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58화
595화
“아!” 까먹고 있었다.
“아? 아~? 뭡니까, 그 이제야 그런 물건이 있는 걸 알았다는 듯한 소리는?”
‘예리한 놈.’
이드는 내심 찔렸다. 하지만 정말 그 기분 나쁜 돌멩이에 대한 일은 비올라가 말하기 전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헬름 협곡이 무너지고 생명의
관을 탈출하고서도 새로운 얼굴들과의 만남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나보다는 네가 까먹고 있던 거 아냐? 그렇게 입에 달고 노래를 부르더니 정작 생명의 관을 나와서는 아무 말도 없었잖아.”
그 시간, 비올라도 자신이 해 놓은 성대한 삽질에 멘붕 중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비올라는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에 손을 저었다.
“아, 됐고요. 긴말 말고 빨리 주십시오. 바이트 타블렛.”
“맡겨 놨냐. 바이트 타블렛.”
“…………바이트 타블렛은 말장난으로 가지고 놀 물건이 아닙니다.”
이드는 단숨에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바이트 타블렛을 가지고 욕이라도 했으면 죽자고 달려들 것 같다. 이드는 방 안쪽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 그냥 장난칠 가벼운 물건은 아니지. 하지만 지금 넘겨줄 물건도 아냐.”
“지금 약속을 파기하겠다는 겁니까!”
“흥분하지 말고 앉아 봐.”
”……”
이드가 자리를 권했지만 비올라는 침묵으로 답했다. 눈빛이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다. 당장 마법을 퍼부어 오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은 모습이었다.
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네 말대로 넘기기로 약속된 일이지만 그때 라미아를 통해서 우리가 먼저 확인하고 넘긴다고 했다고.”
“어디서 수작질이요. 그건 생명의 관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의 관에 남은 바이트 타블렛의 경우고, 생명의 관에서 획득한 바이트 타블렛은 정보를 대가로 내가 가지기로 했습니다.”
‘쩝. 안 넘어오네.’
이드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혹시나 하고 슬쩍 말을 바꿔 봤는데, 역시나 마법사 아니랄까 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실 마법사가 아니라도 목숨 걸고 손에 넣은 물건인데 잊어 먹거나 헷갈릴 수는 없었다.
[지금 꼭 엉터리 사기꾼 같아 보이는 거 알아요?]
이드는 마음으로 전해 오는 라미아의 말과 어쩐지 미묘할 것으로 짐작되는 일리나의 눈길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작질이라니. 너도 알겠지만 마법사도 아니고 무공을 익힌 검사인 내가 그걸 탐내기라도 하겠냐? 나는 그저 약속을 다시 상기시키는 중일 뿐이야. 그리고 거래 내용 중에는 우리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도 들어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넌 가장 중요한 때에 돕기는커녕 내 아내를 인질로 잡고 협박을 해 왔단 말이지. 이건 협조가 아니라 배신이야.”
“잠깐만, 그건…”
순간 단단히 뿔이 나있던 비올라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물론 확실히 잘 기억하고 있는 일이었다. 일리나의 하얀 주먹을 뼈가 시릴 정도로 몸에 새겨 넣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드를 멈출 목적에서 나온 말이었다. 설마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그건이고 자시고!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놈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거 알지. 내가 지금 널 살려 놓고 있는 것만으로도 많이 양보한 거라고. 그런데 내가 뭘 믿고 너한테 바이트 타블렛 같은 위험한 물건을 그냥 넘길 수 있겠냐? 안 그래?”
“하지만 그때 그건 급해서 튀어나온 말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요.”
“네 생각이야 증명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그때 네가 감히 일리나를 죽이겠다고 말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 네가 했던 말은 일리나가 가장 가까이서 들었으니 물어봐. 일리나가 엘프라는 사실은 알지?”
“그, 그런 억지가………….”
반질반질한 비올라의 머리에 땀이 흘러내렸다. 약속을 내세워 독촉했다가 오히려 약속 위반으로 당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좀 억지가 있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걸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걸.”
