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6화
653화
“어째서 벌써 돌아온 건가?”
술 한 잔으로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있던 페시딘이 노크도 없이 들어온 워스를 보고 말했다.
“이런 못된 친구를 봤나. 노구에게 고생스런 일을 시켜 놓고는 혼자 즐기긴가?”
“나 정도 바쁘면 이래도 돼.”
바쁘게 받아치는 페시딘의 말에 농을 던졌던 워스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페시딘이 얼마나 바쁜지 누구보다 같은 삼검왕인 자신들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 중 정치적인 식견과 행정에 가장 밝은 그는 검후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검후가 실종된 후 그의 일은 수십 배나 늘어난 상태였다.
성인이 된 청소년이 분가하는 것만 해도 준비할 것이 많은데, 제국의 그림자에서 소드 팰러스를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할 일이 많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누구에게 탓하고 하소연할 일은 아니었다. 페시딘 자신이 욕망한 일이니까.
“그보다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을 텐가? 설마, 놈이 만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아닐 테지?”
혹시나 하며 묻는 페시딘의 말에 워스가 비어 있는 술잔을 채우며 답했다.
“껄껄껄. 그거 날 몰라서 하는 이야긴가? 내가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얌전히 돌아설 위인이 아니라는 걸 알지 않나. 내가 만나겠다면 누가 날 막을 수 있다고?”
“그럼 그냥 만나지 않고 돌아왔단 말인가?”
“외출 중이라서 못 만났어. 약속을 하지 않고 갔더니 이런 일도 있구먼.”
“뭐?”
외출이라는 말이 의외였는지 페시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차에 마침 어디로 외출했는지 짚이는 것이 있어서 돌아왔지.”
단번에 술잔을 비운 워스는 화원으로 들어가던 오색 기사단장들을 지켜본 일을 말했다. 그리고 마침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페시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맞았네. 단장들이 방문하기 전에 이드가 화원에 들었다는군. 무슨 일로 모였는지는 끝나 봐야 알 수 있을 것이고.”
“이드를 만나는 것도 그걸 안 후가 좋지 않겠나?”
워스의 말에 페시딘이 보고서를 탁자 위에 던지며 끄덕였다.
이드와 손을 잡겠다는 생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화원에서 있을 이야기에 따라 그 후의 일을 다시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보고는 일단 저들의 이야기가 끝나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다리겠나?”
“그러지. 오랜만에 자네와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 후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이한 두 사람에게 많은 이야기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같이 술잔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중 소드 팰러스를 내려다보던 페시딘이 문득 물었다.
“자네, 여전히 내 결정에 불만은 없는가?”
“난 검후보다 자네가 좋아. 초인 놈들이 적이란 사실만 잊지 말게.”
“……훗.”
짧은 문답과 웃음소리 뒤에 술잔이 부딪치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색 기사단의 다섯 단장이 실로 오랜만에 화원의 회의실에 모였다. 검후가 사라진 후 그들이 화원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쉴라를 제외한 단장들은 그녀가 개인 집무실이 아니라 회의실에 자신들을 안내했다는 사실을 통해 이번 만남이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지했다.
“이전 생명의 관의 일로 네 분을 만나기는 했지만, 다 함께 모인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퍽 기쁘고, 반갑습니다.”
쉴라가 간단한 인사말과 서로 간의 안부를 물으며 말문을 열었다.
“자자. 쓸데없는 안부 인사는 적당히 하고, 쉴라 단장이 우릴 모은 이유나 들어 봅시다. 우리 서로 바쁜 사람들이 아니오.”
대충 안부 인사가 마무리되자 성격 급한 빌런이 본론을 꺼내라며 재촉하고 나섰다.
마침 가벼운 인사말을 시작으로 조금이라도 더 쉴라와 이야기를 하려던 모이엔이 눈총을 주었지만 빌런은 모르는 척 무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이엔의 한심한 작업질에 내심 한숨을 쉬고 있던 쉴라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우리 오색 기사단과 소드 팰러스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을 알리고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우리 오색 기사단의 주군이자, 소드 팰러스의 주인이신 검후님에 대한 일입니다.”
쉴라의 입에서 오색 기사단과 소드 팰러스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도 느긋하던 단장들이 검후에 대한 말이 나오자 너 나 할 것 없이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번뜩였다.
그중 빌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검후님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 뒤지지 않는 큰 발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빌런 단장님.”
“빌런의 입은 내가 막고 있을 테니,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하오. 쉴라 단장.”
쉴라를 보며 빙글거리던 모이엔이 미소가 사라진 얼굴로 말했다.
“네 분 단장님께서도 제가 복귀와 함께 가져온 생명의 관에 대한 이야기는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생명의 관에 대한 이야기로 말꼬를 튼 쉴라는 그에 이어서 복귀 후 이드와의 만남, 그리고 이드의 도움을 받아 발견한 검후의 숲과 그곳에서 이어진 초인들의 습격과 생포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이어 갔다.
없는 일을 만들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어려울 것도 없었다. 대신 몇 가지 사소한 것들을 더하고 뺐다.
가량이드가 개구멍을 통해 화원에 침입해서 검후의 숲을 찾아낸 사실은 쉴라의 복귀 후로 미뤄 혹시 모를 분란을 막고, 화원에 숨겨진 이동 마법진과 검후의 숲에 대한 단서를 생명의 관에서 얻은 것으로 만들어 검후의 실종을 생명의 관과 연계시켰다.
