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089화
1524화
시종이 가져온 것은 황제의 부름이었다.
“보세요. 제 말이 맞았죠?”
예상대로라며 히죽 웃는 스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일어났다.
“알았소. 한데 옷을 갈아입으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오.”
전날 알현을 끝으로 그 어떤 공식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아 평범한 일상복 차림을 하고 있던 이드였다.
이에 이드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살핀 시종이 고개를 저었다.
“황제 폐하께선 예의를 차리는 자리가 아니니, 편히 방문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지금 이대로 황제 폐하를 뵈러 가도 괜찮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보기에 멋진 대신 복잡하고 갑갑한 정장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나저나 예의를 차리는 자리가 아니란다.
아무래도 황제는 첫날과 같은 편한 자리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스폴 경은 부인들께 내가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았다고 전해 주시오.”
“그러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명예 후작 각하.”
눈치 빠르게 여느 기사들처럼 딱딱하게 예의를 차리는 스폴.
이드는 새삼 그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그럼 갑시다. 안내를 부탁하오.”
“예.”
시종을 앞세운 이드가 그 뒤를 따랐다.
황궁을 가로지르는 시종의 발길을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둘은 별궁을 나서, 전날 들렀던 대전을 지나쳤다. 시종의 발길은 조금 복잡한 길을 돌아 황궁 심처로 향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의 숫자가 급격히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십여 분을 걸었을까.
이드는 일단의 기사들과 시종들이 지키고 있는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요?”
“황제 폐하께서 사용하시는 집무실 중 하나입니다.”
“집무실이 여럿인 모양이오?”
“….”
대답이 없는 시종.
비밀인 모양이다.
이드는 더 묻지 않고, 옷차림을 간단히 점검한 후 말했다.
“고해 주시오.”
토독. 톡.
“폐하, 이드 명예 후작이옵니다.”
“들라 하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들이 문을 열었다.
황제 개인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사방에서 풍기는 책 냄새였다. 뒤이어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 눈에 들어오고,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서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책 냄새 사이로 은은하게 느껴지는 쌉싸름한 술 냄새.
어째서일까, 이드는 그 속에서 왠지 모를 짙은 고독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들려오는 목소리.
“어서 오시오. 명예 후작.”
황제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드를 반겼다.
“집무실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집무실이라고 뭐, 특별한 곳은 아니니,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앉으시오.”
그리 말하며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권하는 황제.
그는 이어 한쪽에 마련된 미니바로 다가가며 말했다.
“술과 차. 어느 쪽이 좋겠소? 참고로 이 집무실에서는 시종들이 아니라, 내가 직접 차를 우린다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우려주시는 차라니. 꼭 마시고 싶군요.”
“하하하. 그럴 줄 알았소.”
뒤이어 찻잎을 덜어내는 황제의 손길이 가볍다. 직접 차를 내린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는 차마 먼저 앉을 수 없어, 잠시 집무실 내부를 살폈다.
사방에 가득한 책. 미니바에 가득한 술병, 작은 거울과 무릎담요. 그리고 책상에 가득한 서류들.
그리고 직전까지 황제가 앉아 있던 소파 위에 내려놓은 두툼한 서류. 그리고 보란 듯 펼쳐진 서류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나크렌과 라일론, 그리고 소드 팰러스의 병력을 비교 분석하는 보고서였다.
거기에 잠시 눈을 두고 있으니, 은은한 차향과 함께 들려오는 목소리.
“그 서류는 전날 명예 후작이 언급한 맹약에 관련하여 사전에 논의해야 할 것들을 적은 보고서요.”
“죄송합니다. 잠시 호기심에…………….”
“괜찮소. 봐도 괜찮으니, 그냥 펼쳐둔 것이 아니겠소. 손님을 불러 놓고 기밀 서류를 꺼내 읽을 만큼 내가 허술하진 않다오.”
그렇다면 이건 보라고 일부러 펼쳐 놓은 것이라는 말일까.
두 개의 찻잔을 들고 온 황제를 따라 이드가 소파에 앉았다.
“드셔 보시오. 정신을 맑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내가 즐겨 마시는 차라오.”
“영광입니다.”
이드는 황제가 밀어주는 찻잔을 받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알싸한 맛이 혓바닥에 느껴지며 시원한 느낌이 든다.
마테차와 레몬차의 중간 정도의 맛.
황제의 말처럼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맛있군요. 차 내리는 솜씨가 훌륭하십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차 맛이 좋았다.
그런 의미를 읽은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소한 취미가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황제라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또 한 사람의 인정을 받으니, 기쁘구려. 하하하. 명예 후작은 어떤 취미를 즐기시오?”
취미라면 많다.
독서와 영화 감상, 게임, 커피, 그림, 음악 등등.
