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40화
1475화
맛있게 먹고 즐기는 사이 오후 반나절이 치즈처럼 녹아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하늘을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마법등과 촛불이 거리와 가게 안을 밝히기 시작했다. 거리를 채우던 냄새도 변했다.
술과 자극적인 소스 냄새 대신 포근한 빵과 고소한 고기 냄새가 풍겨 와 사람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그건 이드도 다르지 않았다.
이것저것 많이 먹은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이상할 정도로 배가 고파졌다.
“우리도 저녁 먹으러 갈까요?”
돌아다니던 중에 미리 봐두었던 맛있어 보이는 가게를 염두에 두고서 물었다. 관심을 보이던 라미아와 일리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맘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점심에 이어 저녁까지 검후 혼자 먹게 하는 건 너무 불쌍하니까요. 다음에 가요.”
아무래도 말도 없이 몰래 성을 빠져나온 것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래요, 그럼. 시간은 많으니까.”
이드는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의 의견에 따라 성으로 발길을 돌리며 팔을 들었다. 그러자 라미아와 일리나가 냉큼 다가와 팔짱을 꼈다. 팔을 타고 기분 좋은 온기가 전해져 온다.
조금은 줄어든 인파를 뒤로하고 골목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이드는 골목을 돌아보며 아쉬움에 혀를 찼다.
“아쉽네. 확 시집이나 보내 버릴까 보다.”
“누구요? 검후?”
“말고 누가 있겠어요? 은근히 신경 쓰여서 불편하잖아요.”
“귀찮아서 시집을 보내겠다는 건 너무하잖아요.”
노처녀 딸내미 시집 보내려는 아빠 같은 발언이라며 라미아가 키득댔다. 하지만 이드로서는 농담이 아니었다.
“너무한 거 없어. 이게 다 검후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니깐.”
“아하하하. 지금 그 말투요! 그거 진짜 아빠 같은 발언이었어요!”
“내가 아니면 누가 이런 말을 하겠어?”
아마 황제도 이런 이야기는 못 할 것이다.
그나마 이드니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진짜 부모 자식 관계 못지않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도 끈끈하고 무거운 것이니까.
물론 그렇게 끈끈한 관계를 논하기엔 이드와 검후가 함께한 배움의 시간이 일반적인 그것보다 짧기는 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비해 가르침은 컸고, 무엇보다 이드를 대신해 꾸준히 관계를 이어 온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일리나다.
검후에게 있어 일리나는 스승이면서 동시에 사형제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런 관계가 없고서는 누가 감히 검후에게 결혼을 하라 마라 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평생을 홀로 지낸 것도 아니고, 이미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그녀가 아니던가.
“거기에 나이까지 생각하면 할 필요가 없는 거죠.”
“필요 없긴 왜 없어?”
“이드 생각은 다른가요?”
이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나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가장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검후에게 결혼이 필요 없다는 사람 대부분은 그녀가 살아온 시간을 보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반대로 이드는 앞으로 검후가 살아갈 시간을 보고 있었다.
지극한 경지에 올라 다시 젊음을 되찾은 검후가 앞으로 살아갈 시간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면 길었지,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내일 당장 갑자기 무공을 잃게 되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일이다.
일단 변화를 마친 육신은 온전한 젊음을 얻었기에 딱 그 나이대의 시간 흐름에 따라 늙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최고의 상태로 변했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훨씬 건강하게 긴 수명을 살게 되리라.
대략 70년 이상이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비록 친손녀처럼 귀여워하는 황녀가 있다고 해도 홀로 보내기엔 참으로 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검후가 도사나 비구니도 아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
외로움이란 아무리 대단한 무인이라도 견디기에 어려운 것인 만큼, 검후 본인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좋다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다.
“그래도 검후에게 그런 말을 하면 화낼 거예요.”
“모르죠. 오히려 신랑감이나 데려오고 그런 말을 하랄지도?”
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이 때문인가. 여느 부인들처럼 능글맞은 부분을 많이 보여 주던 검후를 생각하면 화를 낼 것 같지는 않다.
“어차피 급한 일은 아니지만요.”
“그렇죠. 그런데, 화나 있지는 않겠죠? 자기만 두고 갔다고.”
“에이, 애도 아니고. 괜찮아.”
살짝 걱정을 담은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팔랑팔랑 손을 저었다.
진짜 애도 아니고, 아마 땍땍거리며 섭섭하다고 잔소리 좀 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맛있는 선물도 준비했잖아. 괜찮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알아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검후.
이드는 자신을 째려보는 눈에서 불길이 토해지는 환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못 나가게 막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몰래 도망치듯 성을 빠져나가다니!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고요.”
“화 많이 났어?”
“그걸 말이라고! 화내는 게 당연하죠!”
“그렇지만 우리가 애도 아니고. 잠깐 외출하는데, 그걸 굳이 보고를 한다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말이에요?”
앉은 소파를 탕탕 내리치는 검후의 눈꼬리가 심상찮게 꿈틀거린다.
