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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86화


723화

사삭. 사삭.

밤의 어둠을 틈타 황색 기사단의 기사 하나가 화원의 중앙 건물로 숨어들었다. 그는 마치 도둑과 같은 발걸음으로 은색 기사단 기사들의 눈을 피해 어느 방 앞에 섰다. 그는 미리 준비한 열쇠로 문을 열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허어~ 이야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멋지군.”

방 안에 들어선 기사는 실내의 모습에 탄성을 토했다.

입구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제외하고, 사방 벽에 가득히 새겨진 마법진 때문이었다. 발동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마나를 통과시키며 보는 사람의 가슴을 얼얼하게 만드는 신비의 덩어리.

이 방은 기사의 무공과 다른 방법으로 세상의 근원에 접근하는 법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화원에 설치된 모든 마법들을 조종하고 통제하는 마법 통제실이었다.

원래는 마법사가 상주하며, 허락받은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고 구경할 수도 없는 곳에 그가 들어온 것이다. 잠시 묘한 감상에 빠져 있던 기사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입구 옆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이름표가 붙은 사각형의 막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법사가 부재중일 때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게 해 주는 마법의 열쇠였다.

그는 그중 사일런스라는 이름표가 붙은 시동키를 꺼내 들고 마법진 앞에 섰다. 물끄러미 시동키를 바라보던 그는 시동키를 허공에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게 다 소드 팰러스와 삼검왕님들을 위한 일이고, 그게 결국 우리 기사들을 위한 일이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사일런스.” 

기사가 시동키를 수평으로 들어 올리고 덤덤한 목소리로 마법을 발동시켰다.

부웅!

미세한 진동과 함께 바닥과 천장에서 한 줄기 마나가 떨어져 내리며 시동키에 닿았다. 시동키는 저절로 기사의 손을 떠나 허공에 떠오르며 미약하게 진동했고, 화원은 침묵의 장벽에 감싸였다.

마법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기사였지만, 시동키가 마법진의 마나와 연결된 것을 느끼고 마법이 제대로 발동했음을 알았다. 그는 조용히 방을 나와 잠금장치를 부쉈다. 그리고 마법 통제실을 찾을 때처럼 그림자에 숨어 사라졌다.

최근 소드 팰러스의 밤은 조용했다.

달리 말하면 원래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당연하다. 힘과 남성성이 가득한 곳에서 해가 졌다고 얌전히 발 닦고 잠자리에 드는 자는 드물다. 그게 아니라도 종일 수련에 힘쓴 후라면 시원한 맥주로 피로를 풀고, 자신의 노력을 스스로 위로해 주고 싶을 테니까. 물론, 그건 꾸민 말이고 그저 취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성공을 위해 소드 팰러스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인맥이고, 그 인맥을 유지하고 넓히는 데 술만 한 것이 없으니까!

그러나 수일 전의 사건으로 그럴 수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황제의 부름을 받은 이드가 황궁에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서 검증을 받은 탓이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검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소드 팰러스와 삼검왕의 한계를 언급했다. 둘러 표현했지만 삼검왕이 무능하다 탓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삼검왕의 심기가 매우 좋지 않다는 소문이 소드 팰러스에 조용히 퍼졌다. 그저 소문일 뿐이지만, 그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알아서 조심하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언제까지 그래야 할지 모르지만, 사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서로 조심하고 술을 자제하고 이른 귀가를 선택한 것이다.

“아니, 술이 무슨 죄야? 원래 심기가 어지러울 땐 술로 풀어야 하는 거라고!”

“조용히 마시는 술도 있는데…….”

“어휴~”

가만있다 뜬금없이 된서리를 맞은 술장사들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며 술을 자체 소비했다. 소드 팰러스가 조용해진 이유다.

그리고 황궁에서 파티가 있던 밤. 소드 팰러스가 조용해진 틈을 타 은밀하게 움직이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복장에

완전무장을 한 그들은 화원으로 은밀히 모여들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모여든 자들은 화원 앞에서 한데 모였는데, 그 수가 백 명이 훌쩍 넘었다. 까딱까딱.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화원을 노려보며 손짓을 했다. 미리 정해진 신호인 듯 몇 명이 등에 상자를 짊어지고 달려 나갔다. 그들은 화원을 중심으로 아홉 개의 상자를 땅에 박아 넣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검은색 젤리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그들은 그 상태로 조용히 신호가 오를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된 신호가 올랐다. 사일런스 마법이 가동되어 화원과 외부의 소리를 단절시킨 것이다.

“시작하라!”

그 모습을 확인한 대장의 말에,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상자에 손을 넣어 초인력을 뿜어냈다.

쿠르르릉!

순간 상자 안의 검은 젤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만 배로 부풀어 오르더니 폭발하듯 솟아올랐다.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속에서 작은 천둥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수증기는 마치 검은 구름 같았는데, 사라지지 않고 안개처럼 화원에 머물렀다. 그러더니 한겨울 뒤집어쓴 이불처럼 화원을 감싸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던 화원이 검은 구름에 가려 온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화원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렸습니다.”

검은 구름을 바라보던 대장이 부하의 말에 문을 바라볼 때, 문 안쪽에서 검은 로브를 두르고 얼굴을 감춘 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막 무언가를 벤 듯 피가 흐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씨익.

그를 확인한 대장이 잔인한 미소와 함께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 옆에는 두 기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협조 고맙소. 이후는 우리가 마무리하겠소.”

로브 옆을 스쳐 지나가며 대장이 고개를 까딱였다. 로브를 입은 인물은 쓰러진 기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자리를 넘어 대장의 부하들이 화원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그리고 마침 순찰을 하던 기사가 그 모습에 당황하여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침입자들이 굳게 닫힌 정문을 활짝 열고 들어올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그것도 잠시, 기사는 본능적으로 검을 잡았다.

