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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43화


680화

똑똑.

“무슨 일인가?”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한 마차에 들린 노크 소리에 벤 자작이 창문을 열었다. 말을 몰던 기사가 멀리 보이는 안티로스와 그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황궁을 가리켜 보였다. 그에 반가운 얼굴을 한 벤 자작은 읽고 있던 책을 던져두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드 님, 안티로스입니다.”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눈을 뜨고 있던 이드가 아직은 멀리 보이는 안티로스를 눈에 담았다. 소드 팰러스에서 출발해 이틀 만에 도착했다. 부르마탄과 마법진으로 이어진 헤르마탄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정확히 한나절이 걸렸다.

“꽤 빨리 달린 것 같은데도 한나절이 걸리네요.”

한나절. 이동 마법진을 이용한 후라면 그 누구도 흔적을 감출 수 없도록 만드는 시간과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이 길을 달렸지만 이보다 빨리 도착하진 못하겠더군요. 그보다 이드 님께서 안티로스를 보시는 것은 처음이시지요. 어떻습니까. 참으로 웅장하지요?”

오랜만이긴 하지만 처음은 아니다. 이드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티로스와 황궁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규모가 커진 것 같지 않아요?]

귓가에 속삭이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긍정했다.

“강산이 아홉 번이나 변할 시간이 지났는데, 당연히 바뀌는 게 있었겠지. 오히려 변화와 발전이 없다면 제국이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야.”

그런 제국의 황궁이라면 더 볼 것도 없이, 당장에라도 마차를 돌려 소드 팰러스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 발전 없이 정체가 길어지면 그 후는 몰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 멋모르고 발을 들였다가는 같이 휩쓸리기 좋다. 성공도, 실패도 주변을 끌어들이는 법이니까.

그러나 구경도 좋지만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먼지가 너무 많았다. 벤 자작은 조금이라도 더 제국 수도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며 설명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이드는 무시하고 창문을 닫았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린 마차는 해가 떨어지기 직전 황성의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눈을 번뜩이며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있었지만, 감히 황궁의 깃발을 달고 있는 마차를 세워서 검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사무엘의 마차는 확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허허, 과연 제국의 수도답게 참으로 거대하구나. 안티로스여, 내가 왔다.”

검문을 받는 동안 안티로스를 살핀 사무엘은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이그렌을 이용해서 이드에게 접근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이대로 무공도 얻고, 제국의 황제까지 대면하게 된다면 더 이상 나를 가볍게 볼 수 있는 놈은 없을 것이다.’

성문을 지난 마차는 더 이상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저녁 시간까지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작은 영지였다면 해가 지기 전에 모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마법으로 거리를 밝히고 있는 안티로스의 저녁은 하루를 마친 사람들로 인해 낮만큼 바쁘고 활기차 보였다.

“저녁에도 사람들이 가득한 모습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네. 과연 제국의 수도야.”

곧 이어질 한잔 술과 맛있는 요리에 대한 기대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즐거워진다.

“음? 아나크렌에 방문한 게 처음이 아니십니까?”

“꼭 직접 오지 않아도 마법이라는 좋은 간접 체험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군요. 제가 너무 한쪽으로만 생각했군요. 당장 저기 길거리에서도 황궁의 모습을 그려서 팔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마인드 마스터께서 아나크렌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겁니까?”

“뭐, 비슷합니다.”

자신이 자신의 눈에게 보여 준 것이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벤 자작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굉장히 기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이거 기쁘군요. 마인드 마스터께서 이드 님께 아나크렌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제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국의 한 사람으로서 기쁜 일입니다.”

이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정도다. 어떻게 작은 거리만 생겼다 하면 제국과 연결 짓지 못해 안달인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라일론이나 일리나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저 과거 이야기였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마인드 마스터께서 가장 많은 추억을 남기신 곳은 당연히 본 제국일 겁니다.”

‘하! 끝말잇기도 아니고. 이러다가는 똥만 싸도 제국 수도의 음식이 몸에 잘 맞아서 그런 거라고 할 것 같네.’

