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3화
650화
다음 날.
이드는 결국 웹 마법을 풀지 못했다. 손가락만 까딱이면 쉽게 뜯어 버릴 수 있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 버렸다.
“…..”
괜히 밝은 햇살을 바라보는 두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드는 것 같다.
그는 밤새 라미아가 마법을 풀어 주기 위해 나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지만 결국 그녀는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드는 알지 못했지만 방으로 돌아간 라미아는 이드의 베개 위에서 잠든 지 오래였다. 하루 종일 바이트 타블렛과 씨름한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며 이드의 입을 막아 버린 웹 마법을 풀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사실 이드도 밤새 몇 번 입을 막고 있는 거미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긴 했었다.
그러나 결국 마법을 뜯어내지는 못했다. 혹시 라미아가 나왔을 때 웹 마법을 뜯어 버린 이드의 모습을 보고 작은 투정도 받아 주지 못한다며 괘씸하게 여기지 않을까 해서다.
그 정도야 뭐 어떠랴 싶을지 모르지만 괘씸죄는 5대 악의 하나로 꼽히는 큰 죄다. 대부분의 범죄가 이 괘씸죄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위험한 죄명이다.
특히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 괘씸죄의 형량이 커지는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함은 물론, 겪는 마음고생 또한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괘씸죄를 풀고 나면 대부분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생기게 된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이드도 괜히 괘씸죄라는 이유로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기다린 것인데, 결국 밤을 새우는 결과로 돌아온 것이다.
‘라미아…………….’
이드는 라미아가 빨리 일어나 나와 주길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당장에라도 뜯어 버릴 수 있는 웹 마법이지만, 밤을 새우며 기다린 지금에 와서 뜯어 버리기에는 어쩐지 아깝게 느껴져서다. 조금만 더 견디면 라미아가 나올 테고, 미안한 미소와 애교로 웹 마법을 풀어 주지 않겠는가.
하지만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 포기하지 못한 이 기다림이 문제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일찍 달려온 케마란에게 입이 봉인된 망신스러운 모습을 들켜 버린 것이다.
“……”
“음………… 재미있게 사시네요. 아침부터 벌칙 놀이 중이신 거예요?”
한참 동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망설이던 케마란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말로 하기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섞여 미묘하게 변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 표정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딱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이드는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웹 마법을 뜯어 버렸다. 그리고 붉게 달아 오는 얼굴을 내공으로 티 나지 않게 식히며 물었다.
“크흠, 그 비슷한 거야.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마스터께 전언을 부탁받아서요. 그래서 저택으로 바로 달려온 건데, 이러고 있으실 줄은 몰랐죠. 아까 그거 라미아가 그런 거죠? 그런데 설마 밤새 이러고 있으신 건가요?”
전언을 가져왔다면서 이미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다. 이드는 중간중간 들리는 쿡쿡거리는 웃음과 질문을 애써 무시하며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로부터의 전언이지? 이렇게 일찍 달려온 걸 보면 가벼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에이, 마스터. 말 돌리기가 너무 노골적이에요.”
케마란이 개구쟁이 같이 말했다. 격이 없어도 너무 없다. 괜히 어려워할까 봐 편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던 부작용이 이런 식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은근히 록을 통해서 조심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이드가 말했다.
“그런 거 아니다. 널 통할 전언이라면 중요할 것 같아서 그런 거지.”
“음, 제 중요성을 이렇게 인정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럼 스폴 경의 전언을 말씀드릴게요. 스폴 경이 오늘 오후에 화원에서 단장님들이 모이기로 하셨다고 와달라고 전하라고 하셨어요. 그런고로 오늘 수업도 빠진다고요.”
“언제 모이나 했더니, 오늘로 정해진 모양이네.”
이드는 케마란이 가져온 전언에 눈을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궁으로 가기 전에 오색 기사단장들을 봐 두고 가고 싶었는데, 날짜가 잡히지 않아서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드의 마음과는 달리 무려 오색 기사단장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다.
