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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39화


576화

끙끙거리는 포로들의 신음만 들리는 가운데 이드와 쉴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지 못한 황궁 발언에 놀란 것이다.

그런 두 사람과 달리 일리나는 한발 물러선 태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엘프인 그녀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고정관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여긴 황궁이니까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라는, 좋게 말하면 편견이, 나쁘게 말하면 기대가 없었다. 무엇보다 까마득한 시간의 기록 속에서 인간들은 언제나 설마 하는 일을 태연하게 벌여 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설마는 대부분이 좋지 않은 쪽의 설마였다.

비올라가 그 표정을 보고 히죽거리더니 실실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애송이도 아니고 뭐 그런 걸 가지고 놀라나? 여기 생명의 관만 유지하는 데도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이런 곳이 두 곳이나 더 있단 말이야. 특히 마법사는 돈 먹는 하마들이야. 숨어서 돈을 버는 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유지될 것 같아? 다 자금을 지원해 주는 스폰서가 있다는 거지.” 

“그럼 황실이 이 미친 짓을 지원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건 모르지?”

이 눈깔 자식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말장난에 이드와 쉴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냐, 그럼 사실도 아닌데 지껄인 헛소리잖아. 바로 직전에 손잡아 놓고 이러면 신뢰에 금 간다.”

“뭐 이런 걸로 금씩이나. 나는 가장 높은 가능성을 언급했을 뿐이다. 미리 경고하는데 생명의 관과 연계된 곳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당장 부관주도 몇 군데 정보를 넘기고 있으니까.”

이드는 이미를 감쌌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었다.

위험하니 바로 도망치려는 마법기사에, 지들 살길 찾기 바쁜 마법사에, 침입자와 붙어먹는 배신자에, 예전부터 정보를 넘기던 기존 배신자까지.

“무슨 이딴 콩가루 같은 조직이 다 있냐. 여기 생각보다 너무 허술한 거 아냐?”

“성충이 되어가는 매미의 허물과 같은 경우지. 허술한 건 아니다.”

그래도 자신이 속해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좋게 말을 꾸미는 비올라였지만, 어느새 그를 바라보는 이드의 시선이 삐딱해져 있었다.

“경쟁에서 떨어진 마법사들이 남았다고 했지? 너도 그런 거 아냐?”

“흐…… 어떨 거 같으냐?”

이드는 되묻는 질문에 혀를 찼다. 어차피 자신이 거둘 사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상관없겠지. 부관주가 배신자냐?”

“가능성은 있다. 탑주의 지시일 수도 있으니까.”

“그럼 황궁은 상관이 없다는 말이군.”

쉴라가 말했다.

그러자 비올라가 득의하게 웃으며 답했다.

“흐흐. 그건 모르는 일이지. 초인파도 생명의 관에 투자하고 있는데, 어딘들 못 할까.”

순간 이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파고는 다시 물었다.

“초인파라고? 진짜냐?”

“사실이다. 부관주가 정보를 넘기던 곳 중에서 알게 된 유일한 곳이지.”

“헐…….”

이드는 입을 딱 벌렸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싶었다. 초인을 납치해서 인체 실험을 하고 있는 조직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돈을 대는 게 초인이라고?

“그 초인파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돈을 대는 거냐?”

“그건 투자의 기본 아니냐?”

“믿기 힘들군요. 초인들이 가지는 결집력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알기로 초인들이 가지는 동지애는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정도의 개념을 넘어, 아예 인간과 다른 ‘초인’이라는 특별한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들에게 인간은 같이 살아는 가지만 다른 종족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같은 종족 안에서야 투닥거릴 수 있다지만, 자신의 종족을 타 종족에 실험체로 판다? 이건 배신이라는 단순한 말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초인들의 문제. 놀랍기는 했지만 쉴라는 다른 점에 주목했다.

“그런데 초인파라면, 아나크렌의 초인파를 말하는 건가요? 또 그들이 이곳을 지원하고 있다는 증거는?”

쉴라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현재 검후가 실종된 후 초인파의 강한 기세에 기사들이 밀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와 같은 사실이 밝혀진다면 초인파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버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기세가 꺾이는 문제가 아니라, 초인파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으로 안에서 붕괴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올라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채워 주지 못했다.

“없다. 마력 라인의 사상의념을 조정하던 중에 획득한 정보일 뿐이다. 정확성은 보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기사.”

