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22화
559화
“아아~ 마스터께서는 지금쯤 쉴라 단장님을 만나고 있으시겠지?”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의자를 까딱거리며 천장의 문양을 세던 에단이 문득 말했다. 무심한 말투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그래.”
서류 더미에 머리를 박고 있던 록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캬흐~ 내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럼 쉴라 단장님 손이라도 한번 잡아 봤을 텐데 아깝다. 아까워~”
“그래, 그래.”
이번에도 록의 짧은 대답이 돌아갔다.
성의라고는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은 영혼 없는 대답에 에단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이 자식이 근데, 왜 아까부터 ‘그래’ 타령이야. 야, 내 말 듣고 있냐?”
사각사각사각…… 뚝.
쉼 없이 서류 위를 달리던 펜이 멈췄다. 록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지 뻑뻑하게 움직이는 그의 목에서 그그극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마치 영화 속 좀비의 움직임 같아서 섬뜩하다.
움직임만이 아니었다. 피곤에 찌든 푸석푸석한 얼굴과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의 모습은 그를 불렀던 에단조차 주춤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아니다. 많이 힘드냐?”
에단이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록의 손에서 펜이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마치 울 것 같은 얼굴의 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크흑. 힘드냐고? 힘드냐고? 너는 내 얼굴을 보고도 그걸 말이라고 하냐! 시펄놈의 삼검왕! 하고 싶으면 지들이 하지, 왜 밑의 사람들을 고생시키고 지랄이냐고오!”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다. 밖에서 들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록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뭐, 지금은 들려도 상관없으려나?’
에단은 입맛을 다시고는 록의 눈을 슬그머니 피했다.
사실, 지금 이 건물에는 삼검왕에 대한 원망을 가진 사람이 가득했다. 수일 전 삼검왕 주최로 열린 긴급대책위에서 소드 팰러스의 운영 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당연히 그런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사항들이 적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그런 준비를 삼검왕이나 긴급대책위가 직접 하지는 않는다. 위에서 결정하고 아랫사람들이 일한다. 소드 팰러스도 다르지 않았다. 한순간에 소드 팰러스 대부분의 부서에서 일거리가 뻥튀기되었다. 특히 서류 작업이 많은 행정부는 그 일거리가 한순간에 수십 배에서 많게는 수백 배로 늘어난 덕분에 벌써 삼 일째 철야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 록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일하는 곳이 바로 행정부 아래 인력 운용과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현재 삼 일째 철야 중이다. 특히 부장으로서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들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그의 수고가 특히나 많았다.
당연히 과장을 시작으로 말단까지 이런 똥 덩어리를 뿌린 삼검왕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록의 방 밖에서 누군가 그의 외침을 들었다면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메아리로 되돌려주지 않을까.
“일 계속해라. 내 이젠 말 시키지 않으마.”
격렬하게 발작 중인 록의 모습에 에단이 발을 내리고 말했다.
그러자 록이 발작을 멈추고 에단을 노려봤다.
“이런 빌어먹을 놈. 그러고 보니 너 때문에 지금 아까운 시간을 10분이나 날렸잖아. 도대체 넌 왜 여기에 처박혀 있는 거야? 내 사무실이 네 집 안방이냐?”
“….안방은 아니지만 별수 있냐. 네가 이해해라. 밖에 있다가 존 워스 그 무서운 인간 또 보면 어쩌냐?”
에단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기운 없이 말했다. 원래라면 이사 이튿날 만났어야 할 워스였다.
하지만 쉴라 단장의 급한 요청에 이드가 자리를 비운 때문에 워스의 미팅 날짜가 하염없이 뒤로 밀려 버렸다. 이드와 만날 수 있도록 말을 전하라고 들었던 에단의 입장에서는 난감해져 버린 것이다.
