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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43화


580화

‘하아…………… 쓰레기 통로라니.’

이드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마음대로 납치해서 실험을 한 것도 모자라,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쓰레기라 말하고 버렸단다. 정말 이 생명의 관에 살아 있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 싶었다.

‘진짜 탑주와 부관주라는 놈들이 인간이 맞는지 그 낯짝이 궁금하다. 쯧, 허기사 인간이니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지.’

과연 그 작자들은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 성문에 걸리면 자신들을 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비올라에 대한 경각심도 새롭게 일었다.

‘이놈도 2층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없는 사람 취급했지. 제 입으로 인체 실험에 참여한 적은 없다고 하지만, 그런 면을 보면 이놈도 생명의 관에 있는 마법사들처럼 생명 경시를 넘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지.’

이후 자신이 살려 둔 인간이 인체 실험과 같은 개짓거리를 한다면 후회로 절대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자신이 죽일 놈을 죽이지 않아 죄 없는 사람이 죽는 꼴은 절대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놈의 고삐를 단단히 조여야겠다!’

비올라를 보는 이드의 눈이 번뜩였다.

그 심상치 않은 눈길에 뒤통수가 찔렸는지 비올라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뭐? 불만있냐? 내가 왜 밑에서 이야기를 못 꺼냈는지 말했잖아. 이거 급한 데다 속도 좁은 놈이네.”

이드는 이놈이 왜 자꾸 급하다고 입에 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계속 급하대? 그보다, 일단 너 나하고 약속 하나 하자.”

“이야기 다 끝났는데, 무슨 약속?”

“앞에 이야기 했던걸 바꾸자는 건 아니다. 내 말은 네가 지금부터 인체 실험 같은 또라이 짓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 줬으면 한다는 거다. 분명 인간들 중에는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멀쩡한 사람을 납치해서는 쓰레기 취급을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냐! 그런 점에선 너도 그 싹이 있다고. 2층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지?”

이드의 이야기에 비올라가 훤한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또 그 소리냐? 그건 이미 내가 너희들에게 맞춰 준다고 했잖아.”

시큰둥한 비올라의 대답에 이드는 목소리를 바짝 조였다.

“그래. 나도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기 때문에 칼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거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맞춰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나와 협력 관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 이후까지.”

“흐…만약 내가 그 약속을 어기면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가장 고통스럽게 정신과 신체를 무너트린 후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쓰레기장에서 썩어 가게 만들어 주지.”

잔인한 내용이지만 큰 소리가 나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절대 그렇게 만들겠다는 이드의 의지가 숨어 주변의 마나를 공명시켰다. 그 순간 이드의 말은 단순한 음파의 떨림이 아니라 실재하는 힘이 되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의 형태로 비올라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박혔다.

“컥!”

가소롭다는 듯 이드를 보던 비올라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마른기침을 토했다.

“쿨럭. 쿨럭………….. 어, 언령(言靈)이라고? 쿨럭! 무식한 무투파가 마법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비올라가 경악해서 외쳤다.

“지랄.”

이드는 비올라의 착각을 비웃어 주며 코웃음을 쳤다.

언령이란 9클래스의 대마법사의 말에 의지와 힘이 실리는 현상을 말한다. 그 메커니즘은 드래곤의 용언과 신의 뜻을 전달하는 신언과 비슷하지만, 위력 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하위 버전의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마법사에게 이 언령이 깃드는 순간 마법사는 언령의 힘을 빌어 마법사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인 마법 주문을 간소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모든 마법사가 간절히 원하는 힘이며, 절대의 경지에 올랐다는 증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드가 만들어 낸 현상은 음공(功)이지 언령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번뇌후의 힘이었다. 언령과 그 근본은 같아도 발현의 형태가 마법과 무공만큼이나 다른 힘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 덕분에 천재의 오만함인지 처음 볼 때부터 아래로 깔아보던 태도가 사라졌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이 착각은 비올라의 심리적 브레이크가 되어 줄 것이다.

“천재라더니, 전지(全知)한 건 아닌가 보네. 그런데 약속은?”

