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83화
1518화
검기와 검강이 흐르는 본격적인 대련이 시작되고 십여 분이 지났을 때,
‘여기까지 할까.’
이드는 대련을 그만 끝내기로 결정했다.
처음 대련을 시작했던 두 가지 목적도 이미 달성한 상태.
바이언 공작의 검법은 모두 보았고, 동시에 그를 상대하며 무형검강결의 위력도 충분히 증명했다.
이 이상 대련이 길어지면 대전의 피해만 늘어날 뿐이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바이언 공작의 손발에 대전의 바닥과 기둥이 깎여나가는 중이지 않나.
이드는 이러한 뜻을 바이언 공작에게 전했다.
물론, 구구절절 말로 전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검을 통해 흐르는 진심이면 충분했다.
백 마디 말보다 진실하고 정확한 의미가 전달되었다.
순간 바이언 공작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애써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검초를 준비했다.
그에 따라 강력한 내력의 응축이 일어났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에 이드도 진심으로 답하기로 마음먹었다.
바이언 공작이 바라던 최선의 일부분을 꺼내 보인 것이다.
다음 순간.
“츠아아압!”
묵직한 기합과 함께 바이언 공작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환상적인 허초를 담은 초속(超速)의 찌르기.
그 초식에 담긴 무리는 사일 검법의 절초에 못지않은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그것으로는 결코 지금 이드의 손에서 피어나는 무형대천강의 힘을 뚫어낼 수 없었다.
푸확!
순간 이드의 손끝에서 하얀빛이 폭발했다.
빛은 초속의 찌르기를 순식간에 잡아먹고, 그 뒤에 있던 바이언 공작까지 덮쳐 버렸다.
커다란 폭발음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소름 끼치는 고요함이 대전을 휩쓴 다음 순간.
쨍강!
“크헉!”
하얀빛 속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답답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이어 빛을 뚫고 튀어나오는 두 개의 물체,
그것들은 그대로 대전의 벽면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하나는 바이언 공작이었고,
콰당!
그 옆 벽면에 박힌 다른 하나는 부러진 그의 검의 반쪽이었다.
티잉.
“승부가 났으니, 대련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얀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타난 이드가 검결지를 풀며 말했다.
“젠장…….”
순간 쓰러진 바이언 공작의 입에서 아쉬움에서 나온 것인지, 분노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애써 쓰러진 몸을 일으켜 앉는 그.
그의 손에는 절반으로 부러진 그의 애검이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바이언 공작은 복잡한 눈길로 부러진 검을 바라보다 질끈 눈을 감았다.
뒤이어 힘없이 부러진 검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말했다.
“졌소. 패배를 인정하오.”
패배를 말하는 바이언 공작의 목소리는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죽어도 좋다고 말했던 그였기에, 이렇게 끝나버린 대련이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
이드는 그런 그를 보며 짧게 포권을 해 보였다.
“멋진 대련이었습니다.”
“약자의 발버둥일 뿐이었소.”
허탈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바이언 공작.
하지만 이드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바이언 공작의 검법은 기문 검법 중에서도 보기 드문 상승 검법이었다.
무림에서도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뛰어난 검법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검법을 상대한 것만으로도 이드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대련이었다.
더불어 꺾이지 않는 투지와 승부욕까지.
참으로 멋진 삼박자이지 않은가.
“제 눈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공작님의 검법은 대단했습니다.”
이드는 그렇게 자신의 진심을 밝히고는 흐트러진 복장을 다듬은 후, 상석에 앉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대련이 끝났음을 고했다.
“승부가 났습니다. 대련은 만족스러우셨습니까. 황제 폐하.”
“실로, 실로 인상 깊은 대련이었소. 최근 수십 년 동안 본 대련 중 가장 대단한 대련이오. 명예 후작의 뛰어난 실력. 잘 보았소.”
“황공하옵니다.”
한 번 더 고개를 숙이는 이드.
황제는 그런 이드에게 답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직접 아래로 내려가 벽에 기대앉은 바이언 공작을 손수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그리고 바이언 공작, 그대도 열심히 해 주었소.”
“추한 모습을 보여 드린 듯하여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아니오. 이 자리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패배가 확실한 대련을 나선 것만으로도 그대는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오. 오늘의 대련으로 인하여 그대의 명예가 추락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명예가 추락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
그 말은 이번 대련에 대한 어떠한 소문도 퍼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는 뜻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이기도 했다. 뒤이어 황제를 따라 폴카 공작과 하인라이어 공작이 다가와 황제의 손에서 바이언 공작을 넘겨받았다.
