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00화
1435화
“검은 여우의 통찰력이 대단하군요.”
이드가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무리 점잖은 척을 해도 먹고 싸는 인간인 이상 돈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건가 싶다.
“정작 중요할 때 쓰이지 않은 재주는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그러나 이런 칭찬에 클라인 백작은 고개를 젓는다.
배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그의 탓이랴.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시커먼 먹구름으로 거대한 욕망을 감추고 있었으니, 그의 모자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물론 당사자인 클라인 백작은 생각할 때마다 분한지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 작자들은 감히 기사라고 불릴 가치도 없는 것들입니다. 기사의 왕이라니. 하! 그 자체가 희극이요, 다시 없을 비극입니다.”
“뭐, 그 비극도 오늘 내일 중으로 끝나게 될 겁니다. 그보다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이드는 마르텔이 적은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클라인 백작은 어쩐지 편지에 쉽게 손을 대지 않는다.
“어쩐지 읽고 싶지 않군요. 마르텔의 성향을 보자면 차분히 자신의 죄를 고백한 건 아닐 것 같고.”
“……이번에도 정답입니다. 용감하게 죽고 싶다는 전언과 함께 온 것인데. 한번 읽어 보세요. 제법 재밌더군요.”
이드가 재차 권하자 클라인 백작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지, 혹은 검후의 편지를 살핀다는 것이 황공해서 그런지 검후를 돌아본다.
그에 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숨과 함께 편지를 펼쳐 드는 클라인 백작.
“쯧,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작자입니다. 감히 검후께 보내는 편지에 이런 악필이라니. 필체부터 인성이 드러나는 법인 것을……”
중얼중얼.
내키지 않는 일이라서일까. 아니면 그만큼 마르텔이 싫어서일까.
클라인 백작은 편지를 읽기도 전부터 마르텔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더한 욕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작게 흥얼대는 그건 마치 노동요를 닮아 있었다.
그런 모습에 이드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가만 보면 저 사람도 정상은 아니라니까.’
잘 꾸민 겉모습은 귀족의 귀감이며, 얼굴은 세련된 꽃중년인데. 지금 하는 짓만 보면 술에 쩔은 동네 아저씨와 하등 다르지 않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이상한 모습이 이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이어질 수가 없었다.
처음 몇 줄을 읽을 때까지는 이어지던 노동요가 다섯 줄을 넘어가면서 끊어지기 시작하더니, 열 줄을 넘어가는 순간 완전히 멈춰 버린 것이다.
빠드드득!
“이 개 같은 작자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이런 같잖은 수작질을!”
편지로 떠나는 추억 여행.
이드와 검후도 보는 순간 알아차린 의도를 검은 여우라고 불린 클라인 백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더욱이 전언으로 온 용감한 죽음을 더하면 다른 가능성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거센 콧김을 뿜으며 부서지게 이를 갈아 댄다. 벌써 몇 번째인지. 과연 오늘이 지났을 때 그의 치아가 무사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것은 바로 끈기였다. 입으로는 분노와 역겨움을 토해 내면서도 클라인 백작은 편지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굳이 눈여겨볼 만한 중요한 내용도 없는 그런 편지임에도 말이다. 검후와 관련한 일에는 그만큼 철저하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일까. 아무튼, 겨우겨우 편지를 끝까지 읽은 클라인 백작은 악전고투를 치른 듯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아 냈다.
“크하! 내 인생에 이보다 역겨운 편지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겁니다. 이 미친 인간이 화병으로 사람을 쓰러트릴 생각이 아니고서야.”
물론 그냥 하는 말이다.
아무렴 검후가 홧병에 쓰러질까.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질 수 없는 것이 현재의 검후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읽어 보신 감상은 어떻습니까.”
“토할 것 같습니다.”
“……”
아니, 그런 감상 말고.
이드는 잠시 말을 잊었다. 클라인 백작은 그런 이드를 뒤로하고 검후를 찾았다.
“무례한 줄은 아오나, 감히 검후 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불쏘시개로도 못 쓸 쓰레기를 제가 처리하고 싶습니다.”
땔감으로도 못 쓴다면서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이런 이드의 의문과 마찬가지로 검후도 이어질 클라인 백작의 행동이 궁금한지 짐짓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서 허락했다.
“이미 소용을 다 한 편지다. 백작이 원하는 대로 해도 좋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클라인 백작은 곧바로 휴대하고 있던 펜을 꺼내 편지의 뒷면에 짧은 글을 써 내렸다. 그리고는 편지를 다시 네 등분으로 찢고, 기사들이 세워 놓은 말이 싼 똥을 치덕치덕 발라서 작은 공처럼 뭉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라미아도 호기심을 보였다.
