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0화
657화
화원의 정문까지 단장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쉴라가 이드와 마주 앉았다.
“과연 삼검왕 쪽에서 이쪽 뜻대로 움직여 줄까요?
은색 기사단이 정성 들여 준비한 과일 하나를 집어 먹은 이드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쉴라 경이 던진 떡밥은 최고급 미끼였다고요. 어떤 물고기도 물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호호. 그렇겠죠? 당연히 제 말에 대해 사실 확인도 할 테고.”
“바로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거죠. 쉴라 경의 이야기는 대부분이 진실. 그 속에 숨은 거짓은 저들이 확인할 수 없는 것들뿐. 답답해진 쪽에서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든, 사건의 수습을 위해서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고,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그 틈을 찌르면 된다. 이거죠.”
맞장구치는 쉴라의 말에 이드는 마지막 남은 붉은색 과일을 집어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름이 뭐예요? 맛있는데. 아무튼 지금쯤이면 저들도 여러모로 호들갑을 떨고 있을걸요.”
“호호호, 그렇네요. 호들갑 떨고 있겠네요.”
명성 높은 삼검왕과 초인파와 어울리지 않는 호들갑이라는 단어에 쉴라가 크게 웃었다.
“그럼 어느 쪽이 더 호들갑을 떨고 있을까요?”
“당연히 초인들 쪽이죠.”
이드가 단언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페시딘과 통신을 마친 라울은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의 등장에 정신없이 명령을 뿌려 댔다. 덕분에 그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더 정신없이 여름철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본래 상사가 부지런을 떨면 부하는 살 떨리는 야근 지옥에 빠지는 법이다. 적당히 피할 수 있는 일이라면 상사의 재채기를 폐렴에 걸린 것처럼 같이 아파해 주며 요령이라도 피워 보련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라 그저 발바닥에 불나도록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모두가 이드들의 작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한마음으로 소드 팰러스에 쳐들어갈 요원 선발에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서지 않을까?
머리 위에 떨어진 폭탄의 해체에 정신없는 초인파와 달리 페시딘은 느긋했다.
이번 일이 초인파를 중심으로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제삼자에 가까운 입장이랄까?
그로서는 쉴라의 말에 대한 진위가 가장 신경이 쓰였지만, 이드의 예측처럼 모두 사실 확인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들뿐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사실을 확인하겠다고 렉터를 내놓으라 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페시딘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울과의 이야기대로 주인을 무는 괘씸한 개로 찍힌 놈들의 처벌을 위해 이번 토벌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를 해야 했다. 페시딘과 라울이 그렇게 정한 이상 그들이 정말 다른 생각을 품었는지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기회를 살려 적극적으로 황제에게 협력하여 적당히 받아 낼 수 있는 것들을 얻어 낼 꿍꿍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쉴라의 몇 마디 말로 벌어진 일치고는 굉장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드와 쉴라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상황은 그들이 바라는 참으로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도 끝났으니 저택으로 돌아가렵니다. 혹시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달콤한 과일만 골라 먹고, 쉴라에게 부탁해서 저택으로 가져갈 것까지 준비한 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에 나왔는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아, 저기…….”
“뭐, 할 말 있으면 해요.”
이드는 평소와 어울리지 않게 망설이는 쉴라의 모습에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쉴라가 묘한 기대감을 품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대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대련이요?”
이드는 살짝 놀랐다. 대련이라니. 예상치 못한 부탁이었다. 그녀는 생명의 관을 나온 후 지금까지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될까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특히 오늘 자신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밝힌 후였으니까.
‘중원식으로 해석하면 장문인에게 무공을 배운 일대 제자가 이야기로만 들었던 전대 장문인을 만난 경우일까나?’
그것도 얼마 전까지 친하게 지내던 인물이라 생각만큼의 어려움도 없다. 대단하다고 평해지는 전대 장문인의 무공을 겪어 보고 싶을 만했다. 이드는 평소의 권위는 어디 두고 조마조마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쉴라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려울 것 없죠.”