이드도 자신의 말이 조금 억지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대로 바이트 타블렛을 내줘야 해서 치사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약속할 때만 해도 바이트 타블렛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위험한 물건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조건을 달았을 뿐이다. 문제가 없다면 비올라에게 넘기고, 위험한 물건이라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부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바이트 타블렛이 12대식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바뀔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그 물건이 12대식에 어떻게 간섭한 건지 알기 전에는 넘겨줄 수 없지.’
거기다 비올라가 일리나를 가지고 협박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조일 경우 생각 못 한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갈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바이트 타블렛을 절대 넘기지 않겠다는 건 아냐. 일단 라미아가 먼저 확인하고, 네가 믿을 만해 보이면 우선 해석 자료를 넘기고, 그 이후 태도를 보고 바이트 타블렛을 넘기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서로 약속대로 잘해 보자고. 나 믿지?”
비올라는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다. ‘나 믿지’라니! 여인네 전용의 작업 멘트 따위를 어떻게 믿으라고.
하지만 믿겠다는 말도, 못 믿겠다는 말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믿는다고 하면 믿고 기다리라고 할 것이고, 못 믿겠다고 하면 네가 믿어 주지 않는데 내가 널 어떻게 믿겠냐고 할 것이다. 괜히 저 간단한 말에 여자들이 당하는 것이 아니다.
“음. 말이 없는 걸 보니 이해했나 보네. 앞으로 우리 잘해 보자고.”
이드는 뜻대로의 반응에 밝게 웃으며 비올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라미아의 눈빛이 마치 섬노예로 팔려 가는 사람을 보는 듯 불쌍해졌다.
이드는 호탕하게 웃고는 일찍 쉬라며 비올라를 방에서 내보냈다.
순간 문밖에서 억울함에 찌든 비올라의 괴성이 터졌다.
“우어어어어!”
“뭐야, 몬스터냐!”
그 소리에 기사들이 놀라서 튀어나왔지만 이드는 깨끗이 무시했다.
[너무하셨어요.]
“자업자득이지. 그렇다고 바이트 타블렛을 그냥 내줄 수는 없잖아. 거기다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당한 거지, 한 일 년만 지나도 지금 같은 말장난은 안 통할 거야.”
하지만 일 년 뒤에는 아무리 말발이 좋아져도 지금 상황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낙장불입 확정된 사실은 흘러간 시간처럼 되돌리기 불가능하다. “그보다 이야기 나온 김에 그거 좀 꺼내 봐.”
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방 안에 비치된 의자와 작은 테이블을 밀어 자리를 만들었다.
쿠웅!
라미아가 그 위로 바이트 타블렛을 꺼내 놓았다.
생명의 관에서 보기는 했지만 자세히 본 일이 없던 세 사람이 바이트 타블렛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수정 같기도 하고, 돌 같기도 하고. 정확한 재질은 모르겠는데?”
[희귀한 마법 재료를 강력한 마나로 융합시켜 뽑아 낸 마법 물질이에요. 고위 아티팩트가 이렇게 만들어지는데, 제가 만들어진 방법과 큰 차이는 없어요. 물론, 들어간 재료와 난이도에서는 차원이 다르지만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을 들으며 바이트 타블렛을 만지작거렸다. 생명의 관에서 느꼈던 그런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드는 손을 떼고 바이트 타블렛을 살폈다. 원기둥의 한 쪽을 잘라낸 것 같은 모양에, 원형 테두리 바깥쪽에는 세밀한 세 줄의 마법진과 룬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런 특이한 점이 없는 물건이었다. 들판 가운데 던져두면 누가 가져가서 건물의 받침돌로 사용할 정도로 특이점이 없었다.
곧 외부에서 뭔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드는 손에 강기를 형성해서 바이트 타블렛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강한 반발력이 일어나 자갈에 찔러 넣은 검처럼 강기를 이리저리 튕겨 냈다.