세뇌에 가까운 벤 자작의 말에 창밖을 살핀 이드가 말했다.

“이제 황궁으로 가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폐하의 초대를 받으셨으니 당연히 황궁에서 귀한 대접을 받으실 것입니다.”

벤 자작은 황궁의 최고급 대우는 정말 대단한 것이라며 부럽다는 얼굴로 답했다. 그러나 황궁의 화려함보다는 지구의 편의 시설이 더 좋은 이드에게 황궁의 대접은 크게 반가울 것이 없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해가 졌는데, 황제 폐하를 뵐 수 있겠습니까?”

전혀 기뻐 보이지 않는 덤덤한 이드의 반응에 벤 자작이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마 내일 이드 님을 부르시겠지요. 오늘은 편하게 여독을 푸시지요. 이드 님을 기쁘게 할 많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드는 다시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벤 자작의 말을 손을 저어 멈추고는 말했다.

“오늘 폐하를 뵙는 것이 아니라면 저는 저택에서 머물겠습니다.”

“네? 수도에 처음 오시면서 저택이라니요? 더구나 벌써 황궁에 이드 님이 머무실 방이 준비되어 있을 텐데요.”

벤자작이 곤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의 임무는 이드를 황궁에 데려오는 것. 그런데 황궁을 코앞에 두고 어긋나게 생겼다.

“소드 팰러스에서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통제당하고 머물러야 했습니다. 안티로스에 왔으니 수도 구경을 해야지요. 괜히 황궁에만 묶여 있고 싶지는 않군요.”

“그건 그렇지요. 그러나 황궁에 머무셔도 이드 님의 외출을 제한할 사람은 없습니다. 누가 감히 폐하의 손님께 함부로 하겠습니까. 그러니 황궁에 머무시지요. 저 웅장한 황궁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는 절대 흔하지 않습니다.”

“사양합니다. 전 웅장하고 화려한 것보다 편한 게 좋네요. 아무리 폐하의 손님이라도 기본적인 황궁 예절이 있지 않습니까. 내 집에서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이지요. 집은 편한 게 최곱니다. 어차피 황궁이나 제가 머물 저택이나 같은 안티로스에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약속 시간만 잡히면 곧 폐하의 부름에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어허 이것 참.”

벤자작은 난감한 듯 이마를 쓸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명령을 들먹이며 이드를 황궁으로 끌고 가야 할지, 아니면 지금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드의 뜻에 따라 주어야 할지를 저울에 걸었다.

그리고 저울은 금방 한 곳으로 기울었다. 이미 이드와의 관계를 우선시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어쩔 수 없군요. 이번 일은 제가 궁에 들러 후작님께 잘 말씀을 올려 두겠습니다. 다만, 내일 제가 이드 님을 찾아왔을 때 꼭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러면서 자신이 이드 대신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벤 자작의 말에 이드가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자작님이라면 알아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에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전 당연히 황궁에 머물게 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안티로스에 머무는 동안 이 검을 만들어 주신 분의 저택을 쓰겠다고 양해를 구했지요.

이드가 옆에 놓여 있는 카일란의 롱소드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벤 자작이 순식간에 이해한 듯 무릎을 쳤다.

“아하, 알겠습니다. 카일란 단장님의 저택이군요. 이드 님이 쓰실 검을 준비해 주셨다니, 당연히 저택을 내어드릴 만도 하지요.”

“그 저택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흑색 대장간에서 나온 수익만으로 구매한 저택이라는 사연 때문에 안티로스에서는 제법 유명합니다.”

이드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흑색 대장간의 수익이 많다고 듣기는 했지만, 설마 그 수익만으로 수도에 저택을 구매했을 줄이야.

“대단하군요. 수도의 저택이라면 상당히 비쌀 텐데. 일단 위치를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마차로 저택까지 태워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 부탁이야 쉽지요. 카일란 단장의 저택으로 가자!”

한번 허락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벤 자작은 당장 기사에게 일러 황궁으로 향하던 마차의 말머리를 돌렸다.

