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3화
450화
“그나저나 이 녀석들 끈기가 있는데요.”
이드는 조용한 문밖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는 난감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이드를 바라보며 일리나도 같은 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저도 마을의 아이들이 이렇게 끈질기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이드가 수련장에 들른 첫날 아이들은 오전 시간 동안 열심히 라미아와 술래잡기를 했다. 정확히는 아이들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쫓아다닌 것. 하지만 라미아가 피크닉 시간에 맞춰 수련장을 찾아오면서 술래잡기는 아이들의 판정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은 수련장에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수련장이 아이들로부터의 안전지대임을 확인한 라미아가 그 뒤 이틀 동안 이드를 따라 수련장에 가서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다가가면 질색을 하면서 도망은 가지만 다른 어른들처럼 혼을 내지 않는 라미아가 자신들과 놀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드가 수련장을 찾은 이틀째 되는 날은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라미아는 이드가 수련장을 나설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실망한 채 귀가한 아이들은 이드와 함께 라미아가 수련장을 찾은 셋째 날 수련장의 진입을 시도했다.
“들여보내 주세요. 라미아하고 같이 놀기로 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첫째 날과 다르게 수련장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 녀석들, 수련장에는 오면 안 된다고 했는데!”
오히려 위험한 곳에 들어오려고 했다는 사실로 인해서 크게 혼이 나고 벌을 받아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그때부터 아이들 특유의 오기가 발동한 모양이었다. 아니, 자신들과 갑자기 놀아 주지 않는 라미아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좀 일방적이기는 했지만 삼 일이라는 짧은 기간 사이에 많이도 친해진 아이들과 라미아였으니 말이다.
사실 라미아도 일리나가 없었다면 수련장 밖에서 또록또록 눈을 굴리고 있는 꼬맹이 녀석들이 신경이 쓰여서라도 한 번쯤 수련장을 나가서 놀아 줬을지 모른다. 그러나 라미아의 곁에서는 일리나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할 맛이 난 것이다.
그날 이드와 일리나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라미아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은 제법 무시무시했다.
[코홈. 전 먼저 가서 자리를 맡아 두고 있을게요.]
어차피 찾아오는 엘프도 없는 곳, 맡아 둘 자리가 어디 있다고.
라미아는 그 말을 남기고 아침 일찍 빼꼼히 창문을 열어 누가 있는지 주변을 살피고는 도망치듯 날아가 버렸다. 어제 저녁 봤던 꼬맹이들의 눈이 좀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머리 좋은 그녀는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수련장을 찾아와서는 라미아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아이들이 이드가 집을 나서기 전을 노리고 직접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과연 지난 삼 일 간 그냥 쫓고 쫓기기만 한 건 아니란 것일까.
이드는 아이들과 라미아 덕분에 푸른 나무 마을에서의 생활이 재미있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드의 생각은 문은 여는 순간 확인이 되었다.
라미아 척살단.
정문을 막아서고 있는 마을 아이들 중 선두에 서 있는 녀석이 들고 있는 긴 나무 막대 끝에 묶여 있는 천에 적힌 글이었다.
“풋하하하하하!”
이드는 그 깃발을 본 순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애써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까지 우습기만 했다. 옆에 라미아가 있었다면 자신을 척살하겠다는 글을 보고 웃음이 나오느냐고 핀잔을 줬을 것이다.
“너희들!”
그런 라미아의 서운함을 일리나가 대신 풀어 주며 앞으로 나섰다. 깃발을 본 일리나도 이드와 마찬가지로 순간 웃음이 새고 말았지만, 곧 웃음을 거두고 짐짓 화난 표정을 해 보였다.
라미아는 나와라!
나와라! 나와라!
와와와
“하하하!”
우디는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의 외침에 기분 좋게 웃었다. 이드 일행이 마을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나지 않았는데, 조용하던 마을에 바람이 불고 생기가 돌았다. 특히 분위기에 민감한 아이들의 반응이 격렬했다. 지금도 평소라면 꼼짝하지 못하는 일리나에게 무서워하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봉인의 문제로 마을을 나갔던 일리나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고 돌아오면서 마을은 긴 침묵에 들어가야 했다. 세레니아는 일리나에게 조심을 당부했지만, 그녀가 속한 마을도 그 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그 주위의 인물들이 해를 당하는 일은 세상에 너무도 흔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마을의 일에는 한 가족처럼 움직이는 엘프들이다. 자연 알아서 조심하고, 마을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일생을 숲에서 조용히 살다 가는 엘프들에게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생활도 심리적인 제약이 더해지면 강제당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법이다. 자연 마을의 기운은 위축되고 안으로 숨어들었다. 특히 라일로시드가가 만든 결계가 그런 느낌을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이드가 마을을 찾아오면서 제약이 풀리고 보이지 않던 마음의 짐도 사라진 것이다.
