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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348화


785화

이른 아침.

백작가는 평소와 달리 조용한 아침을 맞았다. 전날 파티장에서 있었던 모종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알아서 눈치를 보고 움직인 것이다.

이드는 아침 일찍 그런 백작성을 찾았다. 목적지는 당연히 시온 자작이 머물고 있는 별채였다. 그런데 그 주변에는 번뜩이는 갑옷을 걸친 질풍 기사단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자다가 불려 나왔을 기사들임에도 그 분위기가 제법 삼엄했다.

그럴 만했다. 피로에 누웠다가 두 눈 멀쩡히 뜨고 호위 대상에 목줄이 채워지는 걸 구경만 할 뻔했으니까. 그나마 운이 좋아 중간에 막았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랑스러운 기사단 이름에 제대로 먹칠할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바짝 긴장한 그들도 이드가 별채에 숨어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아니,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이드와의 실력차를 생각하면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런 사실도 알지 못하고 두 눈에 힘을 주고 사방을 경계하는 모습은 어쩐지 불쌍해 보였다.

일찍 깨어나 있던 시온 자작은 이드가 연기처럼 방에 나타나자 밝은 얼굴로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명예 후작님.’

“밖에 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더군요. 이제 백작가에서 허튼짓은커녕 자작을 만나는 것조차 힘들겠습니다.”

“모두 명예 후작님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아니라도 이제부터 백작가에서 절 보긴 힘들 것입니다. 코롤 남작이 아침 일찍 백작가를 떠나겠다고 알려 왔습니다.”

아무래도 지저분한 약까지 사용하는 백작가가 적진처럼 느껴져 내린 결정일 것이다.

“백작가에서 잡지 않았습니까?”

백작가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모습을 들켰으니, 어떻게 해서든 그 일을 질풍 기사단장 선에서 무마한 후 보내고 싶을 것이다.

“잡으려고 했지만, 코롤 남작이 모두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를 잡으려면 소영주가 나서야 할 텐데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더군요.

“하하, 그 인간 아직 못 깨어난 겁니까?”

“예. 소영주를 치료할 만한 마법사와 신관을 기사들의 회복이 급하다고 코롤 남작이 잡고 있으니까요.”

이드의 말에 시온 자작이 고소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이드는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약발로 눈이 뒤집힌 보바르. 그리고 빽빽 소리를 지르다 라미아가 입안에 털어 넣어 준 약을 먹고 똑같이 눈이 뒤집어진 시디푸.

두 커다란 남자가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에 질겁한 사람들은 둘을 떼어 내고 진정시키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했다. 쉽게 말해 미쳐 날뛰는 두 사람을 두드려 패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 후 소영주의 중독과 질풍 기사단의 닦달에 투맨이 해독제를 꺼냈지만 효과가 없었다. 약을 너무 강하게 사용해 해독제가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코롤은 빠르게 보바르를 방으로 데려가 급히 마법사와 신관을 불러 보바르의 치료를 맡겼다. 한편 보바르의 중독에 분노하며 파티장의 문을 막아 버렸다.

한순간에 소영주와 파티장에 갇힌 투맨은 소영주를 치료할 신관도, 욕정을 해소할 하녀도 없는 상황에서 발정 난 소영주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불충하게도 지속적으로 두드려 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겨우 약발이 떨어지고 소영주가 제정신을 찾을 때 즈음에는 너무 많이 두드려 맞은 소영주가 그 충격으로 인해 기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드는 한편의 콩트를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숨어 있는 상황만 아니면 통쾌하게 웃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드는 거기까지 보고 자리를 떴는데, 시온 자작의 말을 들어 보니 그 후에도 마법사와 신관을 보내 주지 않은 것 같다.

“이쯤 되면 기사단장이 단순한 심술로 신관들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기사단과 자작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왕실에 속한 기사단을 이끄는 만큼 그런 계산은 능숙할 것 같습니다.”

“그럼 뒷일은 호위대에 맡기고, 나는 이만 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드가 가벼운 어조로 말하자 시온 자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명예 후작님과 후작 부인, 그리고 엘프 분들이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백작가에 또 크게 당할 뻔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은혜 이그렌이 자작 대신 열심히 일해서 갚기로 했으니, 잊어도 좋습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열심히 부려 주십시오.”

시온 자작이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이드 아래서 열심히 활동할수록 이그렌의 명성과 실력은 높아질 것이니까! 이제 백작가의 마수에서도 벗어났으니, 이그렌이 훨훨 날았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자작의 허락도 받았으니 사정없이 굴리도록 하지요. 그럼 자작도 왕실에 가시거든 항상 조심하십시오. 백작가보다 무서운 곳이 왕성이니까요.”

“물론입니다. 백작가에 잡혀 있으면서 그저 의미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은 아니니. 더 이상 누구에게도 당하며 살진 않을 것입니다.”

자신감에 차서 말하는 시온 자작의 눈에 독기가 찰랑거리는 것을 확인한 이드는 그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았다.

이드는 마지막으로 통신용 수정구를 자작의 손에 쥐여주고는 다음에 보자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코롤 남작이 나타나 출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이드가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시온 자작은 다시 한 번 이드가 있던 곳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코롤 남작을 따라 나섰다. 그런 그의 손에는 이드가 쥐여준 수정구만이 들려 있었다. 그 외의 것은 모두 백작가의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입고 있는 옷까지 벗어 두고 가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랴~”

두두두두두.

이드는 숙소의 지붕에 앉아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백작성을 벗어나는 호위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라미아와 엘프들을 보며 말했다.

“자, 이제 일 끝났으니 우리도 집으로 돌아갑시다.”