오히려 그녀의 용기가 대단하다 싶었다. 빌런이 주먹에 얻어맞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을 본 후에 대련을 청하다니 말이다. 아무렴 이드가 빌런에게 한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때리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경우라도 패배가 거의 확실한 일에 도전하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니까.
“저녁은 저택에 돌아가서 먹고 싶으니까 바로 시작하죠.”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쉴라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안쪽에 검후님께서 대련을 해 주시던 공간이 있습니다. 혹시 모를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 줄 테니 그리로 가시죠.”
두 사람이 방을 나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더 안쪽으로 향하자 스폴이 다가왔다.
“단장님, 두 분이서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드 님과 대련을 해 보려고.”
“대련이면………… 안쪽 수련장은 검후님께서 사용하시던 곳이잖아요.”
검후의 공간을 열겠다는 쉴라의 뜻을 알아챈 스폴이 살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곧 이드에게 다가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속삭였다.
“두 분 혹시 대련을 핑계로 사람들 눈을 피해서 위험하고 음란한 짓을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절대 아니거든요!”
이드는 어이없는 유언비어의 생산에 이를 악물고 부정했다. 하지만 스폴의 의혹 어린 눈길은 쉽게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단장님, 혹시 있을지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저도 참관하겠습니다.”
“난 괜찮지만 그건 이드 님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라.”
거부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박력 있는 스폴의 요청에 쉴라가 슬쩍 이드를 돌아보았다.
이드는 내심 거창한 한숨을 쉬었다.
쉴라에게 스폴의 만약은 부상자를 뜻하겠지만, 어쩐지 자신에게는 저 만약이 이드가 쉴라를 덮치는 경우를 상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서 거부하면 찔리는 게 있다고 자백하는 꼴이 되는 거겠지?’
아내를 사랑하는 애처가로서는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스폴 경은 도대체 어떤 막장 로맨스 소설에 꽂힌 것일까?
“저는 상관없어요. 뭐, 쉴라 경 다음으로 스폴 경과 대련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오늘 대련은 굉장히 거칠 예정이다.
그 속뜻을 헤아리지 못한 쉴라는 굉장히 고마워했다. 그리고 스폴이 수련장의 문을 열겠다고 먼저 달려가는 것을 본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렴요. 진짜 ‘순수한 대련일 뿐인데요.”
“…………..스폴 경에게도 이드 님의 비밀을 밝혀 둔다면 앞으로의 일이 좀 더 매끄러워질 것 같습니다만.”
“쉴라 경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라면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장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알고 있는 비밀인데, 스폴 경에게 알리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밝히지 않는 쪽이 편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목숨을 걸고 수호해야 할 비밀까지는 아니에요.”
과연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스폴이 자신과 쉴라의 관계를 의심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한 이드였다.
“그렇지만 검후님의 일기에 언급된 혼돈의 파편이라는 자들에게 이드 님의 정체가 알려지면 곤란한 것이 아닌가요? 아, 물론 스폴 경이 비밀을 안다고 해서 사방에 떠들고 다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아무래도 비밀이 유지되기 힘들다는 말이니까요.”
자신의 말에 스폴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쉴라가 급히 스폴을 변호했다.
그러나 스폴에게 당혹스런 의심을 받는 이드의 귀에는 오히려 스폴의 경솔함을 지적하는 소리로 들려, 이드는 귓속을 팠다.
‘수련생들을 잘 다루는 걸 보면 그런 사람은 아닌데. 아닌 거 맞겠지?”
흔들리는 믿음을 애써 붙잡고 이드가 말했다.
“그런 경우는 어쩔 수 없죠. 어차피 비밀을 아는 사람이 둘이 된 순간 언젠가는 세상에 알려질 비밀이었으니까요. 비밀이 지켜질 때는 오직 혼자 알고 있을 때뿐이죠. 그리고 혼돈의 파편이 알게 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최근에 그들의 존재는 확인했는데, 어떻게 쫓아야 할지 감이 안 오거든요. 차라리 저쪽에서 먼저 접근해 줬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혼돈의 파편을 확인하셨나요? 어디서요?”
“카린 경의 꿈속에서요.”