푸훙!

하지만 아쉽게도 기사보다 침입자의 공격이 먼저였다. 극도로 압축되어 시야를 일그러트리는 공기의 포탄이 날아들었고, 기사는 반쯤 빼 든 검으로 급히 막았다.

떠엉!

그러나 제대로 된 방어는 아니었다. 기사는 당장 부러질 듯 떨리는 검과 함께 날아가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크악! 침입자다!”

어둡던 화원이 핏빛으로 밝아지기 시작했다.


“잠시 쉬도록 하죠.”

허리도 펴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는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모습을 본 일리나가 잠깐의 휴식을 선언했다.

그 말에 최후의 버팀목이 무너진 듯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헉헉, 힘들어! 헉헉, 어떻게 된 게 휴우……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

케마란이 혀를 빼물며 말했다. 그 말에 네리베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갸름한 턱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만큼 우리 실력이 늘고 있다는 뜻이니까 기뻐하라고요. 이것도 일리나 님이 우릴 잘 살펴보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니까. 당신도 이게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화원에서의 수업은 저택에서의 것과는 달랐다. 이곳에서의 수련은 매일 몸과 정신이 버티는 한계 직전까지 밀어붙이는 수련이었다.

몸은 괴롭지만 짧은 시간에 큰 효과를 보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수련 방법이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수련 이전에 몸이 망가지거나 헛수고가 되기에 십상이다. 인체의 한계는 물 잔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감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의 휴식조차 철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는 한계점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한 휴식이다.

그렇다고 오로지 수련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계획하고 조심해도 몸속 깊이 쌓이는 피로는 자고 일어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니까.

포션이나 신관의 도움을 얻어도 의미가 없다. 치료에 특화된 그 이능들은 자칫 몸을 단련 이전으로 회복시켜 하루 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으니까.

일리나는 그 문제를 마사지로 풀었다. 일종의 추궁과혈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추궁과혈의 마이너 버전은 아닌 것이, 종족이 엘프인 탓인지 그녀의 내공은 인간의 것보다 순수하고 맑아 치료와 재생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추궁과혈보다 뛰어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로 인해 수련을 마치고 십 분씩 마사지를 받는 시간에서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인생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인정. 하지만 난 우리하고 똑같이 움직이고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볼 때가 더 놀라워.”

케마란의 말처럼 두 사람에게 휴식을 준 일리나는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고요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좀 전 격렬하게 검을 휘둘렀다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네르베르는 그보다 케마란의 말에 섞인 미묘한 감정이 신경 쓰였다. 네리베르가 케마란을 향해 돌아앉으며 말했다.

“이번엔 또 뭐가 불만이에요?”

“야, 내가 무슨 투덜이도 아니고, 또 불만이라고 할 건 없잖아.”

“그럼 불만이 없는 거네요?”

케마란이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리자 네리베르가 확인하듯 말했다. 아니라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을 것 같은 모습에 입술을 삐쭉거리던 케마란이 결국 입을 열었다.

“불만이 아니고 고민이야. 난화십이식을 어떻게 익혀야 할지 모르겠어. 역시 나, 검법에는 재능이 없는 게 아닐까?”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

네리베르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쉴라 단장에게 천재로 인정받은 재능을 가졌으면서 재능이 없다니. 그녀로서는 배부른 투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케마란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서둘러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난화십이식을 링스피어로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하긴…… 최근 빈둥거리긴 했죠.’

“빈둥거린 거 아니거든! 진지하게 고민한 거거든!”

사실이다. 틈틈이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케마란을 목격한 네리베르였다. 그녀는 조였던 표정을 느슨하게 풀고 말했다. 시시한 고민이 아니라 무공에 대한 일이라면 진지할 필요가 있었다.

“데이노스 경과의 대련에서는 단번에 잘 해냈잖아요.”

“그때는 뭐랄까. 이런 식으로…… 얼떨결에?”

케마란이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손으로 허공을 저어 댔다.

‘혹시 이 바보는 육체적 재능과 지능적 재능을 교환해 버린 것이 아닐까요?’

네리베르는 케마란의 모습에 천장을 보며 길게 한숨을 뿜었다.

“그럼 대련 때처럼 다시 하세요. 나쁜 머리로 고민하지 말고.”

케마란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그 한순간의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은 것이 자신인데,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생각은 해 봤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연출한 순간을 진짜라고 느끼고 집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든다는 말이야. 일리나 님께 물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링스피어에 대한 일이니까 혼자 해 보고 싶기도 해.”

만약 지금 일리나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난화십이식의 링스피어 버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본능적인 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네리베르는 그녀가 굉장히 진지하게 현 상황을 돌파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냥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네리베르는 괜히 답이 없는 이야기에서 떠나 주제를 링스피어로 옮겼다.

“해 보고 싶은 데까지 해 보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그 아이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거죠?”

“응. 전혀! 밤마다 한 번씩 불러 보는데 전혀 반응이 없어.”

“이름을 지었어요?”

“원래 붙인 이름 그대로 링스피어라고 부르고 있어.”

너무 단순무식한 이름에 네리베르는 살짝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어쩐지 곧 깨어날 에고가 벌써부터 불쌍했다. 하지만 주인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끼어드는 게 가능한 건 이드나 라미아 정도다. 에고의 원주인들이니까.

추천하고 싶은 많은 이름들을 꿀꺽 삼킨 네리베르가 억지로 링스피어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빨리 깨우도록 해 보세요. 그 아이가 당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걸?”

케마란이 굉장히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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