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1화
648화
지하에 만들어진 방 중에서 바이트 타블렛을 연구하는 방이 가장 컸다. 바이트 타블렛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중요성에 따른 선택이었다. 방의 중앙에는 바이트 타블렛이 있고, 벽에는 긴 책상이 자리했다. 한쪽에는 구겨진 침낭이 뒹굴고 있었다. 비올라가 이곳에서 잘 때 쓰는 물건이었다.
“라미아, 바쁘니?”
조심조심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이드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라미아를 찾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부름에 답하던 귀여운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지하실에 있겠다고 했는데………….”
방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이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밖으로 나가더라도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고 나갈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막 마음속으로 그녀를 부르려던 때였다.
“저게 무슨……?”
방 중앙에 놓인 매끄러운 바이트 타블렛 위에 놓인 무언가가 방을 밝히는 라이트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진녹색의 바이트 타블렛이기 때문에 차가운 은색의 빛은 특히나 눈에 잘 띄었다.
오히려 왜 지금까지 저걸 보지 못했나 싶을 정도의 요란한 반짝임. 멀뚱히 그것을 보고 있던 이드는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설마, 라미아?!”
머리와 날개가 보이지 않지만 그건 분명 라미아였다.
씰룩씰룩!
마치 좁은 구멍에 끼인 고양이가 몸을 빼기 위해 뒷다리와 꼬리를 요란하게 흔드는 것처럼, 라미아도 두 발과 꽁지깃을 요란하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생각 없이 보면 귀여워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를 제 몸처럼 아끼는 이드에게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한 치의 틈도 없이 매끄러운 바이트 타블렛의 어디에 끼일 곳이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심과 동시에 바이트 타블렛 위로 뛰어오른 이드가 바둥거리는 라미아의 두 발과 꽁지깃을 잡았다.
“라미아!”
[앗, 드디어 이드가 왔다!]
지금 상황 때문일까, 유난히 이드를 반기는 듯 느껴지는 라미아의 목소리가 짜랑짜랑하게 이드의 머릿속을 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거긴 또 어떻게 들어간 거고?”
[큰일은 아니니까, 설명은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당겨요!]
“뭘? 널?”
[당연하죠. 저 말고 당길 게 있어요?]
없지. 유리처럼 매끄러운 바이트 타블렛에 잡을 곳이 어디 있다고.
이드는 말없이 손에 쥔 라미아의 몸을 당겼다. 그 모습이 딱 밭에서 무를 뽑는 농부 같아 보였다.
만약 진짜 새였다면 제대로 당기기도 전에 다리가 부러지고 깃털이 뽑혔겠지만, 본래 신검에 근본을 두고 있는 라미아이기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상 단순 근력으로 그녀의 깃털을 뽑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깃털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깃털도 아니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드도 힘을 쓰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하지만 금방 뽑혀 나올 거라는 생각과 달리 라미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냥 힘으로 당겨서는 못 빠져나가요.]
“하지만 당기라면서?”
[그냥 힘만 쓰지 말고 내공을 써요. 검으로 절 사용할 때처럼. 그리고 상극의 성질을 이용해서 바이트 타블렛과 절 분리해야 돼요.]
“어떻게 끼면 빼는 데 그렇게 복잡해?”
[끼인 게 아니에요. 바이트 타블렛 안에서 물질과 비물질의 중간 형태로 융합된 상태로…아, 몰라 몰라. 설명은 뒤에 하고 일단 당겨요! 너무 오래 물고 있었더니 턱이 아프다고요!]
“이상한 거 먹지 말고 뱉어!”
[엉뚱한 소리 말고 빨리 당기기나 해요!]
“아, 아. 알았어. 그래, 일단 나중에 듣자. 근데 참 오랜만에 잡아 보는걸?”
이드는 손에 느껴지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반가웠다. 그레센에서 지구로 튕겨 나간 이후 지금까지 그녀를 무기로서 손에 잡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무극신기를 아래위로 나누어 상극하게 하였다. 그리고 라미아의 말대로 그녀와 바이트 타블렛으로 나누어 주입했다. 이드 안에서와 달리 외부로 발현되는 순간 두 상극의 기운은 라미아가 원한 대로 서로를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이드는 이때 특히 섬세하게 힘 조절을 했다.
라미아가 원한 대처이긴 하지만, 끼인 게 아니라는 말에 혹시 그녀에게 해가 될까 조심한 것이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생명의 관에서 나온 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바이트 타블렛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순간 이드는 바이트 타블렛이 생명의 관에서처럼 자신의 심상을 흔들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라미아가 빠져나옴에 따라 낯선 듯 익숙한 느낌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어나 이드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저기 라미아 양? 여기 뭔가 이상한 게 뿜어지는데요?”
[뭔지 모르겠지만 괜찮아요. 걱정 말고 힘껏 당겨요.]
뭔지 모른다면서 뭘 근거로 괜찮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녀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는 묘하게 확신이 어려 있었는데, 이드는 그녀가 바이트 타블렛에 대한 파악을 끝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안심하고 명하신 대로. 으쌰!”
이드는 섬세하게 조종하던 내력을 단숨에 울컥 뿜어내며 라미아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뻑뻑하던 움직임이 순식간에 매끄러워지며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라미아가 바이트 타블렛에서 빠져나왔다.
반대쪽에서 라미아를 당기던 힘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드가 기우뚱했지만 빠르게 중심을 잡으며 엉덩방아를 찧는 바보 같은 꼴은 보이지 않았다. 쿠르릉!
그와 동시에 빠르게 사라지는 구멍을 통해 지하실을 살짝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이건 정령의 기운인데.”
