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18화
755화
해가 적당히 달구어지자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일리나스 공관에 먼저 들러 이그렌을 내려 준 이드는 그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그것만 잘 지켜. 그리고 있는 대로 욕심도 부리고. 그래야 얕보지 않는다.”
특정 부류의 인간은 큰 욕심 없고 선한 사람을 약한 사람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드가 보기에 벤텀 백작도 그런 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네, 자작 영지라도 내놓으라고 해 보죠.”
“약해! 백작 영지를 내놓으라고 해. 고생하고, 저녁에 보자.”
이드가 손을 흔들고, 마차가 느릿하게 황궁으로 향했다. 약속 시간이 급한 것은 아니니까.
황궁으로 향하는 한산한 길에 뜨문뜨문 마차들이 보였다. 황제가 발표한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서 제국 각지에서 힘자랑하고 싶은 자들이 몰려드는 중이기 때문이다.
어제 만났던 클라인은 황제가 공개적으로 토벌대를 모으는 이유가 제국 안에서 필요 없이 넘치는 힘을 풀어 주는 것과 동시에 초인파와 기사파의 화합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둘 다 이드와는 크게 관련이 없는 이유지만, 제국의 주인으로서는 제대로 일하고 있구나 싶었다.
황궁에 도착하자 바로 문이 열렸다. 황녀가 미리 언질을 준 것이 분명했다.
그뿐이 아니라 마중까지 나와 있었다.
“황녀 전하를 모시는 코린 툭입니다. 명예 후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드는 그녀의 예를 받으며 황녀가 제법 막무가내라고 생각했다. 오늘 방문하지 않았다면 뒷말이 제법 나왔을 것이 아닌가. 혹시 급한 일이 생겨 방문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반갑습니다. 코린 경.”
“여기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코린은 마부의 옆자리에 올라 황녀궁까지 직접 마차를 몰았다. 황녀궁에 도착한 이드는 그 앞에 서 있는 기품 있는 부인을 볼 수 있었다.
“명예 후작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시종장인 말레나 벨킨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코린이 다가와 그녀가 황녀의 유모라고 속삭였다. 황녀에게 특별한 사람이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의미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이드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무뢰한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이 아니라도 말레나 부인의 첫인상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저택에 있는 집사하고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이야.’
즉, 프로페셔널의 향기가 난다고 해야 할까?
이드는 말레나 부인을 따라 황녀궁에 발을 들였다. 오래전 짧은 시간 황궁에 살았었지만 황녀궁은 처음이었다.
벌츄러스라는 정식 이름이 있지만, 대대로 황제의 장녀가 머물렀기에 황녀궁으로 더 자주 불렸다. 주인의 특성 때문인지 기품이 있으면서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멋이 가득했다. 하얀 복도를 따라 들어가자 그 끝에는 귀여운 연못이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티 테이블에 앉은 황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드가 정원에 발을 들이자 황녀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황녀 전하.”
“저야말로 명예 후작께서 방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 릴리가 새로운 차와 쿠키를 내어 왔다. 긴장한 표정의 하녀는 그러는 중에도 궁금한지 이드를 힐끔거렸다.
이드는 그 작은 행동에 조심은 있어도 두려움이 없어 평소 황녀가 아랫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드는 그녀가 마음껏 볼 수 있도록 놓아두고 잠시 정원을 둘러보았다.
“아름답죠? 이 궁의 첫 주인인 저의 선조께서 입궁하신 후 처음 내린 명령이 이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답니다.”
“그렇군요. 어쩐지 온전히 이 궁의 일부인 양 자연스럽다 했더니 세월의 힘이었군요.”
수백 년의 역사가 담긴 정원, 그 말을 듣자 이드는 정원이 새롭게 보였다. 자연의 멋도 멋이지만, 엘프 아내를 두어서 그런가. 나무와 자연에 새삼 관심을 가지게 된다.
‘따로 기회가 되면 일리나에게 보여 주고 싶군.’
아마 일리나와 함께 방문하겠다고 하면, 일리나에게 관심을 보였던 황녀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그 대가로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하겠지만, 수백 년 역사가 쌓인 정원을 감상하는데 그런 것쯤이야!
이드는 정원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분위기가 풀린 듯하자 황녀의 초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정원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제 아내와 함께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이제 황녀님의 고민에 대해 들어보도록 할까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드의 말에 황녀가 연못의 수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이 세상에서 검후님을 가장 존경한답니다.”
“그러시군요.”
그건 이미 그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눈 날 안 사실이다. 그녀는 일방적일 정도로 검후에 대한 이야기만 했으니까.
“제국을 위한 그분의 노력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슬픈 인생과 그것을 이겨 낸 용기. 그리고 화려한 날갯짓까지. 전 어릴 때부터 그분처럼 되는 것이 꿈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분을 자주 찾아뵙고, 그분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죠.”
“난화십이식도 그래서 배우셨겠군요.”
황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알아보시는군요.”
