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9화
666화
갈대처럼 흔들리는 링스피어에서 세 가닥의 검기가 뿜어졌다. 귀신의 손처럼 음산하게 허공을 가른 검기는 코어를 낚아채듯 휘감아 돌았다. 스스슥.
그리고 귀신같은 움직임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엥?”
케마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실로 이해 불가의 사태였다. 그녀는 코어가 자신이 모르는 방법으로 검기를 방어했다고 생각했다.
황급히 코어를 찾는 그녀의 눈에 마침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있는 코어가 들어왔다.
“으드득. 그래, 비웃는다 이거지? 어디 계속 그렇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어린아이의 겉모습에 흔들리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저렇게 재수 없게 사람을 비웃을 수 있는 다섯 살은 세상에 없으니까! 케마란이 마음을 정하자 링스피어가 본래의 과감하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창날과 검기가 번뜩이며 달려드는 바닥과 기둥을 부쉈다.
사방으로 파편이 날고, 폭음이 터졌다.
이드의 도움으로 한층 정밀해진 창술은 비산하는 파편 사이로 코어를 공격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왜 안 통하는 건데!”
하지만 처음 공격처럼 코어와 일정 거리까지 다가간 검기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파도 같은 바닥과 넝쿨 같은 기둥을 뚫고 직접 휘두른 공격은 물을 벤 듯 흔적도 없다.
눈을 번뜩이며 살폈지만 무슨 방법을 어떻게 썼는지 도저히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성의 바닥과 기둥은 물론 길게 늘어져 있던 커튼까지 케마란을 밀어냈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공격은 무효고 상대만 공격할 수 있다고?
“거기다 이놈의 성은 주인도 몰라보고 왜 나만 공격하는 건데! 내가 주인이라고!”
“이제부터 여긴 내 집이라는 거지. 그러니 이제 그만 사라지라고!”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 케마란의 마음이 흔들리자, 그 틈을 노린 듯 그녀를 향한 성의 공격은 더욱 다양해졌다. 심지어 성벽에서 주먹이 튀어나와 그녀를 두드렸다.
그나마 목숨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공격이 없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케마란이 죽을힘을 다했지만 한 손이 여러 손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그녀는 빠르게 뒤로 밀리며 성문 입구까지 몰렸다.
이대로라면 곧 성 밖으로 쫓겨날 거라 생각하던 찰나!
따앙!
맑은 쇳소리가 진도 9의 진동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끄악!”
“꺄아악!”
코어와 케마란이 셰이커 안의 술처럼 성안을 마구 뒹굴었다. 유령의 집처럼 정신없이 케마란을 괴롭히던 기둥과 주먹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진동이 사라졌지만 한동안은 충격에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휘유~ 끔찍하네.”
싸움의 맥을 끊어 줘야겠다는 라미아의 요청에 링스피어의 창날을 두드린 이드는 그 영향으로 벌어진 사태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면 돼?”
[네. 저 상태로 성 밖으로 쫓겨났다면 열쇠가 있어도 다시 진입하기 쉽지 않았을 거예요.]
당장 싸움에서 이기고 지고는 둘째 문제라는 말이다. 케마란이 다른 수를 찾지 못하고 다시 성 밖으로 밀려나면 어쩔 수 없지만 어쨌든 다시 생각해 볼 기회는 생겼다.
그때 네리베르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했다.
“크흠. 저기, 저도 한번 두드려 볼 수 없을까요? 링스피어의 창날?”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예의 바르게 말하는 네리베르의 모습에 라미아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밖의 상황은 전혀 모른 채 겨우 정신을 수습하던 케마란은 연이어진 진동에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처음보다 약한 진동이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토할뻔했다.
“어우, 뼛속까지 쩌릿쩌릿해.”
겨우겨우 몸을 뒤집은 케마란은 가장 먼저 코어를 살폈다. 과연 자신의 공격을 무시하던 놈도 세상이 흔들리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지 고통스런 표정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회복력은 내 쪽이 위인가. 먼저 공격할 수 있다면 역전이 가능할지도.
뜻밖의 기회에 케마란은 전력으로 내력을 운용했다.
