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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25화


1460화

이드는 실로 오랜만에 진득한 자세로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고급 만년필과 함께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하얀 종이가 두툼하게 쌓여 있었으며, 손에는 유사 축융검법이라는 마르텔의 유품이 들려 있었다.

그 내용에 대한 파악은 이미 끝이 났음에도 이드가 한 장 한 장 공을 들여 비급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꺄하하하하하!!

아이 특유의 웃음소리가 닫아 놓은 창문을 뚫고 들려왔다.

・・・・・・ 그웬으로 가자!

아니야! 거긴 남은 게 없어. 벨론가로 가야 해!

씨잉, 너희끼리만 놀지 말고, 나도 끼워 달란 말이야!

뒤이어 동내가 떠나가라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목소리. 저게 대화를 하는 건지 소리를 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어쩐지 빤히 그림이 그려지는 모습에 고개를 돌린 이드.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골목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아이들의 무리가 한둘이 아니다.

남녀는 물론, 나이로 갈라놓은 무리가 수십 개는 될 것 같다.

“그래. 축제에 가장 신난 건 역시 아이들인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새삼스럽게 해요? 당연히 아이들이야말로 축제의 꽃인데.”

“・・・・・・ 처음 듣는 말인데, 당연한 거였어?”

어느새 다가온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축제의 꽃이라.

보통은 그 축제의 상징이나, 혹은 축제에 대표로 뽑힌 처녀들에게 붙는 말이 아니었던가? 아이들이 축제의 꽃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본 이드다. “당연한 거 맞아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축제가 무슨 흥이 나겠어요?”

“뭐, 그렇기는 한데.”

자신이 기억하기로 분명 아이들의 참가가 금지된 축제도 많다. 하지만 이드는 굳이 그에 대해 언급하기를 포기했다.

생각해 볼수록 라미아의 말이 딱히 틀리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였다. 축제란 자고로 왁자지껄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아이들이었으니까.

사실 아이들이 없으면 조금 심심할 것도 같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축제는 좋은 일이죠. 이때가 아니면 언제 마음대로 먹고 놀 수 있겠어요?”

“글쎄. 평소에도 그렇잖아?”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아이들도 해야 할 몫의 집안일이 있다. 그러나 결국은 아이들이기에 맡겨지는 일은 가벼운 것들뿐이다.

시골 영지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여긴 소드 팰러스에 그런 가정은 없다. 소드 팰러스에 사는 주민들은 대부분 기본적인 의식주에 대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매일은 아니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고, 먹고 싶은 것도 적당히 먹을 수 있다.

“그렇긴 한데, 그래도 마음껏 배부르도록 먹을 수는 없잖아요. 하지만 축제 때는 다르죠.

“똑같지 않아? 축제라고 먹는 게 공짜일리도 없고.”

“어머, 몰랐어요? 축제 기간 아이들이 이용하는 모든 건 공짜예요.”

“모두 공짜라고? 진짜?”

“네, 전부요.”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미아에 이드는 진심으로 놀랐다.

자신이 알기로 소드 팰러스에 사는 아이들의 숫자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활이 안정된 만큼 아이들을 많이 낳는 편이었다.

더욱이 어릴 때부터 수련생으로 소드 팰러스에 들어온 아이들까지 더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 그런데 그 많은 아이들이 이용하는 모든 것이 무료라니. 그런 축제는 듣도 보도 못했다.

나름 ‘복지’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던 지구의 경험도 있는 이드였지만, 거기서도 이런 수준의 복지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돈이 엄청 들어가는 일인데. 그걸 누가 지원하는 거야?”

“누구겠어요?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사람.”

“……검후?”

“그리고 기사들도요. 검후가 좋은 일을 하는데, 기사들이 빠질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먹거리만 공짜였던 것이, 모두 공짜로 바뀐 거래요.” 아마도 검후는 먼저 떠나보낸 자신의 아이를 생각해서 나선 게 아니었을까 싶다. 기사들은 라미아의 말 그대로일 것이고.

이드는 그런 결정 과정을 상상하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좋은 일이기는 한데,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자신을 위한 축제는 필요 없다니. 언행 불일치가 너무 심한 거 아냐?”

“뭐 어때요? 이런 언행 불일치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죠.

그렇기는 하다.

좋은 언행 불일치. 자신의 기억이 맞는다면 지구 말로는 츤데레라고 했던 거 같다.

“그런데 라미아는 이런 걸 언제 알아본 거야?”

“아침부터 아이들이 쉬지 않고 뛰어다녔거든요. 그것도 하나같이 손에 먹거리를 한가득 들고서. 그래서 물어봤더니, 자랑스럽게 말해 주더라고요. 최소한 축제 기간에는 아이들이 먹을 것으로 차별받는 일은 없다고.”

“아…….”

먹을 것으로 차별받지 않는다.

특히 먹는 것 이전에 재능에 대한 차별이랄까? 차이를 극심하게 실감하는 소드 팰러스에서 나온 말이기에 묘한 감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이때, 라미아에 이어 일리나가 다가와 이드의 목을 팔로 감싸 안았다. 순간 숲속에 들어선 듯 기분 좋은 풀 내음이 전신을 감쌌다. “엘프 아이들도 축제를 좋아해요.’