“쉴라 경이라고 불러라.”

“좋다. 쉴라 경, 당신 머릿속의 생각은 대충 짐작이 가는데 너무 좋아하지 마라. 내가 말했잖나. 황궁이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혹시 아나? 소드 팰러스도 한발 걸치고 있을지.”

“미미한 가능성이겠지. 확인할 수 없는.”

앞서 여러 번 의외의 말로 흔들려서 그런지 쉴라는 소드 팰러스가 언급되자 코웃음을 쳤다.

“초인을 연구해 달라고 초인파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니겠어? 그리고 내 생각에는 소드 팰러스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소드 팰러스의 시작도 따지고 보면 권력 싸움 아니겠어? 당신이 찾아온 여기사를 숨겨 준 마법기사를 떠올려 보라고. 왜 숨겨 줬겠어?”

“…. .!”

이제는 더 이상 헛소리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던 쉴라의 표정이 다시 심각해졌다.

충분히 다른 가능성도 있지만, 비올라의 말을 듣는 순간 소드 팰러스와의 연관성이 급부상하는 것 같았다.

1층에서 봤던 자들 중에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 있었던가?’

쉴라는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이 봤던 마법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순간 기억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얼굴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드는 그런 쉴라의 모습에 일리나를 보며 한숨과 함께 투정을 부렸다.

“끄응. 여기 괜히 왔나 봐요. 무슨 수렁도 아니고. 머리 아픈 이야기만 나와요.”

그러자 일리나가 예쁘게 웃으며 이드의 이마와 앞머리를 빗겨 주더니 말했다.

“걱정 말아요. 이드라면 잘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우리 일은 어디까지나 시르피를 찾는 일이니까, 그녀만 찾으면 나머지 일은 알아서 풀릴 거예요.” 

이드는 코끝에 살랑이는 일리나의 향기를 맡으며 짓궂게 웃었다.

“알아서 풀리는 게 아니라 시르피에게 떠넘기는 거겠죠.”

“당연해요. 이건 그녀가 평소 일하지 않아서 생긴 일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진짜 소드 팰러스가 생명의 관에 자금을 대고 있었다면, 평소 소드 팰러스를 단단히 단속하지 못한 검후의 탓이었다. 소드 팰러스의 절대자인 검후다. 절대적인 권한에는 절대적인 책임이 따르는 것이 당연했다. 몰랐다는 말은 단지 변명일 뿐 책임을 회피할 방패는 될 수는 없다.

우르르릉-

갑자기 던전이 흔들렸다. 지진이라기보다는 던전이 들어 있는 산이 울어 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폭발음과 동시에 4층으로 향하는 통로에서 돌가루와 함께 뿌연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뭐지?”

이드는 순간 4층의 마법사들이 통로를 막은 게 아닐까 했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돌가루와 충격에 그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고 비올라를 찾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살피는 중이다.”

과연 눈동자를 조종하는 비올라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능글맞을 정도로 인간의 감정을 내보이던 눈동자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다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커다란 바위가 튀어나오면서 4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완전히 무너졌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닌 듯 무너진 통로에서도 계속 폭음이 들렸고, 그 폭음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허공을 바라보던 비올라가 다시 말했다.

“하하. 이거 재밌는데, 찌질이들이 상층의 마력 라인을 일부 살려냈어.”

“그거랑 지금 점점 내려오는 폭발음과 무슨 상관이 있나?”

“있지. 마력 라인을 일부 살린 찌질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면, 지금 내려오는 놈은 트롤버스터다.”

“무슨 이름이 그래? 지금 내려오는 것도 앞서 봤던 트롤 같은 실험체인가?”

“트롤과 초인을 이용한 실험체 중에서 가장 발전한 형태지.”

이드는 일단 또 트롤을 사용한 주제에 왜 이름이 그 따위인지는 묻지 않기로 하고 다른 것을 물었다.

“왜 자꾸 실험체만 내보내는 거지? 직접 안 내려오고.”

“마법사는 기본적으로 겁쟁이거든. 위에 있는 놈들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겁쟁이들이고. 무엇보다 저 트롤버스터는 마력을 많이 잡아먹지. 약 40%의 마력 라인 정도를 살린 것 같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아마 살아 있는 라인을 통해서 새끼마법사들의 마력도 같이 보내고 있을 거야. 마법사들은 같이 내려오지 않는다.”

