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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39화


1474화

하늘이 티 없이 푸르다. 햇살도 포근해서 참 기분이 좋다.

아무렴 이렇게 날이 좋은데 방에만 있기는 너무 아깝지.

높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이드가 고개를 돌려 방 안을 살폈다. 사랑하는 두 아내가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다. 숨 쉬는 것도 멈추고 일리나의 손톱을 화려하게 꾸미는 중이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

“거기 아름다운 숙녀분들.”

그런데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좀 높았던 모양이다. 깜짝 놀란 붓이 흔들리며 일리나의 작은 손톱 위에 그어지던 선이 삐뚤어져 버렸다. 

“앗!”

“윽! 괘, 괜찮아요. 이 정도는 충분히 수정할 수 있어요.”

잠시 호들갑을 떨던 두 여인은 곧 침착하게 사태를 수습하고는 새초롬한 눈으로 고개를 든다.

이드는 그런 두 사람의 눈길에 조신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미안해!”

“어휴, 놀랐잖아요.”

“정말 미안.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어.”

날씨와 목소리가 무슨 상관일까.

남편의 황당한 변명에 두 여자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이드도 그들을 따라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일은 괜찮아? 망치진 않았어?”

“망할 뻔! 했지만 멋지게 극복했죠. 짜잔! 제 작품 어때요? 이쁘죠?”

일리나의 손가락 끝에서 귀여운 꽃 열 송이가 피었다. 손톱이라는 작은 공간이 무색할 정도로 정교한 그림은 과연 라미아가 ‘작품’이라고 자신할만했다.

무엇보다 그림을 받은 일리나의 표정이 굉장히 만족스러워 보이는 것이 핵심이다.

‘마음에 들었나 보네. 나는 답답하던데.’

라미아의 네일은 이드도 받아 봤지만, 기분 탓이랄까? 마치 장갑을 낀 듯 답답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응, 걸작이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 주긴 힘들겠다. 다 해 달랄 거 아냐.”

“그건 좀 곤란하죠..

화장법이 다양한 그레센이지만 지구의 네일 아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알게 된다면 하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상대가 명예 후작 부인인 만큼 아무나 손을 들이밀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드는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른 건가요?”

일리나가 물었다.

“우리 외출해요. 날이 이렇게나 좋은데 안에만 있긴 아깝잖아요. 나가서 사람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곧 식사 시간인데. 검후는 어쩌고요?”

“애도 아니고, 혼자 먹겠죠?”

아무렴 어떤가. 어른인데, 옆에서 누가 먹여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먹기 적적하면 부를 사람도 많다. 꼭 자신들이 검후와 같이 식사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가고 싶지 않아요?”

외출과 검후를 저울 양쪽에 올리는 이드였지만, 답이야 뻔했다. 저울은 단숨에 외출 쪽으로 기울었다.

“생각해 보니까, 밥을 혼자 먹을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이죠!”

어른의 기준이 갑자기 확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리나와 라미아는 냉큼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랜만의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난 표정이다. 두 사람의 외출 준비는 간단했다. 대신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이드가 입을 옷을 골라 왔다.

이드도 그 옷으로 갈아입고 세 사람은 냉큼 성을 빠져나갔다.

괜히 늦장을 부렸다가는 검후라는 짐이 따라붙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검후가 그렇게 무도한 인간은 아니지만, 최근 이드 일가와 붙어 있는 시간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면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특히나 나이가 들면 눈치가 없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 기준에서 보면 검후의 눈치는 이미 사용 기한을 한참 넘겨 폐기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성을 나서는 세 사람을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 밖 광장에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 검후가 공개한 멜팅 블러드의 여파다.

이드는 라미아와 일리나를 각각 양옆에 두고 팔짱을 끼고는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람이 많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모두 알아서 이드 일행을 피해 움직였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을 피한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귀중품이라서 조심한다는 느낌이랄까.

개중에는 이드 일행을 유심히 살피는 사람도 꽤 있었다.

아무렴 라미아와 일리나의 미모는 어딜 가서도 빛이 나는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호기심에 더해 노골적인 부러움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감히 미녀를 빼앗아 보겠다고 나대는 뇌가 가랑이 사이에 달린 멍청이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은 소드 팰러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병사보다 흔한 어느 기사의 검에 목이 날아갈 수 있는 땅이었으니까.

거기에, 이런 놈들의 특징이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다는 것이다. 힘에 더해 머리가 좋아야 여자를 유혹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아는 것이다. 저처럼 아름다운 미녀를, 그것도 둘이나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그만한 능력의 증명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이다. 그 능력이 신분이건, 재력이건, 무력이건 상관없다. 능력이 된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사실 소드 팰러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형태이기도 했다.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수련생이나, 기사들 중 능력이 모자란 인간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덕분에 이드는 불쾌한 사건 없이 여유 있게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본 일행은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몇 번의 증축을 거친 소드 팰러스의 길과 골목은 크고 곧았다. 그런 골목 안은 광장만큼이나 사람으로 넘치고 있었다.

“이 안에서만은 신분의 고하가 없는 것 같아요.”

낡은 신발과 비싼 신발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수도인 안티로스에서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이런 느낌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소드 팰러스라서 더 그런 것이겠지.”

재능만 있다면 신분에 관계없이 가르침을 내리는 소드 팰러스.

