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42화
579화
4층에 있던 마법사가 모두 죽었다.
3층에 있던 마법기사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급 전력이었지만, 트롤버스터라는 감당 불가의 무기와 독 안개 마법이라는 희대의 삽질로 자멸하고 말았다.
쉴라의 의견을 따르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다. 정말 이 던전에 들어앉아 책만 파고 연구만 하느라 전투에 대해서는 바보들이 되었거나, 멍청한 놈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프뢰벨에게 새롭게 얻은 정보는 없었다. 그저 비올라가 말했던 내용을 재확인했을 뿐이다.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는 했는데,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프뢰벨이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나마 새롭게 얻은 정보가 있다면 비올라에 대해서였다.
프뢰벨은 갑자기 비올라를 정확히 지목해서 묻자 고통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신없이 눈을 굴렸다. 아무리 고통과 두려움에 자신이 아는 것을 나불거리고 있다지만, 그도 나름대로 고위 자리에 오른 마법사인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튀어나온 비올라의 이름에 의심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드는 프뢰벨이 따로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는 생각할 필요 없이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된다. 이드는 바로 그의 손가락 하나를 꺾었고, 프뢰벨은 착실한 응답기가 되었다.
이드는 비올라에 대한 평가를 곱씹으며 허탈하게 웃어 버렸다.
“미치광이, 싸움꾼. 고집불통. 괴짜, 소환술사. 참, 마지막 소환술사 빼면 이게 정말 마법사에 대한 평가야?”
“너무 잘 어울리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이드는 쉴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 어울렸다. 1층에서 3층까지 짧은 시간 비올라와 함께했을 뿐이지만 프뢰벨의 평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눈알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비올라에게서 그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행동이나 발언은 일절 없었다. 굳이 찾자면 탑주의 마법에 대한 집착과 라미아에 대한 끝없는 호감이랄까?
“그러고 보니 라미아가 돌아올 때가 됐는데.”
원래는 3층을 정리하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벌써 4층인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불러 봐요. 납치됐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요.”
일리나가 말했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영혼과 깊게 결합되어 있는 라미아의 영혼을 불렀다.
반쯤 내리감은 눈에 오색의 찬란한 빛이 어른거리며 라미아의 형상이 또렷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아, 이드!]
공간과 물질을 넘어 영혼으로 다가온 이드를 먼저 알아챈 것은 라미아였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한결같이 이드를 향해 있다는 뜻이었다.
이드는 그 마음이 항상 고마우면서도 서로를 향한 마음이 그녀에게 지고 있는 것 같아 분했다. 이드는 라미아와 일리나에게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가슴에 남겼다.
[미안해요. 제가 좀 오래 걸렸죠?]
-조금 무슨 일인가 걱정돼서 말이야.
라미아에게 해를 끼치려면 드래곤 레벨은 나와 줘야 가능한 일이지만, 세상일 모르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남녀 간에는 이런 쓸데없어 보이는 걱정도 표현해 주는 것이 좋다고 예전에 티비에서 봤다.
[히히히. 걱정해 줬던 거예요? 고마워요.]
봐라. 효과가 확실하다.
[처음엔 주변의 적당한 곳에 두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탈랄 마을까지 와 버렸어요. 그런데 와 보니 탈탈 영지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쉴라의 연락을 받은 탈탈 영지의 기사들이 오기로 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고 아직 기사들이 있어? 밤 아니야?
[새벽이 다 돼 가죠. 범죄자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기사단에서는 당분간 마을을 폐쇄하기로 했대요. 관계없는 사람들은 당분간 영지에서 관리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혹시 우리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은 아니다.
-그럼 데려간 사람들은 그 기사들에게 넘겼겠네?
[네.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넘겼어요. 그랬더니 자기 영지의 일이라고 자기들이 나서겠다고 고집을 부려서요. 일단 협곡의 외곽 숲을 포위하는 걸로 이제 막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어요]
이드는 내심 라미아가 시간이 오래 걸렸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납치된 초인들을 탈랄 마을로 데려가는 시간보다, 탈탈 영지의 기사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영지는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똥고집 부리며 닥돌하려는 그들을 말리고 외곽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렸을 것이다.
[정답이에요. 호호. 저 그럼 지금 돌아갈게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다 잠시 그녀를 멈추고는 무슨 일인가 하고 멀뚱히 눈만 끔뻑이는 쉴라를 향했다.