우디의 마음도 그동안의 부담을 벗어 가벼웠다. 그의 입장에서는 딸의 일이 해결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더구나 딸이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의 귀환이지 않은가.
“보기 좋구나. 더 시끄러워도 좋지.”
우디는 편안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베일이 가져다 준 찻잔을 들었다. 오늘은 그처럼 집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엘프들이 많았다. 이른 아침부터 일리나의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집 앞에서 이후의 상황 전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평온한 마을에 오랜만에 마을사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구경거리가 등장한 것이다.
“녀석들. 힘내 봐라. 좀 길게 보자꾸나.”
움찔움찔 일리나의 기세에 밀려 뒤로 물러나는 아이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는 우디와 마을 사람들이었다.
아이들과 일리나의 대치는 당연한 일이지만 일리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애초에 억지가 다분한 아이들의 논리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고, 은근히 실력 행사의 의사를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깃발을 내리고 도망쳐 버린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다시 올 것 같네요. 라미아를 포기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어요.”
“이드는 기대되나 보죠? 라미아에게 일러 줘야 할까 봐요.”
“그건 좀 봐줘요.”
이야기를 하는 사이 이드와 일리나는 마을을 조금 벗어나고 있었다. 봉인은 마을의 끝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마을 안은 아니었다. 어디까지 마을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놓은 건 아니지만 확실히 어떠한 영역을 벗어난 바로 그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단단한 철목들과 커다란 두 그루의 어두운 나무그늘에 가려진 봉인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길 뿐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야 그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헐!”
순간 이드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잠시 눈을 돌렸다가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이드는 일리나를 보며 봉인을 가리켜 보였다.
“저게 봉인이 맞아요?”
“네, 이전엔 그냥 흙기둥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라일로시드가 님이 손을 봐주시면서 저렇게 형태를 고치셨어요.”
이드는 일리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억 속의 라일로시드가를 불러냈다. 그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봉인의 형태는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드의 앞에는 거대한 두 그루의 나무에 묶여 있는 듯 덩굴로 하나가 된 석탑이 있었다. 회색의 돌로 만들어진 탑은 이드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이 위치하고 있었다. 돌을 쌓아 만든 탑도 아니고, 거대한 돌을 통째로 깎아 만든 듯 하나의 흠도 없는 석탑이었다. 그리고 표면에는 두 나무의 줄기까지 이어지는 복잡한 마법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석탑 위에 있었다.
“해골이라니.”
해골이 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인간의 두개골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돌로 된 물건이 아니라 검은색보다 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고 휑한 두 눈은 피처럼 칙칙한 붉은빛이 이글거리고 있는, 한마디로 그냥 악마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특히 검은 그림자와 색이 겹쳐 모습이 아른거리는 가운데 붉은 눈만이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과연…… 윌이 흉물이라고 할 만하네요.”
“워낙 마무리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만지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이들은 이곳에는 절대 오지 않아요.”
“확실히. 저걸 보고 나면 그날 밤에 화장실에는 못 가겠네요.”
[화장실뿐이겠어요. 자면 바로 악몽이라고요. 그런데 이드, 왔으면 빨리 절 찾아야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드의 말을 라미아가 받았다. 지금까지 모습을 숨기고 있던 그녀가 이드들이 오자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숨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두개골의 붉은 눈이 자리한 곳이었다. 피처럼 붉은 눈을 뚫고 나오는 은빛의 새라니.
아이들이 봤다면 잠이 문제가 아니가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넌 거기서 뭐해?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어쩌려고 거기 들어가 있어?”
[악마가 봉인되어 있다고 하니까 한번 살펴보려고요. 그리고 일리나의 말대로 안전해요. 확실히 드래곤의 솜씨답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이중 삼중으로 잘 막아 놓으신 것 같아요.]
“흐음…… 정말?”
