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92화
729화
설명이 잘 먹혔을까. 라미아가 조용하다. 어쩌면 이드의 의도를 미리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옆구리를 꼬집은 것은 두 사람을 위험에 그냥 둔 거친 결정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을까.
살살 옆구리를 문지른 이드가 모퉁이 밖으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짧은 대화의 시간 동안 케마란의 어깨에 베인 자국이 하나 늘었을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저거 흉 지면 안 되는데.]
톡톡거리며 이드의 머리에 오른 라미아가 두 사람의 상처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포션도 있고, 마법사에 신관도 있는데 흉터가 남을 기회라도 있을까.”
그러나 라미아의 말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삐죽였다.
이드는 그녀의 반응에 쓰게 웃고는 현장을 주목했다.
그곳에서는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지하실 통로를 의지해 피땀을 흘리며 적의 진입을 막아내고 있었다.
“잘~ 싸운다.”
한눈에 들어온 적들의 실력은 오색 기사단의 평기사보다 조금 더 좋았다. 두 사람은 그런 초인 셋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는 것이다.
비록 순간순간이 아슬아슬했지만 그 위기를 넘길 때 보이는 천재성과 재능이 참 빛나 보였다. 그리고 위기 속에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실력. 한 호흡, 한 초식마다 그녀들은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저러니 내가 바로 나가서 판을 깰 수가 있나. 이런 이상적인 실전을 겪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보통 제자가 어느 정도 실력을 쌓으면, 스승은 실전이라는 이름으로 몬스터들이 사는 으슥한 숲으로 제자를 밀어 넣는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제대로 된 실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실전은 대련과 다르다. 패배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실전이다.
만약 실전에서 패하고도 죽지 않았다면 그건 패자에게 목숨보다 더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미모가 뛰어나거나, 배경이 좋아 돈이 많거나 말이다. 그리고 드물게 몬스터가 살려 두는 경우도 있다. 맛있어 보여 식량으로 쓰기 위해서.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여야 한다. 극도의 집중력과 긴장감으로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야 한다.
그러나 스승에 의해 숲으로 들어간 제자가 그런 긴장감을 가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할망정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 한곳에는 자신의 스승이 자신을 지켜보다 구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숨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자신감의 원천이 되는 동시에 한계에 이르지 못하는 브레이크가 된다.
하지만 지금 케마란과 네리베르 두 사람은 어떤가?
두 사람은 지금 한순간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실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화원에 자신들을 도와줄 기사가 없다는 사실은 두 사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고의 집중력으로 한계에 도전했고, 겨우 싸워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었다. 자신들의 한계가 올 때까지. 그리고 그 각오가 그들의 실력을 끌어 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때 적의 검이 네리베르의 팔을 깊게 베었다.
[저런!]
라미아가 그 모습을 보고 움찔거리는 것을 이드가 급히 손으로 내리눌렀다.
그 사이 네리베르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재빨리 몸을 뺐고, 기다렸다는 듯 케마란이 그 앞을 막아 링스피어를 회전시켰다. 순간의 위기는 넘겼지만 네리베르의 부상은 컸다. 반 명분의 전력이 줄자 두 사람이 급격히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라미아가 이드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왜 말리는 거예요? 더 해봤자 이기지 못할 것 같은데. 설마 저 상태에서 승산이 있어요?]
“승산 같은 거 하나도 없어. 질 거야.”
[그럼 당장 구해 줘야죠. 이젠 성장이 아니라 위기라고요.]
답답한 듯 말하는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지. 그런데 그래서 좀 더 두고 보고 싶어. 너도 들었잖아. 케마란이 대련할 때 무아지경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거.”
[설마 그걸 재현하려고요?]
“응. 대련 때처럼 싸우는 중이고, 집중력은 잘못하면 죽는다 싶어서 그때보다 더 높아져 있을 테니까. 좋은 기회야. 진짜 위험하면 네가 마법을 쓰거나 내가 달려 나가면 되고.”
이드는 라미아 주변에 묘하게 고양되어 있는 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아까 발동되지 못하고 대기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마법이었다. 각각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보호, 치유하고 적 초인들을 공격할 세 가지 마법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 뜻이라면 알았어요. 그런데 깨달음이란 것이 비슷한 환경을 만든다고 또 찾아올까요?]
“확신은 없지. 하지만 가능성은 커. 검을 수련하는 무인들 대부분이 검을 수련할 때 깨달음을 얻는 것처럼. 전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이 클 거야.”
[만약 또 무아지경에 빠져서 깨달음을 얻는 데 성공하면?]
“뭐, 케마란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굴려야지. 그러니까 일단 지켜봐. 앞으로 칠 초식 안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으니까.”
죽을 정도로 힘들어서 자동으로 무아지경에 빠지도록. 이드가 속으로 되뇌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라미아는 무인에게 깨달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만, 이번만은 그것을 얻지 않기를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케마란이 무아지경에 빠졌다.
‘아, 내가 또 무아지경에 빠졌구나.’
케마란은 이미 한번 경험해 본 미묘한 감각이 느껴지자 자신의 상황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적 앞에 서 있는 자신의 그림자가 들고 있는 링스피어로 난화십이식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겪어 보았지만 신기함은 여전했다.
