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93화
730화
이드는 시체를 한곳에 모아 두고 라미아가 두 사람의 치료가 한창인 곳으로 다가갔다.
짧은 시간 포션과 고위 회복 마법으로 치료를 받은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모습은 말끔했다.
역시나 흉터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남을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깊게 베인 네리베르의 팔조차 붉은 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피에 물든 옷이 아니라면 두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너희들 대신 복수는 확실하게 해 줬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마스터와 라미아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케마란이 일어서서 활기차게 말했다. 조금 전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건 다 잊은 모습이었다. 평소 모습대로 상당히 터프한 정신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드는 네리베르까지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왜 너희들만 여기 있는 거야?”
“그게…… 저하고 네르베르가 파츠 아머를 찾아 입느라 좀 늦어서요.”
케마란은 일리나의 당부로 방에 돌아와 파츠 아머를 장비하고 뛰어나가는 길에 저자들과 마주쳤다고 했다.
딱 봐도 수상한 자들이었고, 침입자 입장에서는 그녀들이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 보였을 테니 싸움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는 중 적들이 지하에 있는 포로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통로를 막고 섰다는 것이다.
“음, 용기 있는 행동이긴 한데, 무모했어. 누구도 너희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한 사람은 없어.”
은근한 걱정이 담긴 이드의 말에 네리베르가 허리를 세우고 말했다.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은색 기사단의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하에는 포로만이 아니라 선배 기사님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분이 만약 혼자라면 저희보다 힘들었을 겁니다.”
끄덕끄덕.
참으로 기특한 마음이 아닐 수 없었다. 기사로서 귀감이 될 만한 자세였다. 하지만 위험한 임무는 마음만으로 수행 가능한 게 아니다. 이드는 두 사람에게 허탈한 현실을 알려 주기로 했다.
“두 사람의 뜻은 잘 알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해라. 이런 일이 있다면 우선 외부에 알리는 게 먼저야. 비밀이라서 두 사람에게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지하에 있는 포로는 사실 가짜야. 살해되거나 도망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당연히 포로를 지키는 기사도 없지. 그런 곳을 지키려다 죽었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게 사, 사실이에요? 정말 지하실에 있는 게 가짜?”
기가 막힌 사실을 접한 케마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평소 예절에 까다로운 네리베르조차 흉하게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포로와 선배 기사를 지키기 위한 자신들의 분투가 모두 헛수고였다니. 다리에 힘이 빠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흘린 피가 아까웠다.
“혹시 저희만 모르는 사실인가요?”
“아니, 몇 사람 말고는 몰라. 다 알면 비밀이 아니지.”
이드의 대답에 네리베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스터의 당부대로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고 깊게 생각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서는 꼭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 묻어났다. 정말 어지간히 쇼크였던 모양이다.
“너희 상처도 나았으니 이제 화원 밖으로 나가 보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쩔래?”
“허락하신다면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래. 같이 가자.”
이드는 두 사람을 데리고 정문을 향해 걸었다. 아직 두 사람의 상태가 온전한 것이 아니어서 달려갈 수 없었다.
그렇게 걸어 도착한 정문에서는 소음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드가 활짝 열린 문의 그림자에 숨어 밖의 상황을 살피자, 케마란과 네리베르도 그런 이드를 따라 움직였다.
전장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드는 가장 먼저 일리나를 찾아 살피고, 다음으로 데일리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들과 초인들이 한데 뭉쳐 피 흘리고 있는 전장을 살폈다.
“다행히 당장 내가 나서야 할 만한 곳은 없는 것 같네.”
[그렇긴 한데 기사들이 너무 움츠려 있는 게 이상하네요. 초인들 분위기도 묘한 것 같고.]
설마하니 적의 대장이 죽으라는 명령을 내려 그렇다고는 상상하지 못한 라미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이드가 보기에 가장 이상한 건 일리나가 상대하고 있는 남자였다. 열심히 도망 다니며 지탄과 같은 공격을 하는 것이 별것 아닌 듯 보이는데, 막상 일리나의 공격이 닿으면 남자의 몸이 투명해지며 공격을 통과시켜 버린다.
“신기하네. 저런 초인기는 처음인데?”
[그러게요. 자세한 건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해야겠지만, 여기서 봐서는 몸을 정령화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신기하지만 일리나에게 위험한 능력은 아니에요.]
“위험하지 않은 건 없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지.”
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장 저자의 능력만 해도 사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했다. 중원에서 손꼽는 살수가 저 초인기를 가지게 된다면 그는 당장에라도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일리나의 상대는 살수가 아니었다. 라미아의 말마따나 직접적으로 일리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능력은 없어 보였다.
‘상대가 강한 것도 아닌데 일리나가 좀 급해 보이네. 왜 저러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리나를 조급하게 하는 것은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분명했다.
두 사람이 말하길, 일리나가 파츠 아머를 챙긴 뒤 합류하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일리나 입장에서는 충분히 걱정될 만했다. 실제로 이드가 조금 늦게 도착했다면, 두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그게 아니라 다른 이유라면 그 이유를 처리해 주면 될 일이다.
