앙 후작이 크레비츠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후작의 모습에 정신을 챙긴 세 남매도 급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들 중 바하잔에게도 대충 인사를 건네던 세르보네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확실하게 남아 있었던 짜증과 불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저는 이곳 카논의 에티앙 영지를 맞고 있는 베르제브 에티앙이라고 하옵니다. 귀하신 분을 맞이하는 데 준비가 소홀했습니다.”

확실히 여황과 동등한, 아니면 더욱더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할 만한 인물을 맞이하는 데, 후작 일가가 직접 나선다는 것은 턱없이 부족한 접대 준비였다.

비록 바하잔이 별다른 준비를 명하지 않았긴 했지만 말이다.

“크레비츠 모르카오 시드 라일론이오. 크레비츠라고 불러 주시면 편하겠소. 그리고 내가 온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테니 그대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감사합니다.”

크레비츠의 말에 에티앙과 그 자제들이 허리를 펴자 바하잔이 자신과 크레비츠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이어 뒤에 제멋대로 서 있던 세 사람과도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사람들은 앞장서서 걷는 에티앙 후작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섰다.

일행들이 안으로 들어선 바하잔은 크레비츠, 그리고 뒤에 서 있던 세 명 중의 하나인 차레브 공작과 함께 에티앙 후작과 함께 서재로 들어서며 일행들에게 저녁 시간 때까지 푹 쉬라는 말을 전했다.

바하잔의 말과 함께 차레브와 같이 서 있던 두 사람 중 프로카스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려는 듯 윗층으로 향했고, 나머지 한 명인 클린튼은 이드를 바라보더니 이드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선 윗층으로 올라가려는 프로카스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아… 중요한 것은 아니고, 아라엘에 관한 것입니다.”

“…. 어제 듣기로는 아무런 일도 없다고 들었는데. 그리고 내게 그 아이에 대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프로카스는 그 말과 함께 이드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싱긋이 웃어 보였다.

‘확실히,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 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다양하겠지.’

“미안해요. 그리고 긴장하실 건 없어요. 좋은 일이니까. 아라엘의 상태가 생각보다 빨리 호전되고 있어요. 아마 프로카스 씨가 용병 활동으로 모으신 약들이나 마법 덕분인 것 같은데, 앞으로 열흘 정도면 아라엘의 아이스 플랜이 완치될 겁니다. 그리고 몸이 좋아져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활발해졌습니다. 아빠를 빨리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 고맙다.”

이드의 말을 전해 들은 프로카스는 목이 메이는지 잠시 간격을 두고 이드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역시 아라엘에 관계된 일에서는 풍부할 정도로 감정을 표현하는 프로카스였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본 이드는 기분 좋은 듯 싱긋이 웃고는 자신과 방금 전 프로카스가 올라가 버린 곳을 번갈아 보고 있는 클린튼을 바라보았다.

그냥 스치듯 보면 모르겠지만 그의 몸은 상당히 잘 단련된 근육으로 이루어져 군더더기 없이 탄탄해 보였다.

거기에 저 사람의 마을 사람들만이 배울 수 있다는 타룬이라는 권법까지 익히고 있다니, 이것저것을 따져볼 때 현경에 이른 고수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드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찬가지로 이드를 바라보던 클린튼이 말했다.

“자네가 이드라고. 하즈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지. 네 녀석한테 빚진 것도 있고. 또 그 녀석 잘못으로 네가 피해도 봤다고 하더구나. 고맙다.”

“아니요. 별것 아니었는데요. 그리고 이쉬하일즈가 잘못했다는 것도 오히려 제게 복이 되었으니까 저로서는 오히려 고마워하고 싶은 일인 걸요.”

이드의 대답을 들은 클린튼은 대단히 마음에 들었는지 이드의 어깨를 뚝뚝 두드리며, 청수한 얼굴 위로 환하면서도 호탕한 미소를 띄어 보였다.

“하하하…. 좋아, 좋아. 마음에 드는구만. 그런데 말이야, 자네 정말 열여덟 살이 맞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와 동급 이상의 실력으로 보이는데. 나도 타룬을 배우면서 천재 소리를 꽤나 들었는데, 자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이드는 클린튼의 보기 좋은 미소에 따라서 미소를 짓고는 이제는 제법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긁적였다.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절 가르치셨던 사부님들도 뛰어나신 분들이셨고요.”

“그런가. 하지만 그것도 배우는 사람이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 대단하군. 그리고 앞으로 있을 전투에 자네 같은 사람이 같이 하니 든든하기도 하구만. 하하하하… 그럼 저녁 때 나 보세나. 난 낮잠이나 좀 자봐야겠어. 여기 오기 전까지 하즈 녀석에게 시달렸더니 피곤해.”

클린튼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본 이드도 곧 한 하녀의 안내를 받아 이층에 마련된 자신의 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드들이 받은 방은 영지 내의 경치가 보이는 창이 꽤 좋은 방으로 세 명의 방이 모두 붙어 있었다.