‘그런데 아까 그 소리, 링스피어의 날에서 나는 소리가 분명한데 왜 갑자기?’
소울 다이브로 이어져 있으니 링스피어의 소리가 들린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들려왔다. 더구나 이 안의 링스피어는 어떤지 모르지만, 현실의 링스피어가 혼자 울었다?
‘아니지. 그건 분명 외부의 충격으로 울리는 소리였다고. 설마, 밖에서 내 상태를 알 수 있는 거 아닐까?’
문득 떠오른 가능성에 케마란은 절망했다. 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안심하고 온갖 욕설과 추태를 부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체야 어떻든 아이를 상대로!
“씨잉.”
미리 이야기해 주지 않은 라미아가 미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코어를 건든 작은 복수인가 싶기도 했다.
동시에 자신이 보인 추태를 만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코어만 어떻게 잘 추스르면 마스터들과 같이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실수할 수 없지!’
과연 그녀는 이드가 추측하던 대로의 꿍꿍이를 품고 있었다.
내공에 고집을 더한 케마란이 후들거리는 몸을 오기로 일으켰다. 그녀는 휘청거리면서도 아직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코어를 보며 말했다.
“후후, 나는 서 있고 너는 누워있다.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투항하라.”
딱딱 끊어지는 말이 마치 책을 읽는 것 같다.
삐죽 고개를 들어 올린 코어의 얼굴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빠직.
·불쌍하게. 방금 진동으로 뇌가 곤죽이 된 거야?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니잖아.”
멋지게 꾸민 표정에 금이 가는 것 같다.
“야! 네가 날 어떻게 알아? 나 원래 교양 있는 사람이야.”
“네가 이 세상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냥 알아.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냐.”
‘하늘은 푸르다’ 급의 확신이 담긴 말에 케마란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반박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헛소리 같은 그냥 안다는 말이 이 공간에서만은 당연하다는 걸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느끼고 있었으니까.
“이제부터 그런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투항해라! 그렇지 않으면 굉장히 아픈 꼴을 당할 거야.”
“그 후들거리는 다리로?”
“당연히. 나는 서 있지만 너는 누워 있으니까.”
자신만만한 케마란의 말에 엎드려 있던 코어가 몸을 뒤집어 누워 요망하게 웃었다.
“누워 있는 사람이 약하다고 누가 그래?”
꿀렁
코어의 말과 함께 케마란이 디디고 선 바닥과 기둥이 다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케마란은 울상이 되었다. 지금 상태로는 자신을 밀어내는 성의 움직임을 피할 수 없었다. 동시에 서럽기도 했다.
“이씨! 야, 너 왜 자꾸 나한테만 그래. 원래 네 주인은 나라고! 왜 나만 가지고 그래!”
푸스스슥
빼액 소리친 케마란은 출렁이던 움직임이 모두 사라진 것을 알고는 놀랐다. 그리고 한 가지 의혹과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성이 자신을 밀어내긴 해도 치명상이 될 공격은 없었다는 것과 어느 때부터 자신이 링스피어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던 라미아의 당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때 마침 다시 바닥과 기둥이 출렁이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네 진짜 주인은 나야. 링스피어는 내 거라고!”
푸스스슥
씨익. 케마란은 다시 움직임을 멈춘 성을 보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제 알았다. 그래, 그래야지. 내가 진짜 주인인데. 그렇지?”
“이익!”
뭐가 크게 깨달은 케마란의 말에 코어가 이를 악물고 꿈틀거렸지만 성은 고요했다. 케마란이 끊임없이 ‘내가 진짜 주인이다.’를 되새기고 있었으니까.
서서히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코어에게 다가간 케마란이 코어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역시, 누워 있는 사람보다는 서 있는 사람이 강하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 난 여기서 못 나가!”
“절대로?”
“죽어도!”
너무 단호한 대답에 케마란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모르지만 코어도 필사적이었다. 링스피어에서 나가는 순간 라미아에게 다시 붙잡힐 테니까. 미약하게 각성한 상태에서도 그는 라미아가 자신이라는 자아를 완전히 제거하고 차근차근 자신의 구성 요소를 해부하려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막 주인에게 귀속된 혼돈의 집합체에서 독립된 하나의 ‘존재’로서 각성한 코어에게 그것은 세상이 붕괴하는 절대적인 공포였다. 링스피어에 깃들어 케마란을 공격했던 이유도, 고통보다는 공포를 부추겼기 때문이다.
