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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 155화


천화는 그 모습에 다시 허공에 대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소환 실레스틴!!”

천화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허공 중의 한 부분이 이상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순간 그 일렁임은 투명한 푸른색의 색깔을 가지면서 성인 요정과 같은 실레스틴의 모습으로 변했다. 드러난 실레스틴의 모습은 요정의 날개가 없고 다리가 있는 하체 부분이 허공 중에 녹아 들어가 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레센의 실레스틴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실레스틴, 세 번째로 보는 실레스틴의 모습이었다. 스피릿 가디언의 학생들에게 정령 소환에 관해서 물었을 때와 자신이 직접 계약을 맺을 때, 그리고 지금.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모습인지 여기저기서 소근소근 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니, 그들에게도 정령은 모습은 어느 정도 익숙할 것이다. 단지 천화가 정령을 소환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것도 최상급 정령 말이다. 하지만 한참 정신없이 당하고 있는 크레앙과 천화로서는 그런 웅성임을 들을 겨를이 없었다. 소환된 실레스틴이 천화의 얼굴 앞으로 날아와 방긋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오랫만에 이세계에 소환하신 주인님 나이트급 실레스틴 인사를 드리옵니다.”

마치 명령을 내려 달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천화는 그런 실레스틴에게 아직도 노움에게 발목을 붙잡힌 채 정신없이 휘둘리고 있는 크레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분 선생님을 바람으로 묶어서 시험장 밖으로 굴려버려….. 단, 심하게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럼 부탁해. 실레스틴.”

“그거면 됩니까?”

“어. 그다지 피해를 주긴 싫으니까.”

“알았습니다.”

천화의 명령에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실레스틴이었다. 게다가 본성은 장난을 좋아하는 바람의 정령이라서인지 그 성숙한 얼굴에 조금은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는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크레앙이 있는 곳으로 날아간 실레스틴은 마치 크레앙을 놀리는 양 그의 몸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런 실레스틴이 손을 내밀자 지나가는 곳마다 투명한 푸른색의 로프가 생겨나 크레앙의 몸을 휘감아 들었다. 그러길 잠시 크레앙이 푸른빛 로프에 반쯤 뒤덮였을 때가 되어서야 실레스틴이 그의 몸을 휘감는 걸 멈췄다. 그리고 어느 한순간 단단히 실에 휘감긴 팽이를 던지듯 로프에 휘감긴 크레앙의 몸을 시험장 한쪽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던져진 크레앙은 엄청난 속도로 시험장 끝자락으로 굴렀고, 그 속도를 전혀 줄이지 못한 그는 시험장 밖으로 그대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차마 못 보겠다는 듯 천화가 슬쩍 고개를 돌리는 사이 잠시간 공중부양의 묘미를 느끼던 그의 몸은 철퍼덕! 하는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철퍼덕거리는 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려 시험장 밖 바닥에 대자로 뻗은 크레앙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천화는 어느새 자신의 얼굴 옆에 날아와 있는 실레스틴을 보며 나무라듯 말을 건넸다.

“에… 저기.. 실레스틴. 너무 심한 거 같은데.. 그리고 저렇게 심하게 해버리면 어떻게 해…?”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의 말을 들은 실레스틴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어 보이고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양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땅 바닥에 뻗었다고 생각했던 크레앙의 몸이 아래위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그제야 만족한 천화는 실레스틴과 노움을 칭찬해 주고, 크레앙의 몸을 다시 시험장 위로 올려놓으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그들이 원래 존재하던 곳, 정령계로 돌려 보내주었다.

“으…. 끄으응….. 으윽…..”

“에구… 죄송합니다. 선생님. 실레스틴 녀석이 장난기가 많아서…. 그대로 크게 다친 곳은 없으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곧 응급처치 반을 부르겠습니다.”

크레앙의 신음 소리를 들은 천화는 실레스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듣고 있는 사람에게 참 뻔뻔스럽게 들리는 말을 늘어놓고는 잠시 전 갈천후가 했던 것처럼 진행석을 향해 한쪽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미 상대가 전투 불능이니 빨리 진행해 달라는 표시였다. 그리고 그 요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 천화군의 두 번째 테스트 역시…. 천화군의 승(勝)입니다. 이것으로서 천화군의 ‘임시 교사 체용에 대한 실력 테스트’를 모두 마칩니다. 대기하고 계시던 가디언 프리스트 분들께서는 속히 크레앙 선생님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아….

스피커에서 테스트의 결과를 발표하자 갑작스런 나이트급 정령의 등장에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트렸다. 자신들과 같은 나이에 선생들 중 최고 실력자라는 두 사람을 이겨버린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아이들 사이에 우상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런 환호를 받는 천화는 별로 탐탁치 않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시험장 한쪽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런데 막 천화가 시험장 아래로 내려서는 계단을 밟으려 할 때였다. 지금까지 쓰러져 끙끙거리던 크레앙이 갑작스럽게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사방에서 일던 환호성이 한순간에 멎어 버렸고, 이쪽으로 달려오던 가디언 프리스트까지 깜짝 놀라 제자리에 급정지해버렸다. 그러나 정작 이런 상황을 연출해낸 당사자는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천화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길 잠시. 크레앙의 얼굴이 천천히 찌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의 얼굴이 찌푸려지는데 비례해서 장내의 긴장감 역시 높여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긴장감은 일순간 날아가 버렸고 그 빈자리를 억지로 참아내는 듯한 킥킥대는 웃음이 대신했다.