비올라가 마치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단언했다.

“40% 정도를 살렸다면, 원래 얼마나 망가트린 건가요?”

“소수점 이하를 떼고 80%를 막아 놨지.”

몽땅 망했구나! 그러니 마법사의 던전인데 트랩 하나 제대로 발동을 안 하지!

이드는 어쩌면 이 생명의 관의 가장 큰 적은 비올라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비올라와 손을 잡은 가치는 충분히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비올라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트롤버스터의 특징은 거대화와 앞서 봤던 회복력과 빠른 스피드다. 그리고 입으로 어둠을 뿜는다. 잘 처리할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말하는 폼이 꼭 딴 데 볼일 보러 갈 것 같다?”

“흐・・・・・・ 마력 라인이 살아나면서 내가 묶어 뒀던 찌질이 두 놈이 깨어나기 시작했거든.”

비올라에게 제압당했다면 당연히 그가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드는 비올라의 자신감을 생각하니 충분히 지금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카린 경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고 가라.”

“흐흐흐. 5층에서 보자.”

비올라는 이드의 말에 괴악한 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마쳤다. 그러자 그때까지 잘 움직이던 눈동자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이드는 그 모습에 비올라가 완전히 이쪽에 대해서 신경을 끊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다시 말해 이쪽에 신경 쓰면서 자기 문제를 풀 만큼 만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 되겠지?”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쉴라가 다시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최대한 빨리 5층으로 올라가야겠군요.”

“그래야죠. 천재라고 잘난 척하는 놈들 중에 진짜 대단한 놈은 드물거든요. 그보다 이 눈알도 일단은 챙겨야 할 것 같은데요.”

이드는 바닥에 뒹구는 눈알을 바라봤다. 벌써 몇 시간을 보고 있지만 손으로 만지기엔 거부감이 드는 비쥬얼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고민할 시간을 줄여 주는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통로를 뚫고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앞서 만났던 트롤의 두 배 크기의 그림자는 몇 바퀴를 구르더니 포탄처럼 먼지 속에서 튀어나왔다.

“일리나, 그 눈알 챙겨 줘요!”

이드는 빠르게 말하고는 일라이져를 뽑으며 앞으로 마주 달려 나갔다.

일리나는 그 뒤를 따라 쉴라까지 달려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쪽에 쓰러져 있는 마법기사의 옷을 찢어 눈동자를 둘둘 말아 검집에 매달고 상황을 살폈다.


“쿠워어어어!”

트롤버스터로 짐작되는 놈은 과연 비올라의 말대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재빨랐다. 뿌연 먼지를 안고 달리는 놈이 이드를 확인한 듯 손을 휘둘러 왔다.

이드는 그 손에서 번뜩이는 대거만 한 적색의 손톱과 거기에 어려 있는 강렬한 마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래서 마력이 많이 필요한 건가?”

이드는 뒤에 따라오는 쉴라의 기척을 읽고는 바로 뇌령화의 초식으로 손톱을 내려쳤다.

터텅!

순간 마력과 내공이 반발하며 손톱과 일리이져가 비켜나고, 이드가 그 속으로 연속해서 철황파산을 쏟아 냈다.

꽈르르릉!

철황의 힘을 따라 철판이 우는 소리가 3층을 채우더니, 트롤버스터가 뛰쳐나온 통로에서 쏟아진 먼지가 충격에 쓸려 가고 트롤버스터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드는 그 모습에 침을 내뱉었다.

일반 트롤의 두 배가 됨직한 짙은 암녹색 트롤의 전신에 기워진 옷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사람의 몸뚱이 때문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혐오감을 자극했다.

“과연 덩치가 크지만 오히려 그래서 보기 흉하구나.”

이드는 흉한 모습을 빨리 치울 생각에 검을 들었다.

그러자 그 말을 이해했다는 듯 하얗던 트롤의 눈이 붉게 변하며 괴성을 질렀다.

“끄롸아아악!”

끄드드득!

동시에 보통 트롤 두 배의 덩치를 가진 트롤의 몸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11미터까지 커지며 3층의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가 되었다. 

“아! 원래 덩치가 컸구나. 이게 거대화구나.”

이드가 한참 위에 있는 트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조금 어이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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