“……약속한다. 원래 처음부터 ‘초인기 이식’은 흥미 없었어. 나는 순수하게 마법을 만들고 싶은 것이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옮기는 저급한 짓 따위는 하지 않아.”

“좋아. 그 약속 꼭 지키기를 바란다. 그럼 쉴라 경.”

비올라의 확답을 들은 이드가 쉴라를 불렀다.

그녀는 대화가 이어지는 짧은 시간 지나온 통로와 이드를 번갈아 보며 갈등하고 있었다.

“여기서 일행을 나누죠. 카린 경을 찾는 쪽과 비올라를 따라가는 쪽으로, 제가 비올라를 따라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쉴라가 기꺼우면서도 미안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카린 경을 구하는 것이 원목적입니다. 원래 목적대로 움직이는데 괜찮고, 나쁘고 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그럼. 어려운 일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만 어려운가요. 카린 경을 구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텐데요. 라미아와 함께 가시면 조금은 어려움이 덜할 겁니다.”

[이드와 다시 떨어지는 게 아쉽지만 잘 부탁해요, 쉴라 경.]

일리나에게 편히 안겨 있던 라미아가 쉴라의 어깨로 옮겨 가며 말했다. 이드의 말처럼 자신이 쉴라와 함께 한 팀이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야말로.”

이드는 두 사람이 인사를 마치자 바로 움직였다.

먼저 쉴라와 라미아를 4층으로 돌려보내고 비올라에게 들고 있던 눈동자를 던져 준 후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네가 앞장서라. 우린 어디로 가면 돼?”

“따라와라. 우선 부관주의 방으로 간다.”

이드는 일리나와 함께 비올라를 따라 달렸다.

왜소한 외형과 달리 제법 체력이 되는지 비올라는 5층의 미로 같은 통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느낌상 그가 있던 곳과는 정반대되는 곳에 도착하자 그가 있던 곳과 마찬가지로 통로가 넓어지며 그 끝에 방이 하나 나타났다.

문이 닫혀 있는 방이었는데 비올라는 그 문을 향해 이드에게 돌려받은 눈동자를 강하게 던졌다.

퍼엉!

다음 순간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며 문이 부서져 내렸다.

‘무슨 수류탄이냐.’

정말 사용 방법이 수류탄과 똑같았다. 다만 디자인은 이쪽이 더 최악이었지만,

비올라는 뿌연 먼지 사이로 들어가며 마법의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치워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간 이드의 눈에 커다란 부관주의 방이 보였다. 전형적인 마법사의 방처럼 한쪽 벽에는 두꺼운 책이 가득했고, 한쪽으로는 4층에 있던 실험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정중앙에 네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마법진이 놓여 있었다.

비올라는 그 마법진 위에 올라서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다.

“탑주는 6층을 사용하고 있는데, 탑주를 제외한 나머지 마법사들이 6층으로 올라가는 유일한 방법이 이 마법진을 이용하는 것이지.”

“탑주가 6층에 있는 건가요?”

“아니, 없어. 흐흐. 탑주가 있었다면 애초에 당신과 당신의 남편이 살아서 생명의 관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야. 나도 손을 잡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거고.”

비올라가 탑주에게 보내는 존경과 집착을 보면 과연 보통 능력자는 아닌 듯했다.

이드는 일라이져를 뽑아 들며 말했다.

“그럼 부관주가 6층에 있나 보지? 네가 노리는 탑주의 고대 마법도 거기 있고?”

“부관주가 6층에 있다면 이렇게 대책 없이 이동하지는 않는다.”

“그럼 어디 있는데?”

“설명은 나중에 일단 따라와라. 탑주의 그림자 아래로!”

비올라는 이드의 말문을 일단 막아 둔 후에 시동어로 보이는 주문을 외웠다.

이드는 다음 순간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주변의 공간이 바뀐 것을 알았다. 정확히는 공간이 바뀐 것이 아니라 세 사람이 이동되어 온 것이었다. 

“이상한 곳이네요.”