곧 마차는 수도의 고급 주택가를 달려 카일란의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의 대문에는 흑색 대장간을 상징하는 망치와 검이 교차한 문장이 달려 있었다. 이 문장을 본 사람이라면 이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설마 흑색 기사단의 것이 아니라 흑색 대장간의 문장이라니.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마차에서 내린 이드는 대문의 문장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카일란이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저택이 유명한 게 단순히 대장간 수익만으로 저택을 샀다는 것뿐만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저택 앞에 두 대의 마차와 기사들이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저택 안에서 깔끔한 모습의 집사와 하녀들이 달려 나왔다.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드 님. 주인님의 지시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일란 단장님이 미리 연락을 해 두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나머지는 이들이 잘 알아서 할 겁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중요한 분이시다. 잘 모셔라.”

“이틀간 고생하셨습니다.”

이드와 집사를 향해 각각 당부를 남긴 벤 자작의 마차가 밤길을 가르고 사라졌다.

“호오, 여긴 흑색 기사단장의 저택이 아닙니까?”

목적지도 모르고 뒤따르고 있던 사무엘이 다가와 말했다. 그도 저택의 대문에 장식된 문장을 한눈에 알아본 듯했다.

이드는 그의 반응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는 집사를 불렀다.

“여기 두 분과 기사들은 내 손님입니다. 이들이 머물 곳이 있습니까?”

“이드 님의 손님들이 머무실 곳도 완벽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카일란이 꼼꼼히 잘 전달한 것 같다.

이드는 사무엘과 이그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안티로스에 있는 동안은 이 저택에 머물 겁니다. 백작께서 안티로스에 따로 머물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셔도 좋고……..”

“당연히 이 저택에 머물러야지요.”

이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한 사무엘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편하게 여독을 푸시지요.”


이드를 내려 준 벤 자작은 그대로 황궁으로 직행했다.

간단히 신분에 대한 확인을 마친 그는 복잡한 황궁 안을 헤매지도 않고 어느 방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후작 각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들어오시오.”

허락의 말과 함께 문이 열리자 방 안에 가득한 책 냄새와 정신을 맑게 하는 차향이 쏟아져 나왔다.

황제의 집무실만큼이나 커다란 방에 홀로 앉은 젊은 권력자의 모습에 고개를 숙인 벤 자작이 문을 닫고 그 앞으로 다가왔다.

“매번 번거로운 일로 자작의 고생이 많소.”

“민망한 말씀입니다. 이 시간까지 황궁을 지키고 있으신 후작 각하만 하겠습니까.”

레오날도 후작은 그 이상 답하지 않고 그윽한 미소로 벤 자작의 보고를 재촉했다.

벤 자작은 그 눈빛이 익숙한 듯 고개를 들고 그가 임무를 받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하나 숨기지도 빼지도 않고 세세하게 보고했다.

레오날도 후작은 이드와 삼검왕과 소드 팰러스의 정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벤 자작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레오날도 후작이 말했다.

“삼검왕을 상대로 자작이 고생이 많았소. 당분간은 삼검왕이나 소드 팰러스와는 부딪히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리다.”

애초에 삼검왕의 기분을 상하게 한 원인이 레오날도 후작의 명령이었지만, 벤 자작은 고마움에 고개를 숙였다.

“민망하지만 그렇게 해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로서는 레오날도 후작이 저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럼 보고는 들었고, 이제 자작의 개인적인 의견을 들어 봅시다. 자작이 보기에 이드는 어떤 자요?”

레오날도 후작의 질문에 벤 자작은 잠시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제가 볼 때 그는 마인드 마스터를 닮은 자입니다.”

“마인드 마스터를 닮았다?”

“예. 마인드 마스터는 대륙과 제국에 큰 흔적을 남겼지만, 미련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드도 마인드 마스터와 비슷한 바람 같은 기질이 있는 듯했습니다.”

“마인드 마스터 같다, 라.”

레오날도 후작은 벤 자작의 평가에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제국의 역사서 중 한 권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만나 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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