라미아의 설명을 들은 이드가 밍밍한 눈으로 라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골 눈에서 내려와 탑의 끝자락에 서서 이드와 일리나를 내려다보던 라미아가 시선을 마주치곤 어깨를 움츠렸다.
[정말이죠. 뭐, 다른 게 있겠어요?]
“난 또 아침부터 찾아온 꼬맹이들 때문인가 했지.”
[정말 찾아왔어요?]
“라미아 척살단이라고 깃발을 들고 찾아왔어요.”
‘아아. 일리나, 그건 아니죠.’
이드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해 버린 일리나에게 내심 소리쳤다. 저래 놓으면 더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라미아의 반응은 생각과 달랐다.
[헹, 척살단? 요녀석들이 봐줬더니 감히 내게 기어올랐단 말이죠. 가만두지 않겠어요. 이드도 이번엔 말리지 말아요.]
지금까지도 딱히 말린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였다. 라미아의 말은 아이들을 찾아가겠다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 나름의 아이들과 어울려 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녀도 이틀 동안 꼬맹이들을 외면한 사실이 마음이 쓰였나 보다.
[그런데 일리나. 이 봉인, 원래 계산보다 좀 더 오래갈지도 모르겠어요.]
더 이상 꼬맹이들의 이야기는 필요 없다는 듯 라미아가 말꼬리를 틀었다.
“왜? 141년이라고 했잖아.”
[그때는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정말 절묘한 시점에 봉인이 됐거든요.]
채이나가 했던 말이다.
[저 악마의 소환 중이던 부분은 봉인에 의해서 봉인되었지만 소환 도중 남겨진 부분이 아직 마계에 있는데, 그 부분이 살기 위해서 열심히 마력을 키우고 있는 것 같아요.]
“……어머나.”
몸이 둘로 나뉘고, 마나도 뺏기는 중에 봉인된 몸을 살리기 위해서 남아 있는 몸이 마력을 모으고 있다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일리나가 조금
뒤늦게, 힘없이 놀랐다.
“그거 위험한 건 아냐?”
자연히 걱정되는 부분이었다. 봉인은 괜찮은 건가?
[아니요. 말했잖아요. 이중 삼중으로 철저하게 하셨다고요. 더구나 그때는 그게 당연했을 거예요. 제가 알기로도 정신체는 근원적인 영체가 분리되면 힘을 쓰지 못한다고 했거든요. 일종의 혼수상태 비슷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고 추측만 하고 있죠. 그러니 당연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이드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지금 확인해 보니까 작지만 소실된 마력이 채워지고 있었어요. 봉인되어 소멸해 가는 악마에게 무상으로 마력을, 그것도 저렇게 소량을 제공해 줄 존재는 없어요. 특히 마력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아나는 모양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존재가 마계에 있는 그의 반쪽이에요.]
“좀, 어이없네. 그럼 얼마큼의 마력이 회복되고 있는 거야?”
[대략 소모되는 양의 30% 정도예요. 시간으로 계산하면 원래 141년에서 42년 정도가 더 연장될 것 같아요.]
라미아의 말에 이드와 일리나가 작게 탄성을 토했다. 아무리 악마라지만 183년이라니, 정말 끈질겼다.
“휴우. 아무래도 장로님의 근심이 좀 더 길어지겠네요.”
“어, 설마 그 해결 불가의 근심거리가 이거였어요?”
일전에 우디에게 해결할 수 없는 근심거리가 있다고 들었던 사실이 생각난 이드였다.
“네. 아무래도 엘프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잖아요?”
엘프와 해골 악마상이라니. 절대 어울리지 않는 미스 매치다.
“아이들도 무서워하구요. 그렇다고 라일로시드가 님이 마을을 위해서 수고하시고 만드신 걸 가리거나 모양을 바꿀 수도 없구요. 무엇보다 악마가 사라지기 전에는 없애 버릴 수도 없죠.”
일리나가 나무를 가리켰다.
“할 수 없이 장로님이 나무를 심어서 여기 봉인을 나무 그림자로 가리기는 했지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일리나였지만 이드는 충분히 그 뒷말을 짐작했다. 그림자로 인해서 형성된 음산한 분위기와 귀기. 결국 우디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일까.
‘이건 나도 해결 불가야.’
이드도 이번 문제에 대해서만은 내심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크흠.”
어쩐지 난감한 분위기에 이드가 크게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