괜한 변명이 그녀의 심기를 더욱 긁은 것 같다. 이드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었어. 이렇게 화낼 줄은 몰랐지. 대신 맛있는 거 사 왔잖아. 그러니 그만 화 풀어라.”
“그 말은 겨우 먹을 걸로 절 회유하겠다는 건가요? 어림없는 소리예요!”
검후는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이드가 보기엔 전혀 사실과 다른 반응이었다.
“・・・・・・ 말은 그러면서 잘만 먹잖아.”
소심하게 투덜거리며 검후의 눈치를 살피는 이드.
그런 그의 눈에 다시 검후의 입으로 들어가는 꼬치가 보인다. 달고 짠 자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검은 소스가 발라진 꼬치가 쉼 없이 검후의 입안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후의 입맛에도 제대로 들어맞은 것 같다.
특히 아공간에 넣어 가져와 열기가 그대로 유지된 점이 컸다. 아무래도 꼬치의 특성상 식어 버리면 맛이 못하니 말이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 말도 안 했어. 완전 반성하고 있어, 몰래 나간 건 정말 미안해. 이렇게 화낼 줄 몰랐어.”
솔직히 검후의 반응이 유난스러운 면이 있었다. 하지만 검후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혹시 떠나 버린 줄 알았단 말이에요.”
“떠나다니? 소드 팰러스를?”
“소드 팰러스의 문제는 이제 다 해결이 되었으니까요. 혼돈의 파편도 제국 안에는 없을 테고.”
다시 말해 말도 없이 떠난 줄 알고 섭섭했다는 것이다.
이드는 그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럴 리가 없잖아. 굳이 몰래 떠나야 할 이유도 없고, 무엇보다 여기 남은 게 한둘이야?”
“그건 그렇지만요.”
검후도 그 말엔 할 말이 없는지 꼬치만 오물거린다.
할 말이 궁색하긴 할 것이다. 당장 이드 일행이 쓰는 방에 남은 물건이 한둘이 아니고, 지금도 연구실에 틀어박힌 비올라와 이제는 의미가 퇴색한 바이트 타블렛이 있으며, 스케스틱도 있다.
특히 스케스틱의 존재는 컸다.
조만간 복귀할 드래곤들을 위해서라도 이드와 스케스틱은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그런 스케스틱을 남겨 두고 움직일 리가 없지 않은가.
‘뭐, 좋게 보면 그만큼 정이 들었다는 거겠지.’
이드는 이제 완전히 눈꼬리가 내려간 검후를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에 검후가 흥하고 코웃음을 친다.
이처럼 서로 격의 없이 편할 수 있는 관계가 검후에게 또 있을까. 아마도 그녀에겐 이 시간이 매우 소중한 것이 분명했다.
검후는 모든 고기를 빼 먹고 남은 꼬치 막대를 흔들며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앞으로 저만 빼 두기 없어요. 남은 혼돈의 파편을 찾아 처리하는 일에는 저도 함께할 거니까요.”
“그렇게 당부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 어차피 제국의 도움을 받을 일이 한둘이 아니라고.”
바벨의 협력을 구해 놓기는 했지만, 눈과 귀는 하나라도 더 늘어나서 나쁠 것이 없다. 더욱이 검후와 황제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바벨보다 더욱 적극적인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조직이 바로 제국이다.
굳이 그들의 협력을 무시할 이유가 없지 않나.
“알면 됐어요. 그런데 이 꼬치 맛있네요.’
“그렇지? 나도 먹어 본 꼬치 중에 첫손가락에 꼽힌다니까.”
“이렇게 맛있는 가게가 성안에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인생을 손해 본 느낌이라 억울해요.”
인생을 손해 본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드는 검후의 표현에 끌끌거리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을 본 라미아가 투명한 컵을 검후에게 건넸다. 아름다운 유리컵 안에는 검은 액체가 보글보글 거품을 뿜어내는 중이다.
“고기만 먹지 말고 이것도 마셔.”
“킁킁. 달콤한 냄새가 나는데. 뭐예요?”
“몸에는 나쁘지만, 입이 즐거운 음료.’
“훗, 그럼 맛있겠네요.”
라미아의 말에 검후는 깔깔 웃으며 컵에 든 음료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맛있는 것일수록 몸에 나쁘다는 말은 그레센에도 통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럴수록 맛이 좋다는 것도 증명된 사실.
무엇보다 라미아가 주는 음료이지 않은가.
의심은 없고, 기대만 있다.
“캬하~~~!! 이거 좋아요!”
“그럴 줄 알았어.”
“한 잔 더…… 크읍! 어머나!”
한 잔 더를 외치던 검후는 자신도 모르게 나온 커다란 트림에 놀라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런 경험은 없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런 부끄러움도 잠시.
검후는 라미아가 건네주는 음료를 연이어 세잔이나 들이켰다. 그리고는 나오는 트림을 참지 못하면서도 한껏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 인생 최고의 꼬치와 음료예요! 이 궁합은 미쳤다고요!”
아무래도 내일 성 밖의 꼬치 가게의 길게 늘어선 줄에 검후가 끼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드는 이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