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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19화


656화

앞서 주입했던 무극신기의 일차 분출이 끝났다. 이드는 외부 자극에 무극신기가 두 차례로 나누어 흘러나오도록 층을 쌓아 두었었다. 두 번 정도라면 단장들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지만,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단장들의 반응을 보아 두 번은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중 모이엔의 눈에 은밀한 욕심과 살기가 떠오르다 사라졌다. 찰나 간의 변화였고, 미세한 흔적마저 무극신기에 흘러가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이엔이 렉터로 위장한 거한의 몸에 손을 댔을 때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던 이드는 그 모습을 확실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살기라니.

차라리 분노라면 이해할 수 있다. 은색 기사단을 해하고, 검후를 납치한 세력에 속한 자니까.

그러나 살기는 아니다. 상대는 적에 대한 정보를 캘 수 있는 귀중한 포로다. 만약 거한이 진짜 렉터였다면 그의 가치는 은색 기사단 절반의 희생을 각오하고라도 확보해야 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를 죽일 생각을 품었다고? 어처구니없는 소리지. 어디 앞뒤 분간 못 하는 햇병아리도 아니고.’

이드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모이엔은 아무리 봐도 햇병아리가 아니라 시커먼 능구렁이 쪽이었다. 그런 그가 렉터의 가치를 모를 수 있을까? 그건 상인이 금의 가치를 모른다는 말과도 같다.

그런 자가 포로를 죽일 생각을 했다는 것은 한 가지 이유뿐이다.

‘바로 쓸데없이 입을 놀릴 수 없게 하기 위한 입막음이지. 분명 렉터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드는 확신했다. 내기를 하라면 전 재산을 걸 수 있을 정도다.

동시에 쉴라에게 들었던 단장들에 대한 정보가 생각났다. 네 명의 기사단장 중 모이엔과 빌런이 삼검왕과 친밀한 관계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단순히 친한 정도를 넘은 듯했다. 삼검왕이 외부의 초인들과 손을 잡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순간이지만 포로를 죽일 생각까지 할 정도면 얼마나 친한 걸까?

‘불쌍한 시르피. 저놈의 충성은 삼검왕을 향해 있었구나.’

그때 태연한 표정으로 거한에게서 떨어진 모이엔이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서, 쉴라 단장이 원하는 바는 뭐요?”

“물을 것이 무에 있나? 그저 쉴라 단장의 명령을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지. 이 모든 것이 쉴라 단장과 은색 기사단이 피 흘리고 고생한 공이

아닌가.”

라발이 쉴라의 공을 칭송하며 격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무리 같은 오색 기사단이라지만, 본래라면 긍지 높은 오색 기사단이 타 기사단 아래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라발이 그만큼 쉴라의 노력에 감동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이엔은 무표정했다. 오히려 이 일을 명분 삼아 쉴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겠다는 듯 차갑기만 했다.

쉴라는 그런 그들의 눈을 보며 당당히 말했다.

“감히 명령을 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단장님들의 도움과 조언을 구할 뿐이죠. 말씀드렸던 대로 새로 알아낸 정보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희 은색 기사단만으로 해결하기에는 전력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여러 단장님이 지휘하시는 기시단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당장 렉터에게서 유일하게 알아낸 단서를 확인하는 일조차 못하고 있으니까요.”

렉터를 돌아본 쉴라는 아쉽고, 아깝다는 듯 말했다.

그녀의 말은 단장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는 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특히 모이엔이 급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 단서라는 것이 무엇이오?”

“자자수 영지. 저자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얻어 낸 대답이었습니다.”

“음…….”

결국 세 단장 모두 쉴라에게 전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모이엔은 먼저 자리를 비운 빌런의 일까지 책임지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수일 내로 각 기사단에서 자자수 영지를 조사하는 데 필요한 기사들을 뽑아 보내 주겠다고 했다. 파견 기사들에 대한 지휘는 온전히 은색 기사단에 맡겨졌다. 이번 일의 주체가 쉴라 단장임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화원을 나선 모이엔은 우선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간 후 은밀히 삼검왕이 기다리는 검궁으로 달려갔다. 쉴라가 대놓고 삼검왕을 의심한다고 밝혔는데 곧바로 삼검왕에게 달려가기에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솔직한 말로 공공연하게 삼검왕을 지지하는 자신과 빌런을 불러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썩 석연치 않았지만, 딱히 흠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애써 쉴라 단장의 감성적인 부분이라고 납득해 버렸다.