이드가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리를 비웠고, 그걸 워스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자연스럽게 워스의 눈길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록도 이 생각에 동감해 주었다. 에단은 그때부터 워스와 부딪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비어 있는 시간을 록의 사무실에서 죽치고 있는 것이다.
설마 보는 사람의 눈도 많은데 여기까지 찾아오겠냐고 생각한 것이다.
록이 눈빛을 누그러트리며 물었다.
“너 아직도 그 양반 피해다니냐?”
“당연하지. 마스터가 돌아오실 때까지는 피해 다녀야지. 제길 아쉽다. 마스터를 따라 갔으면 이런 끔찍한 일도 없이 쉴라 단장님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데.”
“아니지. 말은 바로 해라. 내가 봤을 때는 클라인 백작님이 제대로 보신 거야. 네가 따라갔어 봐라. 내 장담하는데 넌 헛짓거리 하다가 쉴라 단장님께 미운털이 ‘콕!’ 박힐 거다. 어이구, 진짜 그럼 마스터 앞에서 무슨 망신이냐? 나라면 얼굴 들고 못산다, 못살아. 넌 백작님이 네 생명 구해 준 줄 알아!”
에단은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이놈은 자신의 친구를 어떻게 보고 있단 말인가.
“그런데 너 지금도 거기 가냐?”
친구 목록에서 록을 삭제할까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에단이 무슨 말이냐며 얼굴을 들었다.
“어디?”
록이 샐쭉한 눈으로 한 방향을 턱으로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그 방향을 돌아보던 에단이 알아들었는지 한숨부터 내쉰다.
“크하~ 말도 마라. 매일 밤을 샌다. 잠이 모자란 것도 있지만 밤새 초인기로 물건을 들여다보느라 아주 눈이 빠지는 것 같다.”
에단은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수정구를 꺼내 책상에 던져 놓으며 한탄했다.
“아주 저 빌어먹을 물건이 웬수다. 웬수! 저것만 아니면 안 갈 수 있는 일인데.”
에단이 정말 원수처럼 수정구를 노려봤다.
수정구는 라미아가 만들어 낸 아티팩트로, 화원과 검후가 납치당한 곳으로 짐작되는 숲 속의 집터의 마법진을 작동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상당 기간 이동 마법사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에 그녀를 대신할 아티팩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원래대로 쉴라의 요청이 있던 날 바로 출발했다면 만들어 줄 수 없었을 물건이었지만 에단에게는 불행하게도 삼일 뒤에 출발하게 되면서 떠나기 하루 전날 완성되고 말았다.
클라인 백작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당일 밤부터 에단을 데리고 숲 속의 집터를 매일 밤 수색하고 있었다. 그것도 같이 끌려가는 에단이 학을 뗄 정도로 집요하게 말이다.
“내 진짜 돌멩이를 일일이 하나하나 다 뒤집어 가며 확인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내 장담하는데 그런 양반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다.”
“쯧쯧. 서로 고생이다. 고생이야.”
에단은 록을 따라 함숨을 쉬며 다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진짜. 나도 마스터를 따라 갔어야 하는 건데, 여긴 지옥이야!”
이드는 인사말을 건네며 상대를 살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데일리나 열성적인 네리베르와 케마란의 설명처럼 여러 가지로 눈에 띄는 화려한 사람이었다. 석양의 불꽃 같은 붉은 머리에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얼굴과 회색의 로브 사이로 언 듯 보이는 은빛 갑옷까지.
에단의 말처럼 가만히 있어도 뿜어지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다.
슬금슬금.
여관의 식당을 채우고 있던 사람들이 조용조용 눈치를 보며 여관을 나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가까이서 보고, 어떻게 말이라도 붙여 보려고 노력하는 일반적인 반응과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상대가 약한 여성이 아니라 보통 사람은 감히 말도 붙이기 힘든 존재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 사람도 대단하네. 무공을 익힌 기세(氣勢)도 아니고, 타고난 카리스마 만으로 사람을 물러나게 만들고 있잖아.’