코어는 링스피어를 나가는 순간 분명 다시 그와 같은 꼴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코어의 오해다. 라미아는 이미 완전히 독립된 자아를 완성한 그를 제거할 마음이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코어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코어는 그와 같은 공포를 다시 맛보느니 차라리 링스피어 안에서 끝을 볼 각오를 하고 있었다. 각성한 후 처음 감정을 가지고 맛본 공포는 그의 영혼 깊이 새겨져 있었다.
‘도대체 라미아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케마란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코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의 대상은 분명 라미아다. 코어가 그녀의 연구실에 매달려 있었으니까 갑자기 이 코어를 잘 수습하지 못했을 때의 뒷감당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무력을 동반한 일차적인 접촉 행위. 즉 폭력으로 코어를 밖으로 쫓아낼 계획이었지만 포기했다. 한눈에 봐도 단순한 폭력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차선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데, 정말 안 나가지? 신중히 대답해라. 네가 거절하는 순간 이후부터는 네가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니까. 내 개인적으로는 네가 나가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진심으로!”
“……”
“좋아. 후회하지 마라.”
케마란은 말과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퍽!
차선책도 차선책이지만 이미 상대의 외형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한 푼의 사정도 담기지 않은 묵직한 주먹이었다.
“아하하. 겨우 이런 걸로 날 내보낼 수 없다니까.”
있는 대로 분위기를 잡은 후 날아든 주먹에 코어가 우습다는 듯 코피를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케마란은 대답 없이 연이어 주먹을 날리며 주문처럼 외쳤다.
“불. 불, 불, 불, 불!”
파르륵
그러자 정말 마법처럼 바닥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나더니 곧 거대한 불꽃이 되어 코어를 달구기 시작했다.
“크흑,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당황스럽니? 그래서 내가 경고했지. 얌전히 나가는 게 너와 나를 위해서도 좋은 길이라고 왜 말을 안 들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자, 잠깐만 멈춰 봐.”
“아쉽지만 안 돼. 한번 시작했으면 멈추지 말라고 했거든.”
“야, 야!”
코어의 애타는 부름을 무시하고 케마란은 열정적으로 코어를 두드렸다. 그러자 불길에 달궈진 코어가 뭉개지며 찰흙처럼 변하더니 결국에는 네모난 형태의 철괴가 되었다.
그러자 때리는 걸 멈춘 케마란이 더 강력한 불길을 일으켜 철괴로 변한 코어를 달구고 한편으로는 또 주문처럼 중얼거려 대장간의 망치와 모루를 만들어 내 달아오른 코어를 그 위에 올렸다.
“우리 서로가 원한 결과는 아니지만…………… 네가 죽어도 못 나가겠다고 하니 어쩌겠니.”
으득!
성난 듯 이를 악문 케마란이 망치를 높게 들어 올려 코어를 내리쳤다.
“이건 모조리 네 탓이니까!!”
까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저릿한 팔을 느끼며 케마란은 인정사정없이 망치질을 시작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기억만이 떠올라 있었다.
[무난하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불가능할 경우 어쩔 수 없이 코어를 링스피어에 완전히 묶어 두는 차선책을 쓸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면 코어는 링스피어와 영원히 함께하게 될 거야. 그러니 어지간하면 열심히 노력해서 꼭 데리고 나오도록 해. 알았지?]
“크흑, 왕자님 목소리의 에고 링스피어의 꿈이 이렇게 가는구나. 이딴 코어가 내 링스피어의 에고가 되다니. 싫어! 싫다고!”
하지만 그렇게 질색을 하면서도 망치질을 쉬지 않는 케마란이었다. 코어가 링스피어의 에고가 되는 것도 싫지만,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나갔을 때 라미아의 뒷감당도 무서웠던 것이다. 참으로 진퇴양난의 경우지만, 그래도 좀 덜 불행한 불행을 택할 수밖에 없는 케마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