이드는 주변을 돌아본 일리나의 감상에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의 공간이라고 했던 6층은 황궁의 대전만큼 넓은 곳이었다. 그런데 사방이 하얀색 일색이었다. 바닥과 벽, 천장 할 것 없이. 페인트를 칠한 듯 하얗기만 했다.

일리나가 이상하다고 할 만했다.

하얀 공간의 중앙에는 황제의 옥좌 같은 모양의 검은 강철로 만들어진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도대체가 의미도 목적도 알 수 없는 공간에 이드는 이 던전의 마법사들이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 의자로 뛰듯이 다가간 비올라가 강철 의자의 손잡이를 잡고 인간의 성대로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주문을 외웠다.

부우웅!

그러자 기묘한 공명음과 함께 비올라의 마나가 의자로 스며들며 네 개의 의자 다리에서 시작된 회오리치는 형태의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마법진은 잠시 푸르게 발광하더니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타올랐다.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비올라가 키득거리며 득의하게 웃었다.

“으흐흐흐. 이럴 줄 알았지. 부관주 놈이 마법진을 틀어막아 놨어.”

“고대 마법은 다른 곳에 있나 보지?”

이드가 물었다.

“진짜 탑주의 연구실에 있지.”

“그럼 여긴? 여기도 탑주 혼자서 사용한 다면서?”

“우리들은 알현의 방이라고 한다. 탑주를 직접 만날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방이지.”

“심각한 공간 낭비군. 그런데 이제 어쩔 거야? 이동 마법진이 막혔다면서?”

이드의 말에 비올라가 낄낄거리며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당연히 막혔으면 뚫어야지. 내가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한 게 있지. 흐흐흐. 이런 일차원적인 짓밖에 할 줄 모르는 시종장 같은 부관주 놈은 나한테 안 돼.”

“어디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대사네.”

“매드 사이언티스트? 무슨 말이냐?”

“뭐, 그렇게 불리는 연구자들이 있어. 그 사람들 로망이 필요한 때에 딱 필요한 물건을 꺼내 들면서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준비했다!”라고 말하는 거라 하더라고. 네가 하는 모양을 보니 문득 생각이 나서 말이야.”

“흐흐흐. 어디의 연구자들인지 모르겠지만, 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놈들이구나. 하지만 그놈들도 나처럼 완벽한 준비는 못 할걸.”

음흉하게 웃으며 로브에서 나온 비올라의 손에는 다섯 개의 하얀 조약돌 같은 물건이 들려 있었다.

“이 정도는 준비해야 그런 말을 할 주제가 되는 거라고. 깨어나라. 사계의 귀[耳].”

쩔그럭.

비올라가 명령하자 그의 손에 있던 조약돌이 떠오르더니 부풀어 오르며 해파리와 같이 변했다. 대신 해파리보다 발이 짧고 많아서 징그러워 보였다.

변신이 끝난 사계의 귀는 이어지는 비올라의 손을 따라 사방과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겨 수십 개가 되는 발에서 푸른 룬을 뽑아 피라미드를 만들어 냈다.

그런 뒤 비올라가 다시 로브 안에서 축구공만 한 눈동자를 꺼내 옥좌에 올리자 눈동자가 부풀어 올라 성인 남자만큼 거대해졌다.

뒤에 서 있던 이드는 혹시나 피라미드의 룬이 닿을까 일리나를 자신 앞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고 해파리와 눈동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들은 도대체 뭐냐?”

“이놈들은 사계의 귀다. 마법진을 틀어막는 정도는 기본적으로 예상했지. 그래서 그걸 뚫기 위해서 준비한 놈들이지. 그리고 이건 사계의 눈. 1층부터 같이 있었던 놈이지. 우리가 이동하기 전에 이놈을 먼저 보낼 거다. 부관주가 무슨 준비를 했을지 모르는데 무턱대고 이동할 수는 없지.” 

“과연………… 준비성 좋네.”

“흐흐흐. 이 정도는 기본이지.”

다음 순간 비올라는 강철의 옥좌에 마력을 주입해 눈동자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안전을 확인한 비올라의 말을 따라 이드와 일리나도 강철의 옥좌를 잡고 6층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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