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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19화


756화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디에 의뢰를 넣으셨습니까?”

“다섯 곳이요.”

이드의 질문에 황녀가 하얀 손가락 다섯 개를 접어 가며, 의뢰를 넣은 다섯 개 단체를 꼽아 보였다.

대형 용병대 두 개. 암살단 하나. 도둑 길드 하나. 마지막으로 궁색한 연구 자금의 조달을 위해 일터로 나온 영세 마법 학파 하나.

제국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의뢰금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제 용돈도 적지 않으니까요.”

이드는 방글거리는 황녀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의뢰금을 용돈으로 지급할 수 있다니, 새삼 제국 황궁에 돈이 얼마나 많은가 싶다. 작은 용병대 하나를 움직이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드는데, 그녀는 그 몇 배나 돈이 많이 드는 대형 용병대를 움직였다. 뿐인가. 용병대 말고도 암살자에 도둑, 마법사까지.

실로 다양한 직종을 움직였다.

정확한 규모는 몰라도 그 돈이면 어지간한 남작 영지 일 년 수익은 넘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황녀가 돈이 많아 물 쓰듯 두서없이 의뢰를 넣은 것은 아니다.

‘아마 각 단체의 성격에 따라 최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추적, 조사하도록 한 것이겠지. 뭐든지 배우고 익힌 만큼 보이는 법. 무인들이 할 수 있는 생각을 마법사들이 하지 못하고, 마법사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도둑이 볼 수 있는 거니까.’

이드는 황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마주 앉아 방글방글 웃는 얼굴만 봐서는 잘 연결되지 않는 깜찍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나저나 다양한 직종의 인간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초인들만 빠져 있는 것은 우연일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즉, 황녀도 검후의 실종에 초인이 연계되어 있다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게 어떤 정보를 주시렵니까?”

황녀의 행동에 충분히 재미를 느낀 이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받치고 물었다. 자신들보다 최소한 반년 이상 먼저 움직인 황녀다. 그녀가 자신하며 말을 꺼낸 만큼 가치 있는 정보가 분명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이드가 황녀궁 안으로 사라지고 얼마 후,

조용히 나타난 게일이 이빨을 갈았다.

“뿌드득. 내 방문과 파트너 신청도 거절하고, 파티에 참석한 이유가 결국 저자를 궁에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단 말이오. 어떻게 그대가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오, 황녀!”

게일은 끈적한 질투와 분노에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이 제국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황녀뿐이고, 황녀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오로지 자신뿐이라고 여기던 확신이 갑자기 무너진 것이다.

지금만큼은 검후의 뒤를 이어 소드 팰러스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이드로 인해 무너진 것 이상으로 충격적이었다.

문득 황녀가 자신에게 이토록 큰 존재였던가 싶었지만, 그 생각은 곧 스치듯 지나가고 그 빈자리에 배신감에서 출발한 독심과 짜증이 피어올랐다.

제국의 대기사인 자신이 왜 숨어서 황녀궁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빌어먹을 이드! 죽일 놈의 이드! 그놈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뭐라고!”

분노에 꽉 문 입술 사이로 핏방울이 맺혔다.

그러나 당장 소리만 지른다고 해결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게일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가! 곧 씩씩거리는 거친 숨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게일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만들고 그림자에서 나섰다.

“앗, 게일 경!”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원래 자리로 돌아와 황녀궁을 지키고 있던 코린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도 수고하는 군, 코린 경. 황녀님을 뵈러 왔네.”

“곤란한 시간에 오셨습니다. 게일 경. 지금 황녀님께서는 손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황녀님의 초대로 명예 후작이 방문하셨다지.”

“이런, 벌써 황궁 안에 소문이 난 모양이군요.”

“자네가 직접 마차를 몰면서 안내하니까 관심이 몰린 것이지. 나도 그 소문을 듣고 왔다네. 어지간히 뵙기 힘든 분이니, 황녀님과 함께 만나 뵙고 싶군. 게일 인테그란 자작이 두 분을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 주게.”

“알겠습니다.”

코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황녀궁 안으로 향했다. 명예 후작이 중요한 손님이긴 하지만, 게일도 자신의 선에서 거절할 수 있는 가벼운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궁 안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돌아와 말했다.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코린 경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네. 내가 황녀궁의 구조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가면 되는지만 말해 주게.”

“정원에 계십니다.”

“분위기・・・・・・ 좋은 곳에 계시군.”

실룩실룩.

어떤 상상을 했는지 게일의 입꼬리가 떨렸다.

코린도 그 모습을 보았지만, 입이 무거운 황궁 기사답게 보지 못한 척 게일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다만, 기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한 세 남녀의 연애사를 직접 관람하지 못한 아쉬움을 한숨으로 토할 뿐이다.

그러나 이드를 향해 차갑게 번뜩이는 게일의 눈을 보았다면 감히 달달한 연애사를 말할 수 있었을까?

‘우와, 눈깔 한번 살벌하네. 잘하면 밤길에 칼 들고 나타나겠다.’

이드는 자신의 손을 잡는 게일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얼굴은 웃는데 뱀 같은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등장으로 그의 입지가 여러모로 흔들렸단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웃는 얼굴 뒤에 숨긴 반감이 생각 이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이신 명예 후작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게일 인테그란 자작입니다.”

기사로 유명한 자가 스스로를 자작이라고 소개했다. 즉, 황녀와 명예 후작 사이에 끼어든 기사라고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게일 자작에 대해서는 소드 팰러스에 머물면서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감사합니다.”

이드의 말이 떨어지자 게일은 극히 자연스러운 태도로 황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마치 자신의 자리가 그곳이라는 듯. 그리고는 황녀를 보며 말했다. 