과연 이런 사람이라면 제법 넉살 좋은 에단이나 록이라도 이 앞에서 쉽게 입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에단이 말했던 ‘기회’는 처음부터 가망성이 없는 말이었다.
순식간에 여관 1층 식당이 텅 비었다. 등장만으로 완벽한 영업 방해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여성이 입을 열었다.
“이쪽이야말로 이야기 속 영웅의 후예를 직접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후님을 모시는 은색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쉴라 이마큘리입니다.”
자리에 앉은 쉴라 단장은 라미아와 일리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특히 라미아와 인사를 나눌 때는 신기하다는 듯 높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먼저 도움을 주기로 결정해 주신 사실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나섰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이 일도 검후님을 찾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에단을 따라 숲을 나섰던 이유가 검후님을 찾기 위해인 만큼 제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 생각이라면 은색 기사단 모두를 대표해서 환영합니다. 그리고 어떤 생각이라고 하셔도 제 감사의 마음이 변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지금 가야 할 곳에는 도움을 기다리는 제 수하고 있을 테니까요.”
이드는 그녀가 실종된 수하의 생존을 전재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이후의 어떻게 움직이실 생각입니까.”
“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움직이고 싶은데, 피곤하지는 않으시겠습니까?”
“전혀요. 도착이 좀 빨라서 이 여관에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오히려 쉴라 단장…………님?”
“쉴라로 불러 주십시오. 이드 님은 은색 기사단의 기사는 아니니까요.”
“예. 그럼 쉴라 경께서 지금 도착하신 만큼 컨디션을 회복하고 움직이는 것이 어떨까하는데요.”
쉴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틈틈이 포션과 휴식으로 체력 관리는 하면서 왔습니다. 이 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지요.”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하죠.”
이드는 하루 숙박비를 계산하고 묵었던 방을 정리했다.
그동안 쉴라는 먼저 밖으로 나가 자신의 말을 준비하다가 표시나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여관에 그녀의 말과 짐말로 보이는 말 말고는 다른 말이 보이지 않은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드와 일리나가 타고 왔을 말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녀는 마침 여관을 나오는 이드와 일리나를 보고는 물었다.
“타고 오신 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 저희는 처음부터 말을 타고 오지 않았거든요. 데일리 경에게 듣지 못하셨나 보군요.”
쉴라는 실수가 잦은 데일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 님이 허락하셨다는 말을 듣고 쉬지 않고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연락을 주고받기는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저희들이 사용하는 운송 수단은 성을 나가서 보여 드리죠.”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전날 성으로 들어왔던 성문을 향해 걸었다.
쉴라도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어차피 성안에서 말을 타는 일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라서 말을 탈 수는 없었다. 시선도 시선이고, 사고의 확률이 높았다.
탈탈 자작 영지는 전형적인 시골 영지였다.
당연히 성을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간단히 성을 벗어난 이드는 십여 분가량을 더 걸어서 성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정확한 목적지는 어딘가요?”
일리나가 궁금함을 참고 묵묵히 함께 걷고 있던 쉴라에게 묻자 그녀가 말의 안장에서 작은 종이 뭉치를 꺼내 그중 한 장을 펴들었다.
그것은 탈탈 영지와 주변의 특징적인 위치만 대략적으로 그려 놓은 지도였다.
그 위에는 이드들이 나온 탈탈 자작령과 그와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그리고 그보다 두 배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한 좁은 협곡이 그려져 있었다.
“해당 기사는 이곳 탈탈 마을에서 마지막 보고를 한 후 여기 헬름 협곡으로 향했습니다. 당연히 저희의 목적지도 헬름 협곡이 되어야 합니다.
최대한 서둘러야겠지요.”
이드는 끝에 더해진 은근한 재촉에 제법 멀리 떨어진 성문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이 정도면 문제 없겠지. 라미아 부탁해!”
[이드나 잘해요!]
다음 순간.
쉴라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