두 사람은 각자 마법과 초인기로서 바이언 공작의 상처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창백하던 바이언 공작의 얼굴에 점차 혈색이 돌았다.
이내 부축 없이도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그는 벽에 박혀 있던 부러진 검날을 뽑아 검자루와 함께 검집에 넣고는 느릿한 걸음으로 이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나 궁금한 것이 있소.”
“무엇입니까?”
“지그를 부러트린 마지막 무공 이름이 무엇이었소?”
“무형대천강. 오늘 바이언 공작님을 상대로 사용했던 무형검강결의 마지막 초식이었습니다.”
바이언 공작은 검법과 초식의 이름을 몇 번 되새기고는 말했다.
“나는 그처럼 강맹한 검법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소. 이제야 좁은 우물에서 나온 기분이오. 혹시 그 무공이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이오?”
“뭐, 그렇지요.”
“그런데 무형대천강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이오?”
이드는 생각지 못한 물음에 바이언 공작을 유심히 살폈다.
무슨 뜻에서 하는 말일까?
너무 강력한 공격이었다고 피해 보상을 청구하려는 건 아닐 테고.
“이유를 물으시는 겁니까?”
“그렇소. 굳이 그러한 절초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나를 쓰러트릴 수 있었을 것 같아 하는 말이오. 어째서 그런 보석 같은 절초를 꺼낸 것이오?” 트집이 아니라 투정이다.
그 속에 든 것은 불만이 아니라 감사다.
그러한 기색을 알아차린 이드는 웃음을 숨기지 않고서 장난처럼 말했다.
“……그래서 불만이십니까? 대련을 시작하기 전에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 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했지.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소. 마지막 초식은 아마도 명예 후작의 배려였을 테니까. 그렇지 않소?”
“보답이었습니다. 좋은 검법을 보여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니, 그랬구려. 하하하하.”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커다란 웃음을 터트리는 바이언 공작이다.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는 무례였지만,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함께 들었기 때문이다.
시작도 전에 승패가 분명했던 대련.
시종 바이언 공작이 밀리기만 했던 대련.
어떻게 보면 처절할 수 있었던 대련이지만, 그 끝맛은 결코 씁쓸하지만은 않았다.
황제는 이만 쉬라며 대련을 끝낸 이드를 별궁으로 돌려보냈다.
이미 그가 사신으로 온 이유는 충분히 들었으며, 대련을 통해 이드가 가진 힘에 대한 확인도 끝이 났기 때문이다.
이미 답은 나왔지만, 좀 더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공작들과 의견을 나누고 조율할 부분이 남아있었다.
“바이언 공작, 그대도 오늘은 이마 돌아가 몸을 추스르도록 하시오.”
바이언 공작은 이러한 황제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외상은 없지만, 내상은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속이 울렁거리고, 날숨에 비릿한 피 냄새가 묻어나오는 상태였다.
“황제 폐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부러진 검이 든 검집을 들고 몸을 돌려 대전을 나서려던 바이언 공작.
하지만 무슨 생각이 난 것일까.
대전 문앞에 멈춰 선 그가 갑자기 돌아서며 말했다.
“물러나기 전에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그리하시오.”
“이번 검후 님의 협조 요청에 대해, 저는 무조건 찬성임을 밝히겠습니다. 또한 그 협력의 증거로 저희 가문이 가진 쌩텀과 볼레로 두 기사단과 함께, 이들을 보좌할 천명의 병사를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언 공작의 코넬 가문에서는 세 개의 기사단을 운용하고 있다.
그중 가문을 수호할 한 개 기사단을 빼고 두 개 기사단을 내어놓은 것이다. 천명의 병사까지 더해서.
그야말로 공작가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이었다.
“더해서 지금 부상이 회복하는 대로, 저도 직접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공작 본인까지 손수 손을 보태겠단다.
그 말에 황제뿐 아니라,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공작들까지 하나같이 놀란 얼굴들을 했다.
이건 지원 규모가 실로 파격적인 수준이다.
아직 이렇다 할 전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적의 행적을 발견한 것도 아님에도 이 정도라니.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니오? 이건 한 가문이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오.”
황제가 말했다.
그 말대로였다. 검후가 과거의 맹약을 꺼낸 이유는 한 가문의 지원을 바라는 것이 아닌, 제국의 지원을 바라는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후께서 밝힌 적은 대단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해서 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이 있는 이상 최선을 다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보답・・・・・・ 이란 말이오?”
누구에 대한 보답 말인가?
검후?
아니면…….
“혹시 아까 대련을 통해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오?”
그렇게 묻는 황제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바이언 공작의 경지가 올라간다는 것은 제국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새롭게 알게 된 혼돈의 파편이라는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