“황녀님께도 감사드려야겠습니다. 황녀님 덕분에 뵙기 힘든 명예 후작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하하하하.”

“제가 한 일은 없답니다. 명예 후작님께서 허락한 자리니까요.

그녀의 말에 게일은 내심 ‘그럼 당신은 나와의 자리를 거절할 생각이었다는 말이오!’ 하고 소리쳤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랬군요. 그럼 두 번 아니, 세 번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방문을 허락해 주시고, 그 덕분에 이 정원까지 들어왔으니까요. 명예 후작님은 아십니까? 저도 이 정원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세 번째랍니다. 이 정원은 황녀님께서 특별히 아끼는 곳으로,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나 들이지 않는 곳이랍니다.”

“그랬습니까?”

이드는 몰랐던 사실에 흥미를 보였다.

그러자 게일이 기회라는 듯 황녀궁과 황녀에 대해서 떠벌떠벌 떠들어댔다. 마치 자신이 황녀와 이만큼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유치한 모습이지만,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이 끼어들면 사람이 유치해지는 법.

이드는 게일의 행동을 크게 생각지 않고 적당히 받아 주었다.

게일은 그런 이드의 모습에 내심 우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우선권을 인정받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과연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점점 눈빛이 싸늘해져 가는 황녀의 얼굴을 보았다면 마냥 좋아할 수 있었을까?

마주 앉은 덕분에 두 사람의 변화를 한눈에 담고 있던 이드는 젊은 청춘의 실수에 내심 손을 모아 평온을 빌어 주었다.

‘그렇다고 날 향해 질투하는 유치한 놈을 도와줄 생각은 일절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드는 더욱 게일의 말에 다채로운 반응을 보여 주었다. 원래 말은 잘 들어 주면 신이 나는 법이다.

“하하하, 그래서 그날 황녀님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니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저희 두 사람에게…….”

게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진다. 그에 따라 황녀의 인내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서 드러났듯 자신이 중요한 손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방문한 것부터 예의가 아닌데, 끼어들어 혼자 떠들기까지!

평소 그녀가 알던 모습과 달라 낯설기까지 하다.

파트너 신청을 거절당하고 돌아가던 모습이 안쓰러워 참아 주었는데, 계속 언급되는 자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듣고 있으면 자신이 헷갈릴 정도로 이야기 속 두 사람은 친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도 게일이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저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자신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최소한 자신 앞에서 저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이런 모습은 남녀 간의 애정 문제 이전에 제국 황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라고 했던 말레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명예 후작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몰랐겠지.’ 

그저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면 그냥 이런 면이 있구나 하고 지나갈 일이지만, 며칠 전까지 남편감 일 순위에 있던 남자의 일이라서 충격은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제가 황녀님께……………”

“게일 경, 사적인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도 보기 좋지 않군요.”

냉기가 감도는 목소리에 게일이 흠칫한다.

그제야 황녀가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것 같다.

제삼자가 되어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이드는 당황한 게일의 모습에 입술을 적셨다.

보통 저렇게 당황하고 정신이 없을 때 본심이 튀어나온다고 했다.

황녀를 통해 검후에 대한 황제의 생각을 듣고 나니, 문득 게일은 검후의 일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게일 자작은……”

“예?”

그렇지 않아도 곤란하던 차라 게일은 이드가 부르자 즉시 반응했다.

“검후님의 납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게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복잡한 감정에 흐려진 눈이 이드를 향하더니 잠시 후 어두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것은 왜 물으십니까?”

“게일 경은 검후님이 아끼던 제자이지 않습니까. 경을 보니 문득 생각나서 말입니다.”

이드의 말에 게일이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지만 소용없다. 게일이 아니라 드래곤이 노려봐도 끄떡하지 않을 이드다.

“・・・・・・저는 감히 검후님께 위해를 가할 자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그의 진심이 보였다.

‘뭐, 그게 당연한가? 검후의 후계자로 첫손가락에 꼽히는 자가 뭐가 부족해서 검후를 납치하는 일에 손을 보태겠어.’

가만히 있으면 자신의 입으로 떨어질 감인데.

“설마, 명예 후작님께서 그런 출처 불명의 소문을 믿으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직전까지 황녀님과 토론하던 일이라 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나에 대한 초인설을 말했던 게일 자작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좀 우습군요.”

“……”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게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니, 사과는 필요 없습니다.”

이어지는 이드의 말에 게일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진심으로 사과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막상 사과가 필요 없다는 말을 듣자 자신의 입장이 우스워져 버렸다.

“명예 후작님께선 마음도 넓으시군요.”

거기에 이어지는 황녀의 말이 못을 박아 버린다.

게일은 급히 말을 돌렸다.

“크흠,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기에 검후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까? 혹시, 무공에 대한 이야기인지요?”

“맞습니다.”

당연히 황녀가 획득한 정보의 전달이라고 말할 수 없었던 이드는 쉽게 긍정했다. 검후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무공에 대한 고민도 있다고 했었으니 절대 거짓말은 아니니까.

“역시 그렇군요. 그런데 섭섭합니다, 황녀님. 어려운 일은 제게 물으시면 될 텐데 굳이 명예 후작님을 불러 청하시다니…….”

농담처럼 진심이 가득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오산이 있다면, 평소라면 몰라도 그의 행동에 심기가 거슬린 황녀가 그의 말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경의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그대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 그런…….”

황녀의 말에 게일의 표정이 애처롭게 무너진다.

그 모습에 이드는 웃음이 나려는 입을 가리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쯧쯧, 다 자업자득인 거 아니겠어? 탓하려거든 황녀의 기분을 상하게 한 당신 혓바닥을 탓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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