“방금 라미아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드의 말에 끔뻑거리던 쉴라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말입니까?”
“라미아는 특별하니까요.”
…….끄덕.
함축된 답이지만 라미아의 특별한 모습을 현재 진행형으로 느끼는 중인 쉴라를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이드는 라미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쉴라와 일리나에게 전해 주고는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라미아가 오기 전에 탈탈의 기사들에게 해 둘 말이라도 있을까 해서요.”
“아니요. 라미아가 적절히 잘 처리한 것 같습니다. 아, 탈탈의 기사들에게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은색 갑옷의 여기사들이 나타나면 말을 전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바로 진입하지 말고 우선 1층에 있는 포로들을 확보한 후 대기하라고.”
“그분들이 벌써 왔을까요?”
일리나가 물었다.
“제가 긴급 신호를 올린 지 12시간이 넘었어요. 제 기사들이라면 충분히 도착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쉴라의 대답에는 믿음이 가득했다. 과연 그녀의 믿음대로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시간의 한계를 돌파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드는 쉴라의 말을 라미아에게 그대로 중계했다.
―들었지?
[바로 조치할게요. 전달했어요. 지금 돌아갑니다.]
이드는 라미아의 말과 동시에 심상에 있는 라미아의 형상과 눈을 마주쳤다. 다음 순간 시공을 넘어 라미아가 이드 앞에 나타났다.
[얍! 다녀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일리나가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별거 아닌걸요. 그런데 여긴 몇 층이에요?]
“4층이야.”
이드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던 라미아는 한쪽에 미라처럼 말라죽은 수십 명의 마법사들을 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변태 눈알은 안 보이네요?]
“지가 잡고 있던 마법사가 풀려나서 그거 막는다고 연락 끊고 있어. 눈알은 일리나가 가지고 있고.”
[에비~ 일리나가 그 징그러운 걸 왜 들고 있어요. 이드는 뭐 했어요. 일리나가 이런 걸 가지고 있게 하다니. 이건 이드가 가지고 있어요.]
라미아는 푸득푸득 부산하게 날개를 떨더니 일라나의 검집에 걸린 주머니를 이드에게 던져 버리며 핀잔을 주었다.
이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럼 라미아도 돌아왔으니 바로 5층으로 올라가죠. 아직 눈알이 꼼짝도 않는 걸 보면 비올라 상황이 그렇게 여유로운 것 같지 않으니까요.”
이드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5층으로 향하는 통로에 올랐다.
이드들이 사라지고 시체만 남은 공간에 순식간에 음험한 기운이 가득 찼다.
화륵!
그리고 4층의 한구석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작은 불꽃이 천천히 번지며 4층을 태우기 시작했다.
5층에 오른 이드는 순간 길을 찾지 못하고 발을 멈췄다.
5층에 올라온 순간 사방으로 나 있는 복잡한 통로 때문이었다. 1층은 말할 것도 없고, 2층은 납치된 사람과 몬스터를 가두는 방만 있었고, 3층은 넓은 공터에 마법기사들이 나와 있었다. 방금 지나온 4층은 층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뻥 뚫려 있었는데, 5층은 달랐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드가 살짝 난감한 듯 사방을 살필 때였다.
이드의 손가락 끝에 매달린 눈알이 들어 있던 주머니가 꿈틀거렸다.
혹시나 해서 이드가 주머니를 풀어 보니 그 속에서 눈알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비올라가 움직일 때처럼 자연스럽고 빠르지는 않았다.
이드는 푹신한 이불 속에서 묻혀 헤어나지 못하는 듯한 눈알을 주머니째 땅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눈알이 그 짧은 팔다리로 일어나더니 이드의 앞으로 나와서 앞을 가로막고 섰다. “기다리라는 건가?”
이드가 그 모양을 보고 추측하자 눈알이 그렇다는 듯 들어 올린 두 손을 까딱거렸다.
“흐음…….”
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쉴라가 다가왔다.
“이대로 기다리시는 생각입니까?”
이드가 대답 없이 살짝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라미아가 그런 이드의 속을 안다는 듯 말했다.
[뭘 생각하는 척해요. 저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드는 자신의 맘속을 들여다본 듯한 라미아의 말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기다리라는 말도 전하지 못하는 인간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우리도 꼭 들어야 하는 카린의 정보가 있는데.”