그 순간 백작은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다 만든 공을 갈라서는 그 안에다 침을 퉤퉤 뱉어 넣고는 그걸 다시 말아 공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코랄을 향해 다가갔다.
“왜, 왜 그러십니까!”
주춤.
그 어떠한 위협의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코랄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묘하게 겁을 먹은 모습이 꼴사납지만, 그 모습을 본 그가 정말 두려워 그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자리에 코랄이 아니라 자신이 있어도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말똥에 침까지 뱉어서는 그걸 손으로 조물조물하며 다가온다니.
우웩!
기사단 특성상 청결을 중요시해서일까. 울상을 하고서 입을 틀어막는 기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왜냐니? 당연히 전언에 대한 답신을 가져가야 할 것 아니냐. 그게 싫다면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 있겠지. 어쩔 테냐?”
“지금 그게・・・・・・ 답신이라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이 정도면 죄인들에게 전달할 답신으로는 훌륭하지 않나?”
‘눈이 맛이 갔다!’
이런 걸 두고 차분한 광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코랄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미친 클라인 백작도 싫고, 미치지 않은 검은 여우도 싫었다. 그가 이드나 검후보다 상대하기 어렵다는 건 충분히 실감한 상태다. 하지만 대화 상대를 바꾸고 싶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다.
무엇보다 살길을 열어 준다지 않는가. 비록 소름 돋을 정도로 더럽기는 하지만!
“답신의 가치는 제가 아니라, 마르텔 경이 판단할 일입니다.”
“흥, 어디까지 전령 행세를 하시겠다? 그러든가. 그럼 받아라.”
“아니, 제게 주지 마시고요. 여기 넣어 주십시오. 편지와 검과 함께 받은 주머니입니다. 아아! 조심히! 손에 묻습니다!”
“거, 생각보다 재밌는 놈일세.”
마법 주머니를 최대한 벌려서 내미는 코랄의 모습에 클라인 백작이 재밌다는 듯 히죽 웃었다.
제법 과감히 연기도 하고, 검후를 상대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놈이 고작 말똥을 상대로 이런 호들갑이라니. 당장이라도 이런 놈의 선동에 혹해서 내성으로 달려간 병신같은 것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으으, 답신은…… 잘 받았습니다.”
“아쉽군. 아쉬워.”
클라인 백작은 손에 살짝 묻어 버린 말똥을 털어 내고, 물로 씻고, 다시 손수건을 꺼내 드는 코랄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는 곧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다시 황금마차로 다가감에 따라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중 이드가 황급히 손을 들어 클라인 백작을 멈춰 세웠다.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봐요.’
“무슨 문제라도?”
무엇이 문제인지 그 자신만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일까.
이드는 운디네를 불러내 물을 흘려주며 말했다.
“일단 손부터 씻으세요. 설마 그 꼴로 검후님께 갈 생각입니까?”
“하하하. 명예 후작께선 잘 모르십니다. 말똥은 기사에게 아주 익숙한 겁니다. 검후께선 이런 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사실 틀린 소리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기사만큼 말과 가까운 병종도 없다. 그건 다른 직종을 다 따져도 그렇다. 그들에 있어 검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기마술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다.
당연히 말을 돌보는 것도 기사의 일과 중 하나.
그런 기사가 말똥을 보고 질겁할 리가 없다는 것이 클라인 백작의 주장이었지만!
과연 그럴까?
이드는 검후를 향해 어떠냐는 듯 눈빛을 보냈고, 그에 검후가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백작, 손톱 사이까지 꼼꼼히 씻으시오!”
쪼로로록!
“…….”
비비적비비적!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의 명이다. 클라인 백작은 입을 꾹 다물고 운디네가 흘려주는 물에 열심히 손을 비벼 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전 아직…… 인간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걱정 말아요. 일리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진심이다.
인간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인간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지구와 그레센을 통틀어 역사에 남은 수많은 현자들도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내 생에 처음 보는 답신이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한가.”
클라인 백작이 꼼꼼히 손을 씻은 후에야 접근을 허락한 검후가 물었다.
“겨우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클라인 백작은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세어 보더니, 히죽 웃었다.
“아직 제가 저 죄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이 남았습니다. 그것만 생각하면 벌써 웃음이 납니다.”
“후후. 자네가 즐겁다니 다행이군. 처음부터 뒷정리는 백작에게 맡기려 했으니, 천천히 해 보시게.”
“후후후후.”
이 정도면 공식적으로 보복을 허락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이드는 악귀처럼 쩍 벌어지는 클라인 백작의 입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이번 사건이 끝난 후 삼검왕이 지내던 저택은 정말 잡초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담이 아니라,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이 존재했던 흔적을 지워 버릴 것 같은 기세가 아닌가.
“그나저나 그대가 만들어 놓은 저 답신이 백작의 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