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51화
788화
이그렌 자신이 사무엘 백작에게 당했기 때문인가. 저택에 찾아와 막무가내로 나온 자들의 이름을 신나게 적고 있는 이그렌의 모습을 불쌍하게 바라보던 이드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사무엘 백작과는 어땠어? 별일 없었어?”
“끄으응…….”
[있었나 본데요?]
이드는 라미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그렌의 눈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사무엘 백작, 죽이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입에서 단어를 씹던 이그렌이 망설이며 꺼낸 말이었다.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때 거부하던 이그렌이 살인을 말하는 것일까?
이드와 라미아는 서로를 향해 어깨를 으쓱여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추천한 방법이긴 하지만,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뀐 거야?”
“백작이 제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위험하고 나쁜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식에게 죄를 미루는 최악의 인간이라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끝내긴 어렵다는 것도요.”
그렇게 입을 연 이그렌은 사무엘 백작이 찾아왔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도대체 얼마나 인간이 독해야 모든 죄를 아들에게 미루고 덮어씌울 수 있을까? 그래 놓고 뻔뻔하게 아들의 죗값을 대신 갚는다는 연기까지 해
보였다.
만약 이그렌이 이드를 통해 사무엘 백작과 백작가의 일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당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죄를 먼저 고백해서 충격을 줄이고, 정당한 대가를 내미는 방법은 전통적이지만 그만큼 효과가 확실하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그렌의 옆에는 이드가 있었고, 사무엘 백작의 행동은 오히려 이그렌의 반감만 자극했다. 급하게 서두른 나머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이그렌의 성격을 계산하지 못한 사무엘 백작의 실수였다.
하지만 과정이야 아무렴 어떤가?
이드는 드디어 마음을 먹은 이그렌의 결정을 대대적으로 반겼다.
“잘~ 생각했다. 백작도 그렇지만, 이번에 가 보니 그 집안 자체가 구제 불능인 느낌이었어. 죽어야 할 놈은 죽이는 것이 가장 확실해. 나라고 무조건 사람을 죽이라는 게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지금 이래 놓고 막상 백작이 죽을 때 또 마음이 변하는 건 아니겠지?”
이그렌의 어깨에 턱 하니 팔을 걸친 이드가 다짐을 받듯이 물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좋아. 그럼 내가 아무런 뒤탈 없이 백작을 처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지.”
“예? 자리요? 제가 백작을 죽여야 하는……………?”
“당연한 거 아냐? 설마 내가 무슨 청부업자처럼 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백작을 상대할 수 있을지.”
당황한 이그렌이 말을 더듬었다. 제국의 명예 후작을 청부업자로 부리다니! 그런 끔찍한 오해는 농담이라도 절대 사절이었다. 그보다 지금 문제는 사무엘 백작의 상대였다.
솔직히 이그렌은 사무엘 백작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 온 사무엘 백작의 실력이 결코 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드는 그런 이그렌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는 듯 그의 어깨에 걸친 팔로 목을 감으며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듯 말했다.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그동안 내가 수정해 주고 수련한 것 있지? 그걸 믿어. 이제 네가 더 강해. 네가 백작을 죽이겠다는 마음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독심만 있다면 충분히 네 검으로 그의 목을 벨 수 있어. 어때, 명예 후작의 보증이라고 믿을 만하지?”
그 말에 이그렌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말이라고 고개를 저을까?
“백작을 상대하는 건 토벌 때일 거야. 본래 전투 중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피 비린내가 나는 흉흉한 소리를 잘도 웃으며 말하는 이드였다.
본래 토벌은 제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제국의 전력만 참가가 가능했다. 자국에서 일어나는 군사 행동에 타국을 참여시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약소국도 아닌 제국의 체면에 말이다.
그러나 이번 토벌에 한해서 황제는 그러한 사소한 이유를 제쳐 두고 타국의 참여를 허락했다. 당연히 문제가 될 만한 전력을 제국 안에 들여놓지는 않았다.
미리 참가에 대해 허락을 받은 자와 최소한의 수준의 기사 전력의 참가만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황제도 단순히 타국 기사들이 공을 세우고 스트레스를 풀라고 참가를 허락한 것은 아니다. 노리는 바가 있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두 가지.
첫째는 오랜 시간 제국 안에 탄탄하게 쌓인 힘을 자랑하는 것이었다. 이드를 통해 무공의 혜택을 가장 먼저 받은 나라인 만큼 제국의 힘은 강력했지만, 그 규모를 정확히 짐작하는 이는 없었는데, 황제는 이번 토벌을 통해 그것을 알리고 싶어 했다.
제국의 힘은 과거보다 더욱더 강력해졌다고!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 바로 두 번째 목적으로, 바로 이드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 모든 국가의 마음을 졸이게 만들었던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그것도 마인드 마스터처럼 어린 나이에 오색 기사단장 이상의 실력을 갖춘 굉장한 고수가 아나크렌 제국의 것,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말이다.
실로 전투를 우습게 보고, 가볍게 보는 태도였지만, 전 제국의 전력이 모이는 것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기도 했다.
“…..• 백작과 싸우기 전에 눈먼 검에 먼저 찔리지 않아야겠네요.”