“아고…. 아우, 아파…… 아파라…..”

바로 크레앙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온 몸을 주무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코믹한 이 모습에 사람들은 한 토막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새 어른에게 속아 넘어간 듯한 아이의 표정을 한 크레앙이 천화를 바라보며 꼬이는 한국어 발음으로 물어왔던 것이다.

“천화군….. 사용했어? 정령도?”

…. 발음이 꼬일 뿐 아니라 문법도 잘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뜻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천화였다.

“네, 소환해서 계약을 맺었죠. 얼마 되진 않았지만….”

천화의 대답을 들은 크레앙은 뒤쪽의 누군가를 가리키는 듯한 손짓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마스터 갈천후님과 싸울 때는 사용하지 않았어. 정령을…. 아, 아니… 정령을 사용하지 않았지?”

“에? 에…. 그건 뭐, 별다른 뜻은 아니예요. 단지 무공만 수련하신 분이기 때문에 저 역시도 무공만 사용한 거죠. 쉽게 말하면 간단한 예의를 보였다고 말하면 맞을 것 같아요.”

“그럼 나는? 왜 나에게는 정령을 사용한 거지.”

크레앙이 천화의 말에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지만 천화는 그의 말에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단순하게 테스트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 정령을 소환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렇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천화였다.

“음, 그러니까. 그건 무공을 사용하시는 갈천후 사부님께 대한 예의죠. 무공만 사용하시는 갈천후 사부님께 정령까지 들고 비무를 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크레앙 선생님은 마법을 사용하시잖아요. 마법이야 그 많고 다양한 종류의 기법들이 있으니 제가 정령을 사용해도 별 상관없겠다 싶었는데. 괜찮으시죠? 선생님.”

억지였다. 무공을 쓴다고 예를 갖추고 마법을 사용한다고 정령을 사용했다니, 분명히 억지였다. 하지만 아직 한국어에 익숙치 않은 크레앙은 조금 늘여서 말하는 천화의 말에 곰곰히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설사 괜찮지 않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장외에 이렇게 다친 마당에 승복할 수밖에. 천화는 크레앙이 수긍하는 듯 하자 조금 미안한 마음을 담아 고개 숙여 인사해 보이고는 시험장을 내려왔다. 그런 천화의 옆으로 가디언 프리스트들이 스쳐갔다. 천화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원래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올라갔다. 그런 천화를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은 역시나 라미아였다. 자리로 다가오는 천화의 모습에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던 그녀는 천화의 한쪽 팔을 잡고는 방긋 방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 순간 천화와 라미아 두 사람에게 쏠리는 시선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도 했다.

“역시 천화님. 간단히 이기실 줄 알았어요.”

“하하… 그래?”

“후유~ 너 정말 대단하다. 실력이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나 대단할 줄을 몰랐는걸. 근데, 너 정령술은 또 언제 배운 거야? 게다가 그거 최상급 정령이지? 너 나한테 정령술 한다는 말 한 적 없잖아.”

라미아에게 끌려 자리에 앉는 천화에게 연영이 신기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길에도 천화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시험장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험장에는 자신의 테스트 때문에 흩어졌던 시험 응시자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들고 있었다.

“물어 본 적도 없잖아요. 물어보지도 않는데 내가 왜 말을 해요? 근데, 이제 끝난 거예요?”

“칫, 그래. 끝났다. 결과는 내일쯤 각 파트별로 통보되니까 오늘은 이걸로 끝이야.”

연영은 천화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고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 뒤를 그녀의 말을 들은 라미아와 천화가 따라 일어났다.

“일어나, 테스트도 끝나고 했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께.”

“언니, 난 저번에 먹었던 불고기…..”

“사달라는 거 사줄거죠?”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처음 시험을 시작할 때 제일 앞에 나서 지휘했던 그 젋은 기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럼, 이것으로서 제 십 팔 회 정기 승급시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험에 참가하신 모든 학생 분들과 선생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시고, 대회 운영진들은 대회의 정리를 시작해 주십시요. 이상!!”

엄청난 목청을 지닌 기사의 목소리를 들은 세 사람은 가이디어스를 나서기 위해 기분 좋게 몸을 돌렸다. 한데, 막 나서려는 그들의 발길을 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 지금 어디 가는 거지? 만약 놀러 가는 거라면 나도 끼고 싶은데….”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연영과 라미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 천화는 잊었던 것이 생각난다는 듯 한쪽 주먹을 꽉 줘어 보이며 휙 하고 뒤돌아 섰다.

“아, 깜빡했네, 손영형. 나 잠깐 볼래요?”

“…….”

잠시 후 확 풀린 얼굴의 천화를 선두로 세 사람은 가이디어스를 나섰고, 그 뒤를 통통 부은 눈을 가린 남손영이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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