수련할 때는 그렇게 어렵고 갈 길을 찾지 못하던 것이, 이 공간에서만은 왜 이렇게 쉬운 것일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극한까지 몰리지 않고는 이 공간에 진입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슬펐다. 링스피어를 위한 난화십이식을 만들고자 한다면 계속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고생을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하지 말까?’
이드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것도 이 위기에서 살아나야 의미 있는 고민일 테지만……’
그리고 그녀의 미묘한 고민은 잠시 후 무아지경의 상태가 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짧은 시간 환상처럼 허공을 수놓던 링스피어가 갑자기 힘을 잃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마란의 변화를 지켜보던 이드는 곧 그녀의 무아지경이 깨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휴~ 여기까지인가 본데?”
이드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생각대로 무아지경에 발을 들였지만, 그 시간이 너무 짧았다. 유일하게 상황을 뒤집을 기회였는데, 너무 짧은 유지 시간으로 사라진 것이다.
외계에서 찾아온 누군가처럼 유지 시간이 3분만 되었어도 세 명 중 두 명까지 노려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황홀하게 변한 링스피어의 움직임에 꼼짝하지 못하고 있던 적들은 그것이 환상인 듯 원래 모습을 돌아가자 바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묘한 창을 든 여기사의 처리를 최우선으로 한다!”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케마란이 다시 그런 실력을 보인다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빠른 것 이상으로 자신들의 움직임을 제안하는 마법 같은 링스피어의 움직임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것이었다.
대련 때의 기억이 있어 한 발 물러서 있던 네리베르는 그들의 반응에 입맛을 다시며 케마란의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했다.
“하여간. 당신은 끈기가 모자라요.
“……미안.”
“어울리지 않게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말아요. 당신과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톡톡 쏘는 말투와 달리 네리베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이미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정신과 육체의 피로가 한계였다. 상처도 적지 않은 중에 자신은 피도 많이 흘렸다.
그녀는 케마란을 견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적들을 보고 한 손으로 검을 들었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서 마지막까지 당당하게.”
“응. 은색 기사로서 마지막까지 다…… 어?!”
네리베르의 말에 공감하던 케마란이 순간 당혹하며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아무런 기척도 없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는 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네리베르와 접근하던 자들도 마찬가지.
적들이 접근을 멈춘 모습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돌아보자 이드가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스터!”
“두 사람 다 고생했다. 조금만 늦게 도착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굳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릴 생각이 없는 이드였다.
[두 사람 다 이리와. 나머지는 이드에게 맡기고, 상처부터 치료하자.]
이드의 머리에서 내린 라미아가 두 사람을 데리고 뒤로 물러났다. 이미 체력이 바닥인 두 사람은 순순히 라미아를 따랐다.
자신들이 고집을 부릴 순간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신들을 대신해 이드가 나서 준다지 않는가. 차라리 고맙다. 뒤로 물러서던 케마란이 이드를 불렀다.
“마스터.”
“응. 왜?”
“우리 복수 확실하게 해 주세요. 특히 네리베르가 많이 다쳤어요.”
“케마란은…… 많이 맞았습니다.”
고자질하는 아이 같은 케마란의 말에 네리베르가 한마디를 보탰다. 평소라면 케마란의 행동을 지적하고 나섰을 텐데. 당한 게 퍽이나 분했나 보다.
“복수 말이지. 맡겨 둬.”
서로가 당한 것을 대신 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이드가 앞으로 나섰다.
“누구냐.”
“쯧,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지. 그보다 이쁜 내 제자들을 얼마나 괴롭힌 거야? 복수해 달라고 하는데. 각오는 했나?”
세 초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드를 앞에 두고 경계심을 최고로 높이고 있었다. 그들은 케마란과 네리베르와 달리 이드가 나타나는 순간을 눈으로 보고서도 언제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이드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도망을 생각했지만 곧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움직임을 띄는 고수를 따돌릴 자신이 없는 것은 둘째 치고, 발을 빼려 할 때마다 섬뜩하게 오금을 스치는 살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
그런데 이제는 제자의 복수를 대신 해 주겠다고 한다.
스르릉.
이드가 검을 뽑는 순간 세 남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은 이드를 향해 달려들었고, 한 남자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시도했다. 두 명의 희생으로 하나를 살리겠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드는 그들을 얌전히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이 이드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이드의 검에서 붉은 검기가 번뜩이며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서걱!
섬뜩한 소리가 들리고, 도망가던 자의 오른쪽 팔다리가 잘리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면서도 신음 하나 없는 것을 보면 엄한 훈련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은 두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드는 그들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철저하게 그들의 방어를 헛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늘려 주었다. 단 이 분 만에 그들은 붉은 피에 물든 혈인이 되어 쓰러졌다.
그리고 세 사람 모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이드의 출현에 미리 입에 물고 있던 독약을 삼킨 것이다.
이드는 그런 사실을 알았지만 따로 막지 않았다.
독을 준비해서 입에 물고 있는 자들이라면 정보를 알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물어볼 자들이라면 화원 밖에 한가득 있다는 이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