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8화
455화
검은 해골 앞으로 일리나를 포함한 인원이 다시 모였다. 그들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공간을 울리던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어디서 들려왔는지, 어떤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존재의 것인지 모두는 짐작하고 있었다.
우디의 실패했다는 말에 주변을 경계하던 사람들은 일의 사정을 알기 위해 그와 베르디의 주변으로 모였다. 침묵으로 말을 재촉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우디가 입을 열었다.
“확인해 본 결과, 라미아의 말이 모두 맞았다. 봉인의 공간 좌표와 존재 좌표가 비틀렸다. 두 좌표는 봉인의 중요한 근간의 하나다. 그것이 뒤틀리면서 봉인이 뼈대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일단 좌표를 바로잡고 빠르게 수습은 했지만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니다. 좌표가 흔들렸던 만큼 모든 마나식과 마법진을 최적화해서 동기화시켜야 한다.”
컴퓨터를 예로 들자면 프로그램의 버그를 잡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고되고 지루한, 끝없이 반복되는 일이었다.
“문제는 봉인에 생긴 공간의 틈이다. 미세한 틈이다 보니 악마가 탈출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악마의 정신까지 제압하고 있던 봉인에 틈이 생기면서, 그 빈틈만큼 악마가 각성했다. 아마, 자신의 상태와 봉인의 상태까지 벌써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이드는 조금 전 들었던 악마의 울음소리가 생각났다. 워낙 거대한 존재감을 보이는 소리였기 때문에 생생하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디의 말대로라면 그 소리는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스스로의 각성을 알리는 신호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틈이다. 이것이 제대로 메워지지 않고 있다. 봉인의 구성을 재정비했지만 닫히지 않아. 정확히 그 주변만 일그러진 상태다. 아마 놈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외부와 어떤 연결점을 확보한 것일 수도 있고. 그 연결점이 바로 라미아가 말한 ‘그림자’인 것 같다.” 우디는 마계에 남겨진 악마의 반신을 그림자로 칭했다.
‘그림자라. 반쪽보다는 좋네.’
따져 보면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 쪽이 영체의 근원이고, 마계에 남겨진 부분이 광기를 포함한 사념과 육체를 형성하던 마력의 찌꺼기와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림자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반쪽보다는 그림자가 부르기 편했다.
“그럼 열쇠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네. 열쇠는 어디까지나 봉인과 마을의 마법진들을 조정하는 일을 할 뿐이지.”
이드의 말에 우디가 고개를 저었다. 열쇠가 중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그림자가 본체에 도달하는 건 언제입니까?”
이지문이 물었다.
“한 시간하고 조금 더 정확하게 단정할 수는 없다.”
빠르다. 베르디의 대답에 이드는 라미아의 의견을 구했지만 그녀의 대답도 같았다.
[제 계산에도 한 시간 반 정도예요.]
처음 라미아가 확인한 시간은 더 길었지만, 그 사이 우디들이 봉인을 조정하는 작업 시간이 있었다. 물론 그게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한 덕분에 당장 일어나고 있던 이상 현상들을 멈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결과 남은 시간은 지금 상황에 대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대책을 세우는 데도 부족하기만 한 시간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장 떠오르는 뾰족한 대책도 없었다. 덕분에 곤혹스러운 침묵만이 흘렀다. ‘역시 부수는 것이
이드가 연인에게 금지당한 가장 무식한 방법을 떠올릴 때였다.
마을과 숲의 외곽으로부터 십수 명의 인원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그들 중에는 앞서 일리나와 함께 마을로 보냈던 채이나와 마오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어른으로 소개받았던 노년의 엘프들과 여섯 명의 정령수의 가지들도 있었다. 각자 마을과 결계 주변에서 맡은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귀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나와 정령에 예민한 엘프들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괴수의 음흉한 울음소리에 바르르 떠는 정령들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날듯이 달려온 그들은 우디의 앞으로 모였다. 그중 채이나와 마오만이 빠져나와 이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디의 설명은 짧고 간단했다. 봉인이 기능을 잃기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설명에 허비하는 시간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우디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그들은 떠올리지 못했던 대응 방법이 바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그림자’를 먼저 처리해야 할 거야.”
디프록이었다. 그의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엘프로 마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우디가 의견을 구하는 최고 어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하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내 경험으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네. 영혼의 존재는 특별하지. 또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강력하네. 악마라는 존재 정도 되면 그 영혼은 더 특별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존재가 하나가 되려고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말이야. 그것은 이미 공간의 경계를 넘어선 힘이야. 봉인으로 제어하지 못할 영역이지. 이럴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정도가 될 거야. 하나는 그림자나 본체 중 한쪽을 죽이는 것. 또 하나는 서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없는 곳까지 둘을 떨어트려 놓는 것이네. 소환되었을 때처럼. 마계의 바닥까지.”
과연 세월이 겹쳐 쌓은 지혜는 위대하다.
