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77화
714화
이드가 두 손을 쓸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엘론드의 의욕을 꺾었다. 하지만 단순히 의욕의 문제로 포기하고 물러날 수도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비록 레오날도 후작이 심어 놓은 사실을 맹신하고 날뛰었지만,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이런 큰일을 벌여 놓고 이대로 물러나면 내 인생은 끝장이야.’
이대로 형편없이 바닥만 굴러다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고 패배할 경우, 자신의 인생은 끝이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가리오.’ 하고 오만하던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이드의 초인기를 보이기 이전에 자신이 형편없는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부터 증명해야 했다.
이대로 바닥만 구르다가는 모두 자신을 황색 갈기 기사단의 상급 기사가 아니라 황궁 바닥을 청소하는 청소부로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청소부가 아니라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자신의 몸을 굴려 바닥 청결을 지키는 기괴한 청소부! ‘초인 따위!’라고 외치던 엘론드였지만, 당장 자신의 미래 진로가 나락으로 삐뚤어진다는 것을 깨닫자 스스로를 먼저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드는 엘론드의 눈에서 절박함을 읽었다.
‘그런데 절박하게 매달린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면 세상 힘든 일이 없게?’
만약 그랬다면 이드도 진작 중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절박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보신을 위한 절박함이라니. “엉터리 고집이라도 잡고 있었으면 차라리 보기 나았을 텐데.”
이드는 엘론드의 바닥이 보이는 것 같아 미지근해진 눈을 했다.
푸푹! 푸부북!
두 손을 이용한 공격이 이드에게 막히며 모래를 두드리는 김빠진 소리가 났다. 두 손을 사용하고도 오히려 한 손일 때보다 날카롭지 못했다. 이드는 힘만 믿고 날뛰는 눈먼 멧돼지 같은 공격을 엘론드의 얼굴에 돌려주었다. 절정의 이화접목이었다.
빠악!
“크아악!”
엘론드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사방으로 굴러다니면서도 보지 않던 피를,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격하여 본 것이다. 엘론드도 그 사실이 부끄러워 바로 비명을 멈추고 일어났다.
주르륵.
그러자 코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드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쯧쯧, 일부러 검을 쓰는 대련을 피했는데도, 결국 피를 보는군.”
“죄, 죄송합니다.”
엘론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때린 놈이 성내고 맞은 놈이 미안해하는 웃기는 상황이 만들어졌지만, 이미 기세가 꺾여 버린 엘론드는 그런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구경하고 있던 황녀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 모습을 기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황녀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황색 갈기 기사단의 상급 기사라는 자가………….’
황색 갈기 기사단을 부리고 있는 입장에서 부하의 추태가 보기 좋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엘론드가 그런 모습을 보일수록 이드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드를 바라보는 황녀의 눈이 반짝였다.
이드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엘론드를 향해 앞서와 똑같은 질문을 건넸다.
“초인력이 느껴지오?”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련에 임하는 자세가 바뀐 엘론드는 앞서와 같이 침묵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끝났군요’
황녀는 사실상 포기 선언이라고 느꼈다. 애초에 이기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었으니 패배는 아니라고 위로라도 해 주어야 할까?
하지만 황녀의 판단이 어떠하든 이드는 여기서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두 손을 써도 힘들었으니, 이번엔 두 발에 자유를 주겠소. 경이 최선을 다해 주어야 여기 계신 분들이 사실을 확인할 게 아니오.”
‘개자식. 이 꼴을 만들어 놓고도・・・・・・ 계속하자고?’
억울한 심정에 욕설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고 먼저 졌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자존심이 아니라 기사로서, 귀족으로서 최소한의 명예가 달렸기 때문이다.
“감사…… 합니다.”
억지로 입을 연 엘론드의 코에서 다시 코피가 흘렀다.
이드가 자세를 잡자 엘론드가 세 걸음 떨어져 주먹을 쥐었다. 자유를 찾은 순간 거리부터 벌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시작을 알리는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엘론드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앞선 대련에서 먼저 움직이다 당했던 만큼 움직임의 자유를 찾은 지금은 먼저 달려들 생각이 없었다.