그중 이드의 방은 세 개 중 중앙에 있는 방이어서 그리 크지 않은 테라스 쪽으로 나서면 오른쪽으로 세레니아를, 왼쪽으로 일리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선 이드는 테라스로 나가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의 어깨에 걸려 있는 몇 벌의 가벼운 옷이 들어 있는 가방을 방 안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라미아와 일라이저를 풀어 침대 위에 같이 누워 버렸다.

[아직 엘프인 일리나가 왜 그러는지 못 찾으셨어요?]

“응, 엘프에 대한 내용이 꽤나 많아. 그들의 생명이 기니까 역사나 이런저런 내용들이 엄청난 분량이야.”

[죄송해요. 저는 그런 건 잘 모르기 때문에…. 잠깐, 이드님, 설마 그 많은 엘프에 대한 것들을 일일이 다 뒤지고 계신 거예요?]

“에? 그게 무슨 말이야?”

이드는 자신의 말에 길게 내쉬어지는 라미아의 한숨 소리에 자신이 뭔가 빼먹은 게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구, 이드님. 이곳에 오기 전에 세레니아 님이 하신 말씀 기억 안 나세요? 그래이드론 님도 엘프들의 생활 형태와 전통을 알고 계실 거라는 말이요.]

그럼 생활 형태와 전통 두 가지만 찾아보면 될 텐데… 에휴…]

이드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하는 라미아의 말에 막 또 하나의 엘프에 관한 자료를 뒤지려던 생각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세레니아의 말에 따르면 그래이드론이 가진 엘프에 관한 것들을 살펴보면 일리나의 행동을 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그 후로 이드는 엘프에 관한 모든 것을 뒤적이는 데 몰두했다.

특히 세레니아의 말이 끝난 후부터 지금까지 거의 두 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이드는 엘프들에 관한 기록 중 꽤나 골치 아픈 창조신화와 역사를 뒤적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얽힌 채 멍하니 서 있던 두 시간은 너무나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특히 제대로 알았더라면 두 시간이 흐른 지금쯤이거나 한 시간이 더 흐른 후에는 엘프들의 생활 형태와 전통을 완전히 살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 난 몰랐단 말이다. 빨리 말해 주지. 잘하면 지금쯤이면 알아냈을지도 모르는데…”

[어머? 이게 다 이드님이 세레니아님의 말을 똑바로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인데, 지금 누구 탓으로 돌리시는 거예요? 흥!]

“아, 실수… 미안, 말이 잘못 나왔어.”

[됐어요. 알았으면 빨리 찾아보시라구요. 지금부터 찾으면 저녁 식사 전에 알아낼 수 있다구요.]

이드는 라미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 식사 시간 전에 알아내겠다는 생각으로 그래이드론이 가지고 있는 정보들 중 엘프들의 생활 형태와 전통에 대해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드는 찾은 자료들의 반의반의 반도 읽어보지 못한 채 창밖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몸을 일으켜야 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말의 울음소리 같으면서도, 맹수의 울음소리를 닮은 애매한 소리였다.

더욱이 그 소리 사이사이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까지 있었다.

“하~ 정말 뭐 좀 하려니까. 도대체 누구야?”

[특이한 울음소리네요. 도대체 무슨 동물이죠.]

라미아와 일라이저를 다시 원래 있던 허리 쪽으로 돌려보내며 테라스로 나선 이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성 바로 옆의 작은 동산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두 명의 병사들을 보며 거칠게 투레질하는 황금빛 털과 갈기를 가진 보통 체격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평민처럼 보이는 여자아이가 단테라는 말의 이름으로 생각되는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 소녀의 반대편에는 이곳에 도착하면서 보았던 세르보네라는 아가씨가 열심히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역시 이드도 나왔네요.”

눈앞에 펼쳐지던 광경을 보던 이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자신보다 빨리 나와 있는 세레니아와 일리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 좀 자려고 했는데, 시끄러워서 말이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혹시 알아요?”

“잘은 몰라요. 세레니아님과 제가 나올 때는 저 말과 평민 소녀, 그리고 저 세르보네라는 소녀와 병사 두 명이 마주 보고 서 있었거든요. 그런데 세르보네라는 소녀가 반대편에 서 있던 소녀에게 뭐라고 말하더니,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병사들을 움직였어요. 그다음 상황은 이드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에요.”

“그럼, 무슨 일이지? 근데 저 말은 무슨 말이에요? 황금빛 털에 갈기까지 가지고 있는데…”

“골든 레펀이라는 이름의 말이에요. 말과 황금 그리폰 사이에서 태어나는데, 그 성격이 마치 맹수와 같고 잘만 돌본다면 보통 말의 두 배 정도의 덩치와 힘, 보통 말의 두 배에 이르는 속도를 낼 수 있어요. 말과 그리폰 사이에서 태어나 머리도 꽤나 좋지만, 인간들의 눈에는 10년에 한 번 뛸 정도로 소수만이 존재하죠. 그리고…”

뭔가 말을 이으려던 일리나의 인상이 슬쩍 찌뿌려지는 모습에 이드가 의아해할 때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주인이나 자신이 인정한 존재 이외에는 태우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해서 기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인기가 높지요. 덕분에 직접 잡으러 다니는 기사들도 적지 않고 골든 레펀을 노리는 사냥꾼들 역시 적지 않게 많지요.”