전혀 다른 문명을 가진 세상을 오간 만큼, 취미도 다양해진 이드였다.
그러나 황제에게 이걸 터놓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여럿이 있지만, 그 중 그림과 차를 즐기는 편입니다.”
“오호~ 그럼 다음엔 명예 후작이 내려주는 차 맛을 봅시다.”
“기회가 있다면 꼭 대접하겠습니다.”
“기대되는구려. 참, 전해 듣기로 부인들과 함께 황궁 밖으로 나갔다고 하던데?”
“예. 라일론까지 와서 가일라를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오. 이 갑갑한 황궁보다야 보고 즐길 거리가 훨씬 많은 곳이 가일라지. 그래, 즐거우셨소?”
“매우 즐거웠습니다. 사람은 친절하고, 상품은 뛰어났으며, 음식은 맛있더군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가일라에 대한 좋은 평가에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왜 그렇지 않을까. 지금 환경은 모두 황제의 치세의 의한 것. 가일라에 대한 평가는 곧 황제에 대한 칭송과 같은 것이었으니, 즐거울 수밖에.
“하하하. 고마운 평가요.”
“사실인 것을요.”
“사실 나는 그 외출이 우리 비비를 피해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구려.”
여전히 웃는 얼굴이 은근한 눈빛.
과연 황제랄까.
갑자기 막내 황녀를 입에 올릴 줄이야.
이드는 놀란 표정을 애써 감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그날 돌아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황녀님이 다녀가셨다니,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그 귀여운 황녀님을 억지로 피할 이유가 없지요.”
“옳은 말이오. 비비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도 없다오. 그런 아이가 이 좁은 황궁에만 갇혀 있자니, 얼마나 답답하겠소. 그러던 차에 흥미로운 사람을 만나 오랜만에 즐거워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비비의 방문을 반겨주길 바라오. 이것은 황제로서의 부탁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비로서 하는 부탁이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그게 어떻게 황제가 아닌 아비의 부탁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부탁을 면전에서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황제도 황제지만 작은 아이의 즐거움을 막지 말아 달라는 말인데?
“황제 폐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비비 황녀님의 방문 일정을 미리 알려주시면 시간을 비워두도록 하지요.”
“고맙소.”
“그런데 오늘 절 부르신 것은 비비 황녀님 때문은 아닐 테지요?”
“당연하오. 사실은 명예 후작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청했소. 어제 나와 공작들은 맹약의 부활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맹약을 부활시키기로 결론을 내렸소. 하지만 완전한 부활까지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소. 이 보고서도 그중 하나이고 궁금하다면 읽어보겠소?”
슬쩍 서류를 내미는 황제에 이드는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사양하겠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께 올라온 보고서를 외인인 제가 읽을 수는 없지요.”
“나름 재밌는 내용이오. 보고서는 맹약을 부활시켰을 때 경제, 군사적인 측면에서 제국이 얻을 수 있는 득실에 대해 따지고 있소.”
“…..듣기만 해도 복잡해 보이는군요.”
“흐흐 벌써 그런 말을 하긴 이르오. 이제 시작인데. 그런데 보고서를 읽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려.”
황제는 손에든 보고서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이 맹약이 과연 이런 사소한 것들을 따져야 할 만큼 하찮은 등급인가. 하는 생각이었소. 명예 후작이 말한 것처럼 이 맹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혼돈의 파편, 또 그들이 바라는 것은 세상의 멸망, 이를 대비하는 일이 과연 손익을 따져야 할 일인가?”
당장 물에 빠져 죽게 생겼는데, 저기 떠내려가는 짐이 문제냐는 말이다.
“명예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 일단 저라면 생존을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진 것 없는 필부의 입장일 뿐이지요.”
각자의 위치에 따라 살피고, 따져야 할 것이 달라지는 법이지 않던가.
“무엇보다 혼돈의 파편의 존재를 모든 대신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맹약의 부활은 모든 대신들이 알아야 한다.
이 맹약의 규모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신들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혼돈의 파편을 알지 못하는 저들이 과연 맹약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허면, 명예 후작의 말은 대신들을 먼저 설득하라?”
“아니요. 황제 폐하께서 살펴야 할 것들은 많고 많지만, 필부인 저로선 알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의견을 구하고 싶으셨다면
사람을 잘못 고르셨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는 검후께 묻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드가 검후를 언급하자 찻잔을 들어 올려 눈길을 피하는 황제.
“그분은 영 어려워서 말이오.”
그럼 난 만만하다는 말일까.
순간 황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던 스폴의 말이 떠오른다.
“흐음.”
이드는 잠시 황제의 얼굴을 살핀 후 문득 입을 열었다.
“마침 저도 황제 폐하께 드리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만, 들어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