그가 말하는 영혼과 영체에 대한 지식은 특히나 무겁고, 깊은 비전이다. 그런 비전을 디프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귀한 비전의 지식을 말이다.
모든 일이 정리된 이후의 이야기지만, 라미아는 그 날 밤이 되어서야 깨달음의 감탄성과 함께 디프록의 이야기를 이해했다. 그녀의 지식 안에도 이에 관련된 지식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 스스로가 그런 비전의 덩어리를 통해 태어난 존재였다. 가지고 있는 정보는 누구보다 풍부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요 없던 죽어 있는 지식이었고, 스스로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리낌이 있어서 바로 끄집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지식을 바로 끄집어 낼 수 있었다는 게 바로 디프록의 대단한 면이었다.
일단 대책이 서자 짧은 회의를 거친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디와 베르디가 서둘러 봉인 마법의 조정을 시작했고, 라미아를 포함한 노년의 엘프들이 나서서 봉인 주변을 감싸는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디프록의 이야기를 들은 우디는 그림자를 마계로 떨어트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봉인되어 있는 본체 쪽을 손대는 것은 위험했고, 그림자를 죽일 경우 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가 미지수라는 게 그 이유에서였다.
“봉인된 악마를 이번 기회에 소멸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위험을 안고서 시도할 일은 아니지.”
그것이 마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장로로서의 결정이었다.
서두른 덕분에 한 시간 안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타인의 마법에 간섭하는 것은 물론, 영혼을 다루는 최고위 마법의 작성치고는 엄청난 속도였다.
각 마법진의 운영은 우디와 베르디, 그리고 라미아가 맡기로 했다. 우디와 베르디는 봉인 마법의 조정을 위한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라미아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임기응변이 빠르고, 마법의 발현과 위력이 강력하기 때문에 맡게 되었다.
[준비 완료! 바로 시작할 수 있어요.]
라미아가 자신이 컨트롤해야 할 마법진의 중앙에서 운영권을 확보하고서 완료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우디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지금부터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신호를 따라 일부 엘프들이 봉인의 근처에서 주변과 봉인의 경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는 마법진의 운영을 맡고 있는 세 명의 주변에 만들어 놓은 간이 마법진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한 대비를 준비했다.
이드도 그들을 따라 마법진의 밖이지만 라미아의 뒤에 섰다. 이드는 우디에게 일이 실패했을 경우 임의로 움직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그에 따라 이드는 속 보이는 일이지만 라미아에게 가장 빠르게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그와 라미아의 관계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가 바로 이 의식의 핵심적인 위치이며 그녀의 마법진이 이곳에서 가장 이질적인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녀에게 일어날 확률이 가장 크다. 이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뭐, 이드의 생각이 얼마나 체계적이든 간에 이드가 지켜 준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은 라미아는 의욕 충만한 모습으로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시동합니다.”
우디와 같은 시동어도 없었지만, 라미아의 의념을 받은 마법진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부드러운 마나의 공명음과 함께 마법진이 희게 빛나기기 시작했다. 이어서 라미아와 봉인의 석탑 사이에 만들어 놓은 작은 마법진 위로 검은색의 원반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
“시공 터널을 확보했어요. 그림자까지 유도를 부탁드려요.”
“맡겨 두게나. 신관께서는 홀리 블러드를 부탁드립니다.”
우디는 그림자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신성력을 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에 살고 있는 존재의 상극은 언제나 신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로.”
우디의 말에 기다리고 있던 세 명의 엘프 신관이 검은 공간을 중심으로 둘러섰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엘프가 손에 든 칼로 손을 그어 피를 낸 뒤 허공에 떨어트렸다. 핏방울은 검은 공간 안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 위에 떴다. 세 신관이 한 손을 가슴에, 또 한 손을 허공의 핏방울로 향하고서 엘프의 언어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중에 떠 있는 핏방울을 중심으로 새하얗고, 새파란 기운이 핏방울을 감싸고 회전하며 점점 크기를 키우기 시작했다.
아아아-
그것은 마나의 공명과는 달랐다. 듣고 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허밍 같았다. 그렇게 한 곡의 성가가 끝나자 세 신관의 손끝에는 농구공 크기만 한 투명한 푸른색 신성력 덩어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홀리 블러드의 작성을 마쳤습니다.”
피를 냈던 신관이 살짝 피로한 얼굴로 대답했다. 신성력으로 축복되고, 강하게 압축된 홀리 블러드는 말 그대로 축복받은 성인의 피요, 천사의 피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악한 존재에게는 극약이며,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넣으십시오. 둘, 하나, 지금!”
우디의 신호에 따라 세 신관의 합작품인 홀리 블러드가 검은 공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부터는 우디와 베르디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봉인된 악마를 통해 그에게서 뻗어간 인연의 실을 따라 그림자에 이르는 길로 홀리 블러드를 인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