이드는 껍질 속에 숨은 거북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엘론드를 보며 어서 들어오라는 뜻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도리도리.
그러자 엘론드가 고개를 저었다.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무시하지 못하고 내심을 보여 버린 것이다.
이드는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럼 이번엔 내가 먼저 공격하도록 하지.”
투욱-
이드의 앞에 들려 있던 손이 떨어졌다. 마치 매달려 있던 실이 끊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래로 향한 손이 사십오 도까지 떨어지는 순간, 그 끝이 흐릿하게 흐려지더니 캔버스를 가로지른 붓질처럼 길게 늘어나 엘론드의 복부에 박혔다.
퍼억!
거리가 벌어졌다고 안심하고 있던 엘론드의 턱이 저절로 벌어졌다.
“어억….. 섀도…………… 피스트?”
“섀도 피스트? 나쁘지 않은 이름이지만, 이 기술의 정확한 이름은 철사분영편이라고 한다오.”
잘못을 바로잡은 이드는 공격을 쉬지 않았다. 고무줄처럼 죽죽 늘어난 이드의 손바닥과 주먹이 엘론드의 전신을 두드렸다. 놀란 엘론드가 반사적으로 손발을 휘저었다. 그러나 기기묘묘한 방향으로 휘어지는 이드의 손을 모두 막고 피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이드의 주먹은 스스로의 코를 뭉개 버린 주먹보다 약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불행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제대로 공격하라고! 그러면 기절이라도 하지!’
하지만 제대로 된 요청도 받은 적 없는 이드가 그의 속뜻을 알아줄 리 없었다. 이드에게 한참을 두드려 맞은 후 엘론드가 다시 쓰러졌다. 이미 한번 피를 본 후라 엘론드는 다루는 이드의 손길은 거칠었다.
밖으로 드러난 엘론드의 전신이 울긋불긋했다. 특히 피와 멍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유랑극단의 어떤 광대보다 화려하고 불쌍한 얼굴에 황녀가 나섰다.
“더 이상의 대련은 무모하군요. 엘론드 경, 대련을 포기하세요.”
정확히 현실을 찌르는 황녀의 말에 엘론드는 울고 싶어졌다. 기사들에게는 영원한 우상일 수밖에 없는 황녀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때 이드가 주저앉아 있는 엘론드를 향해 말했다.
“황녀 전하의 배려심이 따듯하구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할 말 다 하던 엘론드 경의 용기 있는 모습을 기대한다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마시오.”
마치 협박과도 같은 말에 구경하던 귀족들 몇몇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손속이 독하군, 독해.’
“엘론드 백작가를 생각하면 이쯤하고 넘어갈 만한데 말이야.”
“제국민 누구나 친해지고 싶은 명예 후작에게 엘론드 백작가가 눈에 차겠나?”
“우리도 미리미리 조심하자고. 뒤끝이 보통이 아닌 것 같지 않나.”
어떻게든 이드와 엮여 볼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수군거리며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 이드로서는 뜻하지 않은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엘론드를 두드리는 손길에 약간의 온정이 더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드의 협박 때문인지 체면 때문인지 엘론드가 건드리기만 해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초인력이 느껴지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이드의 질문에 엘론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드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두 발이 자유로운 것으로도 모자란 듯하니, 이번에는 검을 드는 것을 허락하겠소. 피를 보지 않으려 피했지만, 엘론드 경의 손으로 엘론드 경의 피를 본 뒤이니 상관없겠지.”
멀끔한 얼굴로 남의 수치스러운 순간을 또 끄집어내는 이드였다. 마치 엘론드와 파티장의 귀족들이 보라는 듯, 사정 봐 주지 않는 말이었다.
“검을・・・・・・ 들어도 됩니까?”
거의 포기 직전의 상태였던 엘론드의 눈에 빛이 생겨났다.
“물론이오.”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이드의 모습에 한쪽에서 잘근잘근 입술을 씹고 있던 엘코란이 검을 들고 달려왔다.