검성에 도착하자 먼저 화원을 떠났던 빌런이 두 검왕과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한잔하겠나?”

“감사합니다.”

모이엔이 자신이 따라 준 술잔을 단숨에 비우자 그 모습을 예사롭지 않게 바라본 워스가 말했다.

“제법 대단한 이야기를 듣고 온 모양이군. 그럼 우리도 좀 들어 볼까. 참, 빌런이 떠난 후의 이야기만 해 주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골치 아픈 문제가 끼어 있는 일이니, 두 분께서도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쉴라 단장이 공개적으로 우릴 의심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일이겠지? 이거 기대되는군.”

농담처럼 너스레를 떠는 워스의 말에 모이엔은 민망하다는 얼굴로 그가 듣고 본 것들을 이야기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렉터의 존재와 그가 꺼냈던 자자수 영지에 대한 대목에서 감탄인지 실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반응했다. 

“정말 자자수 영지에 그자들의 지부라도 있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모이엔이 의문과 걱정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걸세. 그만 나가들 보게 당분간 쉴라 단장과 함께 움직이려면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어. 나도 당장 바쁠 것 같고 말이야.”

페시딘이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가 말한 바쁠 일이 대충 무엇인지 예상된 모이엔이 조용히 빌런과 함께 방을 나갔다.

“이 머저리 같은 놈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여유롭던 페시딘의 얼굴이 짜증과 비웃음으로 뒤틀렸다.

워스가 그런 페시딘을 보지 못한 척 술잔을 들었다.

“자네에게 그런 얼굴은 별로 어울리지 않아.”

“답답해서 그러지. 감히 우리 허락도 받지 않고 일을 벌인 주제에 뒷수습조차 제대로 못 하다니. 빌어먹을 놈들.”

“차라리 이 기회에 손을 끊는 것은 어떤가. 태생적으로 우리와는 함께할 수 없는 놈들이잖나. 이번이 좋은 기회일 수도 있어.”

“……”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따라 유독 귀에 꽂히는 워스의 말에 머리를 짚은 페시딘이 끙끙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네. 아직은…….”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도 이번 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하네. 특히 생명의 관에서 얻었다는 우리에 대한 정보의 확인은 필수야.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진실일 경우 초인파 쪽에서 빠진 정보일 게 분명해.”

“내 생각도 그러네. 골치 아픈 것들이야.”

워스는 페시딘의 눈썹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하자 살짝 말머리를 돌렸다.

“뭐, 자네가 잘 처리하리라 믿네. 그럼 이드에 대한 것은 어찌하면 좋겠나?”

·오늘 일은 모르는 척하세.”

연이어지는 골치 아픈 일에 페시딘이 힘들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이드와 나누게 될 이야기의 방향을 설정했다. 하지만 오색 기사단장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른 척하기로 한 만큼 이드와 할 이야기는 크게 달라지는 부분은 없었다.

그래도 쉴라가 자신들의 의심하는 발언을 꺼내 놓은 만큼 태도를 조금 바꿔야 할 필요는 있었다.

“그럼 고생하시게. 하하하.”

이드와의 이야기에서 주의할 점을 숙지한 워스가 악동같이 웃으며 일어나자 페시딘이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고생하는 것이 재밌지?”

“아무렴. 늙은 친구를 부려 먹으면서 혼자 술 마시는 못된 늙은이가 함께 고생할 걸 생각하니 즐거워. 옛날에 같이 고생하던 시절이 떠오르거든.”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나가게.”

듣기 싫다는 듯 두 손을 흔드는 페시딘의 모습에 워스가 크게 웃으며 방을 나섰다.

하지만 친구의 웃음소리에도 페시딘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한참을 더 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는 서랍을 열어 통신안을 꺼내 들었다. 황금빛 눈이 열리고 잠시 후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오.”

최근에 짜증을 퍼부어서인지 상대의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역력하다. 이드도 그렇고 이놈도 그렇고, 자신에 대한 존경이 없다. 페시딘은 최대한 감정을 지우고서 말했다.

“자자수 영지에 대해서 알고 있나?”

씨익.

페시딘은 상대, 발터의 말문이 막히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또박또박 할 말 다 하면서 혈압을 높이던 놈의 입이 막히니 참으로 즐거웠다.

“윗놈 불러.”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짧은 답변과 함께 통신이 끊어졌다.