‘숲의 종족… 화낼 만한 일인가? 특히 수가 적다니까.’

이드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전방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근데 정말 무슨 일이야?”

“가르쳐 줄까?”

이드는 위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느긋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클린튼의 얼굴이 있었다.

이드는 곧 클린튼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여기 몇 시간 전에 와서 이곳에서 쉬다가 저 녀석, 골든 레펀의 울음소리에 잠도 못 잤기 때문에 물어서 알게 된 건데, 지금 저 모습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 찾기? 하하하… 그게 좋겠어. 주인 찾기.”

“주인 찾기요?”

“그래, 사실 저 말은 두 달 전쯤에 저기 보이는 숲에서 저 세르보네라는 소녀에게 다친 채 발견되었지.

더욱이 그 말이 골든 레펀이기에 성으로 데려와 치료했지. 한 달이 넘게 치료받았다니 꽤나 상처가 심했던 모양이더구만.”

그 말에 밑에 있던 세 명은 의아한 시선으로 두 소녀와 말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저 상황은 뭐란 말인가.

“이봐, 이야기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들어봐. 구해오긴 했지만 저 귀족의 아가씨가 직접 말을 돌볼 일은 없잖나.

그래서 말이 완쾌되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저 말을 간호하고 돌본 게 저기 세레니아 앞에서 말 이름을 부르고 있는 저 키트네라는 소녀라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저 골든 레펀이 완쾌되고 나서부터인데. 이 녀석이 자신을 구한 세르보네라는 소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저 키트네라는 소녀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거야.

덕분에 화가 난 세르보네라는 소녀가 저렇게 몇 번 잡아타려고 시도를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지.

아까 세르보네가 후작과 함께 자네들을 맞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도 오전에 타려고 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예? 뭘요.”

클린튼의 이야기를 들으며 막 한 병사가 말에 채여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던 이드가 그의 갑작스런 물음에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저 말의 주인 말이야. 누가 주인인 것 같은가?”

이드는 클린튼의 질문에 뭐라고 금방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주인인가… 이건 꼭 낳아준 부모의 은혜와 키워준 부모의 은혜를 비교하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일리나와 세레니아를 슬쩍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연과 동물을 주인이 아닌 친구로 보는 일리나는 아예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고, 세레니아는 어느 쪽이든 자기 것이라는 표정이다.

“하~ 상당히 애매한 질문인데요. 세르보네 그녀가 없었다면 저 골든 레펀은 누군가에게 발견되지 못하고 숲속에서 다른 동물들의 먹이가 됐겠죠.

하지만 집에 데려왔더라도 키트네라는 소녀가 없었다면 돌보는 사람이 없어 죽었겠지요.

아, 다른 하녀나 돌볼 사람이 있다곤 말하지 마세요. 누가 오든 상황은 같았을 테니까요.

뭐, 저 말에게는 처음 얼굴만 비친 세르보네보다는 한 달 넘게 자신의 옆에서 자신을 간호해주고 지켜준 키트네가 은인이겠지만.

저는 뭐라고 결정을 내리진 못하겠네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결정을 내리면 저 말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 말이 생각하는 것도 다를 테니까요. 특히 인정하지 않는 자는 태우지 않는 말이라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지요.”

“그래.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지. 놓아주는 것 다음으로 말이야.

하지만 저 아가씨는 그걸 모르니 조금 더 고생을 해야겠지.”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클린튼이 테라스에 놓여 있던 긴 의자에 다시 몸을 누이자 거친 말울음 소리와 또 한 명의 병사가 쓰러지며 쿵 하는 소리를 냈다.

두 명의 병사를 모두 날려버린 단테라는 이름의 골든 레펀은 여유 있는 걸음걸이로 키트네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모습을 노려보던 세르보네는 곧 몸을 홱 돌려서는 성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 키트네라는 소녀가 허리를 숙여 보였으나 세르보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었다.

“뭐,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세레니아하고 일리나도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은 또 말을 타야 될 테니까.”

자신의 말에 일리나와 세레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의 방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본 이드는 라미아와 일라이저를 다시 풀어 안고는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머릿속에 모아두었던 자료들을 열심히 뒤적이기 시작했다.

“좋아. 저녁시간 전까지 꼭 알아내고 만다.”

하지만 몇 시간 후 저녁 식사를 위해 하녀가 올라올 때쯤에는 몇 시간 전과 같은 그런 열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라미아를 다리 위에 올려놓고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조금은 당황스럽고, 어색하고, 기분 좋은 미소를 띄우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일리나의 일이라면 항상 토를 달고 나서는 라미아마저도 조용했다.

그때쯤 방 밖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듯한 가벼운 인기척과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손님, 식당에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으니 내려오십시오.”

“네, 고마워요.”

이드는 시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그녀의 기척이 다시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든지 함께 다니기로 한 라미아를 허리에 다시 걸면서 라미아에게 말했다.

“후~ 라미아,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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