치열한 전장 가운데 서 있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이그렌의 말에 이드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것도 중요한 포인트지. 어때, 토벌 전까지 미친 듯 수련하고 싶은 의욕이 막막 솟아나지?”
“……”
왜 솟아나지 않겠는가. 무지막지하게 솟아났다. 난데없이 백작과의 결투 날짜가 잡혀 버린 이그렌은 당장이라도 수련을 시작하고 싶어 근질거리는 손에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검을 찾았다.
이드가 수련을 마치고 나왔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담을 넘었다.
“이제야 얼굴을 좀 보겠구먼!”
언제쯤 이드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정보를 물고 펄떡거렸다. 그들은 누가 자기보다 앞설까 봐 허둥지둥 저택으로
몰려들었다.
[흐응~ 이 아저씨들이 이드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이죠.]
집사가 이드를 만나고 싶어 하는 자들의 이름을 적은 방명록을 들고 왔다.
라미아는 거기에 적힌 이름들을 보고는 이그렌이 작성한 데스노트를 펼쳐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데스노트에 적힌 이름들이 방명록 상단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부지런한 멍청이들이 왔네요.]
라미아가 냉소를 머금고 그들을 평가했다. 명예 후작의 저택에서 난동을 피운 자들이 뭘 믿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일까?
설마 그들의 행동을 이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드는 라미아의 어깨너머로 방명록과 데스노트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고는 집사에게 물었다.
“오늘 방문한 사람들 중에 이전 방문에서 소란을 피운 것에 대해 집사에게 사과한 사람 있나요?”
물론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사과를 해도 이드에게 하겠지, 집사에게 사과하는 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 양심 있는 자들이었다면 수련 중인 집주인을 보겠다고 찾아와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겠지.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인간들을 어떻게 굴려야 잘 굴렸다고 소문이 나려나?”
“명예 후작님께서 아량을 베푸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몇 분은 역사가 깊은 가문의 분들이십니다.”
“아량을 베풀어도 그걸 알까요? 오히려 만만하게 보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데요.”
가문의 깊은 역사가 성숙한 인성을 기본 탑재시켜 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개를 잡을 때도 주인을 보고 잡는다고 했다. 이드에 대해 조금이라도 조심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수련 중에 찾아와 집사를 닦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련 중이라는 말을 듣고도 만나겠다고 찾아왔다는 것은 이드에 대한 욕심은 있어도, 경외는 없다는 뜻이다. 하기야 그들의 눈에는 정식 후작도 아닌, 명예 후작에 온전한 영지도 병력도 없는 이드가 우습고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전통 있는 가문이라고 하니, 그런 전통적인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과 블러디 혼을 꺾었다는 소문을 무시하고 저택에 찾아와 그런 억지를 부리지는 못했겠지.
[긴 역사가 지혜를 가져다준 가문이 있는가 하면, 긴 역사 속에서 오만과 편견을 쌓은 가문도 있는 거겠죠.]
문제는 그 오만이 이드에게 향했다는 것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이드는 곧 방명록에서 데스노트에 적힌 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위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선 이 사람부터 보도록 하죠.
이드의 결정에 집사가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어쩌시려고요?]
“원래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인간들이 무시당하고 차별당하면 못 견뎌 하는 법이지.”
뭐, 실제 전통 있는 대단한 가문의 귀족들이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히 더 잘 들어먹을 것이라는 게 이드의 생각이었다.
“괜히 일을 키워 봤자 나만 속 좁은 인간이 될 거고. 어디 속 좀 끓여 보라지?”
[아무래도 약한 것 같은데………….]
하지만 라미아의 의혹이 무색하게 효과는 확실했다.
한 사람, 두 사람 자신들보다 늦게 도착하고, 자신들보다 작위도 낮은 자들이 먼저 이드를 만나자 짜증과 불만에 이빨을 갈다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야. 왜 시골 자작 따위가 나보다 먼저일 수가 있어!”
“도대체 명예 후작은 귀족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의 분노는 힘없이 허공에 날릴 뿐이었다. 그들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노린 이드가 미리 시중인들을 물려 둔 덕분이다.
“좋아, 좋아. 제대로 열 받고 있어.”
자신을 욕하는 소리인데 이렇게 듣기 좋을 수가 있나? 멀리서 들리는 짜증 가득한 고함 소리에 흐뭇해하던 이드는 출렁이는 배에 부욱 하고 트림을 했다.
저들을 골려 줄 생각에 계속 사람을 만나며 차를 마셨더니 물배가 찬 것 같다.
거기다 아직 만나야 할 사람은 많았다. 아니, 집사가 손님과 함께 가져오는 방명록의 이름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만나 주지 않던 이드와 대면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들 골려 주려다가 내가 먼저 배탈 나겠다.”
[그럼 잠시 쉬어요. 급하게 할 필요 없잖아요. 이 정도 기다리게 만들었으면, 저 인간들도 기다린 게 아까워서라도 쉽게 돌아가지 못할 거예요.]
“응. 아무래도 소화를 좀 시켜야겠어.”
하지만 그런 이드의 생각은 잠시 후 들어온 집사의 말에 잠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명예 후작님, 황녀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싸가지 없는 귀족들과 달리 기다리게 할 수 없는 손님의 방문이었다.