“하지만 길을 모르잖아요.”
“방금 찾았어요.”
이드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주머니를 휘돌렸다. 채찍으로 물건을 감아올리듯 눈알을 주머니로 말아 올린 이드는 자신 있게 발을 내디뎠다.
“이쪽이에요.”
이드는 사방으로 뚫려 있는 열 개의 통로 중 하나로 들어갔다. 통로를 따라가자 드문드문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비올라는 5층이 마법사들의 거주 공간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조금 더 들어가자 교차되는 통로가 계속해서 나왔다. 입체적으로 보면 미로처럼 보일 수 있는 구조였다. 하루 이틀 살아서는 길을 익히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자연 뒤를 따르던 쉴라의 마음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길이 확실한 건가?’
쉴라는 이 의문을 물어볼까, 생각했다. 작전 중에 같은 일행에 대해 가지는 의심과 의문은 오래 묵힐수록 독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앞서 트롤버스터를 녹여 버린 놀라운 모습에 이드가 진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라는 말에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그것과 길 찾기는 엄연히 별개라고 생각했다.
몇 번 더 망설이던 쉴라가 막 의문을 표시하려던 때였다.
한결같은 모양을 하고 있던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더니 여기저기 타고 녹고, 부서진 넓은 방으로 이어졌다.
“흐흐…….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참을성이 모자라는구만. 서로 존중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비올라는 그 방 한쪽에 앉아 있었다.
“존중하고 있으니까 온 거야. 그렇게 말 잘하던 인간이 말도 못 할 정도라니 무슨 일인가 했지. 어쩌면 이 눈알을 당신이 아니라 다른 마법사가 강제로 조종했을 수도 있으니까.”
이드는 말을 하며 처음으로 마주한 비올라를 살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강조한 것처럼 특별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나이가 눈에 띄기는 하지만, 평범하고 둥근 얼굴에 왜소한 체격을 한 다크써클의 대머리가 비올라의 모습이었다. 이드는 문득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고생을 했기에 벌써 대머리가 됐는지. 쯔쯔쭛’
이드는 지구에서 대머리로 고민하던 주변 사람이 생각나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대머리는 대머리를 지적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법.
이드는 바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비올라가 상대한 것으로 보이는 두 마법사가 죽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좀 전 이드가 감지한 진동을 발생시킨 마법에 죽었는지 시체 주변으로 흥건한 피가 번져 가고 있었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다행히 잘 처리한 것 같네.”
“흥, 그런 바보들에게 당할 턱이 있나. 일단 들어왔으니 바로 6층으로 가자. 아무래도 부관주가 꼼짝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나서도 벌써 나서야 할 인간인데………….”
‘부관주?’
이드는 갑자기 언급된 부관주의 존재에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우선되는 문제가 있었다. 부관주가 북을 치든 물구나무를 서든 그건 둘째다.
“그러지. 그런데 그러기 전에 말해 줄 게 있잖아?”
“카린이라는 여기사 말이지?”
“그래.”
카린의 이름에 쉴라가 귀를 기울였다.
“말해 주지. 그 여기사라면 폐기장에 있다.”
“폐기장…….”
생명의 관에서 하고 있는 일을 생각하면 대충 어떤 곳인지 짐작이 되었다. 될 수 있으면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은 공간인데, 그 점을 노리고 숨는 장소로 택한 듯했다.
“폐기장은 어디 있는데?”
“지하다.”
이드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지금 있는 곳은 5층. 비올라와 처음 이야기를 나눈 곳은 1층이다. 그런데 카린은 지하에 있단다.
뿌드득.
쉴라가 이빨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비올라에게 농락당했다는 기분일 것이다.
1층에서 말했다면 한 층만 내려가면 될 것을 5층까지 불러 올려서 말해 줄 것은 뭐란 말인가. 그때 그에 대한 답이 비올라의 입에서 나왔다.
“엿 같은 기분인 건 알겠는데, 나도 함부로 너희를 믿고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그리고 1층에서 지하로 가는 길은 복잡하다. 밖으로 나가야 하고, 썩는 냄새가 고약하거든. 하지만 아래 4층에 실패작을 버리는 쓰레기 통로가 있는데 그걸 이용하면 빠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