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17화
654화
“이제 곧 단장님들이 이리로 오실 것 같아요.”
수석 기사의 품위는 어디 팔아먹고 파닥거리며 달려온 스폴이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알았어요. 그럼 우리도 준비하죠.”
일라이져를 닦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드가 일어났다.
그의 뒤에 있는 침상에는 그 침상이 좁아 보일 정도의 거한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스폴이 거한을 덮고 있는 하얀 천을 끌어 내리자 아물지 않은 상처로 가득한 상체가 드러났다.
양 소매를 걷은 이드가 그 옆으로 다가오자 스폴이 한 걸음 물러나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말아요. 이미 한 번 시도해 봤잖아요.”
“그래도 오색 기사단장급을 속이려면 조심에 조심을 더해야 한다고요. 그분들 촉이 얼마나 날카로운데요.”
재차 당부하는 스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누워 있는 남자의 중단전과 두정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리고 남자의 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무극신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부우우-
지금까지 전혀 사용되지 않던 남자의 몸은 갑작스럽게 주입된 항거불능의 힘에 의해 미세하게 진동하며 떨렸다. 본래 그의 것이 아니며, 그의 것이 될 수 없는 무극신기는 세맥을 통해 곧 체외로 흩어지려 했지만, 이드는 강한 의념을 담아 세맥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결국은 흩어지겠지만, 수 시간 머무르게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강력한 기운에 맥이 자극되면서 치유되던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나왔지만, 이드의 섬세한 운용에 그 이외의 이상 반응은 다행히 나타나지 않았다.
“역시 큰 거부 반응은 없네요. 목표한 양까지는 충분히 주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리한 눈으로 남자의 상태를 살피던 이드의 말에 기도하듯 양손을 맞잡았던 스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극신기의 주입에 속도를 더했다. 이번 일에는 무극신기의 역할이 가장 크기 때문이었다.
검후의 숲에서 제압한 렉터가 자살한 후 나머지 포로를 심문한 은색 기사단은 유의미한 정보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들은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꼬리였던 것이다.
그럴수록 자살을 선택한 렉터가 가지고 있을 정보가 아깝고, 아쉬웠다. 비록 단서가 될 만한 좌표를 손에 넣고 그것을 추적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냈다.
죽어 버린 렉터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적을 유인하자는 것이었다. 자살을 통해 비밀을 지킬 만큼 중요한 정보를 가진 렉터라면 분명 저들도
그를 회수하거나 죽이기 위해서 손을 뻗을 것이 분명하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렉터의 생존을 확신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대놓고 소문을 내면 함정이라 의심할 테니까.
그리고 자연스러운 정보의 유출을 위해 이용된 것이 삼검왕과 오색 기사단장들이었다.
삼검왕이 초인파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고, 오색 기사단장들 중에서도 삼검왕을 지지하는 자들이 적지 않은 만큼 쉴라가 오색 기사단장들에게 정보를 내보이면 삼검왕에게도 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단장들에 대한 믿음을 밝힌 쉴라는 말과 달리 단장들을 온전히 믿고 있지 않았다.
‘만약 단장들이 정보를 흘리지 않으면? 그거야말로 기쁜 일이지. 오색 기사단장들이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나 이드가 들었던 오색 기사단장들에 대한 이야기대로라면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애매한 순간이었다. 무극신기를 주입하는 거한은 그 계획에 따라 포로들 중에서 뽑아 낸 자였다. 마침 렉터만 한 거한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렉터와 비슷한 몸을 가졌다고 그가 렉터만큼 강해질 수는 없었다. 거한이 가진 미미한 초인력으로는 스폴이 걱정하는 대로 예리한 단장들의 눈을 속이기 힘들다. 해서 이드는 무극신기를 이용해서 초인력을 흉내 내어 단장들의 눈을 속이기로 한 것이다.
이드 옆에 서 있던 스폴은 거한의 몸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강력한 힘에 이 계획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지고 있었다.
‘충분해. 이 정도라면 누가 와도 못 알아볼 거야.”