“그레이트 소드 이상의 실력자라면 난화십이식이라는 것은 몰라도 황녀님께서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죠. 티가 나거든요.”
그러고 보면 이드의 검증에 황녀가 나섰던 이유도 단순히 이드에게 황녀를 보이고 싶은 황제의 속셈만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황실의 가족으로서 그녀만큼 난화십이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뭐, 절차야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단순한 것이지만, 황녀가 질문한 내용은 난화십이식의 중요한 맥을 짚은 것이었으니까.
황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난화십이식을 익히면서 검후님과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어요. 가끔 제가 어려워하면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기도 하거든요.”
이드는 찻잔을 들었다. 도대체 이 황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혹시 난화십이식을 익히는 중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부를 만하다. 애초에 검후에게 난화십이식을 전한 것이 자신의 전신인 것으로 되어 있으니 검후 이상으로 잘 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장 일리나에 대한 소문에도 그녀가 사용한 난화십이식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아니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어요. 최근 진도가 막혀서 곤란한 부분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잠깐 망설이던 황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명예 후작께서는 최근 수도까지 알려진 소문을 들으셨나요?”
“어떤 소문을 말입니까?”
“검후님께서 잘못되었다는,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소문 말입니다.”
달깍.
이드는 황녀에게서 나올 줄 몰랐던 이야기에 찻잔을 내려놓고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우연히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헛소문일 뿐이죠.”
어제 소드 팰러스에서, 그게 아니라면 저택에 있는 이드가 어디서 들었겠는가. 오히려 검후의 둥지이기 때문일까. 다른 곳보다 다종다양한 소문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중에는 검후가 대결에서 패하고 죽었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는데, 그 소문을 제 입으로 전하는 클라인의 얼굴이 흉흉했다. 능력만 된다면 이런 소문을 입에 담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반 죽여 놓았을 것이다.
“그렇죠. 헛소문이죠. 납치되어 사라지신 분이니까요.”
“……”
이드는 침묵했다. 대신 가늘어진 눈으로 황녀를 살폈다.
그에 황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저는 검후님이 실종된 일과 납치되었다는 증거를 최근에 찾았다는 사실을 알아요. 아바마마께 들었지요. 그 소식을 전하시는 아바마마의 얼굴에 가득하던 근심을 아직 기억한답니다. 하지만 또한 검후님의 일을 비밀로 하고 찾지 않으시는 아바마마의 결정에 저는…… 무력감과 실망감을 느꼈답니다. 아버님은 검후님에 대한 일이 공개될 때 일어난 분란이 제국을 흔들 거라며 검후님보다 제국을 택하셨거든요.”
당시를 떠오른 듯 황녀의 눈에 서글픔이 들어찼다.
확실히 황제의 행동은 제국의 주인으로서는 옳은 것이다. 그러나 가족으로서는… 글쎄?
‘나라면 당연히 가족이 먼저지.’
사실 따로 책임져야 할 세력이 없는 이드로서는 별로 공감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세력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다니? 이드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것도 결국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국 안의 힘을 온전히 컨트롤하지 못한 황제의 미숙함이 가족을 버리게 만든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황녀의 말대로라면 검후의 일에 황제는 관련이 없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황녀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인되지도 않았고, 당시 황제의 말이 진실이라고 확인된 것도 아니니까.
“또 저 자신에 대한 실망도 있었지요. 제국의 황녀이면서도 검후님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당연하다. 황가의 힘은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인데, 그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일이 가능할 턱이 있나. 황제의 허락 없이 황녀가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 줌의 사람들뿐.
대륙은커녕 이 넓은 제국에 숨겨 둔 사람을 찾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는 중에 명예 후작님과 은색 기사단에서 비밀리에 검후님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드가 긍정도 부정도 없이 물었다.
“록마틴 후작님이요.”
“아, 용기사.”
이드는 당시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을 태우고 달려온 용기사와 그 주인인 록마틴 후작을 떠올리고는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있었다. 과연 다른 곳에 떠들고 다니진 않아도 황제에게는 사실대로 알린 모양이다.
‘그래 놓고 황제는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는 말이지?
이드는 어쩐지 황녀가 황제에게 느낀 실망감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추라고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그럼 절 초대하신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까?”
“네. 검후님을 찾는 일에 저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제국의 황녀로서 최선을 다해서 두 분이 하시는 일을 후원하겠어요.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검후님을 찾으며 획득한 정보도 함께…….”
“무슨 정보요? 방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드는 황녀의 마지막 말에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후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정보라면 다르다. 이드가 가장 아쉬운 것이 바로 정보가 아니겠는가.
“제가 가진 돈으로 용병대와 길드에 의뢰를 넣었어요. 제 힘으로는 전국의 영주들과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요.”
전국의 영주들과 군대라니. 과연 제국 황녀의 스케일답다. 수십, 수백만의 인원이 움직이지 않는 일은 큰일이 아니라는 말이 아닌가.
“하하하.”
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는 황녀를 보며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