그 때문일까. 이 영지 안에서만은 신분의 경계가 흐릿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아무래도 축제는 이런 소드 팰러스의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지금 이 골목에서 신분보다 더 중요한 건 주문 순서 정도이지 않을까?”

그리 말하며 이드가 가리킨 곳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마침 누군가 뻔뻔하게 새치기를 하려다 수십 명이 뿜어내는 살기에 엉금엉금 바닥을 기는 모습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저긴 뭔데 저렇게 줄이 길죠? 이 골목에서 가장 긴 것 같은데.”

“소스 타는 냄새가, 꼬치네.”

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로 가려진 가계 안에서 무언가를 내리치는 탕탕 소리에 이어 하얀 연기와 함께 불에 탄 소스 냄새가 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마침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 나와서 그럴까. 가계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턱이 아플 정도로 군침이 돈다.

“우리도 먹을까요?”

끄덕끄덕!

일리나도 군침이 돌긴 마찬가진가 보다. 유난히 큰 고갯짓에 세 사람은 냉큼 줄의 가장 끝에 가서 섰다. 꼬치라는 메뉴의 특징 때문인지 아니면 주인장의 손이 빨라서인지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시 후 이드의 손에는 꼬치 서른 개가 담긴 나무 접시가 들렸다.

“음! 여기 맛집이네!”

“맛있어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꼬치를 입에 넣은 세 사람은 한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필요가 없었다. 그저 맛있었다. 가장 줄이 긴 이유에 납득이 갔다. 이건 신분을 떠나, 줄을 서야 하는 맛이었다.

달고 짜고, 향긋하다. 자연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사람을 유혹하는 교활한 맛!

덕분에 이 골목의 맛집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이드는 즉시 꼬치 집 다음으로 줄이 긴 가게를 지목했다.

“다음은 저기로!”

“어서 가요!”

반대는 없었다. 그렇게 세 가족은 정신없이 식도락을 즐겼다. 메뚜기처럼 긴 줄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꼬치에서 돼지 구이, 그리고 맥주에서 다시 칼솟 뿌리 구이로 이어지는 아무런 맥락 없는, 맛에 따른 원초적인 흐름이었지만, 즐겁고 맛이 있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다섯 개의 가게를 격파한 세 사람은 차가운 탄산을 손에 쥐고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돌아갈 때 꼬치는 좀 사 가야겠어. 검후에게 맛은 보여 줘야지.”

“그러면 좋죠. 그나저나 진짜 축제 같아요.”

진짜 축제는 이미 수 주 전에 끝이 났는데 말이다.

“실제 축제나 다름없죠. 축하할 일이 있고, 그로 인해 사람이 모인다면 그게 바로 축제니까요.”

“그렇죠. 꼭 축제라고 이름표를 붙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이드가 일리나의 말에 고개를 주억인다.

따지고 보면 앞선 검후의 복귀보다 지금이 더 축하할 일이기는 했다. 검후의 외유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그녀가 직접 무공을 공개하는 것은 40년 만이다. 둘이 가지는 의미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신기한 점이라면 이 축제를 즐기고 있는 소드 팰러스 사람들의 체력이었다. 아무리 기분 좋고, 즐거워도 사람이 체력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몇 주를 웃고 떠들 수 있을까. 그런데 소드 팰러스는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그나마 꼬치 가게와 같은 상점들은 이해가 갔다. 그들은 얼마나 매상이 좋은지 붕 떠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아무튼, 고마워요. 이드 덕분에 놓친 축제를 이렇게 다시 즐기잖아요.”

“맞아요. 나가자고 할 땐 놀랐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오히려 내가 미안하죠. 바빠서 축제도 즐기지 못하고. 쭉 내성에만 있었잖아요. 다행히 수정 작업도 끝이 났으니, 이 흥겨운 분위기가 다가시기 전에 한 번은 즐겨야겠다 싶더라고요.”

진심을 담은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발끝을 들고는 이드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오구오구. 착해라~”

이드는 그런 라미아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더 쓰다듬어 달라는 양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후 이번엔 일리나가 물었다. 

“그럼 멜팅 블러드에 대한 건 완전히 끝이 난 건가요?”

이틀 전까지만 해도 멜팅 블러드에 대한 것으로 검후가 쉼 없이 질문을 해 왔던 것을 일리나도 옆에서 똑똑히 들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끝났어요. 최소한 말로써 전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요. 어제는 실제 초식을 운용하는 모습도 보여 줬었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실전에 쓸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사실 하나의 검법을 익히는 시간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이드가 수정된 멜팅 블러드를 넘긴 지 겨우 이 주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멜팅 블러드의 원본을 얻은 시간까지 합해도 겨우 한 달이다.

어디 어설픈 삼류 검법도 아니고, 절정의 검법을 한 달 만에 익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혹 익혔다 하더라도 그저 껍데기 수준일 것이 뻔했다.

보통이라면 말이다.

검후는 이 보통에 해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검법에 있어 이미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검법이라면 한번 보는 것으로 그 핵심을 단숨에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니다. 거기에 멜팅 블러드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마르텔이다.

그리고 그 마르텔의 무공은 다름 아닌 검후에게서 나왔다.

아무리 형태가 다르다 하지만 검후에게 그 뿌리가 있으니, 검후가 멜팅 블러드를 익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럼 소드 팰러스에서의 일은 이제 대부분 마무리된 거네요?”

“응, 그래서 하는 말인데, 카논으로 가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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