그리고 이 작은 거짓말은 이어진 검후의 숲에서의 초인들의 습격과 연계되어 검후와 은색 기사단을 노린 악당의 출연을 의미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게 사실이오?”
은색 기사단의 갑작스런 복귀와 그 후 화원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을 알고 있는 네 단장들은 당혹하고 분노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이엔이 날카롭게 눈을 번뜩이며 의문을 표했다.
“쉴라 단장의 놀라운 이야기에는 내 당장 할 말이 없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소만, 어째서 이전 생명의 관에 대한 보고에는 그들과 검후님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는 것이오?”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결례인 줄 알지만 네 분 단장님이 검후님 앞에서 했던 충성의 맹세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쉴라 단장의 활약을 생각하면 전혀 결례일 일이 아니오. 오히려 은색 기사단과 함께하지 못했음이 부끄러울 뿐.”
쉴라의 이야기를 들으며 흥분과 분노로 얼굴이 붉어져 온몸을 떨어 대던 라발이 거세게 울리는 심장을 두드리며 선언했다.
“분노로 힘차게 뛰는 내 심장에 걸고 검후님과 소드 팰러스에 대한 충성은 변하지 않았소.”
이어서 세 명의 단장도 가슴에 손을 올리고 선언했다.
“네 분의 맹세를 확인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이제 망설이지 않고 말씀드리지요. 제가 이 일을 보고하지 못한 이유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투 중 오직 저만 들었던 적 마법사의 발언이 증거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감히 검후님에 대한 일을 확인하지 않고 거론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서 이야기해 보시오.”
쉴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카일란이 굳은 얼굴로 이어질 말을 재촉했다. 그녀의 망설임 뒤에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어지는 쉴라의 말에 카일란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적 마법사는 소드 팰러스가 자신들을 지원하고 있으며, 검후님의 납치에 협력받았다고 발언했습니다.”
꽝!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빌런이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런 헛소리를 지금 믿으라고 지껄이는 거요!”
“지껄이다니요, 빌런 단장님. 말이 지나치십니다!”
빌런의 거친 발언에 쉴라가 차갑고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참 그녀의 눈을 마주 노려보던 빌런은 모이엔이 툭툭 허리를 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 앉으며 말했다.
“흥분이 지나쳤소. 쉴라 단장께 사과드리오.”
그다지 진심이 담긴 듯 보이지 않는 사과였지만 쉴라는 싸우고 싶지 않은지 대충 넘어갔다.
“마음은 이해합니다. 저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말했던 검후의 숲이 사실로 확인된 이상 무조건 거짓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허면 아까 우리의 맹세를 확인했던 것이?”
“예. 이 문제 때문입니다.”
“허, 그것이 고작 맹세를 확인하는 것으로 되는 일이오?”
라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검후를 팔아넘긴 놈이 무슨 거짓말을 못 할까.
그들의 모습에 쉴라가 미소로 답했다.
“여러분의 맹세 뒤에는 제 믿음이 함께하니까요. 전 여러분의 맹세와 제 믿음을 믿었습니다.”
평소 단호하던 쉴라와 어울리지 않는 낯간지러운 대사에 단장들이 순간 할 말을 잊었다.
“쉴라 단장……”
하지만 라발은 그 말에 크게 감동을 받은 듯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흘겨본 모이엔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왜 삼검왕분들은 청하지 않은 것이오? 설마, 그분들을 의심하는 것은 아닐 테고.”
“아뇨, 맞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
말문이 막힌 모이엔이 입을 닫았다. 설마 저렇게 시원하게 수긍해 버릴 줄이야.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대변해 주는 듯했다.
그녀의 당당한 발언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검후가 없는 지금, 삼검왕에 대한 의심이 얼마나 위험하고 조심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쉴라 단장이 작정을 했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자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인가.’
카일란은 쉴라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공식적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식은땀이 흘렀다. 더구나 그와 마주 앉은 모이엔과 빌런은 평소 삼검왕을 따르는 자들로, 그녀의 말을 흘려들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일란은 일단 삼검왕에 대한 이야기를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좀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쉴라 단장의 말처럼 확인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우선 지금은 쉴라 단장의 이야기를 마저 듣는 것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마침 나도 궁금한 게 있었소. 아까 검후의 숲에서 은색 기사단을 습격한 자들을 포로로 잡았다고 했는데, 그들은 어디 있소?”
“물론, 저희들이 데리고 있습니다. 모두 화원에 있지요.”
“여기 말이오?”
“네. 특히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흙을 조종하는 초인을 생포할 수 있었는데, 이자를 포함해서 다른 자들을 심문하면 적지 않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아까 듣기로 그들 대장의 실력이 어지간한 기사단의 기사 단장급이라고 했는데, 잘 생포했구려.”
“자살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마침 함께 있던 고위 마법사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쉴라 단장께서 정말 고생하셨겠소.”
카일란이 그 속에 든 그녀의 수고를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삼검왕의 이야기에 침묵하고 있던 모이엔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 우리가 볼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모두 공개할 생각으로 여러분들에게 방문을 청했으니까요. 다만, 여러분들보다 먼저 와 살피고 있는 분이 계십니다.”
“누가 말이오?”
“…………이드 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