“그래요?”

“아이들이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 비슷하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나요?”

“딱히 없어요. 그냥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들렸어요.”

이드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것일까. 다음 순간 두 볼이 발그레해진 일리나가 부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아이가 가지고 싶은 거라면, 저는 좋아요.”

그와 반대로 라미아는 두 팔을 들어 엑스자를 만들며 말했다.

“저도 아이는 좋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나중에 내가 아기를 가질 수 있을 때 가졌으면 좋겠어요.”

“자자, 둘 다 진정해요. 두 사람의 아이라면 분명 귀여울 것이고, 나도 기대되지만 아직은 아니니까. 당장 해야 할 일도 많고. 그냥 잠깐 복잡한 머리를 쉬었을 뿐이야.”

그런 말과 함께 두 아내의 머리를 포근하게 안아 주는 이드.

그 품에 안겨 있다가 나온 라미아가 책상에 올려진 비급과 텅 빈 종이를 보고는 말했다.

“수정 작업이 어려워서 그래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거 같은데.”

검후 앞에서 큰소리 땅땅 칠 땐 언제고 이제 와 딴소리냐고 묻는 것 같은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책상 앞에 앉은 지 이제 두 시간이라고.”

“그런가? 우린 한참 지난 줄 알았어요. 그죠? 일리나.”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리나.

“그거야 두 사람이 영화에 빠져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고! 아니, 정말 왜 내가 일하는 옆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거야?”

투덜거리는 이드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하얀 벽면에 쏘아진 영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 두 주인공 커플이 양탄자를 타고 물살을 가르며 나는 장면이다.

‘저 부분이 제일 볼만하지.’

그런데 정작 영화를 시청 중이던 두 여인은 이미 영화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왜겠어요? 좀 더 이드 옆에 있고 싶으니까 여기서 보고 있는 거지. 그죠오~ 라미아의 말에 이번도 고개를 끄덕이는 일리나.”

대신 볼이 살짝 붉다. 부끄러운 걸까. 그래서인지 검법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돌린다.

“그럼 검법 수정에 대한 계획은 섰어요?”

“사실 그 부분이 좀 고민이긴 해요. 정확히는 검법의 방향성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를 고민 중이었거든요.”

그러자 일리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게 고민이죠? 원본이 있는 검법이잖아요. 그럼 방향성은 이미 정해진 것 아닌가요?”

“음, 미안해요. 설명이 좀 부족했네요. 방향성이라고 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검법의 틀을 바꿔야 해요. 다른 곳에서 자기들 좋을 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그러기 위해서는 독특한 개성을 주입할 필요가 있거든요.”

이드가 말한 방향성은 이때 주입할 개성에 대한 방향성이었다.

“음, 이드가 생각하는 방향성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우리가 듣고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맞아요. 아무래도 그레센에 대해서는 이드보다 저와 일리나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어서 속내를 털어놓아라.

그렇게 말하는 라미아의 재촉에 이드는 졌다는 듯 두 손을 들고는 가닥을 잡아 놓은 부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드가 검후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염두에 둔 대상은 다름 아닌 불가와 도가의 정통 무공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여기서 나온 많은 무공이 황실로 들어갔으나, 이후 제대로 사용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여기에는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그 근간에는 불가와 도가에 대한 이해를 필요함에 따른 수련의 어려움이 가장 컸다.

중원에서도 이러했으니, 불가와 도가의 개념을 근간으로 수정을 한다면 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레센에선 어떻겠는가. 못해도 수십 년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조차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건 분명 ‘자기들 좋을 대로 사용하지 못하게끔 하는 데 있어선 바람직한 일이었다.

다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바로 수정된 검법을 익히 위해 불가와 도개에 대한 기본 개념을 공부할 필요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건 분명한 허들이다.

물론 뛰어난 무공을 익히기 위해 그만한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드가 생각하기에 이는 검후가 바라는 방향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기는 해요. 그럼 다른 방법은 없나요?”

“당연히 있죠.”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무공의 진의를 깊이 숨겨 두는 방법이었다. 철저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 정해진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 오르지 않고서는 검법의 위력을 얻을 수 없게 하는 방법이었다.

언뜻 단순하고 쉬워 보이나, 아무리 익혀도 끝에 닿기 힘들어 결국에는 포기자가 속출해 외면받는 무공.

역사가 깊고 명성이 높은 문파와 가문에서라면 꼭 한둘 가지고 있는 그런 무공들 말이다. 이런 형태의 좋은 점은 불가와 도가에 대한 기본 공부가 필요치 않다는 점이다. 또한 누구나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처음 시작은 소드 팰러스에 쉽게 접할 수 있는 무공들과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문제라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검법의 진의에 어지간한 끈기가 아니고서는 중도 포기자가 속출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었어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두 사람 생각은 어때요?”

설명을 마친 이드의 물음에 일리나와 라미아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리나가 간단하다며 말했다.

“당연히 세 번째 방법이지 않나요? 검후가 내놓은 무공이잖아요. 쉽게 익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당사자에게 물어봐요. 마침 점심시간인데.”

아닌게 아니다.

라미아의 말에 끝나기 전에 내성의 하녀가 문을 두드리며 점심 식사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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