만에 하나 렉터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을까 싶어서 스폴이 친절하게 거한의 얼굴을 만져 둔 상태였기 때문에 얼굴만 봐서는 렉터의 부모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그렇게 이드가 내공을 주입하는 일이 끝나가는 듯하자 느긋하게 풀리는 긴장에 스폴이 문득 말했다.
“그런데 저……………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도 되나요?”
갑작스런 스폴의 말에 이드가 호기심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 치료도 아니고, 뜻으로 내공을 다스리는 이드에게 말을 하고 말고는 큰 차이가 없었다.
“아까 단장님 집무실에서요. 저희 단장님하고 은밀한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무…… 무슨!”
순간 기가 막혀 주입하던 무극신기가 꼬일 뻔했다. 그 영향으로 거한의 몸이 와들와들 떨리고 식은땀이 분출되었지만, 그만하길 다행이었다. 잘못했으면 거한의 몸이 뻥하고 터져 버릴 뻔했으니까.
과연 스폴은 자신의 말에 이번 계획과 한 생명이 끝장날 뻔했다는 사실을 알까?
“그보다 도대체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이드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도대체 무슨 인과를 통해서 저런 말이 튀어나온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날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어디 착한 유부남 하나를 골로 보낼 소리를 하고 있어! 라미아와 일리나의 귀에 들어가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라고!’
그런 마음을 담아 이드가 강렬하게 노려보자 스폴이 살짝 시선을 피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아까 집무실에서 나온 후부터 단장님의 태도가 이상해서 말이에요. 마치 검후님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할지, 남편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할지. 그래서 혹시 집무실에서 무슨 마음을 주고받은 게 아닌가 했죠.”
“저얼대! 그런 일 없거든요.”
그럴 만한 일이 있었던가? 쉴라가 일라이져에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녀의 행동은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듣기 전과 하나도 다른 게 없었다. 최소한 이드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이자 같은 여자인 스폴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평소에 쉴라 경하고 저하고 무슨 계기도 없었는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없기는요. 생명의 관이 있잖아요.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가는 것만큼 서로 의지하기 쉬운 상황이 어디 있다고요.”
그건 인정한다. 무림에서도 그렇게 맺어진 부부가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지구에 갔더니 그런 걸 흔들다리 효과라고,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깨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던데 그레센은 어떨까?
“아무튼 절대 아닙니다. 그때 제 옆에는 일리나도 같이 있었다는 걸 부디 기억해 주세요.”
“아무래도 그렇죠? 이드 님이 희대의 바람둥이도 아니고. 그래도 유부남이면서 혹시나 저희 단장님 노리시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죠. 그러니 스폴 경도 허튼 소리 말아요!”
스폴이 이드의 당부에 씨익 웃는다. 그 미소에 이드가 부르르 떨며 무극신기의 주입을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곧 쉴라가 단장들을 데리고 올 때가 되었다.
그때 스폴의 혼잣말이 이드의 귀에 다시 들려왔다.
“흠………… 그래도 이드 님 정도면 나쁘지 않을지도? 비올라 마법사와 데이트한 걸 생각하면, 단장님도 제대로 된 남자를 한번 겪어 봐야 올바른
취향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엔 무극신기가 흩어질 뻔했다. 과연 스폴이 쉴라를 제대로 단장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위기를 넘기고 거한에게 하얀 천이 다시 덮였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쉴라와 네 명의 기사단장들이 내려왔다.
스폴의 방해 아닌 방해로 쓸데없이 잡아먹은 시간이 제법 되었던 모양이다.
“그자는 다 살펴보셨나요?”
“쉴라 단장님의 배려 덕분에요.”
쉴라와 정해진 문답을 주고받은 이드가 그녀와 함께 서 있는 기사단장들을 바라보자 쉴라가 나서서 서로를 소개했다.
“오랜만입니다. 소드 팰러스에 입궁한 후 처음이군요.”
“반갑네. 내가 데려와 놓고는 신경 쓰지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네.”
이드의 말에 라발이 미안한 마음만큼 반가워하며 두 손을 잡았다. 이드는 미안함과 아쉬움을 숨기지 않는 라발의 모습에 꾸미지 않은 웃음으로 답해 주었다.