그 역시 엘론드와 마찬가지로 절실했다. 그가 엉망진창인 모습만 보이고 물러날 경우, 훗날 가문이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자, 이 검을 써라.”
그러나 막상 검이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엘론드는 쉽사리 검을 받아들지 못했다. 기사의 본능처럼 검이라는 말에 혹했지만, 이드와 그 사이에는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절대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어진 대련에서 이렇게 두드려 맞고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이드 후작님이 초인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공 실력만 따져도 이미 나 같은 건 상대도 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레오날도 후작이 엘론드의 머릿속에 심어 둔 생각조차 어느 사이 수정되어 있었다. 역시 바른길로 인도하는 방법으로는 매보다 적당한 게 없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심지어 엘론드의 머릿속에 최고의 천재로 등록되어 있던 게일은 수재로 등급이 변경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재 자리는 공석으로 남고, 그 위에 초천재 등급이 생겼다. 물론 초천재 등급에는 이드의 얼굴이 강력하게 틀어박혔다. 마치 세뇌 같은 강력한 각인이었다.
“후작님께서는 검을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나까지 검을 들면 또 상황이 같아지지 않겠소?”
주먹을 쓸 때처럼 검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지만, 누구도 반론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드에게 두드려 맞은 엘론드의 몸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증명된 사실과 달리 엘론드는 자신만 검을 든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아 결국 멍청한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저만 검을 든다는 것이…..”
사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엘론드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이미 만신창이였다. 여기서 검을 들었다가는 또 두드려 맞고 바닥을 굴러야 할 것이기 때문에 검을 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검을 손에 쥐지 않으려면, 패배를 시인하고 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엉뚱한 말이 대신 나오고 말았다. 그 빤한 속내에 황녀와 귀족들의 입에서 답답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 반응 속에서 이드가 입을 열었다.
“경이 원한다면 검을 들어 주겠소.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내린 검에 묻히는 첫 피가 제국 기사의 것이 될 수는 없는 일.”
말을 마친 이드가 허공을 잡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검 자루를 잡은 듯 부드럽고 단단한 그립이었다.
우우우우-
그리고 그 비어 있는 손 안에서부터 검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처럼 새파란 강기로 이루어진 검이었다.
“허, 검도 없이 저렇게 능숙하게 강기를 다루다니…….”
누군가 멍하니 감탄을 터트렸다. 공격용의 편강과 달리 한 치의 일그러짐 없이 강기로 온전한 형태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기 검이라・・・・・・ 이리되면 검법 실력 이전의 문제잖아.”
누군가의 말이었다.
그리고 엘론드도 그 말을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 것도 알았다. 검기는 검기로 막아야 하고, 강기는 강기로 막아야 한다. 엘코란이 내민 검이 좋은 검이지만, 강기를 막을 정도는 아니다.
이드가 맨손으로 수기를 막았지만, 엘론드는 그런 방법도 알지 못했다.
시작도 전에 결과가 나타났다.
“대련을・・・・・・ 포기하겠습니다. 제가 헛소문에 휩쓸려 감히 후작님께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엘론드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그의 모습에 황녀가 한 걸음 나서서 외쳤다.
“이드 명예 후작과 엘론드 경의 대련은 엘론드 경이 대련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났음을 선언합니다.”
그녀의 말에 이드가 강기 검을 놓았다. 주인을 잃은 강기 검은 바로 사라지지 않고 이드의 몸을 한 바퀴 돌더니 유리가 부서지듯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것이 괜한 퍼포먼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해석을 입 밖으로 내어놓지 않았다.
“휘~ 무시무시하네. 역시 보통 성격이 아니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무력시위라니. 그렇지?”
작게 휘파람을 부는 라울의 말에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요. 강기로 검이라니. 보통 재주는 아니네요.”
“그렇지. 저러면 누구 말대로 강기를 옷 대신 쓸 수도 있겠어.”
“옷?”
갑자기 튀어나온 이상한 응용 방법에 발터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래. 옷. 누가 물어봐 달라더라고. 강기로 옷도 만들어 입을 수 있느냐고 말이야.”
누군가를 떠올린 라울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