이드의 말을 듣고 떠오른 기억에 쉴라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당시 꿈속 괴물의 존재에 이상하게 반응하는 이드의 모습을 본 그녀도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 알게 될 거라고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카린을 공격하고 정신을 옭아맨 괴물이 혼돈의 파편이었을 줄이야!
“그럴 수가・・・・・・ 그럼 그들이 저 인체 실험을 하는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건가요?”
“글쎄요. 당시 상황을 보면 그건 아니라는 게 우리 생각이에요. 카린 경이 있던 곳이 쓰레기장이잖아요.”
“그렇군요. 그런 대단한 존재를 그렇게 대접하지는 못하죠.”
귀족이 찾아오면 별채를 내어 주는 것처럼 상대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뭐, 현재로써는 알 수 있는 사실이 없으니 그저 이번 토벌에서 무언가 더 나오길 바라야죠. 다른 건 몰라도 혼돈의 파편 쪽에서도 생명의 관이 속한 미완의 마탑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곧 전설의 귀환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그 대사 유치해요.”
쉴라는 이드의 말에 귓불을 붉히며 입을 닫았다.
더 묻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그의 말처럼 당장 풀어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무엇보다 수련장 앞이다. 이드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스폴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걸음이 느리시네요, 두 분.”
두 사람이 수련장에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스폴이 말했다.
밖에서 나눈 이야기가 조금 길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그녀의 의심이 깊어져 버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괜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범죄자의 입장을 강제 체험하고 있던 이드는 그런 생각과 함께 일라이져를 뽑아 들었다. 쉴라와의 대련에 충실하려던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난 지 오래다.
그런 이드의 속을 모르는 쉴라가 재빠르게 한쪽 벽에 장식된 검 중 하나를 이드에게 가져왔다
“괜찮으시다면 이쪽 검을 사용해 주세요. 사람이 상하는 건 괜찮지만, 혹시라도 일라이져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까요.”
사람이 상하는 것이 괜찮은 일이란 말인가? 과연 그녀가 치료와 수리의 개념을 알고 있을까?
이드는 일라이져를 검집에 넣고 쉴라가 건넨 검을 받아 들었다.
“바로 시작하죠.”
아무래도 오늘 화원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사랑하는 아내들의 품으로 돌아가자.
“그럼 두 분 모두 위험한 공격은 최대한 조심해 주시고, 시작하세요.”
스폴이 수련장에 선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래도 첫 대련이니까 서로의 실력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도 대련을 기대했던 쉴라는 생각과 다른 이드의 분위기에 움찔 떨었다.
하지만 은색 기사단장 체면에 첫 대련에서 살살 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당찬 쉴라의 대답과 함께 그녀와 이드에게서 동시에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폭음에 기합성이 산산이 부서졌다.
꽈르르릉!
그리고 기합성과 마찬가지로 쉴라도 부서졌다.
딱 열 번의 검격이 끝나는 순간 부서진 검과 함께 그녀는 수련장 벽까지 날아가 바닥에 쓰러졌다.
흘리고, 막고, 부서트렸다.
실로 인정사정없는 공격이었다.
“으…………… 내가 생각한 대련은…………… 이게 아니었는데…”
쉴라가 갑갑한 신음을 토했다.
그녀가 기대한 것은 마인드 마스터가 펼치는 검후의 무공을 보는 것이었는데, 정작 그건 보지 못하고 이드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만 온몸으로 확인했다.
도대체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드가 날려 버린 것은 비단 쉴라의 기대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끈질기던 스폴의 의혹도 같이 날려 버렸다.
스폴은 이드의 검 끝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순식간에 패배해 버린 쉴라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저렇게 독하게 손을 쓰는 걸 보면 절대 남녀로서 관심이 있는 사이는 아니야!”
정말 독특한 성벽을 가진 커플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그걸 이제 알았냐!
이드는 만족스런 반응에 번뜩이는 눈으로 스폴을 향해 양아치처럼 검 끝을 까딱거렸다.
“다음?”
스폴은 격렬하게 고개를 저어 거부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말에 억울해하던 이드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도 매우………… 매우 말이다. ‘검을 들고 마주 서면 죽을 거야!’
절레절레 !
그녀는 필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