“역시 보통 물건은 아니야.”
“반응이 있나요?”
“있어요. 그냥 봐서는 마나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강기에는 강력하게 반발하네요.”
“저도 한번 해 볼게요.”
이드를 따라 일리나도 바이트 타블렛에 강기를 주입하고 가벼운 공격을 가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드 말했던 12대식이 무너지는 느낌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저도 그래요. 그걸 느끼려면 좀 더 강력한 힘을 쏟아 넣거나 12대식을 사용해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면 여기선 힘들죠.”
끄덕끄덕.
일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미아가 말했다.
[민폐예요. 숙소가 날아갈걸요. 시험해 보려면 어디 사람 없는 산속이나 들판으로 나가서 해야죠.]
“넌 어때? 이게 뭔지 좀 알겠어?”
이드와 일리나가 바이트 타블렛을 두드려 패는 동안 라미아는 바이트 타블렛의 외부에 새겨진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아쉽지만 한 번 봐서는 모르겠어요. 정말 제대로 시간을 가지고 해석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대신 밖에 새겨진 룬어는 해석했어요.]
라미아의 말에 이드와 일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위대한 섭리의 가지여. 찬양 받으라.]
“……그게 뭐야.”
도경 속에 잠들어 있는 현문(文) 같은 문구에 이드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봐도 세상과 자연이 돌아가는 위대한 이치에 대한 찬양인데, 그게 어째서 바이트 타블렛에 적혀 있을까.
[단순한 문구는 아니에요. 이 안에 분명 바이트 타블렛 제작자의 의지가 새겨져 있을 테니까요. 그 의념이 이 문구가 가진 진짜 뜻일 거예요.]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라미아의 날개를 불끈 잡았다.
“그럼 일단 이 물건에 대해서는 맡길게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제가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부터 어떤 용도인지까지 밝혀낼 테니까요. 나 믿죠? 호호호]
라미아가 앞서 비올라에게 했던 이드의 말을 흉내 내자 이드가 따라 웃었다.
“하하. 당연하지. 내가 라미아하고 일리나를 믿지 않으면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
일단 12대식을 이용한 실험은 시간과 공간이 마련되는 대로 시도해 보기로 하고 바이트 타블렛은 다시 라미아의 아공간으로 돌아갔다.
아침이 지난 시간.
끄라라락!
탈탈 영주의 저택이 와이번의 울음소리와 돌풍에 시끄러워졌다.
전날 카린의 치료를 위해서 밤하늘을 날았던 프랑 기사단의 용기사가 카린을 치료할 수 있는 대사제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다.
사제가 오기를 가장 열심히 기다리고 있던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이 제일 앞서 그들을 반겼다. 꽃 같은 여기사들의 열렬한 환영에 프랑 기사단의 기사는 밤샘 비행의 피로가 날아가는 뿌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와 함께 날아온 중년의 대사제도 얼떨떨한 가운데 기뻐하긴 했지만, 바로 치료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밤샘 비행에 나이 든 몸이 따라가질 못한 때문이었다.
탈탈 영주와 가벼운 인사를 나눈 대사제는 짧은 기도로 휴식을 취했다.
그런 후 그는 쉴라를 따라 카린의 방을 찾았다.
그는 방 안에 가득한 기사들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카린을 살폈다.
은색 기사단의 이름에 대사제인 그가 먼 거리를 날아오기는 했지만, 설마 그 자리에 이렇게 많은 기사들과 그들의 단장과 부단장이 함께할 거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대사제는 카린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인상이 무섭게 변하더니, 곧 애매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 변화를 손에 땀을 쥐고 보고 있던 기사들은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그들의 마음을 대신해서 스폴이 물었다.
“대신관님, 혹시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가요?”
“아,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만, 지금 상태가 제가 아는 어떤 경우와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꼴깍!
“혹시?”
“혹시………… 마족에게 당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