그 사이 라발의 뒤에 선 단장들은 이드를 향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특히 그중 모이엔과 빌런이라는 자에게서는 경계심을 넘어 적의가 느껴졌다. 이드는 과연 쉴라가 노리는 삼검왕에게의 전달자들이 저들이구나 싶었다.
그중 이드와 눈이 마주친 빌런이 대놓고 코웃음을 치며 나섰다.
“말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난감하구만, 쉴라 단장. 어쩌자고 저자를 이곳에 들인 거요?”
저자라니. 첫 만남부터 재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대놓고 반말이다. 하지만 내심 상대를 나쁜 놈이라고 정해 놓은 이드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고 모이엔을 살폈다.
“이미 말씀드렸듯 여러 가지로 이드 님의 도움을 받아 이번 기회에 단장님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아 생포했던 포로의 상태를 살피는 데 도움도 받고 있고요.”
쉴라가 의도적으로 ‘님’을 강조하여 이드를 높이자 모이엔이 그 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쉴라 단장, 오색 기사단장으로서 위신을 지키시오. 아직 그 신분조차 확인되지 않은 자에게 존칭이라니요.”
“그렇지. 그런 자를 감히 화원에 들이다니 말이 되나. 도대체 허락은 받은 일인지 모르겠군.”
마치 짠 듯이 모이엔과 빌런이 이드를 물고 늘어지자 라발이 화난 듯 나서려 했지만 그보다 쉴라의 말이 빨랐다.
“제가 자매들처럼 아끼는 기사들이 이드 님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런 분을 대우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명예를 모르는 자의 행동이 아닐까요. 저는 오히려 같은 오색 기사단으로서 단장님들께서 이드 님을 존중해 주시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드 님의 방문은 제가 허락했습니다. 은색 기사단에 그만한 권한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검후님이 머무시는 화원에 대한 예의가 아니요.”
괜히 물고 늘어지는 빌런의 말에 눈을 번뜩인 쉴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놀랍군요. 당장 무장을 하고 화원을 찾아오신 빌런 단장님이 화원에 대한 예의를 들먹이시다니요. 저는 검후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금은 잠시 예의를 내려놓으신 줄 알았는데요.”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든 빌런이 불쾌한 듯 침묵했다. 당장 그가 화원 앞에서 했던 말을 쉴라가 하고 있으니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당장 옆에서 비죽이 웃는 라발의 얼굴에 속에서 무언가 불끈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름 높은 오색 기사단의 단장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빌런의 눈에 쉴라와 이드 너머에 누워 있는 거한이 들어왔다.
“할 말은 많지만, 우선 포로나 확인해 봅시다. 과연 은색 기사단이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강한지 확인은 해 봐야지!”
그런데 말과 달리 앞으로 나서는 빌런은 짜증과 흥분으로 강맹한 기운을 뿜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거한을 죽이려는 것 같아 보였다. 과연 지켜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서 대놓고 그런 짓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저런 큰 기운이 침투하면 큰 내상을 입거나 심할 경우 주입해 둔 무극신기가 반응할 수가 있다.
생각과 동시에 이드가 빌런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생각지 못한 상황에 빌런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조금 흥분한 듯 보여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귀한 포로가 상할 수도 있으니, 조금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설마, 네놈은 감히 이 황색 기사단의 단장인 내가 그따위 실수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놈이라니. 심히 듣기 민망합니다만?”
“하!”
호칭의 정정을 부탁한 말에 앞머리를 날리는 비웃음으로 답하자 이드도 상큼한 미소로 답해 주었다.
“아, 기분 나쁜 바람이네. 그리고 지금 당신이 흘리는 살기에 내 피부가 따끔거리거든? 이걸 보면 아무래도… 실수할 것 같지 않아?”
도발과 같은 이드의 말에 빌런이 대답 대신 흉흉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말했다.
“과연 한성깔 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내게 당신이라고 할 줄이야.”
그리고 말과 함께 거칠게 흐르던 살기가 뚝 끊어지며, 빌런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등에 매고 있던 도끼를 이드를 향해 벼락처럼 내리찍었다.
“그 돌대가리 안에 제대로 된 예의범절을 박아 넣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