“오~”

백 년 안에 가장 길었던 외출에 숲이 그리웠던 엘프들이 두 손을 번쩍 들어 환호했다.

“어서 마법사와 신관을 불러라!”

그와 동시에 백작성에서는 신관을 찾는 투맨의 고함소리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수 시간 후.

영지에서 급한 소식에 왔다는 말에 공관을 방문한 사무엘 백작은 시디푸로부터 시온 자작과 질풍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끄응, 멍청한 놈. 이런 간단한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어쩌자는 것이야! 그나저나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하구나.”

설마 실패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일이 실패하고, 거기에 질풍 기사단장에게 약을 쓴 것까지 들켜 버렸을 줄이야!

아무리 평소 아끼는 아들이지만 육두문자가 절로 튀어나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소영주에게 근신을 명령했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무엘 백작은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에 이마를 움켜쥐고 머리를 굴렸다.

그는 이번 일로 인해 왕과 이그렌의 관계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왕은 몰라도 이그렌과의 관계는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지만, 사무엘 백작은 자신이 이그렌을 잘 구워삶아 다루고 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잠시 끙끙거리던 사무엘 백작은 당장 방법이 없는 왕은 두고 이그렌부터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즉시 저택으로 돌아온 사무엘 백작은 방에서 몇 가지 서류를 찾아 이그렌의 방을 찾았다.

“이그렌 경, 방에 있는가?”

“엇! 백작님이 어떻게 제 방에 직접・・・・・・ 하인을 통해 부르시지요.”

“아니, 중요한 이야기가 있네.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지.”

이그렌은 허락도 없이 제 방처럼 밀고 들어오는 사무엘 백작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이드와 아버지에 관련된 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저 인간의 표정이 굳은 것을 보면 나에겐 좋은 쪽으로 일이 풀린 모양이지?’

히쭉 웃던 이그렌은 곧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진지한 얼굴로 돌아섰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만?”

“역시 자넨 알아보는군. 일단, 거기 앉아 보게. 이야기가 좀 복잡하니까.”

사무엘 백작은 마치 자신이 방의 주인인 듯 행동했다. 이그렌에겐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라 이젠 딱히 화도 나지 않아 덤덤히 그가 할 이야기를 기다렸다.

“우선 우리 관계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겠네. 그러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오해 없이 들어 주길 바라네.’

미리 단단히 못을 박은 사무엘 백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시디푸 그 아이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네.”

사무엘 백작은 천천히 시온 자작을 백작가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디푸가 약을 사용한 것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사무엘은 이야기 중에 그것은 절대 함정이 아니었으며, 자작가를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 또한 없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래, 그 아이는 아마도 시온 자작을 손에 쥐고 그를 통해 명예 후작에게 접근하려는 왕에게 시온 자작을 빼앗긴다고 느꼈는지도 몰라. 아직 어린 만큼 성급한 행동이었지.”

이그렌은 혀를 차는 사무엘 백작을 보며 기가 막혔다.

지금 사무엘이 하는 말은 아버지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잘못이 시디푸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아비라는 작자가 계획은 둘이 같이 꾸며 놓고, 어떻게 저리 뻔뻔하게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미룰 수가 있는지.

보통의 부모라면 반대로 어떻게 해서든 자식의 허물을 감추려고 할 텐데 말이다.

설마 둘 다 희생할 필요 없으니 한 명만 희생하자는 것일까?

“휴~ 자네도 놀란 모양이군. 나도 놀랐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은 이미 일어났고, 내 아들이 벌인 잘못이니 내가 해결을 해야지. 그나마 이번 일이 있기 전에 자네와 묵은 감정을 털어 버린 것이 천만 다행이 아닌가 싶네. 이젠 명예 후작께서 자네를 돌봐 주시는데, 까딱 잘못했으면 자네에게 단단히 오해를 살 뻔했지 않은가 말이야.”

이그렌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사무엘 백작은 이그렌이 자신의 생각대로 반응한다 생각한 듯 잠시 말을 끊고는 가져온 몇 장의 서류를 이그렌 앞으로 밀었다.

“이건 뭡니까?”

“시디푸가 저지른 실수에 대한 보상의 의미네.”

그의 말에 이그렌은 서류를 들어 살피고는 이를 악물었다.

손에 든 서류는 백작가가 자작가를 상대로 갖은 수단을 사용하여 만들어 낸 두 가문 사이의 채무 관계에 대한 계약서와 서류였다.

그 안에는 까마득한 시간에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까지 들어 있는 수난의 역사서였다. 특히 자작가가 소유하고 있던 영지에 대한 소유권까지 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있으면 잃었던 영지를 되찾을 수도 있었다.

‘이걸 이렇게 쉽게 내준다고?’

이그렌은 사무엘 백작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그가 이 서류를 내미는 이유를 금세 눈치챘다.

원래 자작가의 영지가 백작가의 영지와 가깝고 종속되어 있으니, 그 영지를 돌려주어 그 영지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모쪼록 두 가문간의 채무를 정리하며 이번에 있었던 일까지 오해 없이 처리되길 바라겠네.”

자신이 할 말은 모두 했다는 듯 사무엘 백작이 돌아갔다.

이그렌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지독하다는 말을 안 할 수가 없네.’

어떻게 된 것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을 수가 있는지. 저래 놓고 오해하지 말라고?

“후~ 미치겠군.”

이그렌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바라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몇 장의 종잇조각에 아버지와 자신이 노예로 팔려 갈 뻔했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것을 노려보던 이그렌이 징그럽다는 듯 서류를 벽난로 안으로 던져 버리며 말했다.

“역시…… 이드 님 말씀대로 사무엘 백작은・・・・・・ 죽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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