수일 만에 날짜가 잡힌 것만도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그나마 같은 오색 기사단장인 쉴라가 요청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색 기사단장님들이 모이시는 거예요? 저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렇죠?”
케마란은 마침 기회라는 듯 물었다.
최근 그녀와 네리베르가 모르는 사이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지만,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름 높은 기사들이 비밀로 하는 일을 물어보기는 여의치 않았는데, 마침 기회가 생긴 것이다.
“몇 가지 사건이 있었지. 하지만 비밀이라서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
이드는 먹이를 찾은 표범처럼 눈을 번뜩이는 케마란의 모습에 부정하지 못하고 말했다.
“너무하세요. 저희도 마스터와 한편인데 저희만 따돌리시잖아요.”
케마란이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며 풀죽은 목소리를 냈다. 어깨는 한 뼘이나 떨어지고 고개는 가슴까지 숙여서 여간 애처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훤하게 드러나는 빈약한 연기력이었지만 아쉽게도 평소처럼 그녀를 말려 줄 네리베르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비록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이드는 그 모습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후 전언은 꼭 네리베르를 통하라고 해야겠다고 다짐한 이드가 말했다.
“그런 거 아냐. 너희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 스폴 경도 너희들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니?”
“스폴 경은 상관없어요. 저와 네리베르가 따르는 건 마스터니까요.”
“그리고 마스터인 내가 너희에 대한 일을 스폴 경에게 일임하고 있지. 나보다 너희들을 잘 알고 이끌어 줄 테니까. 그러니 스폴 경이 비밀로 했다면 나도 비밀인 거야.”
이드는 스폴의 이름을 방패 삼아 케마란을 밀어냈다.
무려 마인드 마스터 체면에 할 짓은 아니었지만 아직 어린 그녀들에게 냉정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는지 듣고 싶다면 스폴 경에게 허락을 받고 들어라.”
“……”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드는 애써 무시하고는 그녀를 수련장으로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아침 식사도 거르고 달려왔다는 그녀의 애원에 그녀를 식당으로 보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나와 라미아가 방에서 나왔다.
웹 마법이 사라진 걸 보고 라미아가 ‘흐응, 뜯었네요.’ 라고 귀신의 곡소리처럼 섬뜩하게 들리는 톤으로 말했지만, 하룻밤이 지나서인지 별다른 후환 없이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드는 그녀들과 록의 준비가 끝나자 케마란과 함께 그녀가 가져온 전언을 이야기하며 아침 식사를 마쳤다.
케마란을 록과 함께 수련장으로 내보낸 이드가 거실에 앉자 일리나가 말했다.
“화원에 가실 거예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에요. 쉴라 경이 절 불렀다면 분명 이유가 있겠죠.”
원래는 이드가 황궁에 가기 전에 쉴라 경이 믿을 수 있다고 판단된 단장들과 은밀히 만나려고 계획했었다. 케마란이 가져온 전언은 그 계획을 뒤집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드는 이의 없이 그녀의 말에 따를 생각이었다.
“단장들 간의 일에 대해서는 쉴라 경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현장 책임자의 말을 들어야지. 거기다 더 늦기 전에 내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도 말해 줘야 할 것 같고.”
[헤에, 쉴라 경이 많이 놀라겠네요.]
“모르지. 잠작하고 있을지도. 나에 대해서 생각이 많아 보였으니까.”
[에이, 설마요.]
그러고 보면 생명의 관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후 소드 팰러스에 돌아가 말해 주겠다던 비밀을 이제야 밝히게 된 것이다.
“저도 오늘 단장들과 만나기 전에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이드와 다른 단장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조용히 의견을 밝히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화원에 좀 일찍 가야겠는걸요. 그래야 쉴라 경도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여유가 생길 테니까요.”