살짝 조심스러워진 목소리에 페시딘이 혀를 찼다. 아무리 서로의 필요에 의해 손을 잡고 있다지만, 자신에 대한 무례가 과했다. 워스의 말이 아니라도 확실히 오랫동안 같이할 만한 놈들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오랜만입니다, 페시딘 님.”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이 강렬해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군. 참으로 오랜만이야. 자네 목소리를 듣기가 많이 어려워.”

“그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책임지고 있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실례를 범했으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좀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보다 더 큰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놈, 급하긴 급했구나.’

페시딘은 이야기를 빠르게 밀고 나가는 라울의 행동에 편안하게 등을 기대앉았다. 저 다급함이 방금 마신 술보다 달콤하게 느껴졌다.

“전혀. 어차피 내 일도 아니지 않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는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 공동의 일이 아닙니까. 제가 그동안의 무례는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페시딘은 상대가 망설임 없이 사과하고 나오자 쓴 입맛을 다셨다. 동시에 상대가 만만치 않은 놈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저와 다르게 자존심도 없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자는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할 뿐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오랜 경험을 통해 이와 같은 자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라울에게 적당히 얻어 낼 것을 얻어 낸 페시딘이 두 기사단장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추려서 전달했다. ‘쯧, 검왕 체면에 보고라니………………

하지만 어쩌겠나.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관계인 만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일인 것을.

“그렇다면 아직 자자수 영지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지는 않았겠군요.”

“곧 시작하겠지. 그 전에 철저히 조치하게.”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대신 화원에 있는 렉터의 처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절하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즉답이 튀어나왔다.

“그러지 마시고 부탁드립니다. 충분한 대가와 성의는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 일은 저희들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네들에게 뭘 받을 정도로 내가 아쉽지는 않아. 그리고 지금은 우리도 쉽게 움직일 수 없어. 모든 은색 기사단이 화원에 있고, 쉴라 단장이 직접 우리들을 의심하고 있다고 말했네. 이런 상황에서 성급히 움직여 확신을 줄 필요는 없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그자를 처리하려면 필히 우리와 은색 기사단에서 희생자가 나올 텐데. 같은 식구끼리 피를 흘리게 하고 싶지는 않군. 그러니 렉터라는 자에 대한 처리는 오로지 자네들이 알아서 하시게.” “으음.”

단호한 거절에 라울이 곤란한 듯 신음했다.

‘이건 길들이기군. 한번 엿 먹어 보란 말이지?’

사실 소드 팰러스에서 삼검왕이 하고자 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 페시딘의 말처럼 피야 흐르겠지만, 그는 진정 원하는 일을 위해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명분을 세워 거절한다는 것은, 최근의 미적지근한 대응과 은색 기사단을 습격했던 일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그걸 알면서도 당해 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렉터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자가 살아 있다. 분명 조사해야 할 부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처리하지요. 대신 하룻밤 길을 열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진정 씁쓸함이 감도는 라울의 약한 소리에 페시딘의 입소가 깊어졌다.

“그 정도라면 내 알아보지. 하지만 잘 기억하시게. 은색 기사단의 피해가 깊어지면 나도 그냥 보내지 못하니까.”

“…..충분히 고려하겠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관에서 나온 우리 삼검왕에 대한 정보. 그쪽에서 흐른 게 아닌가?”

미소를 지운 페시딘이 물었다. 앞의 일과 달리 이 일은 기분에 따라 처리할 일이 아니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저희 스스로 하지 못하는 연구를 대신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페시딘 님께서도 그들이 초인들을 가지고 하는 짓은 잘 아실 터. 쓰임이 다하면 다른 누구도 아닌 저희 손으로 죽여야 할 것들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정보라니요. 터무니없는 추측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양쪽 모두 아니라면, 그쪽에서 역으로 타고 올라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주인을 물겠다?”

“그보다는 끝이 다가오니 독립을 하겠다는 것이 아닐까요?”

페시딘은 까끌까끌한 수염을 쓸었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이미 오래전 금지된 인체 실험을 태연하게 하는 놈들이었다. 어떤 금지된 짓도 할 수 있었다.

물론 초인파 쪽의 수작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초인파와 손을 놓을 수 없는 상황.

“조만간 토벌이 있지. 준비를 잘해야겠군.”

“동의합니다. 적당히 규모를 줄여 둘 필요가 있을 듯하군요.”

그걸로 끝이었다.

서로에 대한 인사도 따로 없었다. 필요를 다한 통신안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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