일리나, 나 왔어요.』
이드는 일단 전음으로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말했다. 직후 그녀의 검에서 느껴지던 조급함이 사라진 사실에 미소를 지으며 이드가 말을 더했다.
상대의 초인기가 기묘한데, 도와줄까요?』
도리도리.
일리나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마스터는 나가지 않으세요?”
뒤에서 상황을 살피던 케마란이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드가 나선다면 더 이상의 사상자 없이 상황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 온 건 비밀이니까. 물론 위험하면 나설 거야.”
[거기다 성 밖에서 감시하고 있는 시선이 있어. 지금 나서면 분명 눈여겨 살필 거야.]
감시라니? 라미아가 더한 말에 세 사람이 빼꼼 문밖을 살폈다.
[호호, 마법적인 감시라 그렇게 봐서는 못 찾을걸?]
“마스터, 그럼 저희만 나가는 건 어떨까요? 그렇다고 나가서 싸우겠다는 건 아니고,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으신 분들을 수습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자칫 시간이 지나면 치료할 수 있는 분도 잘못될 수 있으니까요.”
케마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부상자들.”
이드는 그 말을 듣자 자신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차 하는 마음이 되었다.
왜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너무 전장에만 신경을 쓴 모양이다.
시야가 너무 좁아져 있던 것을 반성한 이드는 케마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문밖을 살폈다. 이번엔 전장이 아니라 그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이 목표였다.
단지 기척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발산하는 기감에 집중했다. 심각한 부상자의 경우 신체 활동이 극도로 미약해져 호흡은 물론 심장의 박동도 약해진다. 기척만 살피는 경우, 자칫하면 미약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해 생존자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더의 초음파처럼 퍼져 나간 내력은 부상자들의 상태를 알려 왔다. 분명 적지 않은 수가 살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했는데, 좋은 의견이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움직일까요?”
칭찬에 의욕이 샘솟은 듯 케마란이 적극적으로 나서려 했다.
“아니, 너희들은 여기 있어, 부상자를 옮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너희들이 아직 부상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직접 검을 들고 싸우지 않아도 저긴 엄연히 전장이야.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곳에 부상자를 내보낼 순 없어.”
“하지만 마스터가 왔다는 건 비밀이라고 하셨잖아요. 지금 나가시면 다들 알아볼 거예요.”
[그건 문제없어. 내가 너희 둘 중 한 사람의 모습을 이드에게 덮어씌우면 간단하게 해결이 가능하니까.]
자신이 내놓은 의견을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던 케마란은, 불쑥 끼어든 라미아의 말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모습을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네리베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자들이 습격 전에 조사를 했을지도 몰라. 그런 경우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친 기사들도 모르는 사람보다 익숙한 너희들이 다가가면 도움을 거부하지 않을 거 아냐. 그런 의미에서…………… 평소와 다른 어투로 무뚝뚝하게 말해도 기사들이 크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 둘 중에 누구야?]
설마 이런 질문을 받게 될 줄이야.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얼굴을 맞대고 의논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친화력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에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기도 했지만 빠르게 답이 나왔다.
“아무래도 네리베르의 모습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케마란은 모든 기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반면, 네리베르는 은색 기사단을 제외한 사색 기사단과 크게 가깝지 않다고 말했다.
“너무 과하게 대시를 하셔서 부담스럽습니다.”
투박하게 이유를 밝힌 네리베르였다.
[・・・・・・케마란보다 네리베르가 인기가 더 많았나 보구나.]
한 방에 핵심을 찌르는 라미아의 말에 케마란이 고개를 떨구며 무너졌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달래 주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이드는 라미아의 일루젼 마법을 통해 네리베르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몸이 변한 것은 아니고 인형 탈을 쓰듯 이드의 몸 위에 네리베르의 영상을 씌워 놓은 것이다.
“음, 이상한 곳은 없지?”
이드는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을까 이리저리 몸을 돌아보았다.
네리베르는 그 모습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가 부상자들을 데려올 테니까. 두 사람은 이 근처에 기사들을 눕히고 치료할 공간을 만들어 놔.”
“네. 맡겨 두세요.”
케마란과 네리베르에게 해야 할 일을 준 이드는 조용히 화원 밖으로 나갔다. 서로 싸우느라 바쁜 사람들에겐 멀리 떨어진 이드에게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거기에 파티장의 라울이 그랬듯 존재를 지우고 있었기에, 이드의 존재를 깨닫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이드는 우선 부상이 위중한 기사들부터 옮겼다. 일일이 확인하지 않고서 어떤 부상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의 생기가 가장 약한지는 기감으로 충분히 확인 가능했으니까.
이드가 그들을 성안으로 데려가면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미리 깔아 둔 천 위에 부상자를 눕히고 방어구를 벗긴 후, 눈에 보이는 상처에 포션을 뿌린다. 그 뒤 라미아가 포션으로 처치하기 힘든 부상에 대한 응급조치와 함께 부상에 진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