과연 마인드 마스터라는 전설 속 존재를 한두 시간 만에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직접 어림짐작했던 에단을 제외하고, 이드의 정체를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하루에서 길면 삼일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믿기지 않는 현실에 볼을 꼬집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럼 화원에 가기 전에 어제 못 들었던 이야기마저 해 줘. 생각해 보니까 바이트 타블렛이 뭔지에 대해서 못 들었던 것 같아. 그게 가장 중요한데.”
“어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일리나는 어제 자신이 일찍 잠든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물었다. 그러자 이드를 대신해서 라미아가 그녀에게 어제 이드와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정확히 웹 마법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빼고 나니 이드가 라미아의 수고도 알아주지 못하는 나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정말 나빴어요. 내가 그렇게 고생하면서 일했는데, 그걸 몰라주고 엉덩이만 흔들고 있었다고 놀리다니.]
“야, 잠깐만…….”
이드는 자신을 몰아가는 라미아의 말에 기가 막혔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일리나의 눈이 이미 이드를 탓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과하세요. 라미아가 그렇게 열심인 건 모두 이드를 위해서인데 그렇게 놀리다니. 이드가 잘못했어요.”
밤새도록 웹 마법에 입이 봉인당하고 그걸 케마란에게 들켜 망신살이 뻗친 이드에게는 억울한 말이지만, 그걸 또 일리나에게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이드로서는 답답함에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억울하고 말지 그 망신스런 모습을 어떻게 자신의 입으로 털어 놓을 수 있겠는가.
‘베~!’
일리나의 뒤에서 혀를 내밀어 약을 올리는 라미아의 모습에 좀 전 느꼈던 섬뜩함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 이드는 케마란에게 입단속을 잘하라 경고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리나의 말을 따라 라미아에게 사과했다. 진심이라고는 1도 들어 있지 않은 사과였지만 라미아는 만족했고, 아이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일리나도 만족했다.
어제 듣지 못한 바이트 타블렛의 정체는 그 후에 들을 수 있었다.
[바이트 타블렛은 간단히 말해서 세상에 박아 놓은 빨대에요. 안에 든 달콤한 주스만 빨아 먹는 빨대요. 지금 세상에 새롭게 생겨나는 초인 있죠? 바이트 타블렛은 이 초인의 생성을 오로지 빨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기능은 당연히 탑주가 원하는 대로 조종이 가능하고요. 비올라가 이야기하던 탑주의 새로운 마법이 바로 이 기능인 것 같아요. 사실 마법이라고 하기도 힘들어요. 그저 힘의 통로를 제한하고, 세상에 뻗어 있는 힘의 한 줄기를 자신이 독차지하겠다는 욕심의 결정체니까요.]
“그게 가능한 일이야?”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에요. 생각해 봐요. 이 세상의 마나를 단 한 명이 사용하는 게 가능하겠어요?]
“그런데 이건 가능하다?”
[애석하게도 바이트 타블렛을 해석한 바로는 그래요. 초인이라는 새로운 법칙이 태어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았고, 다른 세상 법칙과 다르게 불안정하기 때문에 생긴 틈을 공략하겠다는 계획인 거죠.]
라미아의 말을 들은 이드는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라미아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미아는 초인이라는 존재를 탄생시킨 법칙을 아이에 비유해서 태어났다고 표현하지만 그것도 엄연히 세상의 순리에 의한 탄생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이 조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당장 세상의 법칙도 아니고, 그를 본뜬 무공만 해도 그 배움에 끝을 알 수 없는데, 세상의 법칙 그 자체를 손에 쥐겠다니!
“미쳤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생각해 낸 것이나, 그것을 실행해서 바이트 타블렛을 만들어 낸 실행력이나 모두 정상이 아니다.
이드는 혀를 내둘렀다.
[미쳤죠. 그만큼 천재기도 해요. 지하실에 있는 바이트 타블렛만 봐서는 분명 불가능한데 나머지가 합쳐졌을 때도 불가능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거 생각보다 더 굉장히 위험한 놈들이었네.”
이드는 아무래도 영혼과 정신의 관의 토벌이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