그 강력하고 순수한 힘의 분출에서는 속성을 단정하기 힘든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른 말로는 순수한 자연의 속성력과 같았다. 어째서 정령의 기운이 바이트 타블렛에서 뿜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오히려 이드는 익숙한 기운에 마음이 놓였다.
익숙한 것뿐 아니라 최상급 정령이 뿜어내는 것 같은 강력한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순간 지하실을 가득 메우던 기운은 모래 속에 스며든 물처럼 이드와 지하실을 휘감으며 사라졌다.
이드는 라미아를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바이트 타블렛에서 내려왔다.
“괜찮아?”
혹시 어디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라미아를 꼼꼼히 살피며 이드가 물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주저앉아 있던 라미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물론이죠. 이게 너무 안 떨어져서 고생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문제 없어요.]
라미아가 자랑하듯 입에 물고 있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둥근 발광체를 흔들어 보였다.
“불량 식품?”
[아니거든요! 그런 것보다 수천만 배 아~주 아주 중요 한 거예요. 호호호.]
“… …”
라미아가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부르더니, 입에 문 발광체를 부리로 달깍거리며 이리저리 돌렸다.
부우웅!
그러자 발광체를 중심으로 커다란 링 형태의 마법진이 여러 개 생성되더니 순식간에 줄어들며 범인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발광체를 꽁꽁 묶어 버렸다.
발광체가 작은 털실 뭉치처럼 변하자 라미아가 그것을 이드의 손 위에 툭 하고 뱉어냈다.
직접 만져 본 이드의 느낌으로는 털실보다는 유리구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저 바이트 타블렛에서 나왔단 말이지. 비올라가 알면 환장해서 달려오겠네. 이제 말해 줘.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게다가 바이트 타블렛에서 정령의 기운이 솟아나던 건 또 뭐고. 모르긴 몰라도 사람들이 꽤 놀랐을 거라고.”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내공과 마나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상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그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소드 팰러스. 당장에라도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달려올지 몰랐다.
라미아가 깃털 하나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쯧쯧쯧.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내가 이 저택 던전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요. 아마 아까 분출된 기운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요? 당장 일리나가 달려오지 않는 거만 봐도 알 수 있죠.]
라미아의 말을 들은 이드는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대처가 되지 않았다면 또 쓸데없는 소문의 중심지가 될 뻔했다.
[일단 저기 책상에 내려 줘요.]
이드는 명령대로 그녀를 책상 위에 내려 주고 그 앞의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일이 생겼으면 진작 날 불렀어야지.”
[불렀어요. 이드에게 닿지는 못했지만.]
“그게 가능해?”
이드는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자신과 라미아는 서로의 영혼을 나누며 영혼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무선 통신이 전파 방해에, 마법 통신이 마나 간섭에 방해받는 것처럼 어중간한 외부 요인으로 막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라미아와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분명히 느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행성도 아니고, 고작 같은 저택 안에서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고?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런데 아까는 들렸잖아.”
이드는 자신을 반기던 라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이드와 직접 닿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까지는 바이트 타블렛의 코어와 접촉하면서 영혼의 파장이 변질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드와 연결되지 않았던 거고요.]
“영혼의 파장이라니. 어쩐지 불길한 단어인데, 이제 괜찮은 거야?”
[걱정 말아요. 이제 그런 일 없으니까. 이번 일은 바이트 타블렛의 코어에 접촉하려고 내가 방어벽을 너무 내려서 그랬던 거니까요.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요.]
그래. 믿을게.”
이드는 방심하다가 당했다는 라미아의 말에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야무지게 날개로 주먹을 쥐는 모습에 조용히 믿음을 보여 주기로 했다. 대신 털실뭉치 같이 변한 발광체를 책상 위에 굴리며 말했다.
“네가 말한 코어가 이거야?”
[맞아요. 바이트 타블렛의 심장이자 두뇌죠.]
“그럼 코어가 뽑힌 저건 시체야?”
[풋, 시체는 맞는데, 그냥 쓸모없는 시체가 아니라 드래곤의 시체 정도에요.]
“저게?”
이드는 드래곤에 비유하는 라미아의 말에 새삼스럽다는 듯 바이트 타블렛을 돌아보았다. 라미아가 말한 코어라는 게 뽑힌 시체에 불과한 상태였지만, 달라진 점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광채도 그대로고 색깔도 그대로고, 매끄럽기도 그대로다.
‘달라져도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게 없구나.’
그렇다고 해도 드래곤이라니. 라미아에게 드래곤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드래곤 로드의 손에 의해 태어난 그녀에게 드래곤이 특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드래곤의 사체에 비유했다는 것은 그만큼 바이트 타블렛이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저거 비싸게 팔릴까?”
[뭐요? 아하하하. 저걸 어떻게 팔아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못 팔아?”
[못팔아요. 그만큼 가치 있다는 말이었다고요. 혹시 모르죠. 저 물건의 가치를 알 만한 마법사나 원래 주인은 드래곤 시체를 팔고 받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줄지도? 하지만 우리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다. 라미아가 관리하는 아공간에는 드래곤 시체 몇 구는 살 수 있는 돈이 있었다. 드래곤이 잡힌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나도 굳이 팔겠다는 뜻은 아니야.”
[알아요. 그보다 이드, 혹시 몸에 어떤 이상은 없어요?]
“….마침 물어보려고 했어. 이건 뭐야?”
이드가 결린 어깨를 풀듯 팔을 붕붕 돌렸다.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